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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랑길 무안 34코스 제1부
상수장3반-송정교차로-상수장-하수장-반룡-유수정-노두목-외현화
20230125
1.어둠 속 고행과 빛을 찾는 환희
맹추위가 몰아닥쳤다. 남쪽 무안(務安) 땅도 추위는 맹렬했다. 새벽 5시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 현해로 그랜드가든 앞에 버스가 도착하여 서해랑길 탐방객들은 우르르 내려 서해랑길 34코스 시작지점으로 향했다.
가로등 불빛은 거리의 어둠을 모두 걷어내지 못한다. 어둠은 짙게 거리에 차 있고 대지에 누워 있다.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도 물상들을 구별하고 먼 곳까지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국토 탐방의 목적으로 서해랑길을 탐방하는데 어둠 속에서 국토를 탐방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럼에도 그 트레킹팀을 따라 이렇게 서해랑길 탐방을 강행하고 있다. 어둠과 추위를 무릅쓴 강행, 목적은 사라지고 그냥 앞으로만 내달리고 싶다. 그럼에도 어둠 속 위치를 확인하며 조금이라도 더 살피기 위하여 발악을 하며 길을 걷는다.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마을과 하수장마을, 외반리 반룡마을, 평산리 유수정마을, 현화리 노루목마을과 외현화마을, 걸어온 그 마을과 길이 분명히 확인되지 않는다. 불분명한 기억과 불빛을 비추며 찍은 사진, 걸어온 지피에스 트랙을 비교하여 탐방을 기록하며 빛을 찾는다. 그 빛이 비추는 위치 확인에 무안문화원 지명 유래 자료를 보태서 탐방지를 탐구하였다. 국토 순례의 탐구에는 형편없이 모자라지만 이만큼이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탐방의 목적 자체가 사라지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어둠 속 희미한 빛을 겨우겨우 찾은 탐방을 마쳤다는 자기만족의 기쁨이 탐방의 그 길을 따라 흐르고 있다.
어둠 속에 잠자던 까만 눈이 헤드랜턴 불빛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며 일어선다. 흰 눈 속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눈은 밟히며 맑은 소리를 내서 길손을 반긴다. 유년 시절의 마당을 덮은 눈이 먼 데서 날아온 것 같다.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길손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멀구슬나무는 흰 눈 쌓인 들녘에서 더 아름답다. 멀구슬나무 노란 겨울 열매는 불빛과 흰 눈빛에 더 노랗게 반짝인다. 멀구슬은 아름다운 절정의 빛을 공중에서 뿌린다. 그 빛은 향기를 품고 있다. 멀구슬은 빛의 가루를 사방으로 뿌려서 향기의 빛이 어둠 속에서 흐른다. 멀구슬 향기의 빛을 따라 어둠과 추위를 헤친다.
흰 눈에 덮인 양파밭의 양파 모종들이 애처롭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은 대지의 여신처럼, 이 땅의 여인처럼 어떠한 고난도 이겨낼 것이다. 그 푸르른 잎은 얼어서 단단히 굳어 있다. 기울어진 모종 잎은 쓰러진 것이 아니다. 잠시 추위에 몸을 눕히고 있다가 다시 일어설 것이다. 하얀 눈밭에서 양파 모종의 연약한 듯 푸른 잎들이 어둠과 추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얼어 굳어진 푸른 잎이 다시 햇볕을 받아 풀어지면서 양파 뿌리알을 굵고 부드럽게 키우는 것일까? 한 시대 이 땅의 어머니들처럼 눈물겹게 뿌리를 키운다.
거리에서 들녘으로 나가고 해안의 방조제를 따라가기도, 다시 도로를 걷고 마을로 들어간다. 어둠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허위적거리면서 지피에스 궤적을 따라 길을 찾는다. 함해만(함평만) 해안의 불빛, 들녘 마을의 불빛, 먼 곳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다가서는 산줄기들이 동경처럼 반짝인다. 마을회관의 표석에 새겨진 마을의 유래와 농장의 축사에서 풍겨오는 퀘퀘한 냄새가, 인간 역사의 거대한 산맥과 삶의 아름다운 훈기처럼 어둠을 밝히고 추위를 불태운다. 그 동경과 희망의 빛과 열기가 길을 걷는 자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었다. 어둠과 추위 속에서 뜨거운 희열이 솟아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2.탐방 과정
전체 탐방 거리 : 17.2km 중 8km
전체 소요시간 : 4시간 20분 중 2시간
전남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 현해로의 그랜드가든 앞에 트레킹팀 버스가 도착하였다.
