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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 십대살객(十大殺客) - 01
사공운은 자신의 청강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사제라는 소년
이 전해준 검은 등뒤로 대각선을 그리며 메어져 있었다.
그의 눈에 쏘아져 들어오는 살객 두 명의 그림자가 보였다. 마치 허
공을 비행하듯 한 명은 오른쪽으로, 한 명은 외쪽으로 검을 들고 내쳐
오는 자세는 단번에 사공운을 두 쪽으로 가를 듯한 기세였다.
순간 사공운의 그림자가 흩어지는 듯 하더니, 그들의 가운데로 돌진
해 들어갔다. 그리고 그의 신형이 그들 사이로 비켜 지나가는 순간,
그의 검이 약간 비스듬하게 수평으로 그어졌다.
맑은 청색의 서기가 반짝였다. 사라지며 "털썩" 하는 소리가 들렸다.
사공운의 뒤에 쓰러진 두 살객은 정확하게 심장이 쪼개져 죽어 있었
다. 이는 소천 대검식의 청기종횡단점(淸氣縱橫斷點)이란 초식으로 이
를 펼칠 수 있다 함은 바로 검기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의 사부인 유지학은 청기종횡단점(淸氣縱橫斷點)의 초식을 설명함
에, 의(意), 기(氣), 신(身), 검(劒), 형(形)이 오위일체가 되어 검을 그
흐름에 놓으니 일수유에 바위를 자르고, 가장 단순한 형으로 만변(萬
變)을 제압하며, 검이 닿지 않아도 쇠가 베어진다고 했다.
강하고 빠른 초식에, 무슨 특별한 변이 필요하겠는가? 이 초식에 있
어서 변이란 찌르고 가르는 것이 전부였다.
단지 기의 흐름을 검에 조화롭게 융화시켜 검기로 검을 대신한다는
점이 달랐다.
사공운은 자신의 중단전에 고통이 있은 후, 넘치는 공력을 소천대검
식에 운용하면서 능히 이 초식을 완벽하게 운용하고 있었다.
앞에서 달려드는 살객은 검을 드는 순간 자신의 가슴을 뚫고 지나간
검기를 보아야 했으며, 좌우에서 달려드는 살객들은, 사공운의 검이 사
선을 그리는 찰라 허리가 양단되어 쓰러졌다.
보통, 일반적인 초식을 쓰면서 세네번에 한번씩 청기종횡단점(淸氣縱
橫斷點)을 사용하니 그 효율성은 더욱 높았고, 내공의 지나친 사용도
줄일 수 있었다.
살객들의 공격과 사공운의 활약을 지켜보던 대막투왕(大漠鬪王) 묵
가차가 자신의 옆에 있는 곰방대의 노인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곤, 저들이 생각보다, 잘 견디는 것 같은데 차라리 우리가 나서는
것이 어떻겠소? 더군다나 저 쪽엔 생각지도 않은 고수가 한 명 있구
료."
묵가차가 말하지 않아도 마곤이라 불린 노인의 시선은 줄곧 사공운
을 지켜보고 있었다.
"우리가 아니라도 저 꼬마와 막광, 그리고 저 미친개를 상대할 사람
이 있소이다. 그들은 지금 틈을 노리고 있으니 우리는 저들의 시선만
잡아 두면 될 거요."
묵가차는 마곤이 하는 말뜻을 알아들었다.
"10대 살객들이라면 믿을 만 하지."
묵가차가 만족한 웃음을 머금었다.
"하지만 도대체 누구일까?"
묵가차는 사공운의 실력에 상당히 놀란 듯 했다.
마곤 역시 사공운의 실력에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사공운은 앞으로 한발을 내밀고 검을 가슴 앞에 세웠다.
일반적으로 어떤 초식을 펼치는 데 있어, 검을 가슴에 세우게 되면
내기를 검에 모아 검로를 개척하기엔, 더 없이 좋은 자세였다.
살객들은 모두 벙어리 같았다. 아니 사실 그들은 모두 혀가 없는 벙
어리들이었다. 그렇기에 검에 몸이 두 동강이 나도 신음을 하지 않았으
며, 공격을 하며 기합소리 조차 없었다.
한 명의 살객이 정면에서 유령처럼 달려들었다.
