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고구려 사회는 중심점을 잃고 흔들리다가 외부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만 것이다. 이 말은 고구려가 버전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멸망했다는 말이나 다를바 없다. 고구려는 태초부터 5개 부족 또는 소왕국 연합 형태로 출발하였다.
그렇게 5개의 서로 다른 통치권을 가진 집단들이 연합하여 탄생한 나라이므로 태생적으로 강한 왕권을 가지기에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명한 건국이념이 있었기에 비록 여러 소왕국들이 결합한 형태 였지만 목표를 달성 하기까지는 흐트러 지지 않고 한 마음으로 뭉칠 수 있었다.
하지만 광개토 대왕과 장수왕 시절에 이르러 고조선의 옛 땅을 모두 회복하고 나자 더 이상 비전에 대한 갈망을 느낄 수 없게 된것이다. 만약 이때 중국 대륙으로 진출하여 더욱 넓은 땅을 차지 하겠다는 식의 큰 비전을 내세우고 그것을 추구하기 위해 노력했다면 고구려는 더욱 합성한 나라로 오랜시간 이어 갈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러하지 못했고 결과적으로 그 이후 점차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왕권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흔들린 기록들이 나타난다.
22대 안장왕의 사망에 대해서는 시해설이 남아있고 , 23대 안인왕 시절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귀족들 사이에 큰 난이 벌어진다. 안원왕에게는 부인이 셋 있었는데 정부인은 아들이 없었고 중부인이 낳은이가 후에 양원왕으로 등극하는 세자 녹군이며 소부인이 낳은 아들이 세균이다. 안원왕의 병이 심해지자 녹군과 세균의 집단이 서로 자신의 외손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동원하여 싸웠는데 이때 왕은 궁궐 문을 단단히 닫아걸고 꼼짝 못했다고 한다. 24대 양원 왕도 「삼국사기」와 「백제본기」가 즉위 시기를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백제 본기 에서 전하는 대로 양원왕이 8세에 왕위에 올랐다면 혼자서 정사를 돌보기 힘들었을 것이고 어머니인 중부인과 그집단 세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