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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1889-1905)
한국 침례교회의 역사는 1889년 12월 8일 서울에 도착한 캐나다의 독립선교사인 말콤 펜윅(Malcolm C. Fenwick, 1863-1935)의 선교사업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펜윅 선교사가 처음에 한국에 왔을 때는 침례교인이 아니었으며 [침례교]라는 명칭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국에 온 후 펜윅은 서울에서 약 10개월 간 한국어를 공부하다 황해도 소래로 갔다. 소래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선교사업에 착수하던 펜윅은 1893년에 다시 캐나다로 귀국하여 3년 간 체류하였다.
3년간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그는 미국의 북침례교 목사이며 부흥전도사였던 고든(A. J. Gordon, 1836-1895)목사와 긴밀한 교분을 갖게 되었으며 고든 목사가 경영하는 보스턴 선교훈련학교(The Boston Missionary Training School)에도 참석했다.
펜윅 선교사가 침례교의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이 시기였다. 그는 1894년에 캐나다에서 한국순회선교회(The Corea Itinerang Mission)를 조직했다. 고든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의 집사인 씽(Thing)씨는 이 무렵에 그의 죽은 딸을 기념 하는 엘라 씽 기념선교회(The Ella Thing Memorial Mission)를 조직하고 펜윅과 함께 보스턴 훈련학교에 다녔던 파울링(E. C. paulling)부처를 1895년에 한국의 선교사로 파송했다.
1896년에 이 선교회는 스태드맨(F. W. Steadman) 선교사 부처와 2명의 여선교사를 다시 한국에 파송했다. 이들은 충남의 공주와 강경, 칠산 지역에서 선교사업에 착수했으니, 이들은 한국에서 최초로 침례교회 사역을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 사업은 1900년 이전에 자금난으로 선교사들이 거의 철수 귀국하였으며 1901년에는 마지막으로 스태드맨 선교사마저 철수하였기 때문에 이 선교회는 원산에서 일하고 있던 펜윅의 한국순회선교회와 병합되고 말았다.
펜윅 선교사는 1896년 봄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는데 3년 간 캐나다에 체류하는 동안 목사안수를 받고 침례교의 신앙노선으로 변화되어 돌아왔다. 그는 귀국하자 소래를 떠나 다른 교파의 선교회의 손이 닿지 않았던 원산에 정착하여 선교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집에서 순수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동역할 사역자를 육성하여 기거를 같이했다. 1901년 에는 충남의 엘라 씽 기념선교회의 사업을 인수받아 자신의 한국순회선교회와 병합하였다.
대한기독교회의 조직(1906-1920)
대한기독교회(The Church of Christ in Corea)는 한국침례회 총회의 최초의 조직적 기초였다. 펜윅 선교사는 자신이 훈련하여 키운 문서순회전도자를 각처에 파송하며 복음을 전파하며 순회전도를 실시하여 31개의 교회가 생겨나 자 교단조직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1906에 펜윅은 충남 강경에 모든 동역자와 교인들을 회집하여 대회를 열어 [대한 기독교회]를 조직하고 46개조의 회칙을 만들었다.
[대한기독교회]의 조직을 보면 행정구조는 철저한 중앙집권식 전위체계였다. 교단을 펜윅을 수반으로, 전체 교회는 그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모든 직분은 그에 의하여 임명되고 각 지역으로 파송되었다.
교단과 교회의 성격은 초교파적이었으며 성령에 인도되는 신약성서적인 회중사상은 강하였으나 개교회의 자치권 사상은 전혀 없었다. 교단조직은 감목을 필두로 한 위계직분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며 감목은 원로교우회에서, 그리고 기타 직분은 감목이 선임하였다.
1914년에 펜윅은 제9회 대화회(총회)를 원산에서 개최하고 9년 간 역임하여 오던 감목직을 이종덕 목사에게 위임함 으로써 제2대 감목을 선임하였다. 1809년에 장로교와 감리교가 선교지 분할협정을 맺은 [교계예양] 협정에 따라 한 반도의 선교지를 분할하자 펜윅은 기왕에 다른 교단의 손이 미치지 않은 개척선교에 목표를 두고 선교의 터전을 만주, 간도, 시베리아, 몽고 지역에 두고 일해 왔다.
대한기독교회의 이러한 오지의 개척선교사업은 한국교회사에 있어서 불멸의 선교업적을 이루었으며,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많은 순교의 역사를 장식했다. 1919년 10월에는 본 교단에서 신약전서(원산 번역)를 출판했으며 1899년 부터는 복음찬미도 발행하여 그후 계속 증보판을 발행했다.