사공운의 검이 직선으로 찔러갔는데, 이는 섬광일형(閃光一形)의 초
식이요. 검이 가슴 복판을 관통하고 들어가자, 한발로 상대를 쳐내며
검을 뽑아 상방(上方)에서 달려드는 살객의 검을 막은 것은 상방보간
(上方補干)의 초식이었다.
상대의 검과 방어하는 사공운의 검이 충돌하려는 순간 그의 검은 비
룡18쾌검으로 변화하며 비룡탄경(飛龍탄경)의 초식으로 상대의 검을 통
겨내었다.
검에서 퉁겨진 탄경에 내장이 상한 상대가 비틀거리자 사공운은 지
체하지 않고 자신의 검을 상대의 심장에 밀어 넣으려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세 명의 살객이 전방과 좌우에서 사공운의 사혈을 노리고 공
격해 왔다. 특히 전방의 살객은 사공운이 죽이려 했던 살객의 배후를
교묘하게 돌아와 공격하였는데 그 유연함이 단연 발군이었다.
공격을 방어하려던 사공운은, 가슴을 스치는 섬 짓한 기운을 느꼈다.
'뭐지.'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한 가닥의 살기가 감지 된 것 같았는데, 바로
사라졌다. 사공운은 그 살기의 출처가 최소한 지금 자신을 공격하고 있
는 세 명에게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비록 그 세명 중 한명의
실력이 발군이긴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이는 사공운의 직감이었다. 어
디서 기인한 직감인지 모르지만 그는 자신을 믿었다.
'누군가 나를 노리고 있다 그것도 극상의 살수다.'
누군가가 자신을 노리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사공운은 우선 세 명의
적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 살수는 그 틈에 자신을 노릴 것
이다.
사공운이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며, 찔러가던 검을 돌려 크게 원을 그
렸다. 그러자 그의 검에서 쏟아져 나온 검기가 우산을 만들며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 검기들은 공격해오는 세명과 원래 공격하려 했던 또
한명 살객의 사혈만을 노리고 비산하였다.
공격해오던 세 명의 살객들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날
아온 검기는 이미 그들의 몸을 난도질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하나의 검기가 섬전 처럼 뻗어 나와 사공운의 미간을 공격해 왔
다.
사공운은 직감적으로 지금 뻗어온 검기가 조금 전 자신이 느낀 그
살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무엇인가 석연치
않았다.
'지금 공격자는 어제 죽인 10대 살객과 비교해서 차이가 난다.'
이는 사공운에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사공운은 몸이 팽이처럼 돌아가며 그의 검을 피하면서 청기종횡단점
(淸氣縱橫斷點)의 검식으로 자신의 검을 앞으로 찔러 넣었다.
3척이나 뻗어나간 검기는 정확하게 상대의 단전을 파괴하고 관통해
들어갔다. 근데 바로 그 순간 공격을 당한 상대의 등뒤에서 갑자기 검
하나가 튀어 나와 사공운을 공격해 들어왔다. 시간과 거리상 도저히 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죽어 가는 살객의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또 다른 살객의 검은 사정
없이 사공운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눈을 크게 뜬 사공운의 얼굴을 보면
서 희열을 느끼던 살객의 눈이 점차 일그러졌다.
칼에 심장을 찔린 사공운의 신형이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화... ...환술"
놀란 살객이 급하게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사공운의 그림자가 바로
그의 옆에서 나타나며 그의 목을 그어가고 있었다. 소리도 없고 기세조
차 없는 검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빠르고 날카로웠다.
사공운이 자신의 사제라는 소년에게 밭은 구결 속에 들어 있는 바로
그 검법이었으며, 바로 그 안의 신법이었다.
전면을 주시하며 놀라던 살객은 목에 검이 스치고 나서야 자신의 죽
음을 예감했다.
10대 살객 중 한 명이 어이없이 죽어가자 곰방대를 들고 있는 노인
마곤의 얼굴이 푸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 바로 조금 전 저 청년이 펼친 무공은 유령대제의 유
령검법 같은데."
유령검법이란 말을 들은 묵가차는 조금 움찔하는 것 같았지만, 제법
태연한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그의 한 손이 자신의 목을 쓰다듬고 있
다는 사실은 자신,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유령검법이라니, 그럼 저 새파란 애송이가, 강호 10대 고수 중 한
명이라는 유령사혼검이란 말이요."
"그건 아니지만, 조금 전 그 검법은 분명 유령검법 같았소이다."
