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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天節 #개천절
어제가 바로 시월 상달 삼일 개천절 이었습니다.
‘개천절’ 이라는 이름을 짓고 이를 시작한 분은 대종교를 중광(重光)한 홍암 나철 대종사(羅喆, 1864∼1916)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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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은 '세상을 다스리도록 하늘이 열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개천이란 본디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백두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홍익인간-이화세계'의 뜻을 펼치기 시작한 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여기서 개천(하늘이 열림)이라 함은, 천명(天命)에 의해 최초의 인간공동체인 신시를 열고 첫 국가 조선을 건설한 사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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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천자천손으로서의 자격을 갖고 제천숭조의 당위성을 확보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개천절은 ‘하늘이 열려 세상을 다스리는 질서’를 기념하는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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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개천절의 유래는 대종교로부터 기원합니다. 대종교를 다시 일으킨 홍암 나철 대종사가 ‘단군교포명서’의 ‘단군개극입도 4237년 10월 3일’을 계승하여, 1910년 9월 27일 교명(敎命)으로 의식규례를 제정 발포하면서, 제3항에 ‘개천절은 강세일(降世日)과 개국일(開國日)이 동시 10월 3일이라 경일(慶日)을 합칭(合稱)함’이라고 규정함으로써 그 명칭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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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의 원로인 민세 안재홍 대형은 “해마다 이 개천절을 국경일로 기념하게 된 것이고, 동시에 국조이신 단군의 성적을 옹호하고 유지하는 사업은 문득 민족정기를 똑바로 세워 독립과 자유와 통일 단합을 재촉하는 기본조건의 하나로 되는 것이다.”라고 개천절의 의미를 부여하였고 조소앙 선생 또한 우리 민족이 단군의 개천 건국이래 동방에서 가장 유구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가졌다고 자부하면서, 고구려의 무위(武威)와 신라 · 백제 · 고려 · 조선의 문화를 자립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으니 세계 어느 민족에 비하여도 손색이 없었고 이렇듯 찬란하고 유구한 문화 위에 독립-자주하여 온 것은 물론이고 문화적으로도 영도적 지위에 있었음을 자타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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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때에도 국내외에서 이 개천절을 꼭 지켰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경일로서 기념행사를 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난 뒤 충칭(中慶) 등지에서는 대종교와 합동으로 경축행사를 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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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옛 습속대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지켜왔으므로 일제 강점기 때는 물론 대한민국 수립 후에도 음력으로 지켜왔는데, 대한민국 정부하에서의 국경일로서의 개천절은 1949년에 문교부가 위촉한 개천절 음 · 양력 환용(換用) 심의회의 심의 결과 음 · 양력 환산이 불가능하다는 이유와 10월 3일이라는 숫자가 소중하다는 원칙 아래, 음력 10월 3일을 양력 10월 3일로 공포 시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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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는 그해 9월 1일에 교령 제13호로서 "…개천절 의전(儀典)에 대하여 선의식은 구례(舊例)를, 경하식은 신전(新典)을 좇아서 봉행하기로 다시 규정한다"고 공포하여 대종교 선의식은 음력 10월 3일 오전 6시에, 경하식은 양력 10월 3일 오전 11시에 거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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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경일로서의 현행 개천절은 단군 건국기념일로서의 경축 행사인 데 비해, 대종교의 개천절은 신인(神人) 한배님의 백두산 강림을 기념하는 제천행사라는 점이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삼일신고 봉장기’에 의하면 한배님이 갑자년에 백두산에 강림하여 124년간 교화시대를 지내고 무진년 10월 3일부터 치화(治化)를 시작하였다 하여 건국일인 무진년 10월 3일과 그 의의에 있어 같은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처럼 개천절은 그 명칭부터 의식까지 모두 대종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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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회의(1919. 