동아기독교회 시대(1921-1932)
1921년에 제16회 대화회가 경북의 광천에서 개최되었을 때 교단의 명칭은 동아기독교회로 변경되었다. 이것은 1919년의 3.1운동의 결과 일본제국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정책이 강화됨으로써 교단의 명칭에서 [대한]을 변경하도록 강요하였기 때문이다.
교단의 포교지역을 동아시아 지역으로 삼는다는 뜻에서 [동아] 기독교회로 변경했다. 이 당시 일본제국은 일로협상 에 따라 일본의 동남아 침략정책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으며 많은 우국지사들은 중국, 만주, 간도, 시베리아 지역으로 망명하였다. 따라서 동아기독교회는 이 지역에 이산하여 살고 있는 교포들에 주력하여 복음선교 사업을 수행했다. 그러므로 당시 교역자와 교회들은 러시아의 공산당, 일제의 경찰이나 헌병으로부터 수난을 당하였으며 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였다. 따라서 러시아 지역의 교회들이 1917년의 러시아 공산당혁명 이후 공산당의 박해로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1930년대에 함북의 웅기지방으로 철수한 것도 이 시기였다.
1910년에는 한국에서 신구약전서가 완역됨으로써 한국교계에는 성경읽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졌으며, 동아기독 교회에도 펜윅의 [3대교의]의 강조로 전 교단적으로 사경회와 독경운동이 교회생활의 관습이 되었다.
동아기독교 시대(1933-1940)
1933년에는 전치규 감목이 원산에서 대화회를 소집하고 교단 명칭을 다시 [동아기독대]로 변경했다. 이것은 당시 교회라는 명칭이 기독교가 아닌 천도교에서도 사용함으로써 세속화되었으며 기독교회는 성별된 [양무리의 모임]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펜윅 선교사가 [대]로 바꾼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한국에 이어 만주를 강점하고 관동사령관을 주재시킴으로써 만주를 그들의 대륙진출을 위한 군사기지로 삼고 무단정치를 강행했다. 따라서 만주에 많은 교회가 선교지를 확보하고 있는 동아기독대는 날로 가중되는 일본의 탄압에 교세는 약화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1935년에는 펜윅 선교사가 원산에서 별세하였다. 교단의 정신적 지주요 모든 재정을 총괄하던 펜윅의 사망은 여러 면에서 동아기독대의 교세를 쇠잔하게 만들었다. 1940년에 이르러 국내에 100여 개 교회, 만주지역에 100여개 교회, 시베리아에 약 40개 교회, 그리고 몽고에 수개의 개척전도소의 교세를 지녔던 동아기독대는 이때부터 러시아의 공산주의 정책, 일제의 대륙정책의 강행으로 풍전등화처럼 전운의 먹구름 속에서 쇠멸되어 갔다.
동아기독교 시대(1940-1949)
1940년에 이종근 감목이 원산에서 35회 대화회를 소집하고 교단명칭을 다시 동아기독교로 변경했다. 당시 태평양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던 일제는 교단의 명칭에 [대]라는 군사용어를 사용하는 것을 일본 황군에 대한 저항감을 주는 불순한 사상이 있다고 시정을 강요하여 다시 동아기독교로 변경한 것이다.
1941년에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켜 교회탄압과 사상감시를 더욱 강화했다. 당시 일본관헌은 포교계도 제출하지 않고 신사참배도 불응하는 동아기독교를 불순단체로 주목하였으며, 급기야 원산사건을 유발시켜 교단지도자 32명이 원산을 거쳐 함흥형무소에 투옥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원산 헌병대 유치장에서 모진 고문과 옥고에 시달리던 32명의 지도자들은 1943년 5월에 다시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하던 가운데 전치규 감목이 옥중에서 순교했다.
1944년 5월 10일에 동아기독교는 교단해체 판결로 해체되고 말았으며 교회재산은 국방 헌금으로 헌납되고 마는 비운을 맞았다. 교단해체령이 내린 동아기독교는 원산의 총부뿐 아니라 전국의 교회가 예배 및 집회를 금지당하여 교유들은 산지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1945년의 광복으로 일제는 물러났으나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었기 때문에 만주, 러시아 및 북한 지역에 교단의 주류세력을 지녔던 동아기독교는 또다시 남한을 제외한 교회들을 상실하는 비운을 맞았다.