"현재 유령검법의 전인은 유령사혼검 한명 뿐인 줄 알고 있소. 그러
나 저 애송이가 그라고 하기엔 왠지 좀... ..."
묵가차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강호 10대 고수란 말은 아무나 함부로
불릴 수 있는 말도 아니거니와, 실질적인 실력이 되지 않는 다면, 그
자리에 오르기란 불가능한 자리였다. 비록 청년의 무공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지만 10대 고수 중에 한 자리를 차지하기엔 많은 무리가 있었다.
"대체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고수란 말인가? 우리에게 이런 엉터
리로 정보를 주다니."
살문의 10대 살수 중 3번째인 사인마곤(死印魔棍) 오누치는 기가 찼
다. 대체 어쩌자고 저런 고수가 있다는 정보를 놓쳤단 말인가?
"아무래도 저 청년을 상대하려면, 나나 투왕이 직접 나서야 할 것 같
소."
대막투왕 묵가차도 긍정의 눈빛으로 오누치를 바라보았다.
사방에서 몰려오는 살수들의 능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그러나 그 살
수들을 상대하는 청룡당 호위 무사대의 활약도 결코 그에 못지 않았다.
특히 사공운의 활약은 옆에서 함께 싸우는 동료들조차도 경악할 정도
였다.
용설아의 곁에서 간간이 전투에 참석하거나, 혹은 위험에 처한 동료
들을 도와주고 있던, 하소란과 육사헌은, 사공운의 활약을 보면서 갑자
기 자신의 무공에 회의가 들 정도였다.
"저 정도면, 당주님 이상이지 않을까?"
하소란이 조금 허탈한 음성으로 말하자, 육사헌은 막 자신에게 달려
드는 살객 하나를 처리하면서 말했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도대체 저 검법과 신법은 뭐지, 마치 유령인간
이 싸우는 것 같아."
하소란은 두 자루의 비수를 던져 장평을 협공하려던 두 명의 살객을
위협하면서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저런류의 무공으로 최고봉이라면 아무래도 유령대제의 무공뿐인데,
사영무가 그의 제자는 아니니, 도대체 감을 잡을 수가 없네."
"아니란 단정은 못 하잖아."
"이미 용부에서는 유령대제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것을 조사해 놓고
있는데, 그의 무공을 이은 자는 10대 고수 중 한 명인, 사혼유령검뿐이
라고 했어. 사영무가 10대 고수 중 한명은 아니겠지."
육사헌은 말을 하지 못했다. 아니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 달려
드는 두 명의 살객이 더 급했던 것이다.
막 두 명의 상대를 처리하던 사공운에게 막광의 전음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안되겠네, 자네와 내가 앞장을 서서 포위망을 뚫고 나가야
할 것 같다.'
'그게 옳을 것 같습니다.'
막광은 살객들을 상대하면서도 호위무사들에게 전음으로 작전을 지
시했다.
사공운은 막 앞으로 달려드는 두 명의 상대를 보면서, 자신의 검을
대각선으로 휘둘러 막아내었다.
'어디선가 10대 살객들이 숨어 있다. 나를 노렸다면 막당주님이나 가
장 위협적인 운자개 호위장님도 역시 노리고 있을 것이다.'
사공운은 깊은 호흡을 들이키고, 자신들을 포위 공격하는 살객들을
보았다. 총 360여 명 중, 300여 명이 남았었고, 청룡당에서 여자 호위
무사 한 명이 죽어 이제 여자는, 용설아를 빼곤, 하소란과 한 명의 호
위무사가 남았다.
'그렇다면 10대 살객이 끼어 들기 전에 급작스럽게 행동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이미 사공운을 비롯한 청룡수호대는 서로 전음으로 의견을 주고받았
으며, 10대 살객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주고받은 다음이었다.
사공운에게 10대 살객 중 한 명이 죽고 나자 나머지 10대 살객은 몸
을 숨기고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불안해하던 중이었다.
어떤 식으로 상대를 뚫고 도망갈까? 사공운이 궁리하고 있을 때였다.
'뒤로 도망쳐라'
전음의 목소리는 너무도 귀에 익숙한 목소리였다.
'사부님.'
설마 지금과 같은 장소에서, 사부의 목소리를 들으리라고는 생각지
못 했던 사공운은, 반가움과 안도의 마음을 동시에 느꼈다.