12)와 임시의정원 회의(1920. 03)를 거쳐 국경일을 공식 제정했습니다. 임시정부가 제정한 국경일은 두 가지였습니다. 바로 ‘독립선언일’ 과 ‘건국기원절’입니다. ‘독립선언일’은 대한민족이 나라의 ‘독립’을 선언한 1919년 3월 1일을, ‘건국기원절’은 대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이 나라를 처음 ‘건국’한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을 기념하는 날 이었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최초로 제정된 2대 국경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가 제정한 2대 국경일은 현재 대한민국 정부(이하 한국 정부)에서도 국경일로 지정돼 있습니다. ‘개천절’이 ‘건국기원절’이고, ‘3·1절’이 ‘독립선언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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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가 국경일로 제정한 ‘음력 10월 3일’의 정식 명칭은 ‘건국기원절’이었습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 정부가 ‘양력 10월 3일’로 기념하는 국경일 ‘개천절’에 해당합니다. 한국 정부가 ‘개천절’을 국경일로 제정한 것은 1949년 10월 1일이었습니다. 임시정부는 그보다 앞선 1920년에 이미 ‘개천절’을 ‘건국기원절’로 명명해 국경일로 제정했던 것입니다. 임시정부가 ‘건국기원절’을 국경일로 제정할 때에도 대종교에 의하여 ‘개천절’은 널리 사용된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임시정부는 ‘개천절’이 아닌 ‘건국기원절’을 정식 국경일 명칭으로 채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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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11월 9일자 ‘동아일보’ 2면에 상해에 ‘건국기원절’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된 다음의 기사를 보면,
” ① 음력으로 십월 초삼일은 우리의 력사(歷史)에 의지하야, 사천삼백팔십일년 전 이날에 우리의 처음 임금인 단군(檀君)이 이 세상에 나려왓고, 그 뒤 일백이십사년 지금으로부터 사천이백오십칠년 전 이날에 처음으로 단군이 임군이 되야, 배달 (조선) 이라는 나라를 건설한 날이라 한다. ② 그래서 그 뒤에 단군의 교회인 대종교( 大倧敎)를 밧드난 조선에서는 이날을 개텬절(開天節)이라고 뎡하야 긔념하여왓스며, ③ 그 뒤에 림시정부에서는 이날이 대종교인 종교에서만 긔념할 것이 아니라, 실상인즉 우리민족 전톄가 이날을 긔념하야, 우리의 나라 력사가 처음으로 비롯한 것을 긔념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겟다하야, 이날로써 건국긔원절(建國紀元節 )이라고 특별한 일흠을 정하야, 우리민족 전톄가 이날이 우리의 경축할 만한 경사로운 날이라는 것을 정하엿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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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임시정부는 ‘음력 10월 3일’을 대종교라는 특정 종교 차원의 기념일이 아니라, 전체 민족과 국가 차원의 기념일로 탈바꿈했던 것입니다. 1919년 12월 1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경일 제정안이 처음 논의 되었습니다. 국경일 명칭안을 국무원 소관 부서인 법제국에서 기초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이로써 국경일 제정안은 국무회의에서 입안 과정을 마치고, 정식 입법 논의를 위해 임시의정원으로 넘겨졌습니다. 임시의정원으로 회부된 국경일 제정안은 1920년 3월 열린 제7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두 차례에 걸쳐 논의됐습니다. 3월 9일에 제1독회가, 3월 15일에 제2독회가 진행됐습니다. 이때 논의된 국경일 제정안의 명칭은 '국경일안'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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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일안'은 국경일 날짜 문제로 제1독회에서 결정되지 못하고, 제2독회에서 최종 통과됐습니다. 통과된 내용은 ‘독립선언일(03.01)’과 ‘건국기원절(음 10. 03)’을 국경일로 제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은 1920년 3월 15일과 4월 3일자 임시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을 통해서 공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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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1945년까지 해마다 거의 빠짐없이 ‘건국기원절’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임시정부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상해 시기 (1919~1932)와 충칭 시기(1940~1945)에 기념식도 가장 성대하게 거행됐습니다. 첫 기념식은 1919년 11월 24일 상해에서 거행됐습니다. 이때는 ‘건국기원절’이 아직 정식 국경일로 제정되기 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원 주최로 기념식이 성대하게 거행됐습니다. 임시정부는 주로 오전에 ‘정부’차원의 기념식을 거행했고, 오후에는‘교민사회(민간)’전체가 기념식을 거행할 수 있도록 시간을 안배했습니다. 교민사회가 주최한 기념식에는 임시정부의 주요 인물들이 빠짐없이 참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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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식에 참석한 인원은 많을때는 약 400명 이상이 됐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가 침체기에 빠지면서 그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기념식이 거행된 장소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상해 시기에는 한인교회로 사용됐던 ‘三一堂’에서 주로 기념식이 거행됐습니다. 