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 족보서 역문 신유간(1801)
우리나라 명문거족은 반드시 각기 족보가 있다. 그 씨족의 근원이 멀수록 갈래가 나누어지기도 하고 갈은 성에 관향이 다르기도 한 것은 더러 보첩이 다기혼잡한 폐단이기는 하나 비록 족보에 밝혀져 있다 해도 미약하게 이어오면 어찌 빛을 낼 수 있으리오.
안씨의 죽산파는 죽성군에 이봉(관향지를 옮겨 봉함)된데 비롯 된 것이어서 실은 순흥에 근원한 것이니 회헌 문성공의 후예임이야 일반이다.
아! 죽성군 후로 학덕과 관작이 대대로 이어졌으니 이재공은 문장이 목은(문정공 휘 이색)의 추중(중히 여김)한 바요 둔암공(휘 축)은 덕망이 하서(문정공 휘 김인후)와 석천(휘 임억령)과 갈피를 같이 하였으며 천곡공(휘 억)은 충의로 나라의 포상을 받았고 이병재(휘 여해)는 독실한 학문으로 어진 스승의 칭찬을 받았으니 진실로 장한 이들이다. 더우기 은봉선생(문강공 휘 방준)의 도학절의에 이르러서는 실로 선대를 더욱 빛내고 후손을 깨우쳤으니 더욱 장하지 아니한가. 다만 죽성군 이상 세대를 고징하지 못하므로 보첩간행을 못하여 온 문중의 오랜 한이더니 이제 의논이 이루어져 족보를 간행하니 참으로 잘된 일이다. 마침 순흥 구보가 나와 비로소 그 비조이하 육세의 세계를 알게 되어 이를 근거삼아 전하지 못한 세대를 이을 수 있으니 또한 다행한 일이 아닌가.
은봉 5세손 창훈보가 그 아들을 보내 나에게 서문을 청하기에 조용히 생각하니 족보간행은 오직 정자와 장자 그리고 구양수 소순 같은 이들이 말한 의의에 바탕한 것이어서 충의의 확립은 나라에 유익하고 효도와 공경하는 마음이 유연(뭉클 일어나는 모양)히 일게 된다는 것은 적실한 논리가 아닌가 대개 이러한 족보이기에 동보자는 명절이나 화수 모임에서 서로 권면하고 돈독을 더하지 않겠는가.
나 일찌기 앞의 수보의 의의에 마음을 기우렸고 이제 느낀 바 깊으기로 이와 같이 기록한다.
숭정후삼신유(순조원년 1801년) 은진 송환기 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