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약속한 대로 버스를 타고 화장장까지 가려 하였으나 롱아의 6숙이
차를 가져오는 바람에 가지 않으려던 집사람도 함께 편하게 갈 수있었다.
상주측에서 어려워 하며 극구 오지 마시라는 것을 한국인으로써 몇번 집에
초대받아 신세를 진 경험이 있어 도리에 맞지 않다고 우겨서 가게 되었다.
처음 경험이다 보니 어떻게 조문을 하여야 할 지도 모르고 부의금은 얼마나
해야 할 지를 몰라서 우선 봉투와 내지에 한국식으로 붓으로 이름등 내용을 써
가져가서 사돈과 상의를 해서 적당한 정도를 넣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는 데
여기서도 낭패를 보고 말았다. 화장장에 도착하여 조화를 산다는 핑게로
사돈의 팔을 끌어 그런 얘기를 하는데 내가 준비해 간 봉투를 뺏어 가서는
언제 준비했는 지 억지로 자신의 돈을 넣고는 아무리 돌려 주려 해도 받지를 않네.
마침 하늘에서는 굵은 빗방울이 뚝뚝 떨어 지기 시작하여 어쩔 수없이 함께
실내로 들어 갔다. 이렇게 난감한 상황을 어찌하면 좋을 지...
중국에서 경조사를 치르는 과정을 주마간산식으로 훝어 보았는 데
이 사람들 정말 돈 많이 들겠더구만, 지난 번 결혼식때도 형제간에
10,000원(1,800,000) 정도를 보냈다 하는 데 이번에도 아마 그 정도 액수는
지출하였으리라, 일반적인 경우 급여를 기준으로 서너달치 정도의 가치가 아닐까?
물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훨씬 부담이 크겠지만....
화장순서도 우리와 대개 비슷하게 운구해 온 망인을 미리 배정된 안치실에
모셔 놓고 사무실에서 일련의 수속절차를 거치는 데 이 곳에서 유골을 모실
함을 팔고 있어 대강 돌아 보며 붙여 놓은 가격을 보니 우리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가격표를 붙여 놓았다. 싼 것은 500원 정도이고 비싼 것은
수만원이나 한다.내가 본 중에 제일 비쌌던 것은 39,000원(7,800,000원)
나중에 사돈에게 물어 보니 수십만원 짜리도 있다 하니 그런 것은 갑부들이
과시용으로 사용하겠지만 말로는 소장가치도 있다 하니 참 내,
단 유골함은 우리의 도기와 다르게 향나무등 목재로 사각모양으로 짜 놓았다.
그 외에 화장비용등 여러가지 절차에 따른 비용이 발생되는 데 그 또한
부익부 빈익빈이라 안치실도 화려한 곳을 사용하려면 부담을 더 해야 하고
각종 절차에 별도의 비용이 추가로 지출되도록 되어 있었다.
남의 초상집에 가서 사진을 찍을 수없어 자세히 전하지는 못하지만
대충 둘러 본 내 소견으로는 이 곳에서의 비용이 우리보다 거의 서너배 이상
돈이 들 것같았다. 그렇게 수속을 마치고 조금 있으려니 안내원이 앞서고
조문객이 뒤 따르며 망인을 모셔 놓은 안치실로 이동하였다.
십 몇년 전인가 일본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 데 일본의 경우는
거의 서구화 되 있어서 삼일장의 마지막 날 영결식을 치루며 조문객도 영결식 당일
모두 참석하도록 연락하여 식장에서 의식을 진행하는 것으로 조문에 대신하였는 데
식 순서중에 망인의 관뚜껑을 열고 잘 분장된 망인을 마지막으로 배견하는 모습에,
당시 우리 장례문화엔 그런 절차가 아직 익숙치 않아서 약간 신선한 충격을
받았었는 데 요즘엔 우리도 장례식장에서 그런 과정을 거치는 경우가 일반화 된 것같다.
안내원을 따라 안치실에 들어 가니 상주가 모친의 윗쪽에 서서 분장된 망인의
마지막 모습에 명복을 비는 문상객에게 인사를 한다. 이 곳에 와서 처음으로 곡성이
들리기 시작한다. 대개 그렇치만 주로 여성들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
남자들은 눈만 꿈뻑거리기에 사돈에게 넌즈시 물어 보았다.
사돈의 설명으로는 공산당정부가 들어 선 이후 관혼상제의 절차나 방식등을
간편화 하도록 지도한 중에 세가지 일을 금지시켰다는 데 단을 만들어
중이나 도사들이 망령을 영도하지 말고,종이나 지전등을 태우는 것도 금지하고,
상복을 입고 향을 사르는 것도 금지시켰다 한다. 그래서 그런지 문상객들 옷차림이
거리를 지나 다니는 이 들과 다를 바없다. 붉은 색 옷만 입지 않으면 상관없다는 데
그래도 반바지에 슬리퍼는 과히 좋게 보이지 않으니 내 아직도 격식을 따지누나.
중국인들이 가만히 보니까 이전의 방식보다 훨씬 간편하고 부담이 없다 보니
강하게 단속을 하지 않았어도 지금같은 문화가 자연스레 정착되었단다.
그래도 노란 종이지전 뭉치를 든 사람들은 여전히 많더구만,
제사나 삼오제, 사십구제같은 건 없는 지 물어 보니 제사는 당연히 없어 지고
사십구제는 칠칠제라 해서 头七, 27,37하는 식으로 사십구일 되는 날까지
첫 째7일과 두 째7일은 상주가 지전을 태우며 스님이나 도사를 불러 경을 읊으며
혼령을 령도하는데 요즘은 하지 않는 집이 더 많고, 세 째와 네 째 7일은 대개 조카들이
와서 인사하고, 다섯 째는 혼령이 찾아 온다고 상주들이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공양하고, 여섯 째는 딸의 날이라서 망인의 따님이나 조카 딸들이 인사하고,
마지막은 단7이라고 우리 식으로 탈상의 개념으로 모든 장례의식을 마친다네.
그 후에 자손들이 음식을 준비해 친지나 주변 인척들에게 대접을 하는 데
요즘은 장례이후 적당한 날 식당등에서 손님들을 초대해 인사를 한다네.
예전에 읽은 책 중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를 이 사람들이 먼저 알았네.
그리 길지않은 중국생활이지만 이 들 생활의 한 단면을 볼 수있었던 것도
중국사돈 덕인데 그나저나 오늘같은 경우는 곤란하기에 돌아 오며 다시
되 돌려 주려 싱갱이를 해 봤지만 도저히 받지 않으며 내년에 한국에서
자신이 질 신세가 더 많다 하시니 그 쯤에서 포기해야 했었다.
오후엔 이번 주말에 이 곳에 올 딸이 필요한 물건을 찾아 태동에 다녀 왔다.
2013년 7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