1946년 2월에 충남 칠산에서 교단의 지도자들이 모여 교단재건회의를 소집했으며 9월 9일에 노재천 대리감목이 강경교회에서 36회 대화회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교단의 체제를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꾸어 감목제를 회중제로, 대화회를 총회로 바꾸었다. 또한 교단의 위계직분도, 감목을 총회장으로, 안사를 목사로, 감로를 장로로, 통장을 권사로, 총장과 반장을 집사로 바꾸고 교사는 그대로 두었다.
그러나 1947년에 경북 예천지역을 중심으로 한 10여개의 교회가 36차 대화회에서 교단체제 변경에 반발하여 동아 기독교에서 탈퇴하여 [대한기독교]를 조직하여 분립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한기독교침례회 시대 (1949-1958)
1949년 39차 총회를 충남 강경에서 소집하고 교단의 명칭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했다. 이것은 이미 타교단도 우리 교단이 침례교파임을 알고 있으며 38회 점촌 총회에서 교단의 지도력 강화와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하여 미국의 침례교단과의 제휴를 모색하기로 결의한 사후책의 일환이었다.
제39차 총회에는 미국 남침례회 외국선교부의 동양 총무인 코오든(B. S. couthen)박사가 참석했다. 그는 동아기독교의 중요한 교리적 주장과 신앙행습이 남침례교와 같음을 확인했다. 이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 총회는 미국 남침례회 총회와 제휴하기로 결의했다. 그래서 1950년에 최초의 남침례회 선교사로 나요한 선교사(J. Abernathy) 부처 가 한국에 파송되어 본격적인 침례교의 선교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950년 6월 6.25사변이 일어나자 한국교계는 다시 혼돈에 빠져들었다. 정부가 부산으로 옮겨가고 피난민이 부산으로 몰려오자 교단본부도 부산으로 옮겨 총무로교회에서 사무를 보았으며, 선교회는 동란을 맞은 한국백성을 위한 구호사업에 착수함으로써 선교사업의 서막을 열었다.
의료선교사는 부산에서 구호병원을 개설하여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개교회에도 구호금, 교역자 생활보조 및 교회당 신축을 위한 보조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러한 시책은 새로 교단을 재정비하려는 대한기독교침례회에는 재건을 위한 활력과 의욕을 일시적으로 불어넣어준 것을 사실이나, 교단 안에 선교부에 대한 의존성과 보조금을 둘러 싼 교역자 간의 교권투쟁, 그리고 타교단 교역자의 대거 유입사태를 가져옴으로써 교단의 장래를 어둡게 만들고 말았 다.
1952년에 42회 총회가 충남 칠산에서 개최되었을 대 총회를 연맹총회로 규약을 개정하고 여전도회(W.M.U.)를 조 직했다. 1953년에는 대전에 성경학원을 개설하고 1954년에는 문교부로부터 신학교의 인가를 받아 나요한 선교사가 초대 학장으로 취임했다. 또한 소년회(R.A.), 소녀회(G.A.)및 신훈회(B.T.U.)를 조직함으로써 미국 남침례회의 제반 기관들을 교단안에 도입하였다. 총회의 기관지인 [뱊티스트]도 발간되었다. 1953년 총회보고에 의하면 12개 지방회에 87개 교회와 목사 19명, 전도사 57명의 교세에 불과했다.
1953년 이전에는 선교사를 제외하고는 정규적인 침례교회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은 지도자가 전혀 없었다. 총회의 지도권을 가진 대부분의 교단 지도자들은 펜윅 선교사가 길러낸 동아기독교의 목회자들로서 이들은 초창기의 개척 전도자로 영웅적인 신앙의 산 증인들이었으나 역시 정규적인 침례교의 신학교육을 받은 경험은 없었다. 그러나 1950년 대 중반기부터 참신한 침례교의 이상과 신앙정신에 투철한 젊은 선교사들이 많이 내한하자 총회 내에서는 침례교의 신앙원리를 지향한 전도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추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이 한국침례교인들에게 수용되기 에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였다.
선교사들의 이상은 놀라왔으나 한국사람과 한국실정에 대한 지식과 경험이 없는 이들의 선교정책과 사업수행은 한국의 현실과 동떨어진 면이 많아 시행착오가 속출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국지도자들의 행정적 독주와 파당성, 전입교역 자들의 신앙절충주의, 원조와 구호선교에 타성화된 한국교회들의 선교부 의존성 등의 문제는 좌절과 불신을 불러일으키면서 총회와 선교회 간에 갈등과 대립을 조장시켰다.
