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스머프에 대한 다른 해석입니다.
참세상에서 퍼왔습니다. 좀 오래전에..
좀 길지만 스머프에 이런 깊은 뜻이 있구나 하고 놀랄겁니다.
마크 슈미트
Marc Schmidt, Socio-Political Themes in The Smurfs
1. 들어가며
이 글은 Peyo가 만들고 80년대에 널리 방영되기 시작한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머프>에 대한 담화분석이다. 말하자면 내가 이 프로그램에서 알아챈 몇몇 사회-정치적 분석이라는 것이다.
<스머프>는 색다른 프로이다. 우선 무엇보다도 만화이며, 따라서 아이들을 겨냥한 것이다. 이것으로 이야기를 끝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많은 만화들이나 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는 달리, 스머프는 단지 몇몇 인물들의 모험담이라기 보다는 전체 사회와, 그 자체 그리고 외부의 것들 간의 상호작용에 관한 프로이다. 나는 이 프로가 요컨대 정치적 우화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스머프>는 기독교가 아니라 맑스주의에 관한 것이다.
나는 <스머프>가 일종의 억압적인 아동 선전물이라고 비난하려는게 아니다 -- 하지만 설령 그렇다손치더라도, 그게 같은 시기에 수없이 쏟아져 나왔던, 오직 플라스틱 인형을 팔아먹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인형' 만화물보다 더 나쁠 이유가 있을까? 어쨌든 이 글은 최고의 찬사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다른 어떤 아동 프로가 맑스주의라는 주제를 이런 방식으로, 냉전의 한가운데서 이런 방식으로 다룰 수 있었을까? <스머프>는 아이들에게 정치적 테마들을 요정이야기의 은유와 장치들을 이용하여 소개했다는 점에서 찬사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만약 Peyo가 사회주의자라면, 그는 소연방이나 다른 동구블럭 경찰국가에서 행해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사회주의에 몰두하는 이는 분명 아니다. 그는 유토피아주의자이다. 스머프 마을에는 군대나 경찰같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한 것이 필요한 드문 경우에, 그들은 위협을 싸워 몰아내기 위해 그들 자신의 민병대를 구성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경찰국가와는 완전히 반대된다.
<스머프>에서의 맑스주의에 대한 간략한 분석 이후에, 나는 이 프로에서 나타난 페미니즘과 동성애라는 주제도 다룰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의 주요 관심은 <스머프>가 맑스주의 우화라는 것이다.
2. 맑스주의 유토피아로서의 스머프 마을
스머프 마을 자체가 사회주의 코뮌 또는 집산체(collective)의 완벽한 모델이다.
이 마을은 자조적이고 토지는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집산체 전체 또는 모든 스머프에 의해 소유된다. '소유된다'는 말을 쓸 수 있다면 말이다.
파파 스머프는 칼 맑스를 나타낸다. 그는 스머프들의 지도자일뿐만 아니라 그의 나이와 지혜로 인해서도 마찬가지로 타인의 존경을 받는다. 그는 맑스처럼 턱수염을 가졌고, 확실히 그의 캐리커쳐라고 여길만하다. 끝으로, 그는 붉은 옷을 입었는데, 이는 전통적으로 사회주의의 색깔이다. 똘똘이(Brainly) 스머프는 트로츠키를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마을에서 파파의 지력에 필적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 그는 사상가이다. 그의 둥근 안경과 더불어, 그도 트로츠키의 캐리커쳐일 수 있다. 그는 종종 고립되고, 조롱당하며, 그의 사상들로 인해 마을 공동체로부터 쫓겨나기까지도 한다. 물론, 트로츠키는 소연방에서 추방당했다.
그들의 다양한 직무들/구분들에도 불구하고, 스머프는 모두 완전히 평등하다.