"송정리(松亭里)는 현경면소재지에서 해제면 방향으로 3㎞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서로 서해바다와, 남으로는 망운면 목서리와 접해 있다. 본래 목포부의 망운면 지역으로서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 의하면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松亭’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다경면 上水長洞으로 나온다. 이후 현경면으로 통합되었고 1970년대 초에 24번 국도가 지나면서 길을 경계로 상수장 마을과 하수장 마을로 나뉘어진다. 1789년에 나온 호구총수에 의하면 함평현 다경면 松丁里로 나온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다경면 上水長洞으로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과 송정으로 나뉘어지면서 1987년의 자료에는 현재와 같이 송정리 상수장과 하수장으로 나온다. 하수장 마을에 효열각과 불망비가 있으며 상수장에는 부처돌이 있다." - 무안문화원
현해로 건너편 서쪽에 상수장3반 버스정류소가 있다. 서해랑길은 동쪽 서해오리집앞 버스정류장 옆 골목으로 진입한다.
앞 전봇대에 서해랑길 34코스 시작점 표지가 붙어 있다. 34코스는 직진하며 33코스는 전봇대 왼쪽 농로를 따라왔다.
서해랑길 34코스 시작지점으로 가면서 33코스에서 걸어온 들녘을 바라보았다. 불빛 비치는 도로는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현경면 송정리-마산리)일 것이다. 가까이 있을 것 같은데 어둠 속이어서 멀리 보이는 것 같다.
서해랑길 34코스는 직진한다. 33코스는 수양마을 들녘을 걸어 송마로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이곳에서 끝난다.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 가드레일 옆에 서해랑길 33·34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설치되어 있다.
서해랑길 33·34코스 안내도와 이정목이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 가드레일 옆에 설치되어 있다.
17.2km, 소요시간 5시간 30분으로 나와 있는데, 어둠 속을 앞으로만 내달려서인지 4시간 20분이 걸렸다.
서해랑길 34코스 기념사진을 남기고 본격적으로 34코스 탐방길을 떠난다.
국도24호선 '송마로' 서쪽 아래 현해로 지선길을 따라 송정교차로 방향으로 진행한다. 멀구슬나무가 어둠 속에서도 빛난다.
국도24호선 가드레일 옆 현해로 지선길을 따라간다. 국도24호선은 1.5km 전방에서 77호선과 갈라진다는 도로표지판이 보인다.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 송정교차로에서 서해랑길은 오른쪽으로 나가 상수장길로 이어진다.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의 송정교차로 상수장길 진출입로에서 서해랑길은 오른쪽 상수장길로 어어진다. 반대편 동쪽 상수장길로는 송정방조제로 나간다.
상수장길 건너편에 식품판매업체인 임자통통수산이 있다.
상수장길은 현해로의 원형교차로 송정교차로에서 만난다. 서해랑길은 송정교차로를 오른쪽으로 돌아 왼쪽 현경 면소재지 방향으로 이어진다. 오른쪽은 해제 방향이다.
현해로를 따라 상수장(上水長)마을을 통과한다.
"상수장(上水長)마을은 높은 데서 보면 마을이 현경에서 해제까지 연결되는 다리 모양으로 보이거나 대루(옛날 다리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전에는 현재의 길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마치 곱게 단장한 여자 머리의 가르마처럼 보였다고 한다. 왼쪽으로는 서해바다가, 오른쪽으로는 함해만에 접하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송정리 2구에 속한다. 松亭里란 지명은 마을이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있고 또한 정자나무의 구실을 하는 소나무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때 붙여진 이름으로 보인다. 현재도 당시의 울창했던 소나무 숲들이 군데군데 보이는데 대체로 묘지 주변의 숲들이다.
