한라장사 모제욱. 씨름선수치곤 적지 않은 35세의 나이지만 그는 아직도 현역에서 녹슬지 않는 기량을 과시하고 있다. 또 부친인 모희규씨(2001년 작고)의 뒤를 이어 2대째 모교인 경남대 씨름부 감독을 맡아 올해 모교를 전국 5관왕에 이끌며 지도자로서의 능력 또한 범상치 않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그가 오늘의 이 자리에 서기까지는 속으로만 삼켜야 했던 가슴앓이도 적지 않았다. 매서운 12월의 칼바람이 불던 7일, 마산 서원곡 씨름장에서 모제욱을 만나 그의 씨름 이야기를 들어봤다.
◇대를 이은 씨름집안= 모제욱은 1975년 2월생으로 진주시 사봉면이 그의 고향이다. 그의 부친은 전 경남대 씨름부 감독으로 1940, 50년대 전국 모래판을 주름잡던 고 모희규씨로 마산씨름의 대부로 이름이 높다. 그런 부친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모제욱은 어렸을 때부터 씨름과 자연스럽게 친숙해졌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손을 잡고 씨름장을 자주 찾아가 이만기 선배 등 당시 인기가 높았던 선수들을 만나다보니 막연히 나도 씨름을 해야지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초등학교 6학년 무렵 마산교방초등학교로 씨름유학을 나섰다. 하지만 씨름선수의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낙천적인 성격의 모제욱에게 엄격한 선후배 관계에다 혹독한 훈련 량은 고통스러웠다. 심적인 부담감도 컸다. 그의 부친의 명성에 요령도 피울 수 없어 남들보다 무조건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으로써 아버지에게 ‘역시 내 아들’이란 자부심도 심어드리고 싶은 그의 욕심도 작용했다. 그러니 남들보다 배는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두각을 보이지는 못했다. 마산중을 거쳐 마산상고로 진학해서도 늘 2, 3등에 머물렀다. “학창시절에 1등을 별로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키가 크다보니 플러스 요인이 된 것 같아요. 1등은 못 되도 2등짜리는 되니깐 키워볼 만은 하다? 그 정도가 아니었을 까요.(웃음)” 그런 그가 경남대로 진학하면서부터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대학 1학년인 93년에 경북 구미시에서 열린 KBS배 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하면서 부터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뒤로는 기복이 심했는데, 우승 한번 하면 또 잠잠하다가 잊혀 질만하면 또 깜짝 우승을 하고 그런식이었어요.” 하지만 대학 3학년 당시 전국체전 우승과 함께 모제욱은 96년 한보 씨름단의 제의를 받고, 프로무대로 전격 진출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변칙기술의 귀재= 부푼 자신감을 안고 진출한 프로무대였지만 프로의 벽은 역시 높았다. 나름 대학무대서 강호로 대접받으며 자신감과 젊은 패기에 차 있었던 모제욱은 1년 반 남짓한 기간 동안 단 한차례도 8강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며 좌절감에 빠져 지냈다. “이기수, 장준 선배 등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 기껏 16강에 올라가는 게 전부였어요. 말 그대로 장난이 아니었어요.” 프로무대에서 겪은 첫 좌절의 순간, 생존의 위기가 닥쳐온 셈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낙담과 실의에 빠져 지내지는 않았다. “이유가 뭘까, 곰곰이 분석해 봤죠. 제가 상대보다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상대보다 힘에서 밀리는데 억지로 드는 씨름을 하니 10판을 붙어도 9판은 지는 격이었죠.” 그런 그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이가 바로 스승 이승삼 감독이다. 아끼는 제자를 위해 자신의 기술을 아낌없이 전수하며 조련시켰다. 그리고 97년 6월 전남 남원에서 열린 남원전국장사씨름대회에서 모제욱은 생애 첫 한라급 정상의 자리에 서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우승이후 모제욱은 변하기 시작했다. “그 시합 우승이후로 제 자신도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운빨이라는 주변의 시선도 있었고, 더 이상 지기 싫다는 생각에, 운동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달인 7월에 열린 울산 장사씨름대회, 모제욱은 연거푸 우승을 차지하며 한라급 강자로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실력을 의심하는 이도 사라졌다. 새롭게 변모한 모제욱은 다양한 기술로 상대를 괴롭혔고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임기응변에도 능했다. 이후 98년, 99년도에 전성기를 맞이하며 차근차근 한라급 우승 기록 횟수를 보태기 시작했다. 그런 그에게 변칙기술의 달인이란 애칭이 따라붙은 것도 이때부터다. 임기응변에 워낙 능하다 보니 깜짝 놀랄 만한 기술이 종종 터져 나와 씨름팬들을 놀라게 했다. 특히 2002년 한라급 최다 우승기록을 놓고 다투던 김용대를 맞아 2번 연속 패배직전의 상황에서 역전우승으로 2개 대회를 석권한 것은 그의 백미였다.