1950년대 중엽 이후 총회 안에는 비침례교적 요소와 신앙절충주의적 혼탁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선교사들은 한국의 침례교회 안에 외중주의적인 침례교의 신앙원리를 정립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으나, 동아기독교의 감독 체제와 근본주의적 신앙훈련으로 체질화된 한국지도자들의 불목과 분열, 전입교역자들의 제3세력 구축 등의 문제를 수용하여 해결하기에는 당시의 교단의 지도력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의 시련이었다.
총회분열 시대(1959-1968)
1960년대의 한국침례교단은 발전을 위한 역사의 한 과도기적 시련을 거쳐야 했다. 1950년대의 선교사들과 그들의 선교정책은 당시의 한국적 풍토나 체질에는 그대로 수용될 수 없는 문화적 충격과 콘텍스트의 문제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선교의 외세(선교사)를 둘러싼 한국지도자들의 불목과 경쟁, 이러한 와중에 정치적 변수로 작용된 타교단에서 전입한 교역자들의 제3세력 구축 등의 문제는 더욱 복잡성을 띠게 되어 총회와 선교회의 협동문제가 마침내 결렬됨으 로써 한국침례회총회는 9년간의 교단분열의 역사를 거치게 되었다.
1959년에 두 개의 분열총회가 충남의 대전과 경북 포항에서 각각 개최되었을 때 포항총회는 지금까지 총회를 주도해 온 동아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대전총회는 선교회의 지원을 받는 교단의 몇몇 기성 지도자들과 전입 교역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향후 9년 간의 교단분열은 한국 침례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지극히 불행한 일이었으나 한편 침례교단이 침례교의 신앙원리에 투철한 교회발전과 신앙정립을 위해서는 불가피했던 역사의 한 과정이었다. 분열 이후 대전총회는 선교회의 주도로 미국남침례회를 본딴 여러 기관들을 조직하고 그 기관들을 통하여 사업을 수 행하기 시작했다. 침례신학교와 교회진흥원은 대전총회 안에 침례교 신앙정신을 진작시키고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진흥원은 교회학교운동을 전개하고 공과와 제반문헌을 간행 보급함으로써 교단 안에 침례교회 생활을 정착시키는 데 커다란 역할을 담당했다.
분열 이후 선교회의 재정지원이 중단된 포항총회는 많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들로부터 재정적 지원과 도움을 받았던 포항총회는 침례교의 신앙정체를 간직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하지만 분열기간의 어려움은 양총회에 자구책과 자립정신을 함양시키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제는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했던 한국 침례교회들은 1960년대부터 오순절의 성령을 갈급하며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운동을 지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60년대 후반부터 침례교회들 안에 서서히 일기 시작한 영적 부흥운동은 역사적으로 세계의 침례교 회가 성장 발전해온 신앙전통과 유산을 한국의 침례교회와 교인들에게 산 믿음의 체험으로 가르쳐 준 것이었다.
9년간의 교단분열은 이전에 배태하였던 제반 비침례교적 요소들을 여과시키는 반성과 경험의 교훈을 주었다. 이 60년대의 영적 부흥운동은 선교부의 재정적 보조에 의존하던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신앙과 영력을 통하여 교회발전을 지향하는 좋은 믿음과 계기를 촉진시켰다. 정치와 물질과 권력다툼으로 갈라졌던 총회와 교회들이 말씀과 영역을 통하여 교회와 교단 발전을 도모하는 비전과 확신이 서게 된 것이다. 이 분열의 역사는 지난날을 반성하게 만들고 형제간에 이해와 사랑과 한 피의 교제를 불러일으키는 체험을 주었다.
한국침례회연맹 시대(1968-현재)
1968년 4월 16일은 한국침례교단의 역사에 있어서 ;놀라운 감격의 날이었다. 9년동안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과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이라는 명칭으로 분열되었던 교단이 하나로 통합되고 김용해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임한 날이었다. 총회가 개최된 서울침례교회에서는 9년동안 갈라섰던 동역자들이 감격의 악수를 나누면서 다가올 70년대를 위한 한 국침례교단의 미래를 굳게 다짐했다.