‘上水長’이란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주민들은 구체적으로 모르고 있었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는 ‘마을 앞 우물의 수질이 좋고 양이 풍부하여 ‘水長’이라고 불렀다’고 하나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전부터 있었던 지명이 아니고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서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에 물길과 관련된 무엇이 있지 않았을까 여겼으나 주민들은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지명에 대해서 다른 의견도 있다. 지형적으로 마을을 봤을 때 노루가 졸고 있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도덕산이 노루머리에, 송정교회가 노루목에, 안산이 노루 뒷다리에 해당되어 한자로 표현하면 睡獐(수장)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상수장은 노루머리에에 해당된다." - 무안문화원
무안군 현경면 송정리 상수장 표석 왼쪽에 송정2리회관이 있다.
상수장 부녀회와 영농회, 상수장 청년회와 노인회 표지판이 붙어 있다.
송정2리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북서로 양 3km 떨어지져 있는 지역으로 동서로 서해 바다가 접하고 남으로는 망운면 목서리, 북으로는 수얄리와 각각 연접해 있으며, 상수장, 하수장 등 2개 마을이 여기에 속해 있다. 본래 목포부 망운면 지역으로서 소나무 정자가 있었으므로 송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현경면의 상수장을 병합,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켰다.
송정 버스정류소를 거쳐 하수장마을을 통과한다.
이 마을은 졸고 있는 노루의 형상인데, 송정교회는 노루의 목, 장항(獐項)에 해당된다고 한다.
'시인과 바다' 카페 앞을 거쳐 하수장마을로 들어간다.
오른쪽 탄도만 위에 위치한 하수장마을을 통과한다. 하수장마을의 유래를 무안문화원에서 옮겨온다.
"하수장(下水長)은 송정1리에 속하는 마을로 처음에는 水長이라 불렸다. 그러다 1970년대 24번 국도가 마을을 가르며 포장 되면서 상수장, 하수장으로 分里가 되었다. 지형적으로 국도변 아래에 있다 해서 하수장이라 하고 상수장은 국도변 위에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문헌으로 살펴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다경면 松丁리로 나오는데 1912년의 자료에는 다경면 상수장으로만 나온다. 1917년의 자료에는 현경면 松亭리 산하에 다경면 상수장과 망운면 송정리가 포함되었다. 이때까지도 하수장이란 지명은 나오지 않는다. 이후에 현재의 지명인 하수장과 상수장이 나온다. 수장이란 지명의 유래는 자세히 알 수가 없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단지 물길이 좋아서 붙여진 이름 같다’고 말한다. 무안군에서 발행한 마을유래지에서도 ‘마을 앞 우물의 수질이 좋고 물의 양이 풍부하여 수장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실지로 상수장과 하수장에는 수량이 많고 물맛이 좋기로 널리 알려진 샘들이 있다.
마을에 줄샘과 통샘이라는 두 개의 샘이 있었다. 줄샘은 당산거리에 있는 샘인데 그 물이 맑고 좋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하수가 개발되기 전에는 줄샘의 물로 주민들의 식용과 농업용수를 모두 해결했는데 샘 속에서 자라는 수초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아내기도 하였다고 한다. 현재는 지하수 개발로 물이 예전처럼 나오지 않는다. 줄샘 옆에는 아름드리가 훨씬 넘는 소나무가 있었다. 수령으로 봤을 때 입향조가 심었을 것이라 추정되는 나무인데 당산제를 지내기도 해 샘 주변을 당산거리라 불렀으나 지금은 없다.
마을에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격납고가 있다. 원래는 두 개가 있었으나 하나는 밭 주인이 깨버려 현재는 하나만 남아있다. 또한 망운초등학교 뒤와 해동 마을 뒤에도 격납고가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이 마을의 격납고만 남아있다. 이처럼 이 마을 주변에 4개의 격납고가 있었던 것은 일제강점기 때 가당골에서 현경면소재지가 있는 곳까지 임시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 격납고가 있었던 곳에 1990년대 중반까지 격납고 감시초소가 있었다." - 무안문화원
송정1리 마을회관이 아래에 탄도만을 향하여 있지만 가늠만 하고 그냥 통과한다.