사공운이 자신의 동료들에게 전음으로 사부의 지시를 알리자 청룡당
호위대는 모두 희망을 지니고 더욱 힘을 내게 되었다.
"이얍" 하는 고함과 함께, 막광과 운자개의 신형이 앞으로 튀어 나가
며, 묵가차와 오누치를 향해 날아갔다.
살객들이 놀라서 그들의 앞을 막는 순간 그들의 검에서 밝은 빛이
발하더니 서너 명의 살객을 단 한번에 가르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
간 이미 오구와 육사헌이 앞장을 서서 반대편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먼저 하소란의 은형비검 네 자루가 날아갔고, 그 비검을 피하는 상대들
을 오구와 육사헌의 검이 가르고 지나가며 앞으로 퉁겨 나갔다. 동시에
하소란이 용설아의 손을 잡고 그 뒤를 따랐다.
맨 뒤에는 막광과 운자개, 그리고 사공운이 살객들을 공격하며 그들
의 공격을 막았다.
"막아라!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오누치가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몸을 날리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몸을
날리기도 전에 갑자기 멈추고 말았다.
사공운 일행을 가로막고 있던 살객들 30여 명이 무더기로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뿌연 연기 같은 것이 자신들을 덮쳐온다.
"피해랏."
오누치와 묵가차가 놀라서 옆으로 몸을 날렸고 청룡당의 뒤를 쫓던
살객들이 분분히 몸을 회피하였다. 하지만 그 뽀얀 연기를 맞은 살객들
은 쓰러지지 않았고, 멀뚱한 정신으로 눈을 꿈벅거리며 오누치를 보고
있었다.
참으로 어이없게 속은 오누치가 이를 갈았다.
"이...이.."
오누치가 분노에 치를 떨 때, 사공운 일행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쫓아, 빨리 쫓아라."
오누치가 고함과 함께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갔다. 그러나 채 50여 장
을 못 가서 우뚝 서고 말았다.
갑자기 만장 절벽이 솟아나 그들을 가로막은 것이다.
"기문진이다."
오누치가 허탈하게 말했다.
자신들 역시 살객들이니 필연적으로 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보
기에도 예사롭지 않은 이 진을 뚫고 나면, 용설아 일행은 100리 밖을
달리고 있을 터였다.
오누치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
사공운을 비롯한 일행이 앞으로 나가지 않고 뒤로 도망치자 얼마 안
가서 갑자기 거대한 절벽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분명 새벽에 지나
칠 땐 없었던 것이었다.
모두 걸음을 멈출 때, 사공운의 신형이 절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것을 본 다른 일행도 사공운이 사라진 절벽으로 조심스럽
게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절벽엔 어떤 감촉도 없었고,
절벽으로 보이는 듯한 벽을 통과하고 나자 바로 숲이 나왔다.
숲 한쪽에 사공운이 공손한 자세로 서 있었으며, 사공운의 앞엔 제법
연세가 들어 보이는 청수한 모습의 노인이 서 있었다.
막광이 얼른 노인의 앞으로 가서 정중하게 포권을 하였다.
"청룡당을 대신해서, 도움에 감사 드립니다. 크신 은혜는 후에 두고
두고 갚겠습니다."
노인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빨리 가십시오. 난 잠깐의 시간을 끌 수 있을 뿐이니. 그 동안에 최
소 50여리 밖엔 가 있어야 합니다. 이 진은 급한 대로 대충 만들어 놓
은 것이기에 한 시진 이상은 버티기 무리입니다. 빨리 가십시오."
"어르신."
"넌 뭐 하는 게냐? 빨리 떠나거라, 난 때가 되면 알아서 몸을 피할
것이니, 내 걱정은 하지 말거라."
"사부님."
사공운이 자신의 사부를 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일 때, 병서생 유
지학이 막광을 보았다.
"내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말씀하십시오."
"내가 저 녀석에게 금제를 가 한 것이 있어, 이제 얼마후면 그 금제
가 풀리며, 큰 고통에 시달릴 것이외다. 그때 누구라도 저 녀석을 건드
리면 저 녀석은 즉사를 면치 못할 것이요. 그 점을 꼭 명심하고 보살펴
주십시오,"
막광과 청룡당 호위무사들, 용설아가 놀라서 병서생을 보았다. 사공
운 역시 자신의 사부를 본다.
"모든 것은 그 금제가 풀리면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부디 현
명하게 행동하길 바란다."
