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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한·중 역사전쟁, 이제 시작이다
동북공정(東北工程) 무엇이 문제인가?
중국의 역사왜곡 기도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일부 학자들에 의해서 제기되어 오던 문제가 지난 10월 12일 'KBS 일요스페셜'에서 <한·중 역사 전쟁 - 고구려는 중국사인가>라는 제목으로 다루어지면서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이에 역사학계는 대책마련에 부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더불어 정부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 개진되고 있다.
동북공정(東北工程)이란?
동북공정, 이 말을 언뜻 들어보면 무슨 공사이름인 듯 하다. 하지만 이 사업은 북경 사회과학원 산하의 한 연구소 주도로, 동북 3성의 사회과학원과 그 지역 대학 및 연구기관들이 총 동원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대규모 연구프로젝트이다.
5년 간 사업비만도 2백억 위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3조원에 이르는 금액이다. 중국의 경제현실을 고려했을 때,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숫자의 돈이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중국 역사에 대한 재해석이다. 하지만 역사에 대한 단순 재해석이라면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그들이 목표하고 있는 것은 현재 중국의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의 내면에는 중국이 지향하는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 중국은 한족을 중심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만든 국가라는 것이다. 이 가운데 동북지역은 만주족과 조선족을 중심으로 한 역사였으며, 지금 조선족 역시 중국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므로 이 지역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라는 관점이다.
역사 연구에 정치적 색채가 강하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특히 이것은 근래 조선족들의 한국국적신청 운동과 물려서 상당한 정치적 신경전을 예상케 한다. 문제는 이러한 정치적 색채를 띤 역사 연구의 주된 목표가 바로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론대로 하면 현재 중국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는 중국의 역사이므로 고구려사와 발해의 역사는 한국의 역사가 아니라 중국의 역사가 된다. 이것은 최근 돌출된 것이 아니라,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루어 질 때부터 물밑으로 추진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 동북지방을 여행하면서 발해와 고구려를 중국 당나라의 지방정권 혹은 속국으로 표기해 놓은 것을 직접 본 사람도 있다.
현재 중국 정부는 집안(集安)일대의 고구려 유적들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벌이는 동시에, 그것을 내년 6월에 소주(蘇州)에서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과 함께 세계 문화유산으로 신청할 예정이다. 만약 여기에서 평양의 고구려 고분군이 지정되지 않고, 집안 일대의 고구려 유적이 문화유산으로 지정된다면 그것을 한국의 역사로 빼올 수 있는 길은 막연해 질 가능성이 있다.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들의 논리 자체는 상당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현재의 국경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가 그들의 역사라면 훗날 국경이 변했을 경우 없어진 국경만큼 역사를 들어낼 것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역사 속에 국경은 포함될 수 있어도, 국경 속에 역사를 포함시킬 수는 없는 이유이다.
이러한 작업의 의도에는 이후 남·북한이 통일되었을 경우를 예상해서, 지금의 국경을 견고히 하려는 목적이 깊게 배여 있다. 특히 조선족들이 흩어져서 살고 있는 동북3성은 문화적으로 한국에 더 가깝다. 국경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문화와 역사를 같이 공유하게 될 경우, 조선족들의 중국 이탈은 불을 보듯 뻔한 문제이다.
동북공정이 국경분쟁의 가능성을 역사의식을 통해 미리 막으려는 정치적 공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중국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이 그들의 의도대로 성공한다면 이것은 한국 역사에 상당한 문제를 남기게 된다. 단순한 역사 왜곡의 의미를 넘어서 한국의 역사 자체를 중국의 역사로 떠 넘겨줄 수밖에 없다. 일본의 교과서 왜곡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현재 중국 교과서에는 이미 발해의 역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켜 놓고 있다. 발해문제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예민하게 반응하며, 한국인들의 중국 내에서의 발해 연구에 대해서도 상당한 거부 반응을 보인다. 이미 자신들의 역사이므로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평양천도 이전의 역사만을 중국 역사로 기록해왔던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서 고구려사 전체를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고조선의 역사 역시 자연스럽게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게 되며, 따라서 한국의 역사는 한강이남에서 이루어졌던 반쪽짜리 역사와 고려·조선의 역사밖에 남지 않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약 3000년 정도의 역사를 중국에 넘겨주는 꼴이 된다. 동시에 공간 역시 한강이남으로 축소되어, 이후 새로운 영토분쟁의 가능성을 남기게 될지도 모른다. 정신적으로도 지역적으로도 대(大)한민국이 아닌, 소(小)한민국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동시에 동북공정을 인정해주게 되면, 동아시아 역사를 한족 팽창의 역사로 이해해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중국의 한족 중심의 역사관은 자신들의 역사를 끝없는 한족 팽창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역사는 실제 한족과 다른 민족들과의 끝없는 교섭의 역사이다. 이 사이에서 국경의 의미는 교섭되는 힘의 편차에 따라서 갈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동북공정의 역사관이 그대로 이행된다면 동아시의 역사는 끝없는 한족의 팽창사로 규정되며, 그 속에서 한국 및 기타 동아시의 국가들의 역사는 동아시아 주변의 역사로 전락하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하나?
이제 남은 것은 전문가들의 힘있는 단합력과 그것을 밀어줄 수 있는 국민적 공감대, 그리고 범정부차원의 지원뿐이다. 중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전쟁을 준비해 왔다. 침략이 시작될 즈음에 부랴부랴 꾸려진 우리의 준비태세는 아직 너무나 미미하다. 그러나 침략은 시작되었고, 지금 우리는 이것을 반드시 막아내야만 한다.
특히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는 북한과의 밀접한 연계는 이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 대부분의 고구려 유적들이 거기에 있으며, 따라서 연구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북한과의 밀접한 연계는 반드시 필요하다. 정부가 반드시 나서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직 정치적 장애상황이 남아 있는 단계에서 남·북한의 전향적인 태도가 없다면 우리의 역사는 눈뜨고 빼앗기는 현실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지금 한국은 3000년 우리의 역사를 빼앗기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기로에 서 있다. 안이한 대처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치부해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주장]중국, 신제국주의 정당성 역사에서 찾는다
동북공정 무엇이 문제인가(2)
역사상 동아시아를 지배한 가장 강력한 제국은 중국이었다. 그들은 중국(中國)이라는 국호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세계의 중심국가를 원했고, 실제 역사적으로 중국은 동아시아에서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특히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단순한 영토적 측면에서 제국이라는 의미를 넘어, 문화적으로도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했다. 동아시아에서 형성된 한문문화권과 이로 인해 형성된 유교문화권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중국이 동아시아의 정신적 맹주를 자임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의식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공산주의를 표방해온 50년 동안 경제적으로는 낙후된 길을 걸어왔다. 이에 비해 스스로 주변국으로 이해했던 한국과 일본의 경제성장은 눈부셨고, 이렇게 되면서 한국과 일본은 정신적으로 중국으로부터 독립되기 시작했다. 한국과 일본에 대한 중국의 패배감은 여기에 있다.
지금 현재로 중국은 한국과 일본의 경제를 따라잡아야 하는 위치에 서 있다. 이들이 공산주의 경제체제에 자본주의를 도입하면서, 나름대로 급속한 경제성장의 일로에 서 있다. 중국인들은 머지않아 경제적으로도 세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것 같은 강한 자신감에 물들어 있다. 지난 유인 우주선의 발사는 이러한 그들의 자신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러한 중국의 자신감을 역사적으로 회복시키려는 것에서 출발한다. 동아시아 맹주를 자신했던 중국의 화려한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중국인들의 자신감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정신적 명분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 첫 대상이 바로 한국이다. 일본은 중국과 국경을 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중국과는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많이 떨어져 있었다. 하지만 한국은 중국의 군사와 문화에 직접적 영향을 받았다. 실제 한국 역사에서 고려 중기 이후 한반도는 중국의 제후국이었다. 황제의 지위를 잃어버린 왕의 국가였던 것이다.
하지만 한반도에도 힘이 왕성했던 역사는 분명히 있다. 그것이 고구려의 역사이며, 이후 발해로의 역사적 길을 걷는다.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니라 광활한 만주벌판이었다. 이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강한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래로는 백제·신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중국과 당당하게 맞섰던 고구려의 역사는 한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울 수 있는 역사이다. 그 이후 고려와 조선의 대중국관계는 실제 굴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는 중국이 당당하게 동아시아의 맹주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이 왜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로 보려하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고구려가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면, 고구려의 전사(前史)에 해당하는 고조선 역시 중국의 역사이며, 고구려의 후사(後史)인 발해의 역사 역시 중국의 역사이다. 중국과 당당하게 맞섰던 한반도의 역사는 모두 중국의 역사로 편입되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중국의 역사적 영향력이 이미 한반도를 뒤덮고 있었던 것으로 설정할 수 있다는 말이다. 중국의 영토를 한강 이북 전체로 설정할 수 있는 근거 역시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단순히 지금의 국경내에 존재했던 모든 역사를 자신의 역사로 해석하겠다는 그들의 입장은 명분에 불과하다.
중국은 천천히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이제 한 번 해 볼만한 상태에 올랐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서 그들은 제국으로서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옛날 역사를 다시금 되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의 신제국주의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대한 첫 작업이 바로 역사적 정당성의 확보이다.
고구려만 중국의 역사로 편입시킬 수 있다면, 한반도의 모든 역사는 중국에 복속된다. 이는 한족 팽창의 역사로 역사를 기술하고 있는 그들의 역사관을 입증해 주는 근거인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이기도 하다.
동북공정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 대처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국경은 잃어버려도 다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와 문화를 잃어버리면 그것은 회복할 길이 없다.
특히 지금 우리가 침략 당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자심감에 찬 3000년의 역사이다. 이것을 잃는 것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존심을 깡그리 잃어버리는 것이며, 동시에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신제국주의를 저지할 수 있는 역사적 정당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간도 문제, 2005년이면 만료된다
[주장]동북공정 무엇이 문제인가(3)
중국의 동북 공정으로 인해 현재 한국 역사학계가 떠들썩하다. 중국의 역사 왜곡 수위가 일본 교과서 왜곡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역사학계 전체의 대응이 필요하다. 동시에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이러한 와중에 정부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해야 할 일이 생겼다. 바로 을사조약과 간도협약을 무효화시키는 일이다.
동북공정의 2003년 중점 과제 가운데에는 영토분쟁문제를 다루고 있는 <國際法 中朝邊界爭議問題>가 있다. <국제법, 중국·조선의 국경 분쟁 문제>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연구 과제는 요녕대학에서 맡고 있는데, 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이루어졌던 간도협약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 졌다. 간도협약은 1909년 중국과 일본이 맺은 국경에 관한 협약으로, 국경 문제의 당사자인 조선을 빼고 맺은 협약이다.
간도는 원래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영유권 문제로 250년 동안 분쟁이 되었던 곳이다. 이곳은 조선인들에 의해서 개간되었고, 오랫동안 조선인들이 점유해 온 땅이다. 하지만 청나라와 조선의 완충 지대로 설정되면서 문제가 되다가 1712년 청의 목극등과 조선의 박권이 국경 지대를 함께 심사해서 정계비를 세웠다.
이 비문의 내용을 보면 "서쪽은 압록으로 하고 동쪽은 토문(土門)으로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토문이 무엇을 지칭하는가이다. 청은 토문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고, 조선은 송화강 상류를 토문강이라고 주장했다. 토문강을 송화강 상류로 보는가 두만강으로 보는가에 따라서 지금의 동간도(또는 북간도) 일대가 조선의 영토가 되는가 청의 영토가 되는가가 결정된다.
여기에는 여러 역사적 사료들이 제시되면서 계속해서 분쟁이 이루어졌다. 그러면서도 이곳의 점유는 대부분 조선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분쟁은 계속 결말을 못 짓다가 1908년 간도협약을 통해서 지금과 같이 결정되었다.
간도협약은 협약의 당사자가 중국과 일본이었다. 원래 일본은 협약 이전까지만 해도 간도를 조선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정책을 주장했던 일본이 막상 협상 테이블에 앉자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간도의 명분보다 만주 내의 경제적 실리를 챙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렇게 되면서 일본은 만주철도 부설권과 무순탄광 채굴권 등 4대 이권을 얻는 대가로 간도를 청의 영토로 인정해 주었다.
일본의 실리 때문에 국경의 이해 당사자인 조선은 말 한마디 못하고 간도 땅을 잃어 버렸다. 그런데 이 협약이 정당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 때문이다. 을사조약에 의해서 조선의 외교권이 일본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문제를 일본이 대리해서 다루었던 것이다.
지금 정부의 외교적 역량이 최대한 동원되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만약 1905년 체결된 을사조약이 문제가 있는 조약이라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무효화시킬 수 있다면, 여기에 근거해서 이루어진 간도협약 역시 무효화 시킬 수 있다. 실제 을사조약은 위협과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진 조약으로, 고종 황제의 서명 날인도 받지 못한 조약이다. 1963년 유엔국제법위원회의 보고서에서도 을사조약이 강압에 의한 조약임을 인정하고 무효 판결을 내린 적이 있다.
국제 조약은 문제가 있을 때 100년 이내에 문제를 제기하고 하자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을사조약이 1905년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2005년 안에는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이것은 국제 규약이므로 정당한 방법을 통해서 간도 문제를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년 이내에 이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간도를 한국의 땅으로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상실된다. 국제 조약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시한을 놓쳐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외교부와 학계에서 문제를 신속하게 다루어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간도를 한국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는 상당히 많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불합리하게 중국의 영토로 고착되었다. 이 때문에 우선은 을사조약과 간도협약을 무효화시킴으로써 간도를 다시 분쟁상태로 돌려놓을 필요가 있다. 당연한 중국 땅이 아니며, 여기에서 한국 정부는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기반해서 정부는 간도의 영유권을 주장해야 한다. 을사조약과 간도협약이 명쾌하게 잘못된 것으로 판단되면, 간도를 우리땅이라고 말하지 않을 근거는 없어진다. 이것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가장 공격적인 대응이며, 동시에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작업이기도 하다.
특히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겠다는 것이 아니라, 근거 없이 넘어간 우리의 영토를 합리적인 방법을 통해서 찾아오자는 것이다. 중국은 한국의 이러한 반응을 예의주시하면서 동북공정을 통해 벌써부터 이 분쟁을 준비하고 있다.
고구려사 논쟁은 정치적 문제이다
"고구려사 논쟁, 감정적으로 풀어선 안돼"에 대한 반론
역사는 과거의 것이어도, 역사에 대한 해석은 현재의 것이다. 역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자는 것이 아니라, 역사해석을 통해서 현재의 모습을 새롭게 조망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역사해석은 과거의 것이 아니라 현재를 담보하고 있다.
18일 <오마이뉴스>를 통해서 "고구려사 논쟁, 감정적으로 풀어선 안돼"라는 제목의 역사문제가 보도되었다. 이 보도는 '동북공정'(중국에서 벌이고 있는 고대 중국 동북변방 역사 연구 사업)에 대해서 "한국의 분위기가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면서, "중립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학자들의 관점"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복단대학에서 한국 역사를 강의하고 있는 조선족 박창근 교수의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보도는 상당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우선 중국 내에서 조선족 교수의 입장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다. 기자는 박 교수를 중립적이라고 전제하면서 그의 입장을 보도하고 있지만, 실제로 동북공정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조선족의 이탈을 막기 위한 것이다. 그 대상에 서 있는 사람을 '중립적'이라고 전제하는 것은 상당한 문제가 있다.
두 번째로 동북공정의 문제 자체가 결코 '중립적'으로 바라보면서 대응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학문적 영역'이나 혹은 '이론적 영역'에서의 논의구조가 아니다. 이미 위에서도 밝혔듯이 역사해석의 문제는 현실을 담보하고 있다. 특히 무리수를 두면서 이루어지는 해석에는 반드시 저의가 깔려 있기 마련이다.
이 때문에 학문이나 이론의 구조에서 바라볼 수 있는 '중립적 해석'도 현실에는 어느 입장을 두둔할 수 있는 이론적 구도로 탈바꿈되기 쉽다. 실제 '중립적'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박 교수의 논조는 궁극적으로 동북공정의 역사 해석 방법을 중국의 다양한 역사 해석의 하나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쪽으로 귀결되고 있다.
특히 "물론 역사적 관점으로 봤을 땐 고구려사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민감하게 갈릴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다만, 현실적인 영토 개념으로 봤을 때는 분명 중국 영토에 속한 유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는 박 교수의 말은 동북공정의 이론적 배경을 그대로 두둔하고 있는 말로,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현재 동북공정의 문제는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단순한 학문적, 혹은 이론적 논의가 아니다. 그것이 현실 해석으로 드러날 경우 한 쪽은 심각한 타격을 입고 또 다른 한쪽은 새로운 제국주의를 표방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게 된다. 학문적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문제인 것이다.
정치적 문제에 학문적이고도 이론적인 방법을 차용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범정부적 대응 역시 늦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의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단순한 역사적 재해석 작업에 우리 돈 3조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투입할 수 없다는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중국의 동북공정에는 철저한 정치적 속내가 들어 있다. 이것은 대략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남북한이 통일된 이후의 조선족 이탈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에서 목표하는 지역은 동북 3성으로 길림성과 흑룡강성·요녕성이 그것이다. 여기에는 특히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으로, 대부분의 조선족 자치 구역이 여기에 분포되어 있다. 이곳에는 아직 한국의 언어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문화적으로는 중국이 아니라 한국적 요소가 짙다. 경제적으로도 지금도 연변조선족 자치주는 한국 경제의 재채기 한 번에 독감에 걸릴 정도이다. 그들은 지금 현재 한국 경제에 예속되어 있다.
지금 사정도 이러한데, 통일이 되면 이것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이행될 수 있다. 비록 국경은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갈리고 있지만, 문화나 경제적으로는 한국쪽에 속하는 상당히 기형적 형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지금도 중국 정부는 조선족들에게 조국관·민족관·역사관에 대한 대대적인 사상교육을 시키고 있다. 한국은 고국일 뿐이지만, 태어나서 사는 곳은 중국이므로 그들이 충성을 바쳐야 할 곳은 중국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조선족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자신들의 국경과 영토를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것과 연계시키지 않으려는 정당성을 역사해석에서 확보하려는 것이 바로 동북공정이다.
둘째, 동북공정의 목표는 남북한이 통일된 이후에 발생할 수 있는 영토분쟁에서 역사적인 선점을 해 두려는 것이다. 지금도 중국과 한국의 영토문제는 분쟁의 소지가 있다. 원래 간도는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영토분쟁단계로 남아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형태로 고착화 된 것은 1909년에 체결된 간도협약을 통해서였다. 그 이전 간도는 중국의 땅도 아니고 조선의 땅도 아니었다.
간도협약은 잘못된 조약인 을사조약에 근거해서 당사자인 조선이 빠진 채 일본과 청에 의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2005년까지 을사조약의 하자를 들어서 이것을 무효화 시키게 되면, 여기에 기반해서 이루어졌던 간도협약 역시 무효가 된다. 이렇게 되면 간도는 중국과 한국 사이의 엄청난 영토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중국은 이러한 영토분쟁의 가능성을 역사 해석을 통해 미리 막으려는 것이다.