따라서 농부, Handy, 욕심이(Greedy) 같은 스머프의 특정한 직업들이 Clumsy, 투덜이(Grouchy), 게으름이(Lazy) 같은 이들보다 더 중요하기는 하지만, 어떤 스머프들이 그들의 일, 숙련 수준 등으로 인해 더 우월하거나 열등하다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모든 이들이 우선, 스머프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볼 때 스머프 마을은 폐쇄시장이다. 거기에는 화폐가 존재하지 않고, 모든 소유는 집산체의 공동체-재산이다. 모든 이는 똑같이 노동자이자 소유자이다. 스머프는 자유시장 경제라는 사상을 그 탐욕 및 불평등과 함께 거부하며, 집산체가 개인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있는 것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더 크다. 존 레논은 우리에게 "소유가 없다고 상상해보자(Imagine there's no possession)"고 요청했었다. 스머프 마을은 이 목적을 이루었다. 실제로 그 노래에 표현된 많은 사상들은 이 마을에서 현실이 된다. 스머프 마을에는 한가지 커다란 자본, 또는 생산수단이 있는데, 그것은 댐이다. 이 댐은 집산체 전체에 의해 소유되고 운영되며 보수된다.
스머프들은 서로를 똑같은 명칭 '스머프'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똘똘이 스머프, Handy 스머프, 익살이 스머프, 게으름이 스머프, 파파 스머프 등등.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보다 엘리트주의적인 명칭 대신 서로를 부르는데 쓰는 단어인 '동지'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마을에서 완전한 평등이라는 사상에 덧붙여서, 대부분의 스머프는 똑같은 종류와 색깔의 옷을 입는다. 이는 일반적인 작업복이며, 독특한 모자와 푸른 피부와 함께 보면 마오주의 중국에서 통상적이던 소위 마오복(Mao Suit)를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순수 맑스주의의 전통 속에서 스머프 마을은 무신론적이다. 거기에는 신도 없고 성직자 스머프도 없다. 오직 자연과 물리학의 '현실' 힘만이 있을뿐인데, 이들은 대자연 어머니(Mother Nature) 또는 시간 아버지(Father Time)이라는 캐릭터로 비유되어 나타난다. 물론 파파, 가가멜 Balthazar 등이 행하는 요술도 존재하지만, 이는 자연에서 일어나는 것의 다른 수단일뿐이다. 즉 물리적 성격을 가지며, 올바른 노하우가 있으면 다스려질 수 있는 것들이다. 이는 많은 종교에서와 같은, 초자연적 맥락에서 우주를 이해하는 방식은 아닌 것이다.
"스머프 대왕(the King Smurf)" 편은 탐욕스러운 왕들(자본가들)이 그들의 목적에 따라 인구를 착취하는 악하고 억압적인 정부와, 맑스가 정식화한 좋은 평등한 정치 모델 사이의 맑스주의적 투쟁에 대한 궁극적인 삽화이다. 이 에피소드에서 파파 스머프의 부재중에 왕이 된 똘똘이를 전복하기 위해 민병대가 형성되고, 파파 스머프가 돌아오자 유토피아적 질서가 회복된다. 이 지점에서 파파 스머프는, 맑스 자신과 마찬가지로, 맑스주의의 이상적 형태를 표현한다.
악한 마법사 가가멜은 자본주의를 나타낸다. 그는 자본주의의 모든 것을 체화하고 있다. 그는 탐욕스럽고 냉혹하며, 그의 유일한 관심은 자신의 개인적 만족과 희열이다. 그는 개인이 그가 살고 있는 사회보다 자신을 더 중요하게 만들 때 일어나는 것이다. 우연치않게 그는 아무런 현실의 친구도 갖지 못한 미친 늙은 은둔자이기도 하다.