병서생은 빠르게 몇 개의 돌을 옮겨 놓은 다음, 마지막으로 용설아를
보았다. 마침 병서생이 몇 개의 돌을 옮겨 놓음과 동시에 살문의 무리
들이 나타나 이쪽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그들은 이 쪽이 안
보이는 듯 몹시 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돌 몇 개가 옮겨지고
나자 갑자기 사람들 주위로 안개가 번져 나왔다.
모두들 놀란 눈으로 유지학을 본다.
용설아는 이 신비한 광경에 사방을 돌아보다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병서생 유지학을 보았다.
"소녀가 어르신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용설아가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자, 유지학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어찌 은혜라 하겠는가? 모든 것이 돌고 도는 것을, 어서 피하거라."
사부의 말함이 무슨 뜻인지 사공운이 모르겠는가? 가슴이 찌르르 하
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무엇들 하는 것이냐? 어서 떠나거라!"
"사부님... ..."
"네 이놈 어서 떠나라 하지 않았느냐, 난 너희만 없으면 언제든지 몸
을 피할 수 있으니, 걱정 하지 말거라."
"보중하십시오. 어르신."
유지학의 준엄함 호통에 사공운과 청룡당의 호위무사들은 용설아를
데리고 부랴부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사공운은 짧은 거리에서 두 번이
나 뒤를 돌아보고 앞으로 달렸다.
제8장 : 십대살객(十大殺客) - 02
그녀는 아름다웠다. 부드러운 듯 하면서도 기개가 있어 보이는 눈은
지혜로워 보였다. 차가운 표정의 얼굴은 그녀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
는 위엄을 주었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이런 여자가 얼마나 상대하기 까다로운지 잘
안다.
용설향은 그런 여자였다.
"실패했군요. 아니 아직도 용설아가 살아 있다니, 생각보다 시간이
길어졌군요."
마치 남의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만약 사정을 모르는 누군가가
옆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지금 하는 이야기를 들었으면, 그녀와 아무
관련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었다.
팽예린은 웃었다.
용설향을 너무 잘 아는 그녀에게 지금 그녀의 모습은 결코 낯 설은
모습이 아니었다.
"아가씨의 걱정이 결국 들어맞았어요. 사공운이란 자, 정말 대단한
실력을 지닌 모양이에요. 십대 살객 중 한 명이 그의 손에 죽을 줄, 누
가 예상했겠어요."
팽예린의 투덜거리는 듯한 말에, 용설향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겹친
다.
"언니, 그가 누구인지 몰라도 우리에게 큰 방해가 될 것 같은 직감이
들어요."
팽예린은 아직까지 그녀의 직감이 틀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강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그래 보았자, 얼마나 견디겠어요. 난 아가씨를 믿어요."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기회를 놓칠 순 없겠죠?"
그녀는 마치 스스로 다짐하듯이 말했다. 한때는 언니라고 불렀었고,
무척 친한 사이었던 용설아였다. 그러나 세월은 둘 사이를 이렇게 갈라
놓았다.
시간은 그녀에게 몰라도 될 것을 가르쳐 주었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게 하였다.
팽예린은 그녀의 단호한 말에 활짝 웃었다. 가지런한 그녀의 이가 건
강하게 내 비친다.
그녀는 조금 경직된 분위기를 인식한 듯 화두를 바꾼다.
"공부수호대가 개입할 줄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공손기가 그리 쉽게
죽으리라 생각진 못했어요."
팽예린은 공손기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언니, 공손기는 자살한 거에요. 더 이상 자신이 살아 있으면 동료들
을 배신할 수밖에 없겠고, 협조를 안 하자니, 아들이 걱정되고, 그로서
는 그것이 최선이었겠죠."
팽예린은 용설향를 보았다. 원래부터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지만, 지
금 보는 눈빛은 또 달랐다. 그녀는 용설향이 공손기의 죽음을 예측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공손기의 사람됨과 그의 사정을 추측한다면 용설아의 지혜로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팽예린의 얼굴에 다시 한번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청룡당이 강하
면 강할수록, 오래 살아 버티면 버틸수록 흥이 났다.
자신이 시집하나는 잘 왔다고 생각했다. 특히 배짱이 맞는 용설
향을 아가씨로 맞은 것은 자신의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청룡당의 호위무사들과 용설아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그들이 상대하기엔 용설향의 치밀함과 10대 사령 중의 5
사령, 그리고 살문은 너무 강했다.