시점 1.8km, 종점 15.4km 지점으로, 서해랑길은 현해로에서 현해로294 골목으로 진입한다.
현 위치를 지번으로 송정리 526이라 기록했는데, 잘못되었으며, 이 지역의 지번은 송정리 296-8지역이다.
멀구슬나무가 지키는 송정리들녘을 가로지른다.
양파 모종들이 눈 속에서도 파랗게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 위에 세워진 송정2육교를 건너 해안 쪽으로 나간다.
국도24호선과 77호선 송마로 위의 송정2육교를 건너와 뒤돌아보았다.
송정2육교를 건너와 함해만의 현경면 해안을 살폈으나 해안의 흰눈과 검은 바다 그리고 해안의 불빛이 깜빡거릴 뿐이다.
현경면 송정리 동쪽 함해만 해안의 외송정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어간다.
현경면 함해만 해안의 송정방조제에서 바다를 뒤돌아보았다. 저곳이 어디일까? 함평의 돌머리 해안이 맞을까?
함해만은 남쪽에서 서북쪽으로 꺾어져 올라가기에 서해랑길은 송정방조제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간다.
서해랑길은 외송정길을 따라 이어진다.
서해랑길은 외송정길의 양동수산 앞으로 이어진다.
외송정길 67-9 김포자배양장 양동수산 앞을 거쳐간다.
오른쪽에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 지하통로 앞을 지나 현해로 지선을 따라간다.
송마로 지하통로 앞에서 걸어온 외송정길과 왼쪽 위의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하는 송마로를 뒤돌아보았다.
현경면 송정리에서 외반리로 넘어왔다고 가늠한다. 쉼터정자가 있는 곳을 지나는데 정확한 마을 이름을 알 수가 없다.
"외반리는 현경면 소재지로 24번 국도와 809번, 811번의 지방도로가 마주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현경면의 공공시설물과 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어 面民의 중심생활권이 되는 곳이다. 외반, 화촌, 조암, 내반 등 4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으며 본래 목포부 망운면의 지역으로서 반룡동의 바깥쪽이 되므로 ‘바끝 반룡’ 또는 ‘외반’이라 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내반리와 다경면의 신흥리, 고실리, 조암동, 기동, 화촌을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시켜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외반리 지역은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으로 목장지대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매부리에서 동산리 애북 마을 밑 압창포까지 토성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이 토성은 반룡동 토성 또는 목장성터라 불렀는데 망운목장의 군마를 방목하기 위해 축조한 토성으로 당시 다경면과 현화면의 경계 지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민들은 성들, 성안, 성 너머, 목장 성터, 성등 등의 지명을 말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메부리길 옆으로 그 옆을 걸어온 국도24호선과 77호선이 동행한 송마로가 지나가고 있다.
메부리길 지선을 따라가다가 오른쪽 메부리길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평산리 들녘으로 나간다.
무안군 현경면 외반리 메부리길15-20 지역은 현경면 외반리 반룡 외곽을 차지하고 있는 듯. 반룡은 현경면 소재지 중심지역인데 국도77호선 남쪽에 위치하며 이곳은 그 북쪽 함해만과 가까이 접해 있다. 그런데 메부리길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는 매부리인 응취(매 응鷹, 부리 취嘴)를 이르는 듯하다.
"반룡 마을은 지형이 용이 서려 있는 형상이라 하여 ‘盤龍(盤은 서릴 반으로 해석하기도 함, 외반3리 조암동에서는 蟠龍洞이라 표기한다)’이라 하였다. 꼬리가 신흥마을에 있고 몸통이 박연록씨 댁을 지나 새마을금고, 면사무소, 농협에 걸쳐 있으며 노인회관 자리에서 고개를 들고 있는 형상이라고 한다. 해서 용이 지나고 있는 지역은 모두 부자가 되거나 부자가 되었다. 행정구역명으로는 현경면 외반1리 반룡마을이다. 조선시대 후기 이 마을을 포함한 외반리 지역은 영광군 망운면에 속한 지역으로 목장지대였다. 지금도 주민들은 매부리에서 동산리 애북 마을 밑 압창포까지 토성이 있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 토성은 반룡동 토성이라 불렀는데 망운목장의 군마를 방목하기 위해 축조한 토성으로 당시 다경면과 현화면의 경계 지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주민들은 성들, 성안, 성 너머, 목장 성터, 성등 등의 지명을 말하고 있다." - 무안문화원
메부리길 지하통로를 통과하여 외반리에서 평산리로 넘어와 지하보도를 뒤돌아보았다.
