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타와 마리아 집의 그리스도, 베르메르 作(165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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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야속한 말씀입니까? 그분은 평소에 무거운 짐 진 자 모두 내게 오라고 하신 분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분은 왜 무거운 짐을 진 자의 하소연을 무시한단 말인가요? 그 의문을 베르메르는 그림을 통해 풀어줍니다.
이 그림에는 세 명의 등장인물이 나옵니다. 빵을 들고 있는 마르타와 턱을 괴고 앉아 있는 마리아와 손가락으로 마리아를 가리키며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입니다.
마르타의 모습은 동적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의 배고픔을 달래는 빵을 들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발랄하고 밝은 노란색 옷을 입고 있습니다. 활동하는 사람을 대변해주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마리아의 모습은 정적입니다. 그녀의 시선은 오로지 예수님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눈빛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시선은 언니를 향하고 있지 않은가요? 그분은 눈으로 마르타의 마음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도 어느새 언니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사랑의 색인 붉은색 상의와 차분한 색인 청록색 치마를 입고 있습니다. 명상하는 사람을 대변하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두 사람의 관계를 잘 이끌고 계십니다. 마르타가 동생에 관해 예수님에게 불평을 늘어놓지만 그분은 그녀가 동생의 참모습을 이해하도록 손가락으로 마리아를 가리킵니다. 마르타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눈빛은 슬프기까지 합니다. 그분은 마르타에게 간절하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야,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느라 난 너무 지쳤어. 이런 나에게 필요한 게 뭘까? 빵일까? 그것보다는 힘들다는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야. 마리아는 그 몫을 선택한 거야. 마르타가 나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것을 볼 수 있을 거야." 그래서일까요? 마르타는 서서히 감은 눈을 뜨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사랑의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게 이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습은 그림자가 전혀 드리워져 있지 않습니다.
이 그림은 예수님이 두 자매를 연결하는 삼각구도로 안정감을 줍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빵이 놓여 있습니다. 빵은 그리스도의 몸이며 가톨릭 전례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베르메르는 그리스도의 몸인 빵을 중심으로 모두가 하나 되기를 갈망하며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가톨릭은 구원받기 위해서는 선행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베르메르는 그 고민을 이 그림을 통해 해결해 줍니다. 그림의 예수님은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고 했으니까요.
믿음과 선행, 기도와 활동으로 대변되는 모든 이중성은 구원에 이르는 두 가지 조건입니다. 믿음의 증명은 선행이고, 선행의 결과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는 활동은 무의미하고, 활동 없는 기도는 공허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기도하며 일을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