이날은 이제 한국침례교단의 역사에 있어서 한 세대가 물러가면서 새로운 젊은 세대가 교단의 제반중책을 물려받는 세대교체의 전환을 맞이하는 서곡이었다. 1969년 연차총회에서는 선교회의 주선으로 세계적인 침례교의 성악가인 레아(Glaude H. Rhea)박사가 개회식을 겸한 음악회를 가짐으로써 합동총회와 더불어 선교회와도 새로운 친선을 다짐 하는 은혜로운 총회의 서막을 열었다. 본 총회에서는 침례신학교의 정과 1회 졸업생인 오관석 목사가 총회장에 선임 되고 제반 실행위원진도 신학교 출신들로 교체됨으로써 교단 역사에 있어서 세대교체의 장을 열었다.
이 합동총회를 즈음하여 교단의 지도층은 한국침례신학교 출신의 참신한 젊은 일꾼들이 계속 등장하였으며, 선교회도 이와 병행하여 새로운 젊은 계층이 등장하여 새로운 사업프로그램을 제시함으로써 전교단적인 침례교의 정체와 교회 개척 사업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그동안 교단 내에서는 신학대학에서 참신한 침례교 신앙으로 무장된 젊은 사역자들이 계속 배출되었으며, 선교회도 이에 발맞추어 교회진흥원, 라디오 방송부 등의 기관을 통하여 침례교회를 진흥시키기 위한 출판물과 프로그램을 전국적으로 전개하고 공과 및 제반 출판물과 문헌을 보급함으로써 교회성장과 침례교 신앙원리 정립에 크게 공헌했다.
진흥원이 1963부터 추진한 청지기운동, 그리고 1964년부터 시작한 교회학교 확장운동 및 복음전도 운동, 교역자 강습회 등의 교회진흥프로그램은 교인들과 교역자들에게 영적 활력을 일깨우고 복음전도에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70년대 침례교회 성장과 발전에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캠페인이 가져온 또 하나의 커다란 성과는 교단이 합동된 이후 교단을 결속시키고 교회와 교역자간의 총화를 가져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한 일이다.
60년대에 교단 안에 일기 시작한 영적 부흥운동이 재정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나약하던 침례교회들과 교역자에게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감을 불러일으켜 양적인 증가와 교회성장의 기틀을 마련하였다면, 70년대의 전국적인 교회 및 교역자의 훈련 캠페인은 침례교회의 신앙정립과 건전한 교회생활의 기틀을 다짐으로써 이 시기는 침례교단이 건전한 신앙을 정립하고 교세를 확장하는 획기적인 시기였다.
따라서 60년대의 영적 부흥운동, 68년의 교단통합, 그 이후의 전국적인 훈련 캠페인, 그리고 참신한 젊은 사역자들의 계속적인 등장은 70년대의 침례교단 발전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다.
1970년에 한국총회와 선교회는 공동으로 [한미기금위원회]를 조직했다. 이 기금위원회는 개척교회를 위한 제반 기금을 대여 혹은 보조하는 업무를 담당함으로써 매년 개척교회 조직과 발전에 크게 공헌하고 있다. 선교회가 독자적으로 육성발전시켜오던 이러한 기관들을 교단 통합이후는 한국총회와 선교회가 보다 원만한 협동관계를 이룸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러한 기관들은 모두가 복음전도와 개척교회를 육성발전시키기 위한 목적과 방편으로 세운 것이다. 오직 전도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어 온 기관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관들은 분열되었던 교단을 수습하여 다시 침례교의 신앙원리와 정신으로 개교회를 무장시키고 성장 발전시키는 데 실천적인 프로그램과 활력을 부여함으로써 크게 공헌한 것이다.
교단의 통합과 더불어 전개된 70년대의 한국침례회 연맹총회시기는 이처럼 한국사회에서 침례교회가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기틀을 다지는 데 심혈을 쏟은 시기였다. 1976년 11월 4일부터 교단명칭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였다.
이제 침례교회는 한국땅에서 기틀이 완전히 다져졌다. 그리고 아직은 보다 신약성서적인 교회생활과 신앙정신을 구현하는 교회를 향하여 그들의 신앙과 행습, 교회행정과 조직, 교단의 정치와 사업은 계속해서 기틀을 더 다지고 있다. 80년대의 위대한 침례교회 성장은 바로 70년대의 이러한 교단생활의 기틀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제 80년대에 이르러 한국의 침례교단은 선교 100주년에 즈음해 2,000여개 교회로 확장되었다. 1990년대에 세계침례회대회의 서울개최를 위하여 한발 한발 믿음과 성장의 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침례회 총회 본부도 반세기 동자동 시대의 막을 내리고 구로구 오류동 115-1에 1,000여평의 대지,1,180평의 건물을 매입하여 이전, 오류동 시대를 열었다.
○ 동아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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