동시에 동북공정에서 목표하는 대로 역사가 해석되면, 한국의 역사적 영토는 대동강 이남 혹은 최악의 경우 한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것은 결국 급변하는 역사적 소용돌이에서 중국이 한반도 문제, 특히 북한의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역사적 실마리를 마련해 주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토였으므로 그에 대한 개입 역시 정당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얼마든지 가능하다.
셋째,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서 중국의 신제국주의를 위한 역사적 근거를 확보하려고 한다. 중국은 그들의 역사를 한족 중심의 역사로 기술하면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족 팽창사'로 정리한다.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는 한족 팽창사의 주변사에 불과할 뿐이다.
이것도 역사 해석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이것이 불러올 현대적 파장에는 상당한 정치적 문제가 걸려 있다. 동아시아의 중심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규정하는 순간, 중국은 동아시아의 맹주자리를 되찾기 위한 역사적 근거로 이를 이용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신제국주의 정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동아시아의 역사를 한족과 한민족을 포함한 만주족과의 교섭사로 보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처럼 동북공정은 단순한 역사학자들의 역사 해석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이후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속내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프로젝트이다. 이렇게 보아야 그들이 거금을 투자하고 있는 이유 역시 설명된다.
'중립적인 역사학자의 시각'이 결코 중립적일 수 없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동북공정의 역사 해석이 다양한 역사 해석 방법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여지는 순간, 동북공정의 역사 해석은 새로운 역사 해석 방법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것은 위에서 말한 중국의 정치적 속내를 실현시킬 수 있는 기본적 빌미가 되며, 이 때 한국이 입는 피해는 너무나 심각하다.
동북공정을 이론의 다양성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자는 박 교수의 논지 자체가 이미 중국의 입장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치적으로 타협하거나 혹은 다양한 이론 가운데 하나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그 해석에 따라서 엄청난 정치적 파장이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북공정의 정치적 속내에 '학문적 작업'이라는 껍질을 덮어놓은 중국의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북 공정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자긍심뿐만 아니라 우리의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요원해진다. 특히 문제는 앞으로 중국의 신제국주의 팽창 정책이나 같은 민족인 조선족 문제에 대한 우리의 발언권이나 제재의 역사적 근거를 완전하게 상실할 위험성이 너무나 크다. 그 때가 되면 단순히 돈 몇조원 투자해서 막아낼 수 있는 사안이 아니게 된다.
"고구려사 논쟁, 감정적으로 풀어선 안돼"
조선족 중국학자, "중국내에서도 다양한 학설 존재"
최근 고구려사를 둘러싼 논쟁으로 인해 한국과 중국 학계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중국이 내년 소주(蘇州)에서 열리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UNESCO)에서 북한의 평양과 중국 집안(集安) 일대의 고구려분을 중국 유산으로 신청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면서 '고구려사 논쟁'은 중국과 한국 사이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이는 자칫 한중 양국간 민족감정으로 번져 외교 마찰의 소지가 될 수도 있는 문제이기에 한국의 언론 매체들도 앞다투어 고구려사 문제에 대한 보도를 하고 있으며 일반 시민들의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도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이에 대한 한국의 분위기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다. 대부분 "중국이 한국사를 강탈하려 한다"는 전제하에 고구려사 문제를 대하고 있다.
물론 고구려사 문제가 우리 민족의 자존심과 직결될 수 있는 문제이기에, 상당히 민감한 사안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지나치게 감정에만 치우쳐 고구려사 문제를 다룬다면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방안보단 일회성의 처방만을 내놓기 쉽다.
현재 언론매체 등을 통해 한국학자들의 입장은 충실하게 대변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과 다른 입장을 표명하거나 중립적 시각에서 이 문제를 바라보고 있는 학자들의 관점은 거의 소개되지 않고 있다.
이에 상해 복단대에서 '한국학 개론'을 강의하고 있는 박창근 교수를 인터뷰하였다. 박 교수는 국적상 중국인이지만 조선족이다. 또한 '중국'에서 '한국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중국 국적이라는 현실적 조건과 조선족이라는 감정적 조건이 미묘하게 교차하고 있는 '경계인'인 셈이다.
박 교수는 고구려 역사 논란의 '최전선'인 연변보다는 상대적으로 '후방'이라 할 수 있는 상해에서 고구려사 문제를 관망하고 있다.
17일 이루어진 전화 인터뷰에서 박 교수는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고구려사 문제를 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객관적이고 현실적으로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다음은 인터뷰 내용이다.
- 최근 중국측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동안 중국 내에서는 고구려사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있어왔던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연구진들이 고구려사를 연구하고 있고, 따라서 중국 내에서도 고구려사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중국학자들 중,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가장 큰 논거는 조봉·책봉 관계입니다. 고구려와 중국간에 조·책봉 관계가 있었기에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 정부로 보는 것이죠.
하지만 이러한 논거에 대해서도 아직까지 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신라, 백제와 같은 경우, 고구려와 똑같이 조·책봉 관계가 있었지만 중국사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사가 중국사에 포함되는가 여부는 결국 당시의 조·책봉 관계가 어떻게 해석되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라고 봅니다.
또한 현실적으로 보았을 때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데는 현재 중국 정치 상황의 변화 또한 무시 못할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 2004년에 소주에서 열리게 될 세계문화유산위원회에서 중국 측이 중국영토 집안(集安)의 고구려 고분은 물론 평양의 고구려 고분까지 중국 유적으로 등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대해선 어떻게 보시는지요?
"사실 중국이 자국 영토의 유물을 유네스코에 등록하려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관점으로 봤을 땐 고구려사가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민감하게 갈릴 수 있는 문제이겠습니다만, 현실적인 영토 개념으로 봤을 때는 분명 중국 영토에 속한 유물이라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평양 등에 있는 유물까지 중국의 유물로 등록하려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볼 수 있겠죠. 이는 현실적인 조건 하(현재의 영토개념)에서 생각해야지 감정적으로 무리하게 처리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 이 문제에 관해 한국 학자들과 의견을 나누어 보신 적은 있습니까?
"아니오.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인터넷을 통해서 한국내의 반응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 내의 반응을 보면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사실 앞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중국 내에서도 고구려사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모든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내에서는 마치 모든 중국학자들이 '고구려사를 빼앗아 가려 한다'는 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이는 미숙한 반응이라고 봅니다.
역사를 사실 그 자체로 보아야지, 지나치게 감정적인 측면으로 몰고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제가 최근에 서강대학교 김한규 교수님의 '한중관계사'란 책을 중국어로 번역하였는데요, 김 교수님의 관점에 따르면 요동지방은 '역사 공동체'적 성격을 띤 지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요동지방이 현재의 한반도와 미분리 상태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점차 한반도에서 떨어져 나와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 또한 분명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현실이지요.
따라서 요동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고구려사의 문제에 있어서도 일방적으로 한쪽의 역사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역사 공동체'적인 성격으로 보아야 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 북한 학자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아직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분명 한국의 학자들보다 더욱 강력하게 항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과거 고구려 영토였던 지역을 국토로 하고 있는 나라인데다가 북한의 학풍 자체가 민족주의 사학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 반응이 더욱 강경할 것입니다."
- 학생들에게 한국 고대사를 어떻게 가르치시나요?
"최대한 모든 견해를 동시에 소개해주려 하고 있습니다. 일방적으로 한쪽의 견해만을 가르치는 건 바람직하지 않겠죠. 한국과 중국, 양쪽의 의견을 고루 가르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 앞으로 고구려사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십니까?
"정치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역사는 사실 그 자체로 평가받아야지 정치적 이유로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또한 지나친 민족감정으로 판단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현실과 역사를 적당히 거리를 두고 판단할 줄 아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사 논쟁에 있어 한국은 중국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박 교수가 언급한 대로 중국 내에는 고구려사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이는 중국의 고구려 연구가 깊고 방대한 범위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격앙된 분위기와는 달리 박 교수는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로 인터뷰에 임하였다. 일방적으로 고구려사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중국 내에도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는 보다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한 민족감정으로만 역사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박 교수의 지적은 우리의 역사관이 지나치게 피해의식에 젖어 있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오히려 지금 격앙된 분위기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고 중국학자들과의 교류를 활성화해 한국과 북한, 중국이 서로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고 상대방을 정확히 알아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드는 것이 보다 절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사는 우리 민족에게 있어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문제를 오로지 중국과의 ‘승부’ 국면으로만 몰고 가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차분하고도 이성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판단해 해결책을 모색해야 할 때다.
북한과의 협력 강화로 중국 동북공정 대처해야
[주장]우리의 궁극적 협력 대상은 북한...우리 민족의 역사 지켜야
최근 기자는 미국 콜럼비아대 교수인 찰스 K. 암스트롱 교수가 펴낸 'THE NORTH KOREAN REVOLUTION 1945-1950(북한의 혁명 1945-1950)'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영국에서 구입한 이 책은 해방 후 한국 전쟁 직전까지의 북한 역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대목은 고 김일성 주석을 비롯한 북한 국가 핵심적 권력층을 형성한 만주지역 항일 좌파 운동가들에 대한 내용이었다.
남한 건국 정당성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독립운동과 대립된 계열인데다가 분단전쟁 등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어, 만주지역 좌파들의 활동을 남한 사회의 제도권 교육 체제 아래서는 도저히 접근할 수 없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이 지역의 독립운동을 다룬 역사 서적들을 구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명 우리 민족 역사의 일부분이면서도 이민족인 미국인보다 이 사실에 대해 더욱 무지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졌다. 동시에 우리 역사이면서도 분단과 전쟁으로 남한 사회에서는 그 역사적 사실이 철저하게 묻혀 ‘반쪽짜리 역사관’을 갖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책장 위에 아른거렸다.
또 최근 동북공정과 관련해 거인 중국과 힘겨운 투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 민족의 상황도 떠올랐다. ‘반쪽짜리 역사관’은 비단 현대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남북한의 공동 대처 의식 부족은 우리 민족의 ‘조각난 역사관, 조각난 민족의 역량’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 왜곡에 대한 최근 일련의 반응들을 보면 중국 현지의 유물들을 답사하거나, 중국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고구려사 논쟁에 대한 태도를 짚어보는 것에 그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북한과 공동으로 대처해 나가려는 노력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우리는 또다시 ‘찢겨져’거인 중국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두 손 두 발 다 동원해 싸워도 모자랄 판에 우리는 외팔로 대항하고 있다.
고구려사 논쟁에서 조선족 제외시키고 북한과 ‘직거래’터야
최근 고구려사 논쟁에 대한 몇몇 보도들을 보면 조선족들이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부분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접근은 상당히 위험하며 중국 측을 더욱 자극해 자칫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소지가 있다.
기실 이 부분에 대해선 기자도 할 말이 없다. 기자는 지난해 상해 복단대학교의 조선족 교수인 박창근 교수를 인터뷰한 경험이 있다. 당시 동북공정이 국내에 막 소개될 즈음 기자는 '국적이라는 조건과 민족이라는 조건이 겹치는' 박 교수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당시 박 교수는 상당히 곤란해 하며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당시 박 교수의 논지를 집약해 보면 "고구려사 논쟁은 학술적 문제이지 정치적 문제로 풀어서는 안 된다"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박 교수의 이런 ‘미지근한 반응’은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과 조선족들에게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것이 일종의 ‘대리 만족’은 아니었을까 싶다.
고구려의 주무대였던 북측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북한이 고구려사 연구에 대해 보다 용이하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북한과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에 대한 공조를 그 논의조차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
고구려사 문제를 다룰 때 우리에게 항상 아킬레스건이 되는 것은 바로 북한과의 공조 부족이다. 남북이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와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또는 위안의 대상으로 북한 대신 중국의 조선족을 끼워 넣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러나 조선족은 이 문제에 있어 언제까지나 ‘북한의 대타’일 뿐 결코 궁극적인 협력 대상이 될 수 없다. 국적상 그들은 결국 ‘중국인’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연변지역을 비롯한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들에게 ‘고구려사가 어느 나라의 것이냐?’라는 질문 또한 참으로 잔인한 질문이다. 중국의 국적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그래도 같은 핏줄이니 우리 편을 들어주겠지’라는 기대 심리로 자꾸 그런 질문들을 들이댄다면 이들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들은 중국인이기에 직접적으로 조선족들에게 힘을 미칠 수 있는 존재는 분명 한국이 아닌 중국이다. 따라서 고구려사 문제에 있어 조선족은 그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협력의 대상을 잘못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손을 잡아야 할 대상은 조선족이 아닌 ‘북한’이다. 비록 전쟁과 분단을 거치면서 건국 과정의 정당성을 각기 따로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분명 북한과 남한은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로 여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사 논쟁에 있어 남북한의 협력은 시너지 효과를 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고구려사를 중국으로부터 무사히 구출시켜낸 뒤라 할지라도 남북한의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구려사 논쟁에 있어 우리의 파트너는 분명 북한이다. 현대사를 거치며 갈라진 각자의 정당성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서로 공유하고 있는 고구려사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남북한이 서로 ‘직거래’를 틀수는 없는지 이 시기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북한의 ‘허약한 주체성’ 준엄하게 꾸짖을 수도 있어야
하지만 북한과의 공조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최근 북한이 점차 개혁 개방을 추진하면서 북한 경제의 중국 경제에 대한 의존도가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탓인지, 북한은 중국의 동북공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러한 북한을 우리가 보다 적극적으로 설득시킬 수 없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할 때이다. 북한은 스스로를 ‘주체적 국가’라 칭하면서 항상 미국의 그늘에 놓여 있다는 이유로 남한을 비판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주체’를 국가의 근간으로 삼아온 북한이 정작 중국과의 관계 앞에서는 꼬리를 내리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는 분명 자기모순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는 꼴이 된다.
만약 북한이 앞으로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 계속 이러한 모습을 보인다면 북한의 ‘허약한 주체성’을 과감히 비판하고 적극적으로 북한 설득에 나서야 한다.
고구려사를 중국에 넘겨주게 된다면 우리 민족 역사의 절반 이상을 잃게 된다. 또한 고구려사를 시작으로 여타의 역사적 주체성까지 유실당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에 남한과 북한은 서로간의 국가 정당성에 관한 논쟁은 잠시 접고 적극적으로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해야 한다.
우리 민족은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 앞에 위기를 맞고 있다. 또한 이번 위기는 우리의 정체성 자체를 흔드는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다. 이러한 커다란 위기 앞에 남과 북이 갈라져 분산된 힘으로 대응한다면 우리는 또 한 번 민족의 생명이 끊기는 비운을 맞을 지도 모른다.
채 백년도 되지 않는 짧은 현대사의 경험 때문에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역사를 말살시켜서는 안 된다. 남과 북이 함께 손을 '직접' 맞잡을 수는 없는 것인지 보다 큰 틀 안에서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코앞에 두고도 보지못한 '고구려'
[긴급기획 1] 중국, 한국답사팀 관람 원천봉쇄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왜곡, 편입시키려고 해 한중 양국간에 갈등이 야기되고 있으며 자칫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예고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27일~30일 3박4일 일정으로 고구려연구회 답사팀과 함께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과 환인을 현지취재하고 돌아왔다. 취재진은 현지에서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등 현지사정과 우리측의 대책 등을 듣고 이를 3회에 걸쳐 긴급기획물로 내보낼 계획이다....편집자 주)
"어, 저것 봐! 누가 우리 답사팀을 캠코더로 촬영하고 있다."
"중국 공안원(경찰)들 같아. 고구려 유적도 못 보게 막더니 이렇게 감시나 하고…"
지난해 12월 29일 아침 10시께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 취원호텔 앞.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와 <월간중앙>이 공동주최한 고구려 유적답사팀이 탄 30인승 버스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4차선 도로 건너편의 흰색 승용차 안에서 중국 공안원들이 답사팀이 탄 버스를 열심히 촬영하고 있었다. 앞 좌석에 탄 사람은 캠코더로, 뒷 좌석에 앉은 사람은 스틸 카메라로 작업 중이었다. 영하 10도 정도의 추위로 버스 창문에 성에가 끼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똑똑하게 보였다.
마치 형사들이 범죄증거 수집을 위해 채증 작업을 하는 것 같았다. 답사팀이 탄 버스는 환인(桓仁)을 향해 떠났다. 흰색 승용차는 30분 정도 계속 따라왔다. 이들은 집안시 현지 공안원도 아닌 길림성 정부 차원에서 파견된 공안원들로 알려졌다.
이들 때문에 칠성산 211호 무덤, 천추릉 등을 지날 때 답사팀은 버스에서 내릴 수도 없었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잠시라도 내려서 고구려 고분을 좀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이번 고구려연구회 답사팀은 중국 정부가 자국 안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하기 위해 올해 초 집안과 환인(桓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지난 9월 세계유산위원회의 현지 실사를 받고 난 뒤 처음으로 찾은 한국 단체 답사팀이었다.
중국 정부가 한국 답사팀을 환영할 까닭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싸늘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첫날부터 답사팀이 주요 고구려 유적을 관람하는 것 자체를 봉쇄했다.
이는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 문제를 얼마나 정치적으로 보는지, 한국의 행동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생각하는지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국언론에 부는 고구려 열풍
새해 첫날부터 한국 언론에 고구려 열풍이 불고 있다.
'2천년을 지킨 성채…고구려는 살아있다'(<경향신문> '한국사속의 만주'시리즈)
'민족의 뜨거운 심장에 누가 비수를 꽂으려 하는가'(<한국일보> '한중 고대사 전쟁'시리즈)
'꿈틀거리는 고구려혼…1400년 시간 멈춘듯'(<동아일보> '고구려를 다시보자'시리즈)
1월1일자 주요 국내 일간지의 고구려 관련 시리즈의 제목이다. <조선일보>의 경우 2면에 '고구려의 길'이라는 김지하 시인의 시를 싣고 이어 A-20면에 '비상하는 중국, 대제국의 부활을 꿈꾼다'라는 중국 관련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기사도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 등 최근 강화되고 있는 중국의 민족주의 열풍의 현황을 분석하는 기사로 보인다.
각 신문들이 준비한 기획 기사의 규모도 일부는 10회에 이르는 등 상당히 큰 기획이다. 이들 신문들이 나선이상 국내 다른 언론사들도 관련 기획을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해 12월9일 한국 고대사학회 등 한국사 관련 17개 학술단체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중국 역사학계와 '전쟁'을 선언했다. 중국의 <광명일보> 등 주요 언론들은 지난해부터 '고구려사는 중국사'라는 기사를 연속적으로 싣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양국 언론사 사이에도 고구려사를 놓고 취재전쟁이 불붙은 전망이다. / 김태경 기자
고구려연구회 답사팀은 지난 27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 도착했다. 애초 계획은 이날 오후 선양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고구려의 백암성을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선양에 도착한 직후 취소됐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우리 답사팀이 오니까 랴오닝성 정부 차원에서 대책회의를 했던 모양"이라며 "성 정부에서 백암성은 미공개 지역이기 때문에 한국 답사팀이 갈 수 없다고 통보해왔다"고 말했다.