평산리로 넘어와 평산리 들녘과 함해만 바다를 바라보지만 불빛 깜빡이는 곳이 어디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평산리(平山里)는 감방산을 주산으로 하고 대부분 평지에 마을이 들어서 있다. 본래 목포부 현화면의 지역으로 1914년 평림촌과 다경면의 포림리, 응치동, 유수정, 통정리를 합하여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하였다. 현재는 원평산, 평림, 통정, 유수정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으며 里 가운데로 무안-광주간 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다. 평산에 팔바윗등을 포함한 13기의 고인돌이 있으며 평림에 6기 그리고 통정에 5기의 고인돌이 있다. 이어 평산사, 평천정사, 계산재 등의 제각과 4기의 비가 있으며 평림에 무안 박씨 제각인 경모재와 삼호정 그리고 4기의 비와 입석도 2기가 있다. 또한 통정에 1기, 유수정에 2기의 비행기 격납고가 있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평산리로 넘어왔지만 도로명은 여전히 메부리길이다. 메부리길을 따라 유수정마을로 향한다.
현경면 평산리 1114-3 지역ㅡ 메부리길30의 조은농장 앞을 거쳐간다.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조은농장 앞을 지나간다.
눈이 쌓인 데다 농로가 얼어서 미끄럽다. 승용차가 미끄러져 도랑에 빠져 있다.
지방도 815호선 장군로의 육교 아래를 통과한다.
국도77호선 항공로 북쪽 옆 장군로 지선을 따라간다.
장군로 지선에서 유수정길로 들어와 국도77호선 항공로의 현경교차로를 가늠하였다.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1005-3 지역으로 시점 4.6km, 종점 12.6km 지점이다.
무안군 현경면 평산리 1071 축사 옆 유수정길을 통과한다.
축사 옆 유수정길을 걸어와 뒤돌아보았다.
유수정길에서 오른쪽으로 국도77호선 공항로가 지나고 있다. 저곳은 현경교차로 지점이라고 가늠한다.
서해랑길은 유수정마을에서 유수정회관 앞쪽으로 이어진다.
"유수정은 평산4리에 속한 마을로 감방산(坎方山)을 바라보고 있다. 마을 이름도 감방산의 아흔아홉 구비에서 흘러내린 물이 평산을 지나 마을 앞으로 지나간다 해서 유수정이라 했다. 이 물은 저수지가 필요 없을 만큼 농사를 짓는 데 충분한 물이 냇가를 이뤄 흘러내렸다. 또한 마을 뒤에는 해방 전까지 아름드리가 훨씬 넘는 소나무가 있어 당산목뿐 아니라 시원한 정자 구실을 하여 지명에 亭자가 들어갔다고 주민들은 여기고 있다.
자료를 보면 1789년의 호구총수에는 함평현 다경면의 柳木丁리로 표기되었다. 1912년의 자료에는 무안군 다경면 流水亭리로 기록되었으며 1917년 이후부터는 현재의 표기대로 현경면 평산리 流水亭리로 나온다.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예전에 마을 뒤와 ‘저건너’에 해당되는 곳에 커다란 버드나무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저건너’에는 버드나무가 있는데 당시에도 많이 있어 버드나무가 있는 마을이란 柳木丁으로 불려졌다. 그러다 버드나무가 없어지면서 ‘유목정’이라는 음과 비슷한 현재의 이름인 '유수정'으로 불렀으리라 추정된다." - 무안문화원
서해랑길은 유수정회관 앞을 지나서 오른쪽으로 꺾어 마을 앞 들녘을 가로질러 유수교 방향으로 이어진다.
