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사화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 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 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 산군이 국고 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 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 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 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 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 하면서 그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 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 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 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 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 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 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 로 만든 척신 세력 중 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 아 귀양을 간 적이 있 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 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 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 인이자 연산 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 낸다. 폐비 윤 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 긴 적이 있어 그 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 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 을 한다. 임 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 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 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 다.
이 때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 는 일이라고 반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 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 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 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 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 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 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 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 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