아직도 중국에는 미개방 지역이 있다. 중국 정부의 허가 없이 이곳에 갔다가 붙들리면 상당한 법적 책임이 따른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사람들이 아무 제재 없이 백암성을 둘러봤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날은 관람을 불허한 것이었다.
백암성의 동북쪽 성벽은 압록강 이북 지역의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특히 3개의 치(雉·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공격하기 위해 성벽 밖으로 군데군데 내밀어 쌓은 돌출부)가 완벽하게 남아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축성법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백암성 관람 불발은 '시련의 시작'이었을 뿐이다. 답사팀은 이날 밤 10시께 선양에서 열차를 타고 통화까지 갔다. 애초 예정대로라면 28일 환인(桓仁)에 있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 오녀산성을 관람할 계획이었다. 광개토태왕비에는 고구려의 시조 추모(주몽)왕이 '비류곡의 홀본 서쪽 산 위에 성을 짓고 도읍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학자들은 바로 이곳이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라고 본다.
(흔히 광개토'대왕'이라고 하는데 광개토'태왕(太王)'이 맞다. 중국은 최고 군주를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고 불렀지만 고구려는 '태왕'이라고 일컬었음을 여러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기자 주)
그러나 통화에서 현지 여행사의 버스에 타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발표가 있었다. 현지 재중동포 여행사 김송학 사장은 "오녀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얼어붙어서 관람할 수 없다는 전갈이 왔다"며 "불과 얼마 전에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아무 문제없이 안내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번 답사팀은 관람이 불가능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미 현지 여행사는 오녀산성 관람비를 납부한 상태였지만 관리사무소는 갑자기 전화를 걸어 '돈을 다시 찾아가라'고 했다 한다.
서길수 회장은 "지린성 성장이 성 관광국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우리 답사팀의 고구려 유적 관람을 전부 금지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며 "오늘 오녀산성 관람은 포기하고 '집안'으로 간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고 말했다. 그는 의지를 다졌지만 얼굴 표정은 어두워졌다. 자칫하면 '고구려 답사팀'이 아니라 '단순 관광객'으로 전락할 형편이었다.
28일 오전 숙소로 예약한 집안 시내의 취원 호텔에 도착하자 중국 공안원들이 들이닥쳤다. 답사팀의 여권을 일일이 검사하더니 일부 답사팀원의 경우 묵고있는 방안까지 뒤졌다. 이날 나타난 공안원들은 집안시 공안국 소속이 아닌 지린성 소속이었다.
집안시 공안국에게 맡기면 아무래도 시 정부 수입의 최대 원천인 한국인들을 너그럽게 처리할까봐 성 정부 차원에서 직접 파견한 모양이었다.
곳곳에 사진촬영금지
현지 여행사 쪽에서 시 공안국과 관광국 등에 수없이 전화를 하더니 조금 양보(?)를 받아낸 모양이었다. 내용은 광개토태왕비와 장수왕릉, 국내성 등은 관람 가능하지만 사진촬영 절대 금지, 환도산성 및 산성하 무덤 떼 등은 버스 안에서만 둘러볼 것, 그리고 집안 박물관은 관람할 수 없다는 것 등이었다. 애초 답사팀이 중국에 온 목적의 절반도 충족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원래 집안은 지난해 초부터 10월 중순까지는 대대적인 고구려 유적지에 대한 발굴 보수공사로 외국인 출입이 금지됐다. 그러나 이후에는 개방된 상태였다.
서영수 단국대 교수는 "중국이 고구려사가 자기 것이라면 뭐가 그리 겁이 나는가? 왜 이렇게까지 관람을 막는지 이해가 안된다"며 혀를 찼다. 특히 아쉬운 것은 집안 박물관을 관람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국 정부가 지난해 초 6개월간 대대적으로 고구려 유적을 발굴·보수하면서 새로 발견한 유물을 대거 전시해 놓았기 때문에 꼭 봐야 할 곳이었다.
중국 정부가 밝힌 박물관 관람 불허 이유는 '건물 안에 일부 물이 새기 때문에 보수 공사 중'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루 전 날인 27일에도 아무 문제없이 관람이 이뤄졌고 28일은 일요일이라 중국인들이 일을 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한국 답사팀의 관람을 막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서길수 회장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한 지역의 박물관에서 물이 샌다면 큰 문제다. 유네스코에 공식 문제제기 하겠다"고 항의하자 다시 돌아온 대답은 "박물관 직원들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어 문을 열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1시간 넘게 항의했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28일 오후 출발하는 답사팀 버스 안에는 리웨이라고 이름의 40대의 집안 박물관 여성 가이드, 현지 재중동포 공안원까지 버스에 탑승했다. 앞으로 한국 단체 관광객들은 반드시 집안 박물관의 전문 가이드가 따라붙기로 했다는 설명까지 곁들여졌다. 물론 이들의 목적은 한국 단체 관광객들에 대한 감시일 것이다.
장수왕릉(장군총), 광개토태왕비에 도착하자 6~7명의 사복을 입은 공안원들이 답사팀을 밀착해 따라붙었다. 이들의 감시 때문에 몰래 사진을 찍을 수도 없었다. 더구나 유적을 지키고 있는 셰퍼드들도 한국인을 알아보았는지 사납게 짖어대 분위기만 어수선했다. 한 현지인은 "경비견이 아주 많다. 장수왕릉에 2마리, 광개토태왕비에 4마리, 다섯투구무덤(오회분) 2마리, 박물관에 2마리가 지킨다"고 귀뜸해 줬다.
다섯투구무덤(오회분)의 4호묘는 원래 30평 정도의 관람실에서 무덤 내부에 설치한 카메라로 벽화를 보여주도록 되어있지만 이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환도산성과 산성하무덤떼는 차에서 내려보지도 못하고 버스 안에서만 관람이 허용됐다. 영하의 날씨에 성에가 잔뜩 낀 버스 창문으로 고구려 유적을 살펴봐야 하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혹시 자료 독점 하기 위해?"
원래 세계문화유산의 기본정신은 '어느 종족이 창조하였더라도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면 이를 공동으로 지키고 관리하는 것이 국제사회의 기본정신'이라는 것에 바탕을 둔다. 따라서 세계문화유산은 누구에게나 공개하고 관람시켜야 한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이런 기본적인 원칙부터 무시했다.
이번 답사팀 가운데는 문화재 보존학과 교수와 전각 전문가 등 이 방면의 전문가들이 끼여있었다. 이들은 고구려 유물의 보존이나 복원 상태를 보면 전문가적인 판단을 내리고 지적할 수 있다. 즉 중국 정부는 한국의 전문가들이 와서 자신들의 고구려 유적 복원에 대해 혹시 비판을 제기할까봐 아예 관람을 '원천봉쇄'했을 수 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은 모든 고구려 유적지마다 '請勿拍撮 謝謝協助'(사진촬영 금지, 협조바랍니다)라는 푯말이 붙어있는 것이었다.
현지 재중동포 가이드는 12월 26일부터 갑자기 실내는 물론 실외에 있는 그 어떤 고구려 유적도 사진촬영이 금지됐다고 전했다. 비디오 촬영은 예전부터 금지됐지만 사진촬영 금지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위반하면 벌금이 1만 위안(150만원)에 카메라까지 압수한다고 했다.
단국대 동양사 연구소 박찬규 박사는 "혹시 중국정부가 자료를 완벽하게 독점하려고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박 박사는 "올 여름에 중국 시안에 있는 진시황제의 지하궁전인 병마용(兵馬俑)을 보고 왔다"며 "병마용은 실내에 있지만 스틸 사진은 물론 비디오까지 마음대로 찍을 수 있었다. 그런데 외부에 있는 장수왕릉이나 광개토태왕비의 사진도 못 찍게 하는 것은 정말 심각한 봉쇄"라고 말했다.
병마용의 경우 이전에는 내부에서 사진 촬영이 절대 금지되었고 만약 사진촬영을 하려면 500위안 정도의 돈을 내고 지정된 장소에 한해서 촬영이 가능했다. 이랬던 병마용도 완전히 사진촬영 금지가 풀렸는데 바깥에 있는 고구려 유적은 사진 촬영을 완전 금지한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혹시 한국인들이 집안과 환인의 유적 사진을 찍은 뒤 보수가 잘못된 곳이나 미비한 점이 있으면 공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까봐 이를 막기 위한 조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금지조치가 고구려연구회라는 중국정부 입장에서 볼 때 대단히 껄끄러운 단체에만 한정된 것인지 아니면 모든 한국 관광객들에게 그대로 적용될지는 현재로서는 확실치 않았다.
아무튼 이는 올해 6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 회의에서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의 등재 여부에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29일 답사팀은 환인의 오녀산성으로 향했다. 이미 중국 정부의 불허 방침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심정으로 향했다. 한켠에는 '혹시 현지에서 관람할 수 있는 방법이 있겠지'하는 일말의 기대감도 깔려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중국 정부의 설명과는 달리 길은 얼어있지도 않았다. 불과 하루 전에도 아무 문제없이 오녀산성 관람이 이뤄졌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연구회 답사팀의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오녀산성을 1천m쯤 남겨놓은 지점에서 발길을 돌려야 했다. 답사팀은 손에 잡힐 듯이 서있는 오녀산성을 바라보면서 멀리서 사진을 찍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징기스칸도 중화민족" 뿌리깊은 패권의식
[긴급점검 2] 중국의 고구려사 빼앗기 의도와 목적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왜곡, 편입시키려고 해 한중 양국간에 갈등이 야기되고 있으며 자칫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예고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27일~30일 3박4일 일정으로 고구려연구회 답사팀과 함께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과 환인을 현지취재하고 돌아왔다. 취재진은 현지에서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등 현지사정과 우리측의 대책 등을 듣고 이를 3회에 걸쳐 긴급기획물로 내보낸다. 이번 기사는 그 두번째 이다....편집자 주)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하기 위한 '동북공정'은 2년전 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가 직접 나서고,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상황에서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좌절로 국내에서 큰 관심을 끌게됐다.
그러나 이는 표면적인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중국인들의 심리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세계의 중심은 중국'이라는 역사의식이 문제다. 이런 중화중심주의는 중국의 국력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패권주의적' 형태로 표출될 것임을 여러 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경고했다.
10년 전 베이징에서 만난 한 인민대학 학생에게 "지금 중국 영토가 중국 역사상 가장 넓지 않느냐"고 가볍게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하고 "원나라 때 중국 영토가 가장 넓었다. 그 때는 지금의 동유럽 일부와 러시아까지도 중국 영토였다"고 말했다. 징기스칸도 중화민족이라는 말이다.
"원나라는 몽골족이 세운 나라인데 이해할 수 없다"라고 되묻자 그는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다. 몽골족은 중화민족의 하나다"라고 목소리를 높혔다. 몽골 공화국이 지금도 중국 북쪽에 분명히 자리잡고 있지만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유라시아 대륙 거의 전체가 중국 영토가 된다.
기자는 정면으로 반박했다.
통일적 다민족 국가란
중국 정부는 '중국은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고 주장한다. 중국 역사는 한족을 비롯한 56개의 민족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항상 한족을 중심으로 한 다수 민족이 '통일'(大一統)을 견지해왔다는 것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 '현재의 중국 영토 안에서 발생한 모든 역사적 사건은 중화민족의 역사'라는 시각과 함께 한다.
즉 기원전 221년 진시황제가 중국 전역을 통일했으며 지금 중국의 광서성, 운남성 등의 각종 소수민족도 모두 통일된 진나라의 영역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진 나라가 망한 뒤 한나라 때 서역(현재의 신쟝위구르자치구)의 각 민족들과 활발한 교류를 했으며, 이들이 화하(華夏)민족이라는 칭호로 불려지는 등 세계 역사상 인구수가 가장 많은 한족이 성립됐다.
이후 한족이 세운 정권도 있고 원나라나 청나라 등 소수민족이 세운 정권도 있지만 진나라 한나라 때의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틀을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대일통(大一統)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즉 지금부터 2000년 전인 진나라와 한나라 때 이미 '통일적 다민족 국가'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런 '통일적 다민족 국가'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는 거의 맞지 않는다. 한 실례로 근대 중국을 연 '신해혁명'만 해도 그 구호가 '만주족을 멸망시키고 한족을 흥하게 하자'였다. 따라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은 위구르족, 티벳족, 몽골족, 조선족은 물론 대만의 독립까지 막으려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원나라 때 전 국민을 4등급으로 나눴다. 1등급은 몽골인, 2등급은 색목인(色目人·서역 사람들), 3등급은 거란·여진족들, 4등급은 남인(南人)이라고 불린 남송(南宋)의 한족(漢族)들이었다. 몽골인들은 당시 전체 인구의 대부분(80% 이상)인 한족들을 노예로 취급하다시피 했는데 원나라가 중화민족 왕조라니 이해가 안된다"
그 친구는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징기스칸도 중화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고구려가 '동북 변경의 소수민족이 세운 지방정권'이라는 것은 아무 문제없이 자리잡을 수 있다.
통화사범대 겅티에화 교수가 1994년 펴낸 <호태왕비 신고(新考)>라는 책은 이미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의 옛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삼황오제 시절의 고양씨의 제곡의 후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문 학자라는 사람이 전설에 불과한 삼황오제 시절의 얘기를 끌어내 고구려의 선조가 중국인라고 강변했다.
1982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주도해 편찬한 <중국 역사지도집>에는 조조의 위나라의 영토가 황해도, 평안남도와 함경남도까지, 당나라 때 영토는 대동강 이북 전부로 표기되어 있다.
광개토태왕비가 아니라 호태왕비?
지난달 28일 고구려연구회 답사팀과 함께 광개토태왕비를 찾았다. 이 비석 하나에서도 중국인들의 왜곡된 역사의식을 여러개 찾을 수 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이 "광개토'대왕'이 아니라, 광개토'태왕'(太王)이다. 고구려인들은 자신의 왕을 '태왕'이라고 불렀는데 우리가 '대왕'으로 부르는 것은 식민사관의 영향이다"라고 설명했다. 중국에서는 최고위 군주를 황제, 일본은 천황이라고 불렀다면 고구려인들은 '태왕'이라고 불렀음을 여러 고구려 금석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비를 보호하고 있는 누각에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적혀 있다. 광개토왕의 정식 명칭은 '광개토경국강상평안호태왕'(廣開土境國崗上平安好太王)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절대 '영토를 넓혔다'는 뜻이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광개토왕'이라는 쓰지않는다. 반드시 '호태왕'이라고 부른다.
대리석에 새겨진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설명문은 "이 비는 호태왕의 아들인 고구려 20대 장수왕이 '진 의희(晋 義熙) 10년(414년)에 만들었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의희'는 동진(東晋) 안제(安帝) 때의 연호다. 동진은 원래 한족 왕조였던 서진이 흉노족에게 멸망당한 뒤 강남으로 도망가 세운 왕조다.
광개토태왕비에 새겨진 1775개의 글자 가운데는 분명 '영락'(永樂)이라는 고구려의 독자적인 연호가 있다. 다른 금석문을 통해 고구려가 건흥(建興), 연수(延壽), 연가(延嘉), 태화(太和), 영강(永康) 등의 연호를 사용했음이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왕들은 스스로를 '하늘의 아들'(天帝之子)로 인식했음도 상식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광개토태왕비가 세워진 연대를 굳이 중국 왕조의 연호로 표기해놓았다. 고구려의 독자성을 숨기고 '지방정권'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더구나 북방 이민족이 세운 북위(北魏) 등의 연호가 아니라 한족 왕조인 동진의 연호로 표기했다.
중국의 주장대로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면 소수민족이 세운 왕조의 독자성도 공평하게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한족 중심의 왕조에 소수민족 정권이 복속되었다는 의미에서의 통일성만을 강조한다. 이는 결국 '통일적 다민족 국가'란 결국은 '한족 중심주의, 중화 패권주의'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북한에 대한 연고권 주장할 수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해 일부에서 정치적으로 민감하게 대응하지 말자는 주장도 있다. 학술적으로만 대처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이미 '통일적 다민족 국가'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깔고 있기 때문이다.
고구려사가 중국사로 넘어가면 이는 단지 고구려사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발해는 물론 고조선까지 중국사로 넘어간다. 우리 민족의 근간을 이룬 종족이 예맥(濊貊)족과 한(韓)족 가운데 절반인 예맥족의 역사가, 우리 역사 활동무대의 절반이 민족사에서 떨어져 나간다. 이는 한국사의 근간이 흔들리는 심각한 문제다.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은 지난달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학술 발표회'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을 내세우고 특히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운남성 등 국경지방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여기에 한중 수교 이후 한국인들이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고 역사와 관련되 발언을 했을 때 매우 긴장했다. 조선족들이 한국으로 몰려가고 탈북자들이 중국으로 넘어오고, 2001년 한국 국회에서 재중동포의 법적 지위에 대한 특별법이 상정되는 등의 상황이 발생하자 중국 당국은 대책을 세우기 시작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중국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의 고구려사를 중국사라고 주장함으로써, 유사시에는 지금의 북한 땅에 대한 연고권까지 내세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국외국어대 여호규 교수는 2일 <동아일보>에 실린 좌담회에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중국의 최근 행보를 읽어보면 동북지역뿐 아니라 북한 지역에 대한 역사적 연고권까지 주장하려고 한다. 이는 북한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중국이 개입하는 역사적 명분이 될 수 있다. 동북공정은 남북통일 이후의 국경 분쟁이나 북한의 위기 상황 등 현실적 문제와 깊이 연결돼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편입시키려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 유사시 북한이 문제가 생기면 이곳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려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 1959년 중국이 티벳을 침공할 때의 상황을 살펴본다면 이런 우려는 단순한 기우로만 치부할 수 없다.
소수민족에 대한 알레르기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중국인들의 '소수민족에 대한 알레르기'가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중국 전 역사를 보면 소수민족이 한족을 지배한 것이 3분의 1을 넘는다"며 "이 때문에 소수민족 문제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중국 역사는 5호16국,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 등 소수의 북망 이민족이 끊임없이 한족을 지배했다. 당나라 때는 티벳족(당시 토번)에 의해 수도 장안이 점령되기도 했다.
가까운 역사에서도 이를 찾아 볼 수 있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1644년 베이징을 함락시켰을 때 그들의 인구는 300만명에 병사수는 16만~20만명에 불과했다. 당시 한족의 인구는 1억5000만명(1850년대는 4억3000만명) 정도였다. 인구 300만의 만주족이 100배가 넘는 한족을 267년간이나 지배했던 것이다.
중국망(www.china.org.cn)에 올라있는 <중국정부백서>에 의하면 지난 1995년 중국 전체 인구는 12억778만명이다. 이 가운데 한족은 10억9932만명, 55개 소수민족은 1억846만명으로 전체 인구의 8.98%다.
1998년 당시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등 모두 155개의 소수민족 자치지역이 있다. 그런데 이들이 차지하는 면적이 중국 전체면적 960만평방킬로미터의 64%에 이른다. 즉 중국 전체 인구의 10%도 안되는 소수민족 집중거주지역이 중국 전체 면적의 3분의2나 된다.
