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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무조건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하나님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모든 것을 계획하셨는데 이것을 총칭하여 하나님의 작정(foreordination)이라고 한다. 작정은 전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이다. 그 하나님의 계획 중에서 가장 핵심은 인간의 구원 문제이다. 그것을 "선택"과 "유기(遺棄)"라고 한다. 즉 선택된 자는 천국이요, 유기된(버려진) 자는 지옥이다. 이라고 한다. 예정은 구원에 관한 용어로서 예정은 하나님의 작정의 일부이며 그것은 선택과 유기로 나눈다. 이외의 총체적인 하나님의 섭리는 "작정"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선택은 곧 예정이다. 하나님은 어떤 조건으로 선택하시는가? 무조건(Uncondition)이다. 고르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적이다. 선택이란 말은 조건을 따라 고른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예정된 자를 찾아 뽑아내는(pick up) 것을 말한다. "잃은" 양을 찾으며,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것이다(눅 15:1-). 즉 "절대적 예정"이요 "절대적 선택"이다. 인간의 상대적 평가와는 관계 없는 하나님 자신의 일방적인 계획이다. 아무 조건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아니라, 인간과의 공동사역(共同使役)이 되어버린다. 알게 되어서 그를 구원하기로 예정하셨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 2:8-9)." 하나님이 인간을 선택한다는 말은 옳지 않다. 인간 사회에서는 그들의 논리가 통할 수 있다. 사람들이 상점에서 물건을 고를 때 그 물건의 조건(상태)을 보고서 고른다. 그러나 믿음은 무조건적인 선물이다. 그러므로 알미니안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주권, 절대예정, 절대선택을 송두리째 거부하려는 불효한 자녀들이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그렇다면 인간 중에서 하나님 앞에 나설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자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선택이 인간의 조건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나아가겠다는 신앙의 고행행위일 뿐이다. 미친 듯이 부르짖고, 울고, 군중심리에 휩쓸려 황홀지경에 빠진 다음 성령충만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사상이 버려지지 않는 한 그들의 신앙은 불안하며, 유대인의 제사행위에 지나지 않으며, 그러한 집회는 교인들에게 무속신앙의 열정만 더해줄 뿐이다.
해주시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아무리 찾아보아도 내게는 선택받을 만한 조건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다. 무조건 선택이 주는 결과는 "절대 안심"이다. 3.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1) 제한속죄는 특별한 구속(救贖)이다. 타락한 죄인은 하나님의 무조건 선택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다.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흘림은 누구를 위한 희생이었는가? 그것은 선택된 자에게만 해당되는 희생이다. 이것을 제한속죄(Limited Atonement)라고 부른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은 특별한 구속(救贖)인 것이다. 하나님의 선택 자체가 제한이요 특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선택된 특별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입은 자이다. 그것은 오직 무조건 선택과 피흘림의 은혜이다. 입은 자이다. 그것은 오직 무조건 선택과 피흘림의 은혜이다.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갈 1:3-4)" (요 10:11)." 아담 이후의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들이 인용하는 성경은 다음과 같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었은즉(고후 5:14-15)"
그러나 여기에서 모든(every)의 의미는 "모든 인류"가 아니라 "택한 자 모두"의 의미이다. 말씀에서 "다"라는 말은 앞의 "너희"를 의미한다. 즉 "택한 자 너희 모두 다"라는 뜻이다. "믿는 자마다(Whoever believes in Him)" 구원을 받는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죽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면 예수 믿지 않고 죽은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가 실패한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공로가 실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단설이다. 만인구원이라면 믿음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구태여 의롭게 살려고 발버둥칠 것도 없다.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를 감격하게 한다. 감사하게 한다. |
4. 불가항력적 은총(Irresistible Grace) 성령께서 구원을 실시하시는 그 힘은 크고 완전한 효과가 있어서 누구도 거부하거나 그것에 저항할 수 없는 힘이다. 이것을 유효적 소명(有效的 召命)이라고 한다. 그물에 선택된 고기가 반항할 수 없이 끌려오듯이 하나님께 선택된 성도는 기어코 그 품 안에 들어오고야 만다.
결국 인간이 가진 믿음이 하나님의 은혜를 만나서 구원을 이룬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알미니안주의는 "인간이 먼저 회개하고 믿어야 그 다음에 그것을 보신 하나님이 중생을 시켜준다."는 잘못된 구원관을 만들어냈다. 선물"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모독하는 주장이다. 인간은 믿게 해야 믿을 수 있고, 회개의 영을 주셔야 회개할 수 있다. 즉 중생된 자만이 회개하고 믿을 수 있다. 이것이 칼빈주의 신앙이다. 내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은 전적으로 내가 도저히 반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이다. |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5-39)." 들어가고야 만다. 이런 원칙을 "성도(聖徒)의 견인(堅忍)" "궁극적 구원(Ultimate Salvation)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하여 오래 참으시는 사랑과 인내에 근거를 둔 표현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언덕을 오르는 아이는 자기가 아버지를 붙잡고 있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실상은 아버지가 아이의 손을 더욱 굳게 붙잡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견인은 그래서 안심이다. 하나님은 일단 선택한 성도는 놓았다 붙들었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성도를 끝날까지 계속해서 붙잡고, 믿게 하고,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 "그 눈이 불꽃 같고(계 1:14, 19:12)",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출 13:21-22),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하신다(시 23:4).
궁극적 구원이다. 성도는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강력한 힘이 나를 붙들어주지 않으면 자력(自力)으로는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할 수 없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은 하나님께 절대 의지하는 신앙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자녀였다가 다시 마귀의 자식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을 불안하게 하는 교리이다. 주권(主權) 위에 세워진 한 고리에 메어진 동일한 사상이다.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떼어내면 아무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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