그가 스머프를 갖고 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그에게는 두가지 생각이 있다. 첫째는 그들을 먹는 것이다. 대개는 그러지 않는데, 왜냐하면 스머프는 작고 귀하며, 예컨대 사슴만큼 훌륭한 먹을 것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건 골프공만한 먹을거리인 노랑 병아리(Tweety Bird)를 먹지못해 안달인 고양이(Sylvester)의 집착과 비슷하다. 여기에는 두가지 설명이 있다. 하나는 유비적인 것으로, 그는 냉전 동안 서구가 봉쇄전술로 소연방과 그 위성국들을 괴롭혔던 것처럼, 사회주의를 먹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순수한 자본가로서 그는 모든 것 -- 사람을 포함하여 --을 상품으로 만들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가가멜이 스머프를 가지고 하려는 두 번째 계획은 이들을 잡아 금으로 만드려는 것이다. 궁극적 초자본가로서, 그는 평등이나 공평 보다는 그 자신의 부에 관심을 갖는다. 여느 Adamsian 자본가처럼, 그가 얻을 수 있는 가능한많은 돈을 원하는 것은 그의 '자연스러운' 상태인 것이다.
가가멜은 차갑고, 지독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텅 빈 인간이다. 이는 그가 부와 소유를 향한 영혼없는 추구말고는 그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은게 없기 때문이다. 경제적 합리주의의 반사회적 효과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가가멜의 황갈색 고양이 아즈라엘은 냉혹한 시장경제 국가, 즉 가가멜의 집에서 노동자를 표현한다.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또는 목소리(즉 노동조합)이 없는 탓에 비유적으로 불평할 수 없다. 그는 임금을 가지고 협상할 수 없다 -- 그의 주인이 주는 아무것이나 먹는다. 그는 가가멜보다 더 작고 더 못한다. 이는 아즈라엘은 비유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가가멸은 부르주아를 나타내는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그의 주인을 위해 싸우고 사냥한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상태에 대하여 질문을 제기할 지적 능력은 갖고 있지 못한데, 노동자 역시 교육을 가까이할 수 없고 그의 사장을 위해 일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없기 때문에 수백년 동안 그의 운명을 감내해야 했던것과 마찬가지이다.
가가멜은 그의 집과, 그 속에 연금술 장치라는자본을 포함한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이는 스머프들이 그들의 마을에서 소유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만약 가가멜의 집에 동일한 정치 구조가 존재한다면, 가가멜의 큰 덩치나 지식과 숙련 등과 무관하게, 그와 아즈라엘은 동등하게 소유자일 것이다. 하지만 아즈라엘은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이후 80년대 들어 이 시리즈에 자신들의 색깔과 다른 의복 및 외양을 가진 Smurflings 같은 새로운 캐릭터들이 침입했는데, 이는 프로가 오래되자 대중성과 판매력을 높이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상업적 관심이 침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비유적으로, 이 프로에서 이들은 스머프 마을의 유토피아적 조화에 서구의 침투로 표현되었는데, 80년대 중후반, 소연방의 최종적 붕괴를 선도한 고르바초표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개혁과 마찬가지이다.
3. 페미니즘과 스머프
Monique Wittig는 여성들은 여성으로서 정의되며, 반면에 남성들은 그들의 직업으로 정의된다고 이야기한바 있다. 즉 남성은 직업을 가지고 있고 여성은 그렇지 못하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고가 보고될때, 희생자는 "한 명의 교사, 한 명의 배관공, 그리고 한 여성"이라는 식으로 기술될 수도 있다. 스머페트는 그녀가 남성 또는 실제 스머프들처럼 직업으로서 또는 개성의 특성으로서가 아니라 그녀의 성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마을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그녀는 그 성 때문에 사회의 실제 성원이 아니며, 이는 그녀가 가가멜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의해 은유적으로 나타난다.
우리사회에서 통상적인 '-ette'라는 축소형 어미역시 스머페트를 남성과 동등하지 않은 것으로서 규정한다. 그녀는 제 2의 성인 것이다.
위에서 나는 이 마을에서 모두가 평등하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는 여전히 옳다. 처음부터 모두가 남성이었고, 스머페트의 유입은 가부장적 질서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결국 스머페트는 다른 이들과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가 아니라, 평등하다.