소수민족 집중 거주 지역은 모두 다른 나라와 국경지대로 중국 안보상 중요하며, 석유, 가스 등 지하자원이 풍부하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볼 때 이들 지역을 한족 왕조가 확실하게 장악한 적이 거의 없다. 한족 왕조의 세력이 아주 강성할 때는 이들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지만 대개 단기간에 불과했다. 대부분 소수민족들이 지배했던 것이다.
중국의 북쪽에는 내몽고자치구, 서쪽에는 신쟝위구르자치구와 티벳, 남쪽에는 소수민족이 많은 윈난성과 광서장족자치구 등이 있다. 1755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준가리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신쟝위구르자치구가 청나라의 영토가 됐다.
티벳의 경우는 티벳인들은 단 한번도 역사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대등한 관계'였다고 본다. 지난 1959년 중국의 공격으로 달라이라마 14세가 인도의 다름살라로 망명해 지금까지 독립정권으로 자부하고 있다.
만주로 알려진 랴오닝·지린·헤이룽장의 동북 3성의 사정도 비슷하다. 동북 3성은 이곳에서 흥기한 만주족이 중원을 점령하면서 현재의 중국 영역에 들어갔다. 더구나 만주족은 자신들의 발상지를 보호하고 유사시 한족에게 왕조가 멸망당한 뒤 후퇴할 장소로 남겨놓기 위해 1860년대까지 200년이 넘게 만주지역에 한족들이 살지 못하도록 '봉금(封禁)지역'으로 만들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한족의 이주가 금지되었던 동북 3성의 1812년 인구는 170만이었다. 30년 뒤에는 300만을 넘었고 봉금정책이 풀린 1897년에도 700만에 불과했다. 그러나 1997년에는 1억697만명이나 됐다. 100년간 1억 명이 늘어난 것은 산둥성의 기근으로 한족들이 엄청나게 이주하고 이들의 높은 출생률 때문이었다.
즉 만주지역이 한족들의 확실한 거주지가 된 것은 100년 정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주요 종족은 조선족 192만명, 만주족 982만명, 묘족 7398만명, 장족(壯族·광서장족자치구), 위구르족 721만명, 티벳 459만명, 몽골족 481만명, 회족(回族) 860만명 등이다. 인구가 불과 4245명에 불과한 헤이룽장성에 주로 거주하는 허저(赫哲)족이라는 소수민족도 있다.
이 민족 가운데 중국 밖에 모국이 있고 어느 정도 힘이 있는 나라가 조선족밖에 없다. 중국은 거꾸로 남북 통일 뒤 통일 한국이 만주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현재 인구 1억2000만명인 동북 3성에 대한 경제적 영향력이 확대될 것을 꺼려하는 것으로 보인다. 수없이 소수민족에게 점령당했던 중국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그들에게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중국의 세계문화 유산 신청은 정치적
중국이 중국이 집안(集安)과 환인(桓仁)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신청을 한 의도부터 대단히 정치적이다.
북한이 지난 2002년 1월 고구려 고분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자국 안의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은 세계문화유산을 이미 29개나 보유하고 있지만 길림·요녕·흑룡강성 등 동북 지방 것은 한 곳도 없다.
그러나 북한이 등재를 신청하자 중국은 태도를 바꿨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는 마당에 북한의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전 세계적으로 '고구려사=한국사'로 인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은 2002년 북한에 고구려 유적을 공동 등재할 것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하자 바로 '고구려 수도 , 왕릉과 귀족무덤'을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으로 제출했고 2003년 1월 세계유산 등재를 정식 신청했다.
그리고 지난해 9월 4~10일 이코모스(국제기념물 유적협의회) 현지 실사를 받았다. 이를 위해 올해 초 불과 6개월동안 3억위안(480억원 정도) 이상의 돈을 들여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했다.
북한이 고구려 고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을 하지 않았으면 중국도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6년 장천 1호분 벽화가 도난당했지만 중국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1930년대에 완벽한 모습이었던 국내성은 1990년 높이가 3m 정도로 낮아졌고 1997년에는 아파트 화단으로 변했다.
이렇게 고구려 유적이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한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돈을 댈테니 보수를 하자고 말했지만 중국 정부는 모른 체 했다. 그런 중국이 이제와서 집안과 환인의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한 것은 그들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올해 6월 중국 쑤저우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중국과 북한의 고구려유적의 세계유산 등재여부가 결정된다.
만일 이때 북한과 중국이 신청한 것이 똑같이 받아들여진다면? 이 경우도 중국에게 훨씬 유리하다. 북한이 신청한 것은 벽화고분 16기를 포함한 고구려 무덤 63기가 전부다. 그러나 중국은 왕릉급 13기, 귀족무덤 26기 등 모두 40기를 신청해 수적으로 부족하지만 내용상으로는 결코 기울지 않는다. 또 중국은 북한과 똑같이 16기의 벽화고분을 리스트에 넣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홀본성, 국내성, 환도산성 같은 도시 자체를 신청했고 동아시아의 '로제타 스톤'으로 불리는 광개토태왕비도 신청했다. 이는 중요한 고구려 유적은 모두 중국에 있고 북한에는 무덤떼만 남아있는 것으로 오인될 만큼 큰 차이가 난다. / 김태경 기자
동북공정은 중국의 '동북아 전략기획서'
[긴급점검 3] 단순 역사왜곡 차원 넘어서... 근본적 대응책 필요
(중국 정부가 고구려사를 자국사로 왜곡, 편입시키려고 해 한중 양국간에 갈등이 야기되고 있으며 자칫 외교분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마저 예고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12월 27일~30일 3박4일 일정으로 고구려연구회 답사팀과 함께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과 환인을 현지취재하고 돌아왔다. 취재진은 현지에서 중국이 고구려사를 편입하기 위해 어떠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지 등 현지사정과 우리측의 대책 등을 듣고 이를 3회에 걸쳐 긴급기획물로 내보낸다. 이번 기사는 그 세번째다.... 편집자 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을 단순히 '고구려사 빼앗기' 정도로 축소해서 생각하지 말라. 이는 중국 정부가 국가 전략적 관점에서 추진하는 '동북아 프로젝트', '동북아 전략기획서'다."
국내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동북공정의 본질을 이렇게 지적한다. 이는 중국의 동북공정 설명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中國邊疆史地硏究中心) 홈페이지
(www.chinaborderland.com)는 동북공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동북지구는 우리 중국의 중요한 변경지역으로 자원이 풍부하고 인구가 조밀하며 특히 동북아시아의 중심적 위치로 중차대한 전략적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부 국가의 연구자들과 기관들이 딴 마음을 먹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고, 소수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으로 잘못된 이론을 공개적으로 선전하고 혼란을 야기했다. 이 때문에 동북 변경과 현상 연구는 중대한 도전에 직면했으며 새로운 과제를 부여받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일부 국가들의 연구자와 기관'이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분명하다. <조선 전사>와 같은 역사서를 통해 고조선·고구려·발해의 독자성과 중국 역대 봉건왕조와의 투쟁을 강조하는 북한은 물론 남한의 학자나 연구기관까지 들어간다.
중국은 동북지역이 '동북 아시아의 전략적 중심지'라고 큰 의미를 둔다. 따라서 동북공정의 주요 작업내용도 고대중국 영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연구, 중·조(中·朝) 관계사연구, 중국 동북변경 및 러시아 원동지구의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안전 전략연구, 조선반도 형세 변화 및 이의 동북지역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 등 대단히 광범위하다.
동북공정은 단지 고구려사 연구에 그치지 않는다. 고조선·발해 등 한국 고대사 전체를, 더 나아가 동북 지역의 영토·역사 관계·사회 안정·다른 나라와의 관계 등 모든 것을 포괄한다. 따라서 단순히 학술적 차원의 역사 연구가 아니라 '동북아 전략기획서'인 것이다.
중국 "동북지역은 동북아의 전략적 중심지"... 북한 난민 유입 가능성에 촉각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는 동북공정이 한민족의 동북 지방 유입 역사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변강사지연구중심 홈페이지의 '중국변경고찰'이라는 난에는 '조선반도 형세 변화의 동북지역 안정에 대한 충격'이라는 문건이 실려있다. 변강사지연구중심의 '당대중국변경계열조사연구'라는 팀이 1998년 9월 작성한 글이다.
문건은 "조선반도의 형세 변화는 특히 연변조선족 자치주와 랴오닝성 단둥 지역에 큰 충격파를 줄 수 있다"며 "연구의 주안점은 첫째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 조선반도의 동란과 난민들의 동향, 둘째 현재 지린성 중·조 국경의 현황"이라고 명시했다.
연구중점은 △조선반도 형세에 대한 추적 조사 △고조선, 고구려, 발해 및 중·조 국경 형성 및 교류의 역사 △19세기 후반 조선난민의 중국 입국 경위 및 중국 조선족 형성의 역사 △현재 동북지역의 종교 및 민족 문제 △조선 난민 유출의 가능성 및 대책 등이다.
지난 19세기 후반 조선 왕조의 정치 혼란과 기근 등으로 많은 조선사람들이 동북지역으로 들어갔다. 일제시기 때도 동북지역으로 계속 한민족이 유입됐다. 이는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된 바탕이 됐다. 중국은 앞으로 혹시 한반도 유사시 많은 수의 북한 난민들이 다시 동북지역으로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한다.
한 국내 전문가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현재 동북 지역에 조선족이 100만 이상, 탈북자가 수십만이있다. 그런데 남한의 주도로 남북 통일이 이뤄진다면 북한 공산당 및 군부의 강경세력들은 '무기'를 들고 중국 땅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는 중국정부로서는 아주 우려스럽다. 지난해 조·중국경지대의 수비병력을 인민해방군 15만명으로 교체한 것도 이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다. 일제시대 때 만주가 독립운동의 기지가 됐던 것처럼 남북통일 뒤 다시 한민족의 또다른 근거지가 되어버리는 사태를 막으려는 것이다."
간도 문제도 중국에게는 부담스럽다. 간도는 지난 1909년 일제가 간도협약을 통해 만주철도 부설권, 푸쉰 채광권을 얻는 대가로 청나라에 넘겼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당사자인 대한제국이 배제되고 맺어졌다. 따라서 통일 한국이 간도협약을 무효로 선언하고 다시 영토 확정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는 것은 동북공정의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중국은 동북아시아의 정세 변화를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국가전략 관점에서 동북공정을 진행하고 있다.
고구려 전문가인 김용만씨는 "동북공정의 핵심은 고구려사가 아니다, 고구려사는 겉으로 드러난 일부분일 뿐"이라며 "중국은 남북 통일 뒤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미리부터 준비하는 것이다, 이 문제는 한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지적했다.
고구려사 연구센터에 대한 긍정·부정 두가지 시각
국내 전문가들은 한국 역시 장기적인 관점에서 대책과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윤명철 동국대학교 교수는 "중국의 현재 움직임은 그들 나름대로 동북아 질서를 구축하는 작업으로 봐야 한다, 단 동북공정으로 그들이 그동안 감춰왔던 패권의도가 예상보다 2~3년 정도 빨리 대중적으로 공개된 것"이라며 "일본도 우경화 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 의식이 더 강화될 것이다, 한국은 중간적인 입장인 한 우리도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한국이 해결해야할 과제는 많다. 일단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 63기가 올해 6월 쑤저우에서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 전체 회의 때 통과되도록 해야한다.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이 중국인데다 이사국이 21개국 밖에 되지않아 중국이 신청한 고구려 유적의 문화유산 등재는 쉽게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지난해 북한의 고구려 고분의 등재가 이뤄지겠느냐는 것이다. 현재로서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러나 지난해 7월 파리에서 열린 회의 때도 애초 쉽게 등재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좌절되고 말았다.
전문가들은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인 외교적 노력을 기울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번 문제는 남북 공조의 좋은 계기와 사례가 될 수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도 "구체적인 내용은 다 공개할 수 없지만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북한이 신청한 고구려 고분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단기적인 과제다. 보다 근본적인 중장기 계획이 필요하다. 지난달 한국고대사학회 등 한국사 관련 17개 단체는 성명을 내고 정부에 고구려사를 비롯한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를 체계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연구센터를 설립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정부는 '고구려사 연구센터' 건립이라는 대책을 내놓았다. 지난해 12월 15일 고건 총리는 국정현안정책조정회의를 열고 국사편찬위원회·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및 관련 학회가 공동 참여하는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만들기로 했다. 정치권에서도 심재권 민주당 의원 등 여야 의원 25명은 '중국의 역사왜곡 중단 촉구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기도 했다.
고구려사 연구센터의 건립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현재 고구려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국내 연구자는 13명 정도로 알려져 있다. 물론 고조선이나 백제·신라사,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고구려사 연구에 참여할 수 있지만 수백명이 달라붙었다는 중국에 비하면 연구인력부터 부족하다.
국내 전문가들을 함께 모아 공동연구를 하고 기초자료부터 차근차근 수집하는 작업을 고구려사 연구센터가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정부는 센터의 구체적인 건립 계획은 수립하지 않은 상태다. 일부에서는 정신문화연구원 산하 기관으로 둘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나 정문연 관계자는 "아직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우리 기관의 산하로 할지 독립기관으로 할지 정해지지도 않았다"며 "총리 지시가 있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세워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런데 벌써 학계 일부에서는 고구려사 연구센터에 대해 논란이 벌어진다. '국책 연구기관의 한계'로 결국 돈만 쓰고 성과는 별로 없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서길수 고구려 연구회회장은 "100억원으로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건립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 건물 짓고 직원 채용하고 나면 대체 고구려 연구 자체에는 얼마나 자금이 투입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자칫하면 정부가 책정한 예산에 대해 나눠먹기식 행태가 벌어질 수 있다, 차라리 정부는 자금만 지원하고 민간 단체들끼리 서로 경쟁시켜 성과에 기초해 지급하는 방식이 올바르다"고 주장했다. 한 학자는 "말썽 많았던 BK21의 재판이 될 수 있다"고까지 지적했다.
이런 의견들은 그동안 정부 주도의 국책 학술 사업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경험에 근거한다. 순수 학술 지원을 위해 추진했던 BK21이 대표적이다. 그같은 전철을 밟지 않도록 치밀한 계획이 필요하다.
"우리도 통일 이후 동북아를 대비해야 한다"
연구센터의 성격도 문제다. 단지 고구려 연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국학'연구기관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존 연구기관으로 정신문화연구원이나 세종연구소 등이 있다. 그러나 정신문화연구원은 근본적으로 원장 자체부터 대개 정권의 논공행상 차원에서 임명되어 왔다. 세종연구소의 경우 정치 중심이다.
최광식 고려대 박물관장은 "고구려사 연구센터를 만든다면 이름에는 '고구려'가 들어있지만 내용은 고조선·발해 등의 역사, 우리 한민족의 영토문제 및 주변 제민족과의 관계사,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문제까지 연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그는 "한 5년정도의 단기 프로젝트로 하면 안된다"며 "통일 이후도 대비할 수 있는 연구소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서길수 고구려연구회 회장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은 전략적 차원의 문제다, 따라서 한국도 중국의 사회과학원이나 대만의 중앙연구원 수준 정도의 연구기관을 설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남북한 사이의 활발한 학술교류도 빠질 수 없다. 단지 고구려 고분군의 세계유산 등재 뿐 아니라 고구려를 비롯한 한국 고고 유적의 발굴 및 조사에 남북한 사이에 공동 작업의 필요성이 강조된다.
한국 고대사 유적, 특히 고구려와 발해 유적은 북한에 월등하게 많이 남아있다. 그런데 북한은 기술적·재정적 문제로 한국 고대사 관련 유적에 대한 체계적인 발굴조사와 정리가 지체되고 있다. 따라서 남한이 남북교류협력기금 등을 이용해 북한과의 공동학술교류나 유물 공동 발굴 조사 등을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은 꽤 설득력이 있다.
북한 사회과학원은 오는 2005년에 새로 발굴한 유물 성과를 바탕으로 고고학 60권, 역사 40권 등 역사학 전서 100권을 발간할 예정으로 알려졌다. 남한이 이런 작업에 기초부터 참여한다면 훨씬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몸놀림 무거운 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민
학계와 정부의 노력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민간단체들의 활동이다. 정부가 외교적 이유로 직접 나서기 힘든 사안에 대해서는 민간단체들이 훨씬 더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다.
지난 5일 '중국의 역사왜곡 대책 민족연대 추진운동본부'(위원장 이돈희)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 한국 주재 중국 대사관 앞에서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시도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동북공정 프로젝트는 졸렬한 역사패권주의의 발로로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작태"라며 "고구려 역사·문화에 대한 약탈행위를 즉시 철회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앞으로 △다른 시민단체와 연대 및 지역별 추진운동 본부 결성 △학술대회 △남북한을 포함한 몽골·중국·일본·러시아 학자들이 참여하는 국제학술대토론회 개최 △'고구려사 지킴이' 웅변대회 개최 △초중고생 역사책 독후감 경연대회 등을 펼치기로 했다.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www.prkorea.com)는 최근 '고구려 부흥 프로젝트-21세기 대한민국 서희 찾기'를 시작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세계 역사학자와 유네스코 세계유산 학자 등 1만3000여명에게 중국의 역사 왜곡의 부당함을 전자우편 등으로 전달하고 우리의 고구려사를 담은 영문 안내책자와 광개토대왕릉비가 새겨진 엽서를 보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민간단체들의 활동은 일반 국민들 사이에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을 광범위하게 불러 일으킬 것이다. 일부에서는 고구려사 연구센터 건립에 정부만 재정적 지원을 할 것이 아니라 일반 국민을 상대로 성금을 모으는 운동도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과 한국의 '동북아 중심국가론'
노무현 정부의 국정 과제 목표 가운데 하나가 '동북아 중심국가'였다. 이를 위해 대통령 직속기구로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위원회가 최근 발간한 <동북아경제중심 추진의 비전과 과제>라는 책자를 통해 동북아 협력(평화촉진을 위한 동북아 SOC건설, 동북아 공동체 형성촉진), 물류중심지 전략추진, 동북아 금융중심 추진, 창조형 국가혁신체제 구축, 전략적 외국인투자 등을 목표로 내세웠다.
애초 동북아 중심 국가론에 대해서 "너무 패권주의적 냄새가 짙다", '중국·일본 등 주변국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는 반론이 있었다. 이에따라 지난해 4월 2일 '동북아 중심국가'가 아닌 '동북아경제중심 추진위원회'가 대통령 직속 기구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한국의 동북아 중심 국가론이 중국의 동북 공정과 일부 상충될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한국의 '동북아경제중심'은 결국 동북아시아에 있어 한국의 중심적 역할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국의 동북공정도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중심지로 동북지역을 규정하면서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장기 전략을 세우고 있다.
북핵 문제 등으로 한국의 동북아 중심 국가론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고 아직 추상적인 목표 나열에 그치고 있는데 비해 중국의 그것은 상당히 구체적이다.