공문수호대가 도와 준다고 하지만, 그 들 역시 오래 버티진 못할 것
이다. 그녀가 아는 10대 사령은 그 정도의 자격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들을 노리는 또 다른 세력이 있고, 그들이 투입한 인원 역시 자신들의
아래가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팽예린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공손명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공연히 그를 죽여 의심받을 필요는 없겠죠?"
팽에린이 웃음기를 머금고 다시 말했다. 그녀는 아주 즐거운 얼
굴이었다.
"아가씨, 또 다른 보고에 의하면 백수문의 백안귀가 죽었다고 하던
데. 청룡당 호위무사들 중 누가 죽였을까요."
용설향의 고개가 흔들렸다.
"언니,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청독
광견과 독편복들을 어떻게 속이고 접근했느냐 하는 점이에요. 그것을
알아내지 못하면 이번 일은 생각보다 더 쉽지 않을 거란 예감이 들어
요."
팽예린은 아차 하는 심정으로 용설향을 보았다. 미쳐 거기까지는 생
각지 못했었다.
용설향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인해, 호위무사대는 고양이를 죽여 호랑이를 부르는 꼴이
되었군요."
"노구의 형 노악은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인물에 집요한 인물이죠.
하지만 그들이야 어차피 우리 소관이 아니고, 물론 아가씨도 나름대로
또 다른 대비를 해 놓았겠죠?"
용설향이 팽예린을 보았다. 둘의 눈이 처음으로 마주쳤다. 그녀들의
눈빛은 아주 비슷하게 닮아 있었다.
살아 남은 청룡당의 호위무사들은 사흘을 달리고 또 달리며 싸우고
또 싸워야 했다. 모두 피투성이에 성한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살문의 고수들을 죽였는지 그들도 셀 수가 없었다. 그 중에 10대
살객 두 명이 사공운과 막광에게 죽었다.
사공운의 활약은 지켜보는 청룡당의 수호대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살문에서 느끼는 사공운에 대한 놀라움은
청룡당 호위무사들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일행의 앞을 막아서는 살문의 수하들은 대막투왕(大漠鬪王) 묵가차
와 살문의 10대 살객 중 3번째인 사인마곤(死印魔棍) 오누치가 올 때까
지 시간을 벌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들의 계획은 청룡당의 강한
저항과 예상치 못한 사공운의 힘에 의해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성과는 어느 정도 있어 살문의 본진이 청룡당의 턱 밑까지 쫓아오
고 있었다.
원래 지금쯤이면 회수를 건너야 할 시간이었지만, 살문의 방해로 아
직 반나절은 더 가야 회수에 도착할 듯 했다.
막광은 지칠 대로 지친 일행을 위해 걸음을 조금 늦추었다.
"모두 잠시 쉬었다 간다."
막광의 말이 아니더라도 이미 일부분의 사람들은 걷기도 힘든 상황
이었다.
모두들 자리에 앉자 오구가 사공운에게 다가왔다.
사공운은 오구를 보다가 그가 곁에 와 앉자, 가볍게 한 숨을 쉬며 물
었다.
"공손기님과는 친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오구의 눈 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공운은 거칠기만 한 오구의 눈가에 작은 물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그랬지.
"그 분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 주십시오."
오구는 잠시 동안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차분하게 이야기를 꺼냈다.
"그가 왜 철면이란 이름을 지니게 되었는지 아나? 그는 말일세, 나와
는 반대로 만석지기 부자 집안에서 태어난 도련님이었네. 어느 부자 집
에 여자만 내리 3녀를 낳았다가 네 번째에서야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 바로 공손기일세. 섬서성의 성도인 장안의 공손 가문이라면, 지금도
그곳에서는 가장 유명한 부잣집 가운데 한 곳이지. 원래 부자집 어른들
이 그렇듯 공손형의 부모들도 고집과 아집이 강했고, 특히 외동아들에
대한 집착이 강했네. 부는 있지만, 힘이 부족하다고 느낀 공손형의 부
모님은 공손형에게 어려서부터 무공을 익히게 하였지. 공손형의 부모님
들은 힘과 권력에 대한 집착이 생각보다 강했네."
"처음 돈을 모을 때, 힘이 없어서 당한 설음이 컸었나 봅니다."