이외에 이동 시기에는 임시정부가 피난하던 배 위에서 기념식이 거행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1945년 11월 7일 중국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기념식은 상하이와 충칭에서 동시에 거행됐습니다. 임시정부가 충칭에서 상하이를 거쳐 국내로 완전히 돌아갈 준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단군이 나라를 처음 세운 기원전 2333년 음력 10월 3일을 ‘대한민국’의 ‘건국기원절’로 삼고 기념했습니다. ‘건국기원절(개천절)’ 은 특정 이념과 세력을 초월한 대한민족 전체의 ‘국가일’이자 ‘민족일’이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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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모든 나라에 있는 건국절이 없는 나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일’ 을 ‘건국절’로 바꾸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건국절’이 없는 것이 아니라, ‘건국절’이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바로 지금의 ‘개천절(10.03)’이 임시정부가 1919년부터 국경일로 기념한 ‘건국기원절(음 10.03)’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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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식민사관을 통해 국조(國祖) 단군을 전면 부정하였습니다. 단군은 ‘신화’이자 민족주의의 산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사관에 경도된 사람들은 여전히 '악마의 증명(Devil’s Proof)'에 빠져있습니다.
"악마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악마를 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나, 악마가 부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온 우주를 샅샅이 뒤져 악마가 없다는 것을 일일이 대조해야 하기 때문에 부존재의 증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라는 것이 바로 ‘악마의 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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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은 중세 유럽의 로마법 하에서 법학자들이 토지나 물품 등의 소유권이 누구에게 귀속되는지 과거에 거슬러 증명하는 어려움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에서 유래 되었습니다. ‘민사소송법’이나 ‘부동산 등기’ 그리고 ‘물권법’의 분야에서도 입증이 곤란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영국법'에서는 '신의 증명'(probatio divina,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라)을 요구하는 것은 '악마의 증명'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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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정체성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늘인 환인(桓因)의 손자이자 환웅(桓雄)의 아들인 단군(檀君)의 자손이라는 천손(天孫) 의식입니다. 이에 홍암 나철 대종사는 대종교를 중광하면서 민족사관 정립에 나섰습니다. 2대 종사를 지낸 무원 김교헌 종사는 ‘신단민사’, ‘신단일기’ 등을 저술하여 홍암 나철 대종사의 사상을 대중화 시켰습니다. 3대 종사 단애 윤세복 종사는 감옥에서 ‘삼일신고’를 한글로 번역해 주해를 달았습니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단군 부활 운동에 공감하고 나선 대표적인 인물은 단재 신채호와 백암 박은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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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는 저서 ‘독사신론’을 통해 단군의 역사를 설파 하였습니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발해가 망한 것은 혼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또 문일평(文一平)은 우리 민족은 단군의 직손이며 대종교가 그 원류라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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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의 선교사 제임스 게일 목사(James Gayle, 1863-1937)는 이러한 우리 민족의 '천손의식'을 이용하여 성경의 유일신 ‘GOD(神)’을 한국적 유일신 명칭인 ‘하느님’, 또는 ‘하나님’으로 불리도록 ‘GOD’의 한국 명칭을 정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게일 이전에는 '야화', '야화화'등으로 불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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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우리 나라의 불교 사찰에는 다른 나라에는 없는 '산신각(山神閣)'이 있습니다. 