한국 정부의 동북아 중심국가는 국제적인 협력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러나 동북공정의 내용에서 보듯이 중국의 태도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한국 정부가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 단순한 역사 왜곡 문제로만 생각하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북공정은 고구려 도둑질...감정대응 금물"
[기고] 역사학자 이이화씨(고구려역사문화재단 상임대표)
(최근 중국이 이른바 '동북공정'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고구려사를 자국 역사로 편입시키려는 작업을 추진해와 한중간에 '역사전쟁'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이에 민찬 '한국사' 저자로 유명한 역사학자 이이화씨가 이 문제에 대한 글을 보내와 소개한다....편집자 주)
근래 중국에서 고구려를 자기네 지방정권이라는 주장하면서 고구려사를 자기들 역사에 편입하려하고 있다. 이에 한국인들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해 하다가 조금 지나서는 흥분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민족감정과 결부되어 현재 한국인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는 비단 연구자들만이 아니라 시민들과 학생들의 관심도 높아가고 있으며 뒤늦게 정부 당국도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논란이 되고 있는 '동북공정'의 실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1) 동북공정(東北工程) 이전의 고구려사 인식태도
중국은 오랫동안 고구려사를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한국사로 보았다. 그러던 중국 역사학자들이 1994년부터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정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고구려 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므로 소수민족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2000년부터는 고구려사 연구자를 양성하는 사업을 벌여 100여명의 학자가 자료수입 또는 유적 발굴에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고구려의 역사를 국내성을 수도로 정한 시기는 중국사,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에, 평양일대에 보존된 고구려 고분변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신청하였다. 이 때 중국은 심사국의 자격으로 북한의 유적을 돌아보고 관리 소홀과 접근의 어려움을 들어 등재를 보류시키는 데 앞장섰다. 이어 자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보수 발굴하면서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신청하였다.
2) 동북공정의 주요 내용
2002년 2월부터 동북지역의 역사와 현황에 관한 학술작업인 동북공정을 대형 국책사업으로 지정해 고구려 편입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3조여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공정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동북지방은 현재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등 이른바 '동북3성'을 일컫는 지역으로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에 해당한다. 물론 국내성이 있던 집안과 백두산도 이 지역에 들어있다.
동북공정은 기본목적을 고구려와 발해에 관련된 자료의 수집, 유물 유적의 발굴 보존에 두었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먼저 집안현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의 정비사업을 벌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수천 채의 민가를 헐어내고 내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다.
또 요양지방과 심양지방의 고구려 성곽을 수리하고 동경성 등 발해유적에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였다. 이와 함께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 그 근거는 크게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이 중국의 고대역사에 등장하는 고이족과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는 것, 둘째로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朝貢)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이라는 것, 셋째 고구려가 벌인 수당과의 전쟁이 국가와의 전쟁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벌인 통일전쟁이라는 것,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거의 당 나라로 끌려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혈연적 계승이 단절되었다는 것, 다섯째 고구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왕족은 왕씨여서 계승성이 단절되었다는 근거를 제시하였다.
3) 동북공정 추진의 배경
1992년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져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일대로 몰려가 고구려와 발해유적을 찾아갔다. 한국인들은 단순한 관광이나 유적 답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행태를 보였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승용차에 “고구려는 우리 땅” 또는 “백두산은 우리 땅” 따위의 프랑 카드를 걸고 돌아다녔다. 또 많은 제물과 제수를 한국에서 꾸려가서 울긋불긋한 제복을 입고 백두산 천지를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고 제주를 천지에 뿌리기도 하였다.
또 백두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 삼창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하였다. 연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도 거리나 술집에서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면서 통일이 되면 우리가 찾아야 한다고 떠들었다. 연변일대에 1백만명이 넘게 거주하는 조선족이 한국과 연대하여 앞으로 독립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다.
한편 앞으로 한국이 통일되면 중국은 북한지역에 대해 고구려 땅의 영유권을 주장할 명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삼자는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통일에 즈음하여 북한의 주민들이 대량으로 국경을 넘어 연변일대로 이주하여 민족적 갈등을 유발하고 독립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구려 발해의 영토와 간도의 영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이런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4) 고구려 정권의 특징과 후기의 역사인식
고구려의 국가체제가 중앙집권제적 군현제를 골간으로 한 중국의 역대정권과 다른 특징을 들어본다.
첫째 정치제도에서 나타난다. 고구려는 고대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 정치체제를 갖추었으며 황제국을 표방하였다. 그 특징은 국가형성의 초기에 독자적인 관직명에 잘 드러난다.
관직명에서 태대형(太大兄) 등에서 나타나는 형(兄)은 족장세력을 편제하는 관직이었으며 태대사자(太大使者) 등에서 나타나는 사자(使者)는 왕권을 수행하는 관직이었다. 중국에는 없는 관직명이었다.
둘째는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로 북방문화를 수용하였다는 데 또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 곧 부여를 중심으로 옥저 동예 숙신 선비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여러 종족집단을 통합한 최초의 통일국가였다는 점이다.
후기에 와서 중국문화와 정치체제를 수용하면서도 북방 유목민족의 문화와 생활풍습을 토대로 유지 발전하였던 것이다. 또 700여년 동안 국가를 유지하고 그 3분의 2의 기간을 대동강 가의 평양에서 수도를 정하였다.
고려는 분명하게 국명에서 나타나듯,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여 고토 회복전을 폈다. 이런 기본 인식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의 편찬하면서 고구려사를 본기에 편집해 한국사로 규정하였으며 일연도 <삼국유사>를 쓰면서 고구려를 신라 백제와 같은 민족국가로 단정하였다.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의 건국과 그 시조를 찬양하였다고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쓰면서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며 그 계통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 고구려 인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국 초기부터 세종은 평양에 고구려 시조를 모시는 묘사(廟祠)를 새로 짓게 하고 몸소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그 뒤에도 이런 관례는 변함이 없었다.
5) 고구려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논리의 허구
위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측 주장의 다섯 가지 논리의 허구를 지적해보자. 첫째 고이족 고양씨의 후예문제이다. 고이족은 산동지방에 살았던 부족이었으나 고구려 영토로 이동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고양씨(전욱의 호)는 중국 고대사(서기전 2천 5백년)에 제왕으로 등장하는 전설의 인물이다. 중국의 역사학자들도 그 인물의 실체를 인정치 않는다. 고구려 왕실이 고씨 성을 가졌다할지라도 고양씨의 시대와는 2천여년(고구려 건국은 서기전 37년)의 간격이 난다.
둘째, 중국에 조공하였다는 근거도 논리가 옳지 않는다. 중국 제국은 명분을 중시하여 스스로를 천자국이라 표방하고 주변국가에 조공을 하게 하였다. 이를 거절하면 정벌을 단행하였다. 따라서 조공은 명분을 주는 외교 형식이었다.
셋째, 수당과의 전쟁을 통일전쟁으로 보는 주장은 더욱 논리에 어긋난다. 고구려는 요동일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장성을 쌓고 대항하였다. 엄연히 지방정부 차원이 아닌 독립국가로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7백여년을 지탱하였다.
넷째, 고구려 유민들이 거의 당 나라로 끌려가 혈연적 계승이 단절되었다는 주장도 언어도단이다. 그야말로 대다수 유민들은 그 영토 안에 살면서 안동도호부에 저항하였고 뒤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다섯째, 고구려와 고려와는 계승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계승성의 근거를 성이 같은 왕조로 친다면 중국의 역사정권은 하나도 동일한 성을 가진 적이 없다.
고려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250여년이 지났으나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표방하였고 동명왕릉을 시조능으로 받들고 보존하였으며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제2수도로 삼았다. 또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왕족을 받아들이고 발해 역대왕의 왕묘를 세우게 하고 받들었다.
역대 중국의 정권은 주변국가를 끊임없이 복속국으로 만들려 하였다. 이런 의식의 바탕에서 중국의 정사인 <삼국지>에 고구려를 동이전에 포함시켰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정사 부분인 본기(本紀)에 넣지 않고 외전(外傳)에 넣었던 것이다. 이런 기술방식은 <수서> <당서>로 그대로 이어졌다.
또 중국사람들은 고려를 고구려의 후예라고 보았으며 명 나라는 처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이 고구려의 옛땅을 찾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들은 근현대 시기에도 조선사람을 고구려 후예로 보았다. 그들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보고 “망꿔노”(亡國奴)라는 말과 함께 “꺼우리 팡스”(高句麗幇)라고 욕질을 하였던 것이다.
6) 현재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것은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구려를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고구려의 유적을 인류 공유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아 보존 관리한다면 보편사적 관점에서 나무랄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대응논리는 이런 관점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세 가지 정도 당면과제가 놓여있다.
첫째, 철저한 고구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둘째, 고구려 정신과 기상을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국민 차원의 선양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셋째, 현재적 관점에서 고구려사가 우리의 역사임을 밝히고 그 왜곡문제에 접근해 한다. 그러나 옛 영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미래 노리는 중국,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
[박선영 교수 기고]고구려 연구재단으로 동북공정 대응 한계있다
(오는 3월1일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기 위한 '고구려 연구재단'이 정식 출범한다. 그러나 이 재단이 과연 동북공정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 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동북공정이 동북아 지역에서 중국의 패권을 확보하려는 현실 전략적 목적하에 진행되고 있는데 비해 고구려연구재단은 한국 고대사 중심의 역사 연구에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박선영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현 고구려연구재단의 문제점과 발전방향에 대해 글을 보내와 소개한다....편집자 주)
국민의 성원 하에 발족될 고구려연구재단
범국민적 관심과 참여로 2004년 3월 1일 드디어 고구려연구재단(이하 '재단')이 발족될 수 있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환영하는 바다.
우리는 앞으로 재단이 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관심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며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국가차원에서 동북프로젝트(동북공정)의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고 전략적으로 재단 설립을 추진하였더라면 더 바랄 것 없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구려사 편입 문제가 부각되면서 고대사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재단 설립까지 오게 되고 보니 재단에 담을 내용과 형식에 많은 논란이 있는 상황이다.
재단이 과연 동북프로젝트에 제대로 부합하는 지향성을 지니고 있는지, 목적에 부합하는 조직으로 편제되었는지, 소수의 연구팀이 최대한 효과를 낼 수 있을 정도의 업무 내용이 정비되었는지 등등. 어쨌든 기왕에 국민적 신망을 얻고 출범하는 재단이니까 앞으로 냉정하게 대처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기 때문에 여유를 갖고 모든 것이 제대로 정비되기를 기다리고 있지만 재단 출범이 중국의 동북프로젝트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몇 가지 발전적 제언을 하고자 한다.
동북프로젝트의 필연성
중국은 오랜 준비를 거쳐 2002년 2월부터 향후 5년간의 동북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시행해 오고 있다. 5년간 실시될 내용의 전모가 드러나야 명확하게 중국이 의도하고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겠지만 중국이 현재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밝힌 의도는 우연성과 필연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이 말하는 우연성은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중교류가 잦아지면서 한국인의 고토의식 표출로 인한 사소한 시비들이 포함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동북프로젝트를 실시하게 된 필연성인데 이는 최근 동북을 둘러싼 러시아, 북한, 한국, 몽골, 일본, 미국과 중국 사이의 쌍방관계나 다변관계에 큰 변화가 초래되고 있기 때문이다.
동북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가 지속적으로 상승됨에 따라 동북은 세계가 주목하는 중요한 지역으로 부각되었고 동북지역은 동북아 중심위치에 처하게 됨으로써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북의 전략적 국면은 동북아 전체 전략적 국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고 동북아 전략 국면은 또 세계 전략적 국면 및 21세기 세계 전략적 국면의 파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동북은 세계적으로 봐도 중동과 더불어 세계의 또 다른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이와 같이 중요한 동북지역에 대한 중국의 패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철저하게 중국의 역사로서 재정비하는 작업이 필요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중국이 왜 동북프로젝트를 시행하게 되었고 그것의 지향하는 바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중국이 말하는 필연성에 의해 동북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면 이는 분명히 동북의 현재와 미래에 닥칠 문제를 위한 대비책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비책은 현재와 장래에 대한 다방면의 전략적 접근이 중요하고 이를 뒷받침할 역사적 정당성을 위해서 고대사의 재정비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동북프로젝트의 추진방향에서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동북프로젝트의 지향성
동북프로젝트는 기초연구, 응용연구, 당안자료과제(역사사료), 번역과제로 나뉘어 있다. 1차로 공개 선정된 27개 연구과제중 12개 과제가 한중변경문제(간도문제)와 직간접적으로 관계있는 것이다.
2차로 공개 선정된 15개 과제 중 7개 과제가 역시 한중변경문제(간도문제)와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2개 과제가 동북지역의 중러변경문제 및 변경이론 문제에 대한 고찰이다.
즉 15개 과제 중 9개 과제가 변경문제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8개의 비공개 응용연구 방향이 무엇일지는 짐작할만한 것이다. 더욱 명확한 것은 역사 사료 정리인데 북경 제1당안관(당안관은 중국의 정부기록보존소), 요녕·길림· 흑룡강성 당안관이 참여하여 전부 동북 변경 역사 자료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 당안관은 북경에 명청 시대 자료가 있고 나머지 당안관은 근현대 자료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또한 번역과제로 고대사를 포함하여 한중, 중러 변경 문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표면적으로 드러난 동북프로젝트의 중점이 어디에 있는지는 충분히 방향이 보일 것이다.
반만년의 동북 역사를 재정리하는데 현재까지 보여준 위의 연구방향과 내용으로 봐도 많은 부분이 몇 백 년에 불과한 근현대에 치중되어 있으며, 중러변경문제도 있지만 특히 한중 변경연구에 치중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천명하는 동북프로젝트의 필연성과 그 내용 및 동북의 경제적, 전략적 중요성과 근현대 변경문제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변동의 핵' 동북
평화로운 시대의 동북은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변경에 불과한 지역이지만 주변국들이 관심을 갖게 되면 동북은 '아시아의 전쟁터', '충돌의 요람', '세계위험지대'라고 불리는 '변동의 핵'으로서 역할을 하게 된다.
근현대의 동아시아 및 세계질서를 좌지우지 할 정도의 중요한 전쟁으로 꼽히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발발도 동북지역과 다양한 연관성이 있으며 한국전쟁 그리고 21세기 역사전쟁도 동북과 관계가 있다.
동북은 전쟁 발발과 확대의 직간접적인 요소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변동의 핵인 동북은 물산이 풍부한 경제적 보고, 산업자원의 보고로 불리는 곳이고 동아시아 각국을 잇는 매개체로서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 곳이다.
이미 중국은 74억 달러의 동북 투자를 공언하였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연결하는 철도를 연내 착공하여 기존 11개 철도와 연결함으로써 교통상 으로도 대대적인 정비를 하고 있다. 미국은 북한의 민주화와 탈북자 문제 등 인권 문제를 고려한다는 차원에서 2억 달러 이상을 쏟아 붓기로 결정하였다.
미 국무장관 John Hay는 “미래 세계의 평화는 중국에 달려있다. 따라서 누가 중국을 이해하면…곧 미래 500년 세계 정치의 열쇠를 장악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북에 대한 관심 집중은 동북을 장악하는 자가 강국이 되었던 역사적인 경험을 되살리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현재 모든 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중국이 동북프로젝트를 통해 더욱 동북지역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인 근거를 명확히 해두려고 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 즉 조선족 사회, 한반도 정세 변화에 따른 탈북자 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는데 특히 중국이 한중변경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는 이유는 역사적으로 분쟁의 여지가 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중변계문제와 간도협약의 무효
1712년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이라고 명시한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양국의 경계를 삼았다. 그러나 소위 조선인의 ‘월경’ 문제로 분쟁이 일게 되자 1885년과 1887년 2차례 회담을 벌였으나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1905년 일본이 불법적으로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후 일본의 이익을 위해 1909년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를 청조에 귀속시켰다.
그러나 간도협약은 크게 2가지 측면에서 무효다. 하나는 1905년 을사조약이 무효이기 때문에 이를 기반으로 한 1909년의 조약이 무효다. 또 하나는 일본이 제국주의 힘을 이용하여 맺은 각종 조약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효로 돌아갔으며 각종 국제법적인 측면에서도 마땅히 무효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간도협약만 유효한 것처럼 중국이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상의 역사적인 연유로 분쟁의 여지가 있는 간도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서 중국은 철저하게 중국의 변경의식 및 변경 통치 등의 연구를 통해 이 지역이 자고이래로 중국의 영토임을 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중국경분쟁의 재연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동북지역에 누구도 어떠한 이유를 달아 근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포석이기도 하다. 따라서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한 변경연구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되는 것이고 현재와 미래의 변경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고대사도 재정비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의 방향과 동북프로젝트의 괴리
(1) 고구려연구재단이 이해하는 목적과 사업방향의 문제점
재단이 이해하는 동북프로젝트의 목적은 중국이 동북 변방의 정치사회적 안정을 목표로 동북 장악의 역사적 정당성을 확보하여 조선족 통제 및 조선족의 한민족 의식을 제거하여 중국 소수민족의 분열을 원천봉쇄하며 북한 붕괴 및 혼란 시 과거 역사 연고를 근거로 정치, 군사적 개입 근거를 확보하고 통일한국시대의 국경선 분쟁을 원천 차단함으로서 동북아 국제질서를 중국 중심으로 재편한다는 생각이다. 이는 위에서 설명한 동북프로젝트의 면모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정작 재단이 추구하고자 하는 사업의 핵심은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더불어 고대사 왜곡에 체계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다. 이는 재단의 설립 목적에서도 명백하게 “고구려사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 나아가 동아시아 역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재단 사업의 필요성, 사업의 범위 등에서도 고대사 왜곡의 중요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니까 중심은 고구려사(고대사)가 될 수밖에 없다.
아무리 뒤집어서 생각해 보아도 동북프로젝트의 목적과 재단의 대응방향은 괴리가 있지 않는가? 현재와 미래의 필요에 의해 근현대 연구가 중점이 되고 더불어 과거도 연구하고 있는 동북프로젝트에 대해 과거에 중심을 두고 현재와 미래의 문제는 거칠게 표현하여 '심심풀이 땅콩'이나 구색을 갖추는 정도의 ‘악세사리’의 역할을 하게 하는 재단이 된다면 명분과 실리 모두를 추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까?
(2) 고구려연구재단 조직상의 문제
먼저 고구려역사연구팀 7명, 고구려문화연구팀 7명, 고조선사 연구팀 6명, 발해사 연구팀 5명, 동북아관계사팀 7명, 민족문제연구팀 6명의 편제로 동북프로젝트의 목적에 부합하는 연구가 제대로 창출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있을까?
재단의 조직도에 의하면 중국이 동북프로젝트의 70% 이상을 쏟아 붓는 변경문제는 기껏해야 전문 연구인력 1명 정도가 배정될 수 있을 정도의 상황이다.
그 외에 공모를 통한 공동연구나 단독연구에 1~2과제 정도 배정되어 있다. 근현대 변경문제를 다룰 수 있는 곳이 동북아관계사 연구팀인데 총 7명의 연구 인력이 고려-근대 한중관계사, 고려-근대 한일관계사, 고려 이후 영역과 정책 문제 연구, 해당 분야 (번역) 자료집, 사료집, 홍보책자 저술까지 업무로 배정되어 있다.