우리 마을 유수정은 감방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마을 앞으로 흘러내린다 하여 마을 이름을 유수정이라 하였다. 마을 북쪽은 드넓은 바다가 있고 동남서쪽에는 울창한 임야로 둘려 있어 아담한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이어서 200여 년 전에 장흥 고씨가 처음으로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후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이 차츰 커지고 발전되어 왔다. 장흥 고씨의 후손은 마을 앞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 임야는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 논밭이 늘어나 주민들의 소득이 증대되어 왔다. 우리 마을은 오랜 전통과 아름다운 풍속을 이어온 마을로서 수십 호가 살고 있으나 마을회관이 작고 낡아서 회관 신축이 숙원이었던 바, 전라남도 지원금 일천만 원, 무안군 지원금 삼천만 원과 주민들의 성금 그리고 출향 인사들이 고향을 사랑하는 마음의 찬조금으로 새로운 회관을 건립하였으니, 마을의 유래와 이 분들의 성함을 이 돌에 새겨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한다.
감방산을 가늠하여 방향을 잡아 보았다. 어디가 감방산일까? 중앙 맨 뒤쪽 검은 실루엣으로 보이는 산이 감방산일까?
유수정마을을 왼쪽으로 나와서 오른쪽으로 꺾어 유수정마을 앞 들녘을 가로질러 유수교 방향으로 이어간다.
유수교 아래를 흐르는 물은 감방산에서 시작하여 함해만 바다로 흘러든다. 서해랑길은 유수교를 건너 장군로로 이어진다.
유수교를 거쳐 지반도로815번 장군로로 나왔다.
장군로를 가로질러 평산4리 버스정류소 앞을 지나 평산 해안길로 진입한다.
오른쪽 뒤 유수정마을과 유수교를 거쳐 장군로로 나와 장군로를 가로질러 평산4리 버스정류소 앞에서 평산 해안길로 들어왔다.
함해만(함평만) 평산리 해안에서 장군로 지선을 따라 노두목마을 가는 방향으로 이어간다.
평산리 해안에서 장군로 지선을 따라 현화리 노두목마을로 들어왔다. 이제 현화로를 따라 외현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노두목갈림길에서 꺾어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노두목마을 일부가 보인다. 오른쪽 아래는 함해만이다.
"노두목은 현경중학교에서 함평 방면으로 2㎞ 가량 가면 나오는 마을로, 815번 지방도로 옆에 위치하고 있으며 함해만을 끼고 있는 마을이다. 쭉쭉 뻗은 수십 그루의 오래된 소나무가 촌락을 구성하고 있는 마을로서 행정구역명은 현경면 현화6리에 속한다. 원래는 독립된 형태의 마을은 아니었으나 1990년대에 평산1구와 평산4구의 일부 그리고 현화1구의 일부를 합쳐 현재의 현화6구로 새로 편성된 마을이다.
노두목이란 마을 이름의 유래를 보면 ‘마을이 바닷길을 건너는 길목에 있다 해서 부르게 되었다’ 고 한다. 예전에 망운, 현경을 포함하여 해제나 지도 사람들이 함평을 갈 때 지나야 하는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하나는 평산리 앞을 지나서 돗재로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 마을을 거쳐 현화리를 지나서 가야 했다. 그런데 평산으로 가는 곳은 그런대로 길이 있었으나 현화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지금처럼 둑이 있어서 큰길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함해만의 바닷물이 평산리 평산 오막내까지 드나들어서 뻘을 건너야 했다. 뻘을 건널 때 발이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노두(징검다리)를 놓고서 다녔는데 주민들은 이곳을 노두목(노두가 놓인 길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행정구역이 새로 개편되면서 마을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마을에서는 마을 이름을 한자로 ‘路頭木’이라 쓰고 있는데 ‘路頭목’이라 써야 맞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쓰는 '목'은 순수한 우리말로 원래 사람이나 동물의 몸통과 머리를 연결하는 부위를 일컫는데 일의 진행과정에서 가장 긴요한 대목을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또한 장사에서 ‘목이 좋다’는 것도 이처럼 중요한 길목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이다. 해서 징검다리가 놓여있는 길목의 뜻인 ‘노두목’은 굳이 한자로 써야 한다면 ‘路頭목’으로 써야 맞는 표현이다." - 무안문화원
현경면 현화6리 들녘을 가로질러 간다.