고려의 승려 일연(一然, 1206~1289)이 편저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단군'이 '산신'이 되었다고 한 것을 보면 '산신각'의 ‘산신’은 '단군(檀君)'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또한 '불교'를 배척한 '유교'의 유학자들도 사대주의가 팽배해 있음에도 우리나라의 역사서를 쓸 때는, 반드시 '단군'을 조선의 개국조로, '단군조선'을 조선 최초의 '국가'로 기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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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온 초기의 개신교 선교사 '게일'이나 '헐버트' , '월남 이상재'(李商在, 1850~1927) , '도산 안창호', '규암 김약연' 같은 초기의 개신교 신도들은 '단군'을 우리 민족의 조상임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고, 이준(李儁, 1859~1907) 열사는 “국혼의 부활”을 부르짖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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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흰샘 주시경이 우리글을 ‘한글’이라고 지었다면(한글의 ‘한’은 ‘크다’, ‘밝다‘는 뜻으로 대종교 ’한배검‘의 ’한‘과 그 뜻이 같습니다.) 위당 정인보는 ‘국학(國學)’이라는 용어를 창안해 냈습니다. 그는 일제 당시의 조선학(한국학)을 두고 일본학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 이유는 조선 시대 유학(儒學)의 고질병인 사대주의와 개화기 이후 서구 문명을 맹종하는 식민주의에 빠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런 반성에서 나온 것이 ‘국학’이었습니다. 일찍부터 그는 우리 민족의 ‘얼’을 강조하면서 그 얼은 ‘석가’나 ‘공자’의 가르침이 아니라 ‘단군’의 가르침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을 해방 후 우리의 교육이념으로 만드는데 앞장선 공로자이기도 합니다. 개천절 노래 가사 역시 정인보가 지었습니다. 노래는 총 3절인데 1절 가사는 아래와 같습니다.
우리가 물이라면 새암이 있고
우리가 나무라면 뿌리가 있다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이 나라 한아버님은 단군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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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첫번째 시교사이자 임시정부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예관 신규식 도형은 그의 저서인 '한국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사람들이 신인(단군)이 만약 태백산 단목하에 강림하였다는 한줄의 문자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갈천씨의 백성이 되거나 무희씨의 백성이 되었을지 나 자신 알 수 없는 일이다.“
위 '갈천씨'나 '무희씨'는 중국 '복희씨' 이전의 제왕을 말합니다. 이러한대도 우리의 뿌리를 애써 부정하며 '단군'과 '개천절'을 폄하할 것인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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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최초의 나라가 기원전 2333년에 ‘홍익인간’이라는 숭고한 이념을 갖고 세워진 것을 기념하는 날이 왜 이런 푸대접을 받고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1) 주류 사학계에서 단군조선의 역사적 존재를 인정하기를 주저하거나 거부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서는 물론 중국 사서에도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이 많이 있으나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사학에서 벗어나질 못해 단군을 ‘신화’로 치부하고 그 역사적 실재를 사실상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주류 사학계는 고조선이 한(漢) 나라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소멸된 데에 초점을 두고 접근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국의 동북공정은 상당 부분 한국의 주류 사학계의 주장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2) 국내 기독교 신자들 가운데 일부가 단군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거부감을 표출하고 있습니다. 대종교에서 개천절을 주창했다고 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 같기도 하고 단군을 기리는 것이 마치 그들의 신앙에서 금기시하는 우상 숭배라고 보는 것 같습니다. 단군에 대해 우리가 갖는 마음은 결코 우상 숭배가 아닙니다. 단군은 유구한 우리 역사의 상징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수천년 전 나라가 세워지고 나라의 지도자가 단군으로 불리운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면서 각자 종교를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3) 1982년 ‘고조선(Древний Чосон)’을 출간한 러시아의 유리 부틴(Юрий Бутин)은 “고조선은 1천년간 중국 지배를 받지 않은 독자적 문화를 발전시켜 왔으며 소위 한사군(漢四郡)은 현재 한국 국경 밖에 있었다. 동북아 고대사에서 단군조선을 빼놓고는 아시아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일본이나 중국은 없는 역사도 만들어 내는데 한국인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하는가?”라고 지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