아무리 잘 배분을 한다 해도 1명 정도가 한 분야를 담당해야 하는데 예를 들어 1명이 고려-근대 한중관계사의 수많은 내용 중 어떠한 방향을 집중적으로 연구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동북프로젝트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변경문제는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어딘가에서 적절하게 해결되는 것인가?
(3) 고구려연구재단 내용상의 문제
재단이 설립되기 까지 아무래도 역사문제가 부각되었고 역사연구를 위해 설립되는 재단이다 보니 대부분이 역사 일색이다. 그러나 재단은 고대사 연구자들만의 기득권을 행사하는 곳이 되어서도 안 되고 또 역사연구자만의 전유물이 되어서도 안 된다.
전체적인 방향과 동북프로젝트의 목적이 고대사 왜곡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고대사 연구자들의 재단 창립에 노력했던 기득권이 보호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더욱더 역사연구자만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다. 현재와 미래를 위해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연구가 필요한 경우 더욱더 다양한 학제간 연구가 절실하게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4년도 사업계획을 보면 순수역사 연구에 치중되어 있다.
이는 재단의 방향을 순수 역사연구에 집중할 것이냐 아니면 중국의 의도에 맞대응하는 방향의 전략을 포함한 연구를 할 것인가가 분명하게 결정되어야지 정리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연차별 중점 연구 과제를 보면 1차년도에 고구려 일색이다. 2차년도에 고조선을 포함한 고대사, 3차년도에 고구려와 발해 및 고려의 계승문제다. 재단의 수년간 중점연구방향에서 벌써 많은 것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재단과 동북프로젝트의 인식 차이가 너무도 확연하다면 재단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는 동북프로젝트 목적에 부합하는 재단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가 주저된다. 재단에 묻고 싶다.
수년간의 중점연구방향을 통해 재단이 인식하는 동북프로젝트의 목적에 부합하는 전략적인 연구 성과 및 역사 왜곡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방안이 수립될 수 있는지? 만약 재단으로부터 확신 찬 대답을 들을 수 있다면 비록 중국의 방향과는 다르게 가고 있지만 우리는 역으로 고대사를 연구하여 첨예하게 신경전을 벌일 수 있는 근현대 변경문제에 관한 전략까지 수립하게 되므로 그것 또한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재단이 그 정도의 마스터 플랜이 있는 상태에서 고대사에 편중된 연구라면 국민들도 수긍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지적할 문제는 중국의 한국사 왜곡으로 비롯하여 재단 발족까지 이어져왔는데 그러한 재단에 중국사 전문가 및 근현대 연구자가 배제되어 있는 점이다. 재단의 향후 추진 방향은 동북프로젝트의 목적과 방향을 충분히 직시하여 국가의 장기적인 비전하에 전략적으로 연구하고 접근하는 재단이어야 한다.
해법 하나
중국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연구 인력이 열악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효과적인 연구수행 및 대처가 가능한 것인가? 고구려 역사의 중요성 부각으로 시작되어 고대사 연구에 집중되어 있는 재단의 기금 및 조직 편제 등을 대폭 확대 혹은 재조정하여 동북프로젝트의 목적과 사업방향에 부합되도록 종합적인 연구기관의 위상으로 정립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참에 중국의 사회과학원이나 대만의 중앙연구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의 권위 있는 연구기관으로 태어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기관에서 필요한 경우 동북프로젝트와 같은 거대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너무도 과대한 요구라고 한다면 적어도 동북프로젝트 맞대응에 걸 맞는 이름과 내용들로 충실하게 채워져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고구려사’로 대변되는 재단 방향과 목적의 당위성 등이 재조정되어야 하고 심지어 고대사 연구 중심의 편제도 바뀌어야 할 것이다. 중국이 그토록 중시하는 변경문제는 국가의 존립기반인 영토와 국민의 생활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문 연구팀이 체계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지 산발적인 몇 개 연구 성과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전혀 아니다. 중국이 비공개 응용연구 및 변경과 관련된 1차 사료 정리까지 동원 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을까?
또 다른 해법
많은 진통을 겪으면서 출범하는 재단에서 동북프로젝트와 맞대응 할 정도의 모든 일을 할 수 없다면 또 하나의 방법으로 역할을 분명히 구분하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재단이 고대사 연구의 중요성과 그 의미를 부각하고자 한다면 그야말로 고대사 연구만 확실하게 하고 근현대 변경문제는 국가기관인 국사편찬위원회에 충분한 기금을 할당하여 국가가 장기적이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하며 전문 연구팀을 편성하여 영토 및 국경문제 등에 대해 연구할 수 있도록 하여야 마땅할 것이다.
적은 연구 인력으로 효과적인 연구수행 방법을 고안하여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않으면 그야말로 중국이 모든 것을 정비한 후에 비로소 뒷북을 치며 한탄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민족문제와 관련하여 그동안 연구가 되었다면 민족문제 등에 관하여 기금을 배분하거나 새롭게 편성하여 삼자가 역할분담을 통해 효율적으로 연구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나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오랜 시간을 들여 축적해 온 수많은 자료 및 연구 인력을 활용하여 재정비 하고 전문 연구팀이 집중 연구한다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자료 수집부터 모든 것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재단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접근하여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본다. 또 각 기관의 특성을 발휘하여 연구 성과 면에서도 집중도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고구려연구재단X국사편찬위원회X정신문화연구원의 3박자 호흡
재단 이사에 국사편찬위원장과 정신문화연구원장이 당연직으로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3자의 효율적인 역할분담으로 국력의 낭비를 줄이고 적은 연구 인력으로 많은 연구 성과를 내는데 의미가 있을 것이다.
또 각 기간의 연구 성과를 모아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재정리하는데도 삼자의 긴밀한 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각 기관마다 추구하는 목적이 달라 통일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지만 재단이 조그만 구멍 가게식 잡화상처럼 운영하면서 총 38명의 연구 인력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또 그것이 효율적이지도 않다면 기존의 기관을 활용하는 방법도 우리의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효과를 극대화 하는 좋은 방법이 아닐까?
물론 재단은 유관기관과의 협동연구 및 상설협의체를 구성해 대응방안을 개발한다고 하고 있다. 전시성 행정이 아닌 진정하게 의미 있는 역할분담이라면 더욱더 철저하고 효율적인 역할분담이 필요하지 않을까? 재단이 국가의 각종 국책 민간 기관들과 원만하게 역할분담을 할 수 있어서 충분한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총괄하고 기획하는 정도의 역할만 담당해도 좋을 것이다. 문제는 고대사 중심의 기본에다 국민의 요구를 반영한다고 다양한 의견 수렴은 하였으나 여전히 엇박자처럼 비춰지는 것은 왜일까?
국민의 염원은 어디에?
재단 발족을 지켜보는 국민은 바라는 것이 많다. 재단의 무궁한 발전과 도약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재단이 추진하는 방향이 국민의 염원에 부합되길 간절히 원하고 있다.
그렇다면 둘 중의 하나는 분명히 해 주어야 할 것이다. 먼저 국민이 원하는 바대로 동북프로젝트에 맞대응 할 수 있는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재단, 국가의 장기적인 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정도의 면모를 분명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동북프로젝트의 핵심을 정확히 파악하여 현재의 방향을 재조정하며 국민의 요구를 충분히 수용하여 명칭을 포함한 재단이 추구할 내용 및 조직 편제 등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현실적으로 힘들다면 국사편찬위원회나 정신문화연구원과의 긴밀한 상호협조 속에서 국력을 낭비하지 않고 그동안 쌓아온 자료와 연구 인력을 활용하여 더욱 더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국익과 직결되는 문제이고 국가의 장기적인 전략으로 접근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없는 것이 없을 정도의 세련된 대형 마트가 되던가 아니면 고도의 전문성을 제대로 갖춘 전문 샵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프랜차이즈 총본부 같은 기획 조정의 역할을 하여야 할 것이다. 기억해야 할 것은 현재까지 드러난 동북프로젝트의 핵심은 국가차원에서 장기적인 전략을 갖고 접근해야 할 근현대 변경연구에 집중되어 있다.
변경연구를 철저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고대사의 재정비는 매우 중요하다. 재단의 고대사 중심 연구는 그런 면에서 충분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동북프로젝트는 중국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중심의 한시적 프로젝트에 불과하다. 따라서 표면적으로 보아 동북프로젝트와 재단을 등치시키는 것은 맞지 않다.
비록 동북프로젝트로 인해 재단 설립까지 이루어졌지만 재단이 동북프로젝트만을 위한 한시적인 것을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원견을 갖고 장기적인 구상을 하여야 할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국민은 여유를 갖고 기다리는지도 모른다.
동북아 허브를 구상하는 참여정부가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되는 동북의 위상은 도외시한 채 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현안이 아니라고 여기어 안이하게 대처하는 청와대와 국가정보원은 지금 세계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가를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재단이 더욱더 발전하기 위해 우리의 지혜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점이다.
'간도' 영토논쟁, 본격 시작되나
외통부, 국감자료서 "간도협약은 무효" 명기했다 뒤늦게 삭제
우리 정부가 1909년 중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간도 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을 정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 정부가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음이 드러난 것은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이다.
중국이 지난 2002년부터 동북공정을 시작한 핵심 목적이 결국 간도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올 만큼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었다.
13일자 <조선일보>에 따르면, 외교통상부가 국회에 제출한 국정감사자료 7권 186쪽 '1909년 청나라와 일본의 간도협약' 내용 마지막에 "우리 정부는 1905년 우리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조약이 강박에 의해 체결된 무효조약인 만큼, 이의 연장선상에서 일본이 우리의 의사와 무관하게 체결한 1909년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입장을 견지함"으로 돼있다.
지난 9월3일 열린우리당 김원웅 의원을 비롯한 여야의원 59명이 간도협약이 원천무효라는 내용의 결의안을 국회에 제출하는 등 비 정부차원에서의 주장은 많았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이렇게 공식 입장을 밝힌 것은 처음이다.
외교통상부는 국감 자료를 배포했다가 중국과의 외교마찰을 우려해 지난 12일 거둬들였다. 대신 새로 배포한 자료에는 '간도협약은 무효'라는 부분을 삭제하고 "간도문제는 북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는 아주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서, 신중히 다뤄나가야 할 문제"라는 입장만 남겨뒀다고 <조선일보>는 보도했다.
간도협약이 무효라면 우리 정부의 공식입장은 최소한 백두산과 두만강 북쪽,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 지역이 한국의 영토라는 게 된다.
최근 국내 학계에서는 북한 신의주를 마주보고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단둥(丹東), 이 곳에서 서북쪽으로 50㎞ 지점에 있는 펑황(鳳凰. 고구려의 오골성이 있는 곳) 등 랴오닝성 선양 및 신빈 이남을 서간도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따라서 국감자료에서 드러난 한국 정부의 입장이라면 현재 남 만주 일대가 한국의 영토라는 인식이 가능하다.
"한국정부가 이런 입장 밝힌 것은 해방 이후 처음"
간도협약의 무효화 주장은 국내에서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지난 1995년 10월20일 김원웅(당시 민주당 소속) 의원은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정부는 간도협약 무효선언을 하고 그 땅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총리의 의견은 무언인가"라고 물었다. 국회차원에서 간도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이어 지난 16대 국회에서도 여야의원 19명이 간도협약 무효화 결의안을 제출했다. 그러나 임기 말이어서 국회가 폐회되면서 자동 폐기됐다. 그러다 지난 9월3일 여야의원 59명이 다시 결의안을 제출했다.
지난 9월말 <오마이뉴스>와 만난 김원웅 의원은 "국회에서 결의안이 통과되기는 어렵겠지만 최소한 100명 이상의 찬성을 얻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영토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 특히 남북 통일 이후를 생각해서라도 지금 쟁점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는 백산학회가 꾸준히 간도문제를 제기해왔다. 또 지난 6월에는 간도학회가, 7월에는 '간도 되찾기 국민운동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연세대학교 동서문제연구소 김우준 교수는 "한국 정부가 이렇게 간도협약의 무효와 원칙을 밝힌 것은 1945년 해방이후 처음"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외교부가 국감자료를 배포했다가 나중에 수거했지만 의미가 남다르다"며 "새로 배포한 자료에서 '간도문제는 북한을 포함한 여러 나라가 관련돼 있는 아주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로서, 신중히 다뤄나가야 할 문제'라고 언급한 것도 상당한 진전"이라고 평가했다.
이전에 한국 정부는 간도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북공정 핵심은 간도... 중국 반응 관심
이제 중국 정부의 반응이 상당한 관심거리다.
현재 외교가에서는 지난 8월 방한했더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의 행보에 대해 민감한 해석이 나오고 있다. 당시 우 부부장은 고구려사 왜곡과 관련 한국과 5개항의 구두합의를 했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우 부부장이 "남북한 통일 이후에도 절대 간도 문제를 언급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국이 할 것과 이를 문서로 확인해줄 것을 요구했다는 해석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 정부는 "간도문제는 비 정부차원에서 언급하는 것"이라며 중국 쪽 요구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당시 구두양해에 대해 "아무런 구속력이 없는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그러나 다른 쪽에서는 "우다웨이 외교부 부부장이 간도문제를 들고나왔다면 이 문제에 대해 한국이 서면합의를 해주지 않은 것은 잘한 일"이라는 반대의 평가를 했다.
지난 9월에 만난 한 중국 학자는 "지난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간도협약 무효화 얘기가 국회에서 나오자 중국 정부 내부는 벌집쑤신 듯했다"며 "특히 군부에서는 '한국이 전쟁하자는 얘기'냐며 크게 반발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중국변강사지연구중심(www.chinaborderland.com)에 공개된 동북공정의 연구과제를 봐도 중·조(中·朝) 관계사연구, 중국 동북변경 및 러시아 원동지구의 정치·경제 관계사 연구, 동북변경의 사회안전 전략연구, 조선반도 형세 변화 및 이의 동북지역 안정에 미치는 영향 연구 등 이다.
연구과제에 고대중국 영토 연구, 동북 지방사 연구, 동북민족사연구, 고조선·고구려·발해사 연구 등이 있지만 이것도 결국은 영토문제에 있어 중국 쪽의 논리를 뒷받침하기위한 연구다. 영토문제는 결국 간도문제다.
미래 노리는 중국, 과거 집착하는 한국
[분석] 통일한국과 '동북 공정', 그리고 간도땅
(이 기사는 연초에 중국의 '동북공정'과 간도 문제를 집중 보도해온 <경향신문>의 자매 시사주간지 <뉴스메이커> 소속 윤호우 기자에게 청탁해 7월 21일자로 게재했던 것을 독자여러분들의 이해를 위해 다시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간도문제를 연구하는 한 연구학자는 지난 봄 중국 연변의 한 조선족 대학교수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제자가 한·중 국경문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준비하고 있으니 자료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동북공정의 연구 과제로 선정될 것이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5년에 걸쳐 진행되는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적이 어디일까? 단순히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에 넣기 위해 시작한 것일까.
중국은 이달초 고구려 유적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킨 후 외교부 공식 홈페이지에서 한국 역사 중 고구려 부분을 삭제하고 중국 관영언론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소개하는 등 본격적인 행보에 나섰다. 순수한 학문 연구라는 선(線)을 이미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중심으로 연구과제가 선정된 동북공정에서는 한·중 변경문제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차로 공개선정된 27개 연구과제 중 13개 과제가 한·중 변경문제와 관련이 있다. 2차로 선정된 15개 과제 중에는 7개 과제가 관련이 있다. 이중 '국제법과 한·중 변경 논쟁 문제'같은 연구과제는 직접적으로 국경문제를 다루고 있다.
미래를 노리는 중국,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
"간도 관련자료 본격 수집 나설 것"
간도학회, 7월 24일 첫 모임 가져
"과거 청산없는 한중수교는 결국 동북공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더이상 간도 영유권의 회복을 늦출 수 없습니다. 정부가 이 일을 하지 못한다면 국민들이 나서야 합니다."
간도학회 발기문에 나타난 글이다. 동북공정을 계기로 간도문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게 될 간도학회가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다. 간도학회는 오는 7월 24일 첫 모임을 갖는다.
간도 문제를 연구해오던 사학자, 국제법학자, 정치학자들은 6월 4일 간도학회 준비위를 구성하고 한국간도학회를 출범시켰다. 간도학회 회원들은 동북공정의 핵심목표는 간도영유권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1966년 창립된 이후 간도 문제를 포함해 만주지역에 대한 역사적 문제를 다뤄오던 백산학회는 간도영유권 문제를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간도학회를 발족시켰다고 밝히고 있다. 백산학회 육낙현 총무는 "간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일단 관련 자료 수집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간도가 우리땅임을 밝힐 수 있는 해외자료와 지도 수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간도학회의 정식 발족식은 9월에 열릴 예정이다. 간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반인들도 학회 회원으로 참여할 수 있다.
(간도학회 전화 02-2268-8668)
최근 발간된 <고구려는 중국사인가>라는 책에서 박선영 포항공대 교수(중국 근현대사)는 간도문제를 언급하며 '미래를 노리는 중국, 과거에 집착하는 한국'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이 제목은 고구려사의 중국사 편입을 두고 한국과 중국 간에 벌어지고 있는 역사 논쟁의 한 단면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단순히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간도를 둘러싼 동북아시아 향후 질서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동북이란 용어 자체도 옛 만주지역으로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요녕성·길림성·흑룡강성을 일컫는다. 한국에서는 간도지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문가들은 한반도의 통일 가능성이 높아지자 중국이 영유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이곳에 대해 본격적인 준비 작업에 나선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인천대 법학과 노영돈 교수(국제법)는 "동북공정의 궁극적인 목적은 통일 이후 간도 영유권 제기를 근원적으로 없애려는데 있다"고 말했다.
중국이 영유권 분쟁 문제로 두려워 하는 간도문제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간도라는 명칭은 '사이섬'에서 유래된다.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운뒤 텅 비어버린 이 곳은 양쪽에서 들어가지 않도록 설정한 봉금지대였다. 하지만 조선후기 평안도와 함경도 유민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몰래 넘어가 이곳을 개척했다. 강 사이의 섬으로 간다는 핑계를 댔지만 사실은 목숨을 걸고 강을 넘어간 것이다.
이 당시 청의 강희제 때 중국에서 제작된 당빌지도(1737년 제작)와 황여전람도(1718년 제작)에 의하면 조선과 청의 경계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에 있었다. 특히 당빌지도에는 압록강 너머에 '평안'이라는 명칭이 적혀있다.
오랫동안 간도문제를 연구해온 김득황 박사는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의 경계선을 '레지 선'으로 명명했다. 전문가들은 고구려와 발해 이후 중국땅으로 여겨져 왔지만 실제로는 이곳이 조선땅으로 여겨져 왔다고 주장한다.
영토에 관심을 쏟았던 강희제는 1712년(숙종 38년) 목극등이라는 관리를 보냈다. 청은 백두산(중국명 장백산)을 선조가 태어난 영산으로 여기고 이 지역을 확보하려고 했다. 강압적 자세로 나온 청은 백두산에 정계비를 세워 양국의 경계선을 확정했다.