"큰 정도가 아니라,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것으로 알고 있네."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돈이 있고 힘이 없으면, 힘있는 자들에겐 먹
음직한 고기에 불과 하겠죠."
"맞는 말일세, 그래서 공손형의 아버지는 자신의 딸들을 엄청난 지참
금과 함께, 힘과 권력이 있는 곳으로 나누어 시집을 보냈다고 하네."
사공운이 오구를 보았다. 그곳이 어디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 하더군."
오구가 자신의 흰 이를 들어내고 웃었다. 저 모습으로 어떻게 광견
살검이라고 불리게 되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하여간 공손형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만은 힘과 재력을 다 가진,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이었지. 공손기는 참으로 그의 부모가
바라는 대로 잘 하고 있는 듯 했었네, 그런데 문제는 공손형의 나이 18
세가 되던 때에 일어났네, 공손형은 자신이 다니던 무관의 절친한 동료
의 동생과 사랑에 빠진 것일세. 평범한 집안으로 뭐 하나 내세울게 없
었지만 그녀는 정말 아름다웠네. 둘은 소중하게 사랑을 키워갔고, 공손
형의 나이 20이 되었을 때, 부모님께 결혼을 승낙 받으려 하였네."
오구는 잠시 말을 끊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한데 당시 공손형의 아버지는 그를 고관대작의 딸에게 결혼시키려
고 이미 완벽한 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었네."
"그게 쉽지는 않았을 텐 데요."
"장안의 유명한 세도가 중의 한 명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아주 어
릴 때부터 공손형을 무척 따랐었다고 하네, 물론 그것도 송손형의 아버
지가 배려한 때문이었지."
사공운은 조금 뜻밖이란 표정으로 오구를 보았다.
"그랬었습니까? 그런데 공손 소호장님은 그녀를 싫어했었나 보군요.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해도 그 쪽 집안에서 쉽게 허락했겠습니까?"
오구의 입가에 묘한 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채 오척이 안 되는 단신에 얼굴은 박색이었고, 몸은 너무 비
대해서 봐주기 어려울 지경이었다고 하네. 물론 공손형이 그래서 그녀
를 싫어한 게 아니라, 그냥 동생 같은 기분이었다더군."
사공운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손기님이라면 그녀가 아무리 볼 품 없어도 박대하진 않을 것입니
다."
"맞았네, 그렇게 해서 문제는 불거졌고, 두 부자는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팽팽하게 고집 대결을 하게 되었다지. 서로 조금도 양보를 하지
않은 두 부자는 갈수록 서로 사이가 안 좋게 변하였는데, 생각다 못한
공손형의 부모는 사람을 시켜, 그가 사랑했던 여자를 납치하게 하였네,
그래서 공손형의 눈앞에서 그녀가 사라져 버린다면, 조금 방황은 하겠
지만, 마음을 돌리겠지 하는 생각을 한 것일세."
사공운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정말 최악의 선택을 하였군요. 공손기님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구의 입가에 씁쓸한 웃음이 걸렸다.
"자식의 성격을 의외로 부모가 잘 모르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가 바
로 그런 경우라 할 수 있겠지. 여하간 그녀를 납치한 녀석들은, 마침
이상한 기미를 눈치채고 달려온 공손형과 그 친구에게 쫓기게 되었네,
급한 김에 청부자들은 그녀의 두 다리를 망가트려 놓고, 도망해버렸
네."
사공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설마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왜 공손기가 자신에게 자신의 부인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는
지 알 것도 같았다.
"공손형은 그 일이 있고 나서, 자신의 부모와 절교를 선언하였고, 그
날로 그녀를 업고 섬서성 장안에서 산동성 제남까지 와 버렸다지. 그
후 막광 당주님에게 발탁되어 소호장이란 직책까지 올랐왔던 것이네."
사공운은 자신을 대신해서 죽은 공손기를 생각하자 다시금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어디 그 뿐이랴 한쪽에서 조용히 오구의 이야기를 듣던 호
위 무사들도 숙연한 표정이었고, 용설아는 자신을 지키다 죽은 그의 모
습을 생각하다 미안한 마음을 이기지 못했다.
"그는 그 일이 있고 부터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웃지 않았고, 철면이
란 별호를 얻게 되었는데, 그 후로도 절대 자신의 소식을 부모에게 알
리지 않았네. 특히 자신의 부인이 당시에 얻었던 지병으로 죽고 나선,
더욱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였었지. 하지만 혈연이란 것이 그리 쉬운 겐
가? 가끔 자신의 부모님을 걱정하는 말을 자신도 모르게 하곤 하였네."