현경면 현화리 녹색한우농장 지·시온농장 옆을 지나간다.
지·시온농장은 농장주 이명희·장근억 부부가 경영한다. 지·시온이 무슨 뜻일까? 두 따님 지온과 시온을 따온 것이라 한다.
서해랑길 34코스에서 벗어나 있다. 이곳에서 600m 떨어진 함해만 해안에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시점 7.4km, 종점 9.8km 지점으로 태통산 외현화마을까지 0.6km가 남아 있다. 위쪽 현화로를 따라 올라간다.
이 지역은 현경면 현화리 산70-19 지역이다. 이곳까지가 현화6리에 속하는 것 같다.
현화로를 걷다가 뒤돌아보았다. 오른쪽 가로등이 있는 곳이 지시온농장 앞 서해랑길 갈림목이고 왼쪽 뒤 불빛 반짝이는 곳은 지방도로815번 장군로에서 현화로로 들어오는 곳이다.
현화로의 현화1리 버스정류소 맞은편 외현화길로 들어서 외현화마을 방향으로 이어간다.
외현화마을 입구에 열부 장흥 고씨 기행비가 세워져 있다. 현경면 평산리에 장흥 고씨 집성촌이 있다고 한다.
현화로의 현경면 현화리 현화1리 외현마을마을 출입로에 외현화마을 표석과 문화생태탐방로 이정목이 세워져 있다.
"현화리는 현경면 소재지에서 함평 쪽으로 4㎞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지역으로 태통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동쪽으로 감방산, 북쪽으로는 칠산바다를 향하는 함해만을 접하고 있다. 예전에 목포부 현화면의 소재지가 있었던 지역으로 함평현 다경면과 합쳐져 1914년 무안군 현경면이 되었다. 이후 구산동, 성자동, 내현화동, 외현화동을 병합하여 현화리라 해서 무안군 현경면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태통산을 중심으로 외현화, 청룡, 내현화, 성자동, 절동, 노두목 등 6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 무안문화원
태통산 아래에 외현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에 외현화마을회관, 그 앞에 삼강문, 그 앞쪽에 유정각이 세워져 있다.
"외현화(外玄化)는 현화1리에 속하는 마을로 현화리의 바깥쪽에 위치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태통산을 주산으로 하고 있으며 처음엔 인동 장씨가 들어와 살았다. 마을회관 뒤에 ‘장푸대’라 부르는 곳이 있는데 그곳이 인동 장씨가 살았던 곳이다. 이후 장수 황씨들이 들어와서 ‘황감사를 배출했으며 무송 유씨, 광산 김씨 등으로 이어졌다. 무송 유씨는 옆 마을인 청룡마을로 옮겨서 새로운 마을을 개척하였다. 특히 광산 김씨는 9대까지 살았으나 후에 전주 최씨가 들어와 비로소 마을이 번성하게 되었다 한다. 얼마 전까지 전주 최씨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어울려 살고 있는 복합 성씨의 마을이다.
이 마을은 새터와 구터로 이루어졌는데 마을의 전체적인 지형이 게(蟹) 형국이다. 자세히 마을을 살펴보면 구터와 새터가 게의 두 발이고 마을 앞에 있는 두 개의 선독이 게의 눈에 해당된다. 주민들은 구터의 눈은 감은 눈이고, 새터의 눈은 뜬 눈이라고 한다. 구터의 선독은 누워있고 새터의 선독은 서 있기 때문이다. 새터 선독의 길이는 96, 둘레 145㎝로 길가에 있다. 특히 구터의 선독은 마을 길 확장 공사 때 묻혀버렸으나 주민들이 새롭게 복원하여 예전의 자리 옆에 두었다.
마을은 조리형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구터 앞에 마을회관과 전주 최씨 삼강문이 자리하고 있다. 모두 전주 최씨 가