이상적인, 성차별적인, 가부장 국가에서 여성은 공동체의 일부가 아니다. 그들은 노동과 외부세계의 '공공영역'을 점유하지 않으며, 그들은 확실히 노동하지 않는다. 스머페트의 주된 직업은 예쁘게 보이며 돌아 다니는 것, 즉 '여성으로 있는 것'인 듯이 보인다. 물론 문제를 해결해야할 시점에서, 고맙게도 제작자는 그녀를 머리 빈 여자(bimbo)로 만들지는 않았다. 그녀는, 물론 파파를 제외한 나머지 스머프들 보다 조금 더 날카롭다.
스머페트는 확실히 남성 시선의 '객체(object)'이다. 그녀가 객체이기 때문에 남성들은 주체들이다. 그들은 활동적이고, 그녀는 수동적이다.
스머페트는 가슴이 없다. 나는 스머페트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를 생각할 때 이 점은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녀는 가가멜의 거의 프랑켄슈타인적 창조물로서 생을 시작했다. 자본가로서 그는 당연히도 그녀를 상품으로, 궁극적으로 그가 돈을 만들기 위해 창조되고 사용되고 처분될 수 있는 무엇으로 취급했다. 여성이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고는 출산에서 여성의 핵심적 역할을 부인한다. 그녀가 가슴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이러한 자연적 성격에 대한 거부에다, 여성을 통제하고 이들을 가부장적 질서가 부과한 사회적 규범에 순응하도록 만드는데까지 나아간다.
스머페트는 그녀가 남성을 본따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이차적 창조물이다. 그녀는 차가운 가슴을 가졌고, 기술적으로 그녀는 비자연적이다. 물리적으로 그리고 은유적으로, 그녀는 '진정한' 스머프가 아니다. 그녀는 요컨대 가부장적 문화들이 수세기동안 여성을 보아온 것처럼, 나쁘고 그릇된 것이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 이야기는 한 예가 된다. 바로 창세기에서 여성은 본성적으로 나쁜 -- 남을 속이고, 악의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다 좋은 여성을 만들어낼 것인가? 말하자면 어떻게 사회(즉, 그 마을 또는 우리 자신의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성을 만들어낼 것인가? 하나, 그녀에게서 모든 대립(fight)을 제거하는 것.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만들고, 그녀를 남성지배적 사회구조가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선을 따라 사뿐사뿐 걷게 만드는 것. 이의 한가지 사례는 그녀가 흑발에서 금발로 변화한 것이다. 서구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어두운 색의 머리털의 여성은 현명한 것으로, 반면에 금발은 좀 아둔하지만 더 아름답고 바람직한 여성으로 스테레오타입화되어있다. 이것은 보다 좋은 여성을 만드는 또하나의 방법이다.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 것.
핵심적으로, 파파 서머프가 스머페트를 '진정한' 스머프로 만들기 위해 주문을 걸었을 때, 가시작 변화는 그녀가 좀 더 '아름다와졌다는' 것이기도 했다. 그 전에 그녀는 추했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성의 경우, 추함은 잘못된 것과 같고, 아름다움은 옳은 것,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진정한 것과 같은 것이 된다. 하지만 왜 어떤 것은 아름답고 다른 것은 그렇지 않은가? 누가 판정하는가? 결국
그건 가부장적 질서이다. 그리고 남자 대 여자가 99:1의 성비로 존재하는 스머프 마을은 확실히 가부장제이다. 여기에 상품으로서의 여성이라는 생각이 더해진다 -- 그녀는 남성에 의해 변화되고 만들어지며, 그들의 기준에 의해 아름답다. 그리고 종국에 그녀는 이에 감사한다.
Gloria Steinem은 "여성들은 역사상 최초의 여장호모들(drag queens)이었다"고 쓴 적이 있다. 말하자면 아름다움의 이상은 모두 가부장적 질서에 의해 부과된 것이며, 성에 의해 구분을 짓고 여성들을 단지 객체로, 남성 시선의 초점으로 강제할 필요가 아니라면 여성들에게 '여성처럼' 보이도록 할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스머페트도 예외는 아니다.