◇지도자로의 변신= 하지만 그의 씨름인생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소속팀이 무려 6번이나 바뀌었다. 옮기는 곳마다 팀이 해체되면서 그의 속도 시커멓게 타들어갔다. 한보 씨름단과 동성, 태백, 지한 등을 거쳐 마지막 종착지라 여겼던 LG투자증권 씨름단까지 2004년에 문을 닫았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운동을 할 의욕마저 잃었다. 한 두달, 아니 6개월 안에는 정상화가 되겠지 생각했지만 1년이 지나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그렇게 그의 씨름인생도 끝이 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가족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2004년 박영주씨를 평생 반려자로 맞이한 모제욱은 현재 딸 모현이(5살)를 두고 있다. “갓 결혼하고 팀이 해체되고 일년이 다되어가니깐, 그때부터는 먹고 살일에 걱정이 많았어요. 벌이 자체가 없다보니 시간이 갈수록 힘들었어요.” 그런 그에게 힘을 복 돋워 준이가 바로 그의 부인 박영주씨였다. 팀 후배인 김기태의 소개로 만나 ‘첫눈에 인연임을 짐작했다’는 모제욱은 사랑하는 가족이 있기에 힘든 시기를 잘 극복해 낼수 있었다며 애틋한 가족 사랑을 드러냈다. 실제 그는 결혼을 하루 앞두고 열린 2004구리장사씨름대회에서 부상을 털어내고 16개월 만에 한라급 정상에 다시 오르며 신부에게 멋진 결혼선물을 선사했다. 모제욱은 씨름선수로 결코 적지 않은 35살의 노장이다. 지금은 지자체인 마산시체육회로 소속을 옮겨 활동하고 있지만 2007년부터 모교인 경남대 감독을 맡고 있다. 때문에 그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은퇴에 대한 고민이 자리 잡고 있다. “실력이 안 되면, 더 이상 우승할 자신이 없다고 느껴진다면 미련 없이 은퇴할 겁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는 그였지만 현역에 대한 미련도 많아 보였다. 선수로써 그의 목표는 한라급 최다우승 타이틀 기록 수립이다. 그는 현재 라이벌 김용대와 함께 한라급 최다우승기록을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백호장사까지 합쳐 통산 14회 우승으로 김용대(15회)를 바짝 추격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내년이 더 중요한 시기이다. 내년에 우승 못하면 은퇴도 고려하겠다는 각오다. 모제욱, 그의 도전은 아직 현재진행중이다. 하지만 그의 도전이 멈출 때 그의 얼굴에는 최선을 다한 만족의 미소와 해냈다는 자부심이 새겨져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설명=지난 2007년 충남에서 열린 추석장사 민속씨름백호장사 결승전에서 모제욱이 박보건을 상대로 샅바를 끌어당기고 있는 모습. 모제욱이 2-0으로 이겨 백호장사에 등극했다.(맨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