비문에는 '서위압록 동위토문'(서쪽은 압록강으로, 동쪽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한다)이라고 씌어 있다. 양국은 경계선을 설정하기 위해 정계비를 주변으로 압록강과 토문강 사이를 잇는 나무와 돌 울타리를 만들었다.
조-청 경계선, 토문강
하지만 이후 '토문강'이라는 명칭이 논란이 됐다. 1880년대경 청은 함경도 유민들이 급격하게 늘어나자 국경선은 두만강이라면서 두만강 이북의 유민들에게 이남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조선에서는 정계비에 적힌 토문강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상류인 토문강임을 주장했다.
당시 중국의 고지도에서 상당 부분이 토문강이 백두산에서 만주쪽으로 흘러들어가는 지류임을 표시하고 있다. 김득황 박사는 "정계비에 나타난 분수령의 의미를 볼때 백두산 정계비에 연결된 강은 압록강과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 뿐이며, 두만강은 이 인근에 있는 강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정계비에 따르면, 압록강이 출발하는 백두산에서 바로 윗쪽으로 토문강이 흘러 송화강에 이르는 만주지역이 조선 땅이 되는 셈이다. 지금은 조선족이 자치주를 이루고 있는 연변자치주 지역이 대부분 이 곳에 속한다.
1885년(고종 22년) 을유감계담판(국경회담)과 1887년(고종 24년) 정해감계담판을 통해 양측은 국경협상을 벌인다. 당시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의 군대가 서울에 주둔하면서 청은 강압적으로 압록강-두만강 국경을 확정지으려 했다. 조선측 대표였던 이중하 감계사는 '내 목을 자를 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양보하지 않자 협상은 끝내 결렬되고 만다.
경인교육대 강석화 교수(조선후기사)는 "국가간의 국경회담에서 일단 영토에 관해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게 이중하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고 평가했다. 타협점을 찾지 못한 이때의 회담 덕택으로 간도의 영토 문제가 아직도 '분쟁 지역'으로 유효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1897년 대한제국이 성립된 후 우리나라에서는 간도영유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다. 이범윤을 간도관리사로 파견, 이 지역의 주민들을 직접 관리하게 한 것이다. 외교권을 빼앗긴 1905년 을사조약으로 간도에 대한 권리는 일본으로 넘어가게 된다.
일본은 만주로 진출하기 위해 맨처음 간도는 한국땅이라는 논리를 개발한다. 하지만 만주에서의 철도부설권과 탄광채굴권 등을 얻는 조건으로 1909년 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청에 넘겨준다. 대한제국 당시 두만강 너머에 한국과 청나라간 경계선이 그어져 있었지만 이때 이후 양국 경계선은 두만강으로 고착되고 만다.
일제 이후 양국 경계선 두만강으로 고착
1945년 광복을 거치면서 일제가 제국주의적 야욕으로 체결한 모든 조약이 무효화됐지만 간도협약은 한반도의 분단 때문에 아직도 한국과 중국의 경계선을 가르는 근거가 되고 있다.
국제법 학자들은 을사조약이 무효화된 만큼 이를 통해 외교권을 빼앗은 일본이 일방적으로 체결한 간도협약도 무효라고 주장한다. 노영돈 교수는 "간도협약은 중국의 간도 점유 사실을 입증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면서 "따라서 간도영유권 문제는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분쟁상태에 있다"고 강조했다.
간도영유권 분쟁의 또 하나의 변수는 북한과 중국이 1962년 맺은 '조·중 변계조약'이다. 백두산 천지를 양쪽에서 나누고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이 조약은 아직 전문이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비밀조약이다.
간도연구가인 이일걸 박사(정치학)는 "비밀조약으로 국제적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지 못하는데다 동·서독의 예처럼 통일 때 이 조약을 승계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담으면 된다"고 주장했다. 독일통일 때 독일은 조약승계에 대한 문제를 다뤘다.
이 박사는 "중국이 동북공정을 추진해야 하는 이유가 통일 후 간도 문제에 있는 것처럼, 한국도 통일을 대비해 간도영유권에 대한 연구를 미리 해둬야 한다"고 밝혔다.
간도영유권 주장과 관련해 국내 학계 일부에서는 글로벌 시대에 있어 '너무 국수적인 시각'이라는 비판도 하고 있다. 이 박사는 "흔히 간도를 언급하면 옛날 고구려땅을 어떻게 찾느냐며 국수주의자로 몰아붙이지만, 간도영유권은 고구려라는 아주 먼 옛날로 소급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조선 후기 우리 선조가 일군 땅을 찾자는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는 "중화사상은 더 국수적이고 패권주의적이며, 간도영유권 주장은 우리가 당연히 찾아야 할 권리를 찾는 것 뿐"이라고 주장했다.
"내 목을 자를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
청나라와 맞서 국경 지켜낸 토문감계사 이중하는 누구?
"내 목을 자를지언정 한 치의 땅도 내놓을 수 없다."
19세기말 토문감계사(오늘날 국경회담 대표자) 이중하는 두만강 국경선을 확정시켜 간도땅을 차지하려는 청나라의 강압적인 태도에 목숨을 걸고 맞섰다. 그러나 그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역사를 거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됐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한 일간신문 칼럼에서 '이미 나라의 지배 밖으로 떠난 유민들의 터전을 지켜주기 위하여 목을 내걸고 항쟁한' 이중하를 '의인'이라 평했다. 함경도 안변부사였던 이중하는 1885년 조정으로부터 감계사로 임명받았다.
청은 당시 두만강 이북 지역에 조선 유민들이 늘어나자 이들에게 이남으로 내려가든지 청나라 백성이 되든지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청은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확정하기 위해 외교문서를 보내 감계담판(국경회담)을 하자고 나섰다.
이중하는 1712년 백두산 정계비에 나타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라 북쪽으로 흘러가는 송화강의 지류임을 끝까지 주장했다. 이중하는 청 측 대표 덕옥, 가원계, 진영 등과 함께 직접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하면서 논란이 된 강의 물줄기를 조사했다.
정계비 인근에는 압록강과 송화강 지류의 물줄기가 위치해 있었고 정계비와 송화강 지류 사이에는 문헌에 나타난 대로 나무, 돌 울타리가 쳐져 있었다. 이 답사로 청나라 측은 자신들의 주장이 먹혀들어가지 않게됐다. 아들 이범세가 집필한 이중하의 행장에 의하면 이중하가 목숨까지 위태로운 처지에 있었음을 알게해주는 대목이 있다.
답사 도중 청의 가원계가 복통으로 신음하는 것을 보고 이중하는 미리 준비해둔 환약을 써보라고 주었다. 그러나 약을 먹은 후 복통이 더욱 심해지자 청측 대표는 자기를 죽이려고 독약을 준 것이라고 흉기로 이중하를 위협했다. 이때 이중하는 청측 대표 앞에서 남은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다음날 아침 복통이 가라앉자 청 측 대표는 정중하게 사과했다고 한다.
2년 후 다시 청나라는 감계담판을 열자고 했다. 이때에도 감계사로 임명받은 이중하는 정해감계담판에서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로 청측을 요구를 묵살했다. 당시 이중하는 협상 내용을 상세하게 일기로 남겼다. 그가 쓴 <감계일기> <감계전말>은 간도영유권 주장에 소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중하의 기록은 1910년 '한일합방' 후 사라졌다. 그는 나라를 잃자 아들과 함께 경기도 양평으로 낙향했다. 퇴직금 명목으로 은사금을 내렸지만 이를 받지 않았고 합병기념 훈장조차 돌려보냈다. 한일합방이 된지 7년후인 1917년 이중하는 나라를 잃은 분노를 잊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간도, 외교적 사기인가 역사적 사실인가
[기고-박선영 포항공대 교수] 중국측 논리와 그 한계를 짚어봄
외교통상부가 국정감사 자료에서 '간도협약 무효' 입장을 밝힌 것을 계기로 간도문제가 주목을 끌고 있다. 이에 대해 중국사 전공자인 박선영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가 기고를 보내왔다. 박 교수는 "한국의 주장은 날조", "명과 청이 간도지역을 방임하고 조선의 영토요구에 관대했기 때문" 등 간도문제에 대한 중국 쪽의 논리를 비판하면서 한국 정부의 종합적인 대응을 촉구했다.... 편집자 주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 간도
중국의 동북프로젝트(동북공정)가 '고구려사=중국사'로 알려지면서 우리는 고구려 열풍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고구려연구재단 성립 이전부터 동북프로젝트의 핵심이 고구려사 왜곡에만 있는 게아니라 간도문제에 있음을 지적했다. 요즘 고구려 열풍이 사그러드는가 싶더니 간도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하고 있다.
간도는 매우 복잡한 문제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 설정, 1885년(1차)과 1887년(2차) 국경 담판, 1909년의 간도협약 등의 역사 뿐만 아니라 압록강 대안(서간도), 두만강 대안(동·북간도)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간도 범주가 현 연변자치주 정도의 범주로 구체화되는 공간적인 문제, 간도의 명칭,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 문제 및 간도에 대한 국가의 행정적 통치 행위 등 소위 간도 문제 전반에 걸쳐 한·중간에 일치되는 견해가 거의 없다.
또한 간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 주체들, 즉 한국(북한, 통일한국)·중국·일본 등도 다양하게 얽혀 있다. 이 글에서는 중국이 어떤 논리로 간도문제를 설명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그 한계를 지적하고자 한다.
날조론과 역사적 사실
외교라인 간도문제 혼선?
간도문제에 대한 외교 라인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있다.
반기문 외교장관은 14일 정례브리핑에서 간도협약 문제와 관련 "간도협약은 여러나라가 관련되어 있는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에 고증을 위한 역사적 자료를 수집하고 전문가들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다뤄나가겠다"고 말했다.
"신중하게 다뤄나가겠다"고 말했지만 고증을 위한 역사 자료 수집, 전문가들의 연구결과 참조 등을 언급한 것은 이전에 간도문제를 '소 닭 보듯'하던 한국 정부의 태도에 비하면 상당히 적극적인 것으로 평가됐다.
일부 간도문제 전문가들은 "국감자료에 간도협약 문제를 넣었다가 뺀 것은 간접적으로 정부의 의중을 알리려 한 것 아니냐"는 식으로까지 해석하기도했다.
그러나 같은 날 청와대 정우성 외교보좌관은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 <열린세상 오늘>'과의 인터뷰에서 간도협약 무효론 확산을 우려했다.
"간도협약이 유무효 논란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정 보좌관은 "단순히 유효, 무효를 정할 수 없다. 더 크게 봐야 한다. 조약 문구라든지 법리적으로 볼 것은 아니고, 간도 문제가 불거져 중국과 우리 사이에 영토와 국경 문제로 번지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정 보좌관의 말은 아예 간도문제를 제기해서는 안된다는 시각으로 보인다. / 김태경 기자
첫째, 중국은 간도 문제를 날조론·허구론으로 설명한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과 간도의 지리적 위치, 조선인 거주시기, 간도문제 발생 요인 등 소위 간도문제 전반이 날조라는 것이다. 중국은 간도라는 지명이 원래 중국 고유의 명칭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서 의도를 가지고 만든 명칭이라고 하여 연길(延吉)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간도문제를 조선인이 위조하여 외교적으로 사기 친 것이라고 본다. 1712년 목극등(穆克登)이 세운 정계비가 소백산에 있었는데 개간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조선인들이 정계비를 옮겨 중국에게 영토를 요구한 국제 외교 사기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1712년 백두산 정계비 설치, 1885년 을유감계담판, 1887년 정해감계담판, 1909년 간도협약 등의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허구적인 날조라고 치부할 수는 없다. 중국의 간도 날조론, 허위론에 대해 한국의 간도(墾島, 艮土, 閑土, 間島) 이해는 주로 역사적인 의미 부여에 치중하여 언어학적, 민족적, 지리적, 역사적인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최남선(崔南善)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에서 중국의 위압적인 자세와 우리의 퇴영하는 자세가 어느새 압록강 지역을 관습상의 국경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중국의 죠우언라이(周恩來) 전 총리는 만주족이 빠르게 흥기하여 백두산 이동에서 요하 유역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하면서 조선인을 동쪽으로 밀어넣어 압록강과 두만강 이동으로 밀리게 하였다고 설명했다.
조선인의 간도 거주 시기에 대해 중국 자체의 연구에도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고대 시기까지 소급하는 경우와 '원말명초 이주설', '명말청초 이주설' 등이 있지만, 최근 중국은 정책적으로 조선인의 이주를 19세기 중엽 이후로 규정한다.
그러나 <재간도일본총영사관문서(在間島日本總領事館文書)>에 의하면, 조선인은 동북지역인 고토에서 살면서 만주족처럼 쉽게 한족에 동화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이 한족보다도 먼저 동북지역에 거주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동북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관대정책론과 억압
둘째, 중국은 관대정책론 혹은 방임정책론으로 간도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은 간도가 원래 중국의 영토인데 조선인이 불법 이주한 것에 대해 관대하게 대하였기 때문에 간도문제가 발생하였으며, 한·중 양국의 국경은 기본적으로 청천강(淸川江)과 대동강(大同江) 사이를 오가는 정도였다고 한다.
압록강이 중국과 고려의 국경이 된 것은 금(金) 태조로부터 시작되고, 명대에는 두만강 일대에 행정기구를 두고 관할을 통치하였으므로, 16세기에 이미 중국과 조선 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중심으로 기본적으로 국경이 형성 확정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간도문제 발생에 좋은 빌미가 된 것은 한·중 변경의 상당부분을 공지(空地)의 비군사 지역으로 삼았고 조선의 요구에 관대했던 자소(字小·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사랑해주는 것)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조선인은 중국인과 달리 황무지 개간세 및 기타 잡세도 납부하지 않았을 정도로 중국이 관대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경선이 명확하게 설정되기 이전에 양국사이의 완충지대는 복수주권(multiple sovereignty) 지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은 무조건 자국령으로 삼고 조선인에게 관대정책을 베풀었다고 하지만, 조선인에게는 그것이 오히려 힘의 억압이지 관대정책으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영유권 결정에 있어서 선점과 행정권 행사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런데 중국 자료인<광서조동화록(光緖朝東華錄)>에서도, 중국인이 한번도 개간을 하지 않은 곳에 조선인이 이미 대단히 많은 면적을 개간하였고 함경도 자사(刺史)가 지권을 발급하고 등록하여 그 지역을 조선령으로 간주한 것을 발견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간도문제 연구자인 나이또(內藤虎次郞)는 <한국동북강계고략(韓國東北疆界攷略)>(1906년)에서 조선인이 간도지역을 중국인보다 먼저 개척하였음을 지적하였다.
백두산정계비 유무효론과 전략
셋째, 백두산정계비의 유무효론이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설정한 것에 대해 중국은 정계비 유효론과 무효론으로 설명하고 있다. 중국이 양국의 변경을 정확히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으로 조선인의 말을 듣고 백두산 절반이 조선에 속하는 정계비를 세워 많은 영토를 상실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심지어 청나라 강희제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정계비는 변경을 조사한 심시비(審視碑)에 불과하다고 한다. 양국의 대표가 참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국경조약이라 볼 수 없으며, 정계의 함의도 없기 때문에 단순히 기념물적인 성격이라는 것이다.
중국이 백두산정계비를 정계비로 보려는 이유는 정계비문상의 토문이 어디인가의 논란을 제외한다면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이 확인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이 백두산정계비를 심시비라고 보는 이유는 정계비문의 '동쪽으로 토문'이라는 내용에서 토문이 어디인가의 논란을 처음부터 차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양국간에 공식적인 담판기록이 없고, 비석에 대청(大淸)이라는 청나라 국명만 있고 조선이라는 국명이 없는 점 등도 양국의 국경비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중국 스스로가 상반된 견해를 주장하는 이유는 정계비문의 '서(西)로는 압록, 동(東)으로는 토문'의 해석여하에 따라 양국의 영토범주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상의 어떠한 논의도 불가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어 한다. 따라서 중국은 1887년의 국경담판이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지만, 조선 대표 이중하가 토문강과 두만강의 동일성을 인정했다고 하면서 양국이 합의에 이른 것처럼 설명하였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담판 시 청조의 강압이 있었다고 보고, 1888년 5월 16일에 교섭 통상사무 독판 조병식이 위엔스카이(袁世凱)에게 새롭게 국경담판을 열어야 한다고 통고하기도 하였다. 한·중 국경담판의 내용에 대해 양국이 이견을 보이고 있지만, 국경담판이 최종적인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는 점에서는 양국이 동의하고 있다. 따라서 한·중 양국사이의 이견 없는 공개적인 국경담판은 역사적인 미해결 과제로 남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국제법적 해결론과 현상유지
넷째는 국제법적 해결론이다. 중국은 간도문제에 대해 현상유지를 고집하겠지만 동북프로젝트를 통해 국제법적인 검토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현재 연구 중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논리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근현대 변경분쟁을 해결할 법리원칙을 5가지로 제시하였다. 중국의 5가지 법리원칙(①관습선 존중 ②비밀협약 불승인 ③일방적 변경선 불인정 ④중앙 전권대사 체결 조약만 인정 ⑤미해결 문제는 양국이 협상)은 한국이 간도문제에 적용하여 새로운 논리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① 중국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한·중간의 전통적인 관습선이라고 주장하지만 양국 사이에 어떠한 분쟁도 없으려면 중국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역사와 현실적인 각종 요인을 고려하여 양국이 협상으로 해결해야 한다.
② 조선은 간도지역에 행정기구 설치, 관리 파견, 부세 징수 등을 하였는데 중국이 그 지역을 전부 중국의 영토로 주장하며 국경선을 획정하는 것에 대해 한국(통일한국)은 동의할 수 없다. 또한 ③ 일본이 불법적으로 행사한 외교권에 의해 한·중간의 국경문제를 제3자인 일본이 1909년 중국과 체결한 간도협약을 한국은 승인할 수 없다.
④ 양국 중앙정부의 전권대사가 체결한 것이 아닌 변경선 조약은 인정할 수 없다면 1712년 설정된 백두산정계비는 재논의의 여지가 있다. ⑤간도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만 보아도 이는 역사적으로 미해결된 영토문제이자 변경문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은 평화5원칙에 입각하여 양국이 평화롭게 국경분쟁을 해결할 수 있도록 협상해야 할 것이다.
중국은 여러 국가와 변경을 접하고 있어서 개별적인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국제법적 논리를 적용하고 있으므로 중국의 모순을 잘 활용하면 간도문제에 대해서도 좋은 방법을 제공받을 수 있다.
우리는 지금 한·중간의 영유권 분쟁인 간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합적이고 학제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특히 영유권 분쟁의 최종 결정이 '영토 취득 및 상실과 관련한 국제법의 일반 원칙'에 따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제3자 중재기관이나 국제사법기관의 시각에서 사안을 접근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영유권 분쟁의 판결을 받은 유사 판례를 비교 검토하여 간도문제에 대비한 전략적 적용을 고민해야 하고 국제사법기관의 법리를 극복할 수 있는 법리 개발에 주력해야 한다.