하늘거리는 바람도 분위기에 눌린 듯 잠잠해졌다.
오구는 오구대로 용부에 혼자 계신 홀어머니 걱정에 침묵하였고, 다
른 호위무사들 역시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모습들이었다.
사공운은 자신을 친절하게 대해주던 공손기를 생각하고 더욱
숙연해졌다. 태어나서 아영과 사부를 제하고는 처음으로 따뜻함을
느꼈던 사람이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사공운이 조금 큰 목소리로 물었다.
"아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명아, 말이군. 명아의 슬픔이 클 거야! 명아는 태어나면서부터 오른
발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네, 이제 아버지 마저 잃었으니... ..."
오구가 제대로 말을 잊지 못하자,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하고 있었던
막광이 힘있게 말했다.
"명아의 일은 걱정하지 말게 내가 양자로 삼아서라도 훌륭하게 키우
겠네."
사자검 운자개도 나섰다.
"내가 그에게 무술을 좀 더 체계적으로 가르치기로 하지.."
사공운은 다행이란 생각과 함께 공손기가 평소의 생활이 어땠으며
인간관계가 어땠는지 더욱 깊게 알 수 있었다.
용설아 역시 마음이 조금 놓인 듯 막광과 운자개를 바라본다.
자신을 위해 회생한 사람을 위해, 지금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그것뿐이라는 게 서글펐다.
공손기를 위해 대신 고마워해야 하는 것.
사공운 역시 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공손기의 후사가 완전하게 해결
되는 듯 하자 기쁜 빛을 띠었다.
"공손기님을 대신해 두 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감사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일세."
"암 당연한 일이지."
막광과 운자개의 말에 사공운은 큰짐을 던 느낌이었다.
이제 조금 마음이 개운해진, 그는 한쪽에 서 있는 용설아를 보았다.
그녀를 스치듯 본 사공운은 멍하니 하늘을 보았다.
'아영 이제 난 어찌해야 한단 말이요.'
사공운은 약 일각동안 생각에 잠겼다. 잠시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오
자 용설아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처지가 대비되며 마음이 심란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사공운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였다.
사공운의 모습을 지켜보던 막광과 오구는 그가 무엇인지 고민에 빠
진 것을 알았다.
"무슨 걱정인가?"
막광의 물음에 사공운은 용기를 낸 듯 막광을 보았다.
"당주님 무엇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해 보게."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부인이 머리를 다쳐 기억을 잃고 아주 부자집의 양녀가 되었습니다. 남
편은 겨우겨우 그녀를 찾았지만, 차마 자신이 남편이라 말하지 못했습
니다. 자신이 나타나면, 그녀의 행복이 깨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
로부터 남편의 고민은 계속 되었죠, 설사 자신이 나타나 내가 당신 남
편이요. 한다고 믿어줄지도 의문이었죠.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
까?"
사공운의 말에 모두들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과연 자신이라면 어찌
해야 하는가?
"당연히 말을 해야 합니다."
용설아의 말에 모두들 그녀를 보았다.
"물질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없습니다. 둘이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면, 그녀에게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지요. 그리고 그녀가 현재
행복한지 아닌지는 그녀 외엔 아무도 모르는 것이죠?"
사공운은 목이 메였다. 그 누구의 말보다도 그녀의 말은 그에게 힘을
주었다.
"내 생각도 아가씨 생각과 같습니다. 여자의 행복이란 사랑하는 사람
곁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게 마련이죠."
하소란이 거들고 나왔다.
"남자가 말을 하지 못한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네, 그
는 여자의 행복을 위해서란 핑계 속에, 그녀의 배경에 대한 열등감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르네."
막광의 말에 운자개가 곰곰이 생각하며 말했다.
"어쩌면 말일세, 남자는 여자가 자신을 부정했을 때 다시는 기회가
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에 용기가 안 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네."
사공운은 용기가 샘처럼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
면 말할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믿고 안 믿고는 나중이었다.
막광을 비롯한 청룡당의 호위무사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미지수였다. 그
러나 지금이 아니면 영원히 기회가 없을 거란 느낌은 그를 서두르게
하였다.
'그래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힘들다.'
사공운은 결심을 하고 일어섰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모든 시선이
그에게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