이상적인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남성 대 여성의 비율이 50:50인 스머프 마을이 어떠할지 상상할 수 있는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건 이 프로에서 보여지는 유토피아와는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이상적인 맑스주의 국가는 성적인 평등을 포함하여 모든 이들이 평등할 때만 진정으로 운영될 수 있음을 의미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 여성인 스머프 마을을 상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는 다른 이유보다도 필경 우리 자신의 사회에 깊이 뿌리박은 성차별주의에 기인하는 측면이 클 것이다. 만약 여성이 스머프들에게 '자연스러운' 성이라면, 나는 그들이 왜 모두 스머페트처럼 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아름다움이라는 개념,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이 '금발의 그리고 귀여운' 등과 등치되어야 할 아무런 기반도, 아무런 참조틀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4. 호모토피아로서 스머프 마을
스머페트가 나타나기 전까지 스머프 마을은 항상 모두 남성이었고, 이후에도 여전히 압도적으로 남성이다. 이는 이들이 전통적인 수단으로 출산하지 않으며, 따라서 '이성애'가 규범이 아닐 것임을 의미한다.
많은 이들이 세계가 도달했던 순수한 민주주의와 가장 근접했다고 믿는 아테네 같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통치는 모든 인민에 의해 이루어졌지만 여기서 '모든 인민'은 남성만을 의미했다. 여성은 공적 업무에 참여하도록 요청받지 않는다. 아테네에서 동성애는 유별난 것도, 얼굴 찌푸려지는 일도 아니었다.
어떤 스머프도 스머페트와 어떤 관계를 맺는 적이 없다. 비록 그녀가 몇몇 유치한 이성애적 라이벌관계, 특히 덩치(Hefty)와 Handy 사이의 초점이긴 하지만, 이 마을에는 아무런 현실적인 이성애적 긴장도 없다. 긴장은 스머페트보다는 서로를 인상적이게 만드는데 보다 관심이 있어 보이는 덩치와 Handy 사이에서 더 심하다.
만약 스머프 마을이 수 세대동안 여성없이 존재했다면, 스머프들이 어떻게 스머페트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까? 자연이 스머프가 관찰할 수 있는 남성-여성 유대의 사례를을 제공하기도 했겠지만, 그들 자신의 공간에서는 여성이 존재하지도, 이성애가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스머페트가 누군가를 유혹할 수 있을까? 창조자들은, 만약 이성애가 사회에서 존재하지 않고 이성애적 매력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틀이나 참조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이성애가 자연스러운 상태라고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이 점에서 나는 창조자들을 배제할 용의가 있다. 이들은 아마도 이 점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인데,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 이성애는 거의 규범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나는 덩치, Handy, 허영이(Vanity)라는 캐릭터들은 게이의 원형이라고 생각한다. 허영이는 영국의 시트콤 "Are You Being Served?"의 사례처럼, 스트레이트 연예산업에서 공통적으로 보여지는 유형의 게이 원형이며, 반면에 덩치와 Handy는 같은 성격의 프로에서 극단적으로 과장되어 강조되는 아이콘적 근육질 남성성을 가진 게이 원형이다. 또한 나는 Clumsy와 똘똘이는 스테레오타입화된 게이 커플이라고 생각한다.
5. 결론
최소한 나는 Peyo가 풍유적인 요정이야기라는 형식을 통해 보종의 맑스주의 이론들을 제시하려고 시도했다고 본다. 결국 <스머프>는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 세계를 비춰줌으로써 최상의 환타지 문학의 역할을 하는데 성공한다. 내러티브로서 <스머프>가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우화임을 암시하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궁극적으로 나는 이 프로가 갖는 인기의 많은 부분역시 이러한 유토피아적 이상으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 모든 복잡성으로 인해 그것이 현실 세계에서는 일어나기 어렵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