중국의 영토 취득 관행을 분석하여 중국 논리를 재활용 하고 1962년 북한과 중국의 비밀 변경 조약이 한반도 통일 이후 '현상유지·점유물 유보 원칙(uti possidetis 원칙)'에 어떻게 적용될 것인지를 검토하여야 한다.
중국의 영토문제 경험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중국은 과거 변경 문제의 경험을 통해 되새겨야 할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중국은 과거 대부분 피동적으로 변경연구를 하면서 구체적인 경계지점의 고증을 경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변경조약으로부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고 문헌 중심의 연구에서 탈피하지 못하였다. 또 새로운 자료의 개척이나 발굴도 부족하였으며 전문기구를 설치하여 전문연구가들이 체계적으로 연구하지 못했던 것을 교훈으로 삼고 있다.
중국의 교훈을 대면하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국경 영토 문제는 국가 민족의 근본 이익과 관계있는 것이기 때문에 주동적·계획적으로 국가의 장기적 발전을 전면적으로 고려하여 연구 성과의 수준과 질에 신경 써야지 임기응변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연구는 문헌자료의 연구뿐만 아니라 전문가들이 실질적으로 개별적인 국경비, 설립지점, 변경선 문제 등을 명확하게 확인하는 답사를 거쳐야 한다. 새로운 자료의 개척이나 발굴과 더불어 국경비 등의 실물이나 문자 기록 및 기타 학문의 활용, 외국 자료나 연구성과 등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상대국이 변경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조직화하고 공식화한 후에 피동적인 위치에 있지 않으려면, 전문 기구를 설치하고 전문연구자가 제대로 연구할 수 있도록 이에 상응하는 시설과 조건을 제공하여야 한다.
전문가들이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전략을 세운 바탕위에 정부가 효율적인 실무를 구체화하지 못한다면 후환은 매우 클 수 있다. 간도문제는 변경조약이나 협약 등의 연구로부터 문제를 제기하고 변경조약과 협약에 근거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연구의 중복도 많고 중요하고 민감한 영토문제에 대해 논리적 모순이 심각하다. 이러한 것을 해결하고 좀더 수준 있고 영향력 있는 학술 성과를 바탕으로 국가적인 장기 전략을 세우려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국의 죠우언라이 총리는 두만강·요하·송화강 유역에 조선인이 오랫동안 거주하였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직접 그곳에 가서 조사하고 비문을 찾고 문물을 출토하여 역사의 흔적을 연구할 권리와 책임이 있으며, 중국은 이런 일을 도와줄 책임이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찾고 책임을 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중국으로 하여금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촉구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명확한 역사 사실의 규명이 진정한 한·중관계의 평화와 동아시아 평화, 더 나아가 세계의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쟁을 생산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아니라 평화를 창출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우리의 목적임을 되새겨야 할 것이다. / 박선영 교수
"중국역사 1만년으로 끌어올려라"
신화·전설을 역사로 만드는 '공정'
[특별기획-중화패권주의 ①] '중화문명 탐원공정'의 현장을 가다
중국은 고구려사 강탈을 목적으로 한 '동북공정' 이외에도 전국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공정(프로젝트)'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역사빼앗기를 넘어서 최근 중국의 패권주의적 경향과도 무관치 않다.
<오마이뉴스>는 중국이 왜 이같은 작업을 벌이고 있는지, 또 그들이 노리는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지, 그리고 이에 대해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등을 다각적으로 분석하는 기획기사를 10회에 걸쳐 내보낸다. <오마이뉴스>는 이를 위해 지난 9월 3일부터 18일까지 2주일간 중국현지를 답사했다. 이 기사는 그 첫번째다.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지난달 30일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55주년 기념 리셉션에서 "중국은 앞으로 영원히 패권을 추구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이는 최근 중화민족주의 경향이 두드러지고 패권주의적 움직임을 보인다는 외부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말 몇마디로 우려가 없어질 수 없다. 중국의 거대한 땅과 인구, 급속하게 성장하는 국력에 대한 심리적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중국 스스로 외부에서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작업(이른바 '○○ 공정')을 계속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작업 가운데 하나가 지난 2003년 11월부터 중국 정부가 공식 추진하고 있는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다. 이는 전설로만 알려졌던 삼황오제(三皇五帝) 시대를 모두 역사적 사실로 만드는 작업이다.
중국 문명의 역사를 5000년에서 최고 1만년 전까지 끌어올려 중국이 문화적으로 세계 최고·최대의 나라임을 선포하려는 목적이다. 이에 비한다면 동북공정은 오히려 하찮게 보일 정도다.
올해부터 쏟아지는 중국언론들의 보도
"산시성(山西省) 린펀시(臨汾市) 샹펀현(襄汾縣) 타오스향(陶寺鄕) 동포거우(東坡溝)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4100년전의 천문대 터가 발견됐다." (지난 5월 중국 언론들의 보도)
"허난성(河南省) 신미시(新密市) 리우짜이진(劉寨鎭) 신짜이촌(新砦村)에서 옛 성벽과 궁전터가 발견됐다." (지난 3월 중국 언론들의 보도)
"허난성 신미시 황제궁(황제 헌원의 궁전 유적지)에서 황제가 팔진병법을 만들었음을 기록한 당나라 때의 비석(높이 4m33㎝)이 발견됐다." (지난 7월 중국 언론들의 보도)
올해 들어 중국 언론에는 이같은 보도가 집중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모두 정부의 공식 기구인 중국사회과학원과 각 성의 문물고고연구소들이 행한 작업의 결과물이었다.
중국인들은 스스로를 '황제의 자손'이라고 부른다. '전설의 인물'이었던 황제를 비롯한 삼황오제는 이제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 재창조되고 있다.
<오마이뉴스> 취재팀은 이 같은 중국 언론들의 보도를 확인하기 위해 직접 발굴 현장을 답사했다.
중국은 공정(工程)의 나라?
중국이 추진중인 공정은 여러개다. 공정은 프로젝트를 중국어로 번역한 말이다.
동북 공정은 이미 잘 알려져있다. 하상주단대공정과 중국문명탐원공정은 중국의 영토를 최대 1만년 이상으로 확장하려는 것이다. 이에비해 동북 공정은 만주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확실히 하기 위한 작업이다.
여기에 이미 서북공정과 서남공정도 진행중이다. 서북공정은 오늘날 신쟝위구르 자치구 지역의 역사 및 지리에 대한 종합적 연구다. 이 지역이 중국의 영토로 확실히 들어온 것은 1755년 청나라 건륭제 때 준가리아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부터다.
따라서 중국의 영토가 된 지 불과 250년밖에 안됐다. 또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위구르족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강하기 때문에 서북 공정을 하는 것이다. 서남 공정은 물론 티벳 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중원지역 4곳 집중 발굴
지난 9월4일 산시성 린펀시에서 1시간30분 가량 자동차로 이동해 타오스향에 도착했다. 마을 사람들에게 최근에 유적 발굴 작업을 하고있는 곳을 물었다. 그러나 모두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다.
한 현지인은 "이 곳의 한 해 수입은 한 가정에 2000~3000위안(29만~43만5000원)에 불과하다"며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한데 옆에서 무슨 일이나는지 전혀 관심없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다시 1시간30분정도 먼지가 풀풀나는 비포장 도로를 타고 헤맸다. 이 곳은 전형적인 황토지역이었다. 책에서만 보던 토굴집을 볼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옌안에서 소비에트를 만들고 장제스와 대결할 때도 역시 이런 토굴집에 살았다. 신 중국 성립 55년이 지났지만, 동부연안의 발달된 지역을 제외한다면 서부지역, 특히 농촌의 삶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셈이다.
간신히 타오스촌에 도착해 40대 농부에게 유적지에 대해 물었다. 그는 "몇달 전부터 마을 뒤쪽에서 발굴 작업이 있었다"며 "대형 무덤들을 발굴한 뒤 유물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겼다"고 말했다.
길 안내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는 정색을 하고 "당신들 어디에서 온 사람들이냐?"며 "그곳은 보안지역이다, 외지인들이 유적발굴 현장 안내를 부탁하면 절대로 해주지 말라고 현 정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며 거절했다. 도굴꾼들을 경계해 이런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였다.
한 20분 정도 마을 뒤쪽으로 계속 올라가자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나타나더니 대뜸 "당신들 어디에서 왔느냐"고 추궁하듯 물어봤다. 그는 "외지인들이 오면 절대로 유적 발굴지를 알려주지 말라고 정부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며 "유적지를 보고 싶으면 발굴대에 연락해 허가를 받고 오라"며 그들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더 이상 마을 뒤쪽으로 가는 것은 상황상 힘들었다.
타오스촌을 빠져나와 다시 1시간 가량 중국언론들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터가 발견됐다는 동포거우 지역을 찾아나섰다. 타오스향 시내 중심지에서 10㎞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다. 동포거우 마을 안쪽에서 옥수수와 면화 등을 심어놓은 밭을 따라 30분 정도 더 가니 저 멀리 유적 발굴지가 보였다.
4100년 전의 천문대...?
유적은 반원형으로 너비 약 20m 정도에 평평한 지형이었다. 군데군데 지름 10㎝ 정도의 구멍이 10여개 뚫려있었다. 옆 벽면으로는 판축한 흔적이 보였다. 앞으로 더 넓은 지역을 발굴한 예정인 듯 이 유적지의 앞 쪽으로도 출입금지 줄이 쳐져 있었다.
중국 고고전문가들과 천문학자들은 이 유적의 역사를 기원전 2100년 께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영국 스톤헨지의 기원전 1680년에 비해 400여년 앞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라는 것이다.
총 면적이 1400㎡인 이 곳을 중국 학자들이 천문대 터라고 보는 이유는 13개의 기둥이 서있던 자리. 이들은 "이것으로 미뤄볼 때 정 동쪽에서 떠오르는 일출을 관측하고, 1년 12절기를 정확히 측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상서(尙書)>의 '요전'(堯典)에 나오는 "해와 달, 별의 움직임을 살펴보고 사람들에게 시간을 알려줬다"는 기록이 역사적 사실임이 증명됐다는 것이다.
천문대터는 타오스향의 문화 유적 가운데 일부분이다. 전체 타오스 문화 유적은 동서길이 길이 약 2000m, 남북 너비 1500m, 면적 약 300만㎡ 초대형 유적이라는 것. 북·동·남 3개의 성벽과 궁전터, 중기의 왕 및 귀족들의 대형 묘들이 발견됐는데 연대는 이미 기원전 2100~2000년으로 이미 확정됐다.
올 3월 중국사회과학원은 허난성 신미시 동남쪽 18.6㎞ 지점에 있는 리우짜이진 신짜이촌에서 3중의 방어시설과 동·북·서 3면의 성벽 및 2개의 성문터, 대형 건물터가 있는 100만㎡의 유적지를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지난 9월 5일 <오마이뉴스> 취재팀이 신저촌에 갔을 때 군데군데 유적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옥수수밭을 파헤치고 곳곳에 땅을 절개시켜 놓았다. 한 곳의 발굴지는 길이 50m, 너비 15m 정도에 깊이가 7~8m 가량 정도됐다.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계속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 고고학자들은 "이곳의 성터는 4000년 전 것이다, 바로 황제가 활동했던 중심지역으로 황제의 옛 도읍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의 차오춘칭(趙春靑) 박사는 "신저 유적은 원시시대 말기의 전형적인 주거 지역"이라며 "신석기 후기 문화인 용산문화와 하나라 문화 사이를 연결시켜 준다"고 말했다.
황제궁에 100억원 투입, 발굴 조사중
허난성의 성도인 정저우(鄭州)에서 서남쪽 37㎞ 지점에 있는 신미시 리우짜이진 리우짜이촌에는 황제의 궁전터가 자리잡고 있었다는 '황제궁'이 있다. 지금도 유적지 및 황제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경내는 완전 공사판이었다. 두달 전 발굴 공사중 발견했다는 원나라 시기 때 이곳 지방관의 황제 찬양 기념비가 서있었고, 멀리 성벽을 보수하는 모습이 보였다.
40대의 한 관리인은 "지난해부터 대대적인 보수 발굴에 들어갔다"며 "공사비가 수천만위안에 이른다"고 말했다. 한국돈으로 근 1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이다. 그는 "이는 관광지 겸 황제 및 황제 문화를 숭배하고 찬양하기 위한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곳에는 지난 1999년 말레이시아 화교 수백명이 와서 제사를 지내는 등 화교들의 관심이 아주 높다"고 자랑했다. 한국에서는 학교에 세운 단군 상의 목이 잘려나가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지만 '과학적 사회주의'를 아직 표방하는 중국은 전혀 달랐다.
"중화문명 5000년, 숫자를 맞추자"
이 모든 일들은 중국 정부가 이미 10년전부터 계획해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정부는 지난 1996년 5월 '하상주(夏商周) 단대공정(斷代工程)'을 시작했다. 200여명의 전문가가 동원됐고 싼시성(陝西省) 저우위안(周原) 유적, 허난성 정저우의 상청(商城)유적 등 모두 17곳을 새로 발굴했다.
중국 역사에서 연대가 정확하게 알려진 가장 이른 시기는 기원전 841년 서주(西周)말 공화(共和) 원년(元年)이다. 그 이전의 사건은 사실인지 전설인지 불명확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2000년 11월 9일 하상주 단대공정을 끝내고 '하상주 단대연표'를 정식 발표했다. 하나라의 시작을 기원전 2070년으로 확정지었고, 따라서 중국의 역사시대는 총 4070년이 됐다. 현재 기원전 841년보다 1229년을 끌어올렸다.
상나라는 기원전 1600년에 건국했고, 반경이 은(殷)으로 천도 한 때는 기원전 1300년 무렵, 주나라는 기원전 1046년으로 각각 설정됐다. 전설이었던 하나라와 요임금, 순임금은 역사적 사실이 됐다.
이 공정의 총 책임자인 칭화대(淸華大)의 리쉐친(李學勤) 교수는 지난 6월 17일 중국 CCTV와의 인터뷰에서 "중국의 정확한 역사시대는 기원전 814년이다, 이전의 역사는 아주 모호하다"며 "세계 4대 문명가운데 유일하게 5000년 중국 문명만 이런 역사적 공백이 있다, 이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었다"라고 말했다.
즉 중화문명 5000년을 얘기하지만 이제까지의 자료로는 역사시대가 3000년에도 못미치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하상주단대공정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중화문명의 역사시대는 4000년 정도다. 5000년에서 약 1000년이 모자란다. 다시 '중화문명탐원공정(中華文明探源工程)'이 시작됐다.
이 공정은 지난 2002년 11월 중국언론이 시작을 예고했고 2003년 6월부터 정식으로 개시됐다. 그러나 중국문화부 홈페이지의 설명을 보면 "지난 2001년 11월 14개 과제와 24개 전문연구과제를 설정했다"며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결합해 역사학, 천문학, 고고학, 연대측정학, 환경 및 야금 등 90여명의 전문가가 이미 결합해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중화문명탐원공정은 '중화 문명의 시원'을 찾는 프로젝트다.
1만년... 1만2000년... 중국의 역사적 시간 계속 늘려
중화문명탐원공정이 하는 구체적인 작업을 보면 ▲고문헌의 요·순·우(禹) 관련 자료의 수집과 연구 성과 정리 ▲중국 천문학의 기원 연구 ▲예제(禮制)의 기원과 연구 성과 정리 ▲허난성 서부 및 산시성 남부 지역의 용산문화부터 이리두 문화까지 고고학 문화 계보 ▲용산문화시대부터 하나라 초기 때까지의 취락형태가 보여주는 사회구조 ▲용산시대부터 이리두 시기까지의 야금기술 및 유적, 관련 자료의 수집과 정리 ▲초기 각종 부호 및 문자 관련 자료의 수집과 정리 ▲생태환경 평가 ▲문명기원에 대한 이론과 방법, 연구 성과의 종합 ▲탄소측정 방법 연구 등 총 11개 과제다.
'예비연구' 과정에서 허난성 신미시의 구청진(古城鎭)과 신짜이촌의 유적, 역시 허난성 덩펑시(登封市)의 왕청강(王城崗) 유적, 산시성 타오스향의 유적 등 4곳이 집중 발굴지역으로 선정됐다.
이 곳은 현재 한족의 원류인 화하(華夏)족들이 활동했던 중원지역들이다. 시기적으로는 지금으로부터 4000~5000년전, 고고학적으로는 신석기 후기문화인 용산문화부터 하나라 초기까지, 전설상으로는 삼황오제시기에 해당한다. 이미 예비연구는 끝난 상태다.
그러나 '5000년'에 만족할 중국이 아니다.
지난 2001년 8월 14일 중국 후난성 사회과학원 '염제순제 과제조'는 "중국 문명은 결코 5000년 안팎이 아니다"라며 "1만년, 더 나아가 1만2000년이나 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들의 주장 근거는 순임금의 주요 활동지역인 후난성 잉저우(永州) 다오(道) 현에서 출토된 볍씨 등의 농작물 종자가 1만2000년 전 것이고 각종 고문헌이 방증한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이 중국의 역사적 영토를 공간적으로 넓히는 작업이라면, 중화문명탐원공정은 시간적인 영토를 확보하려는 작업이다.
연세대 강사인 김선자 박사는 "중국 정부는 신화를 역사로 만들고 있으며, 그 밑바탕에는 '위대한 중국'이라는 프로그램이 가동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공정들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중국의 영역을 엄청나게 확장시키려는 프로젝트"라며 "중국은 경제·외교적으로 자신감을 얻으면서 강렬한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이제 문화적으로 '슈퍼 파워'가 되겠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중국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대체 삼황오제(三皇五帝)가 정확히 누구인가이다. 삼황오제 하면 보통 황제·염제·요임금·순임금·우 등을 말하는 것으로 알고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대 문헌에는 삼황오제가 누군인지 모두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사기>에는 황제·전욱·제곡·요·순으로, <풍속통의>에는 복희·여와·신농으로 <백호통>에는 복희·신농·축융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제왕세기>에는 복희·신농·황제, <여씨 춘추> <회남자>에는 태호·염제·황제·소호·전욱으로 다 다르다.
시기도 문제다. 대체로 중국문명탐원공정의 시기는 문화적으로 용산문화에서 하나라 초기까지, 전설상으로 삼황오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삼황오제가 서로 계승 관계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시기적으로 차이가 나는지, 만약 차이가 난다면 어느 정도 시간차가 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당연하다. 모두 전설이기 때문이다.
또 일부 중국 학자는 치우가 빠진 것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치우는 동이족의 선조신으로 인정된다. 화하족의 선조인 황제와 탁록에서 크게 싸웠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런데 중국의 고 문헌 가운데 삼황오제에 치우를 넣는 경우는 별로 없다.
중화민족은 한(漢)족과 함께 55개 소수민족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하는 중국학자들 입장에서는 동이족의 최고 신인 치우를 홀대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삼황오제에 치우는 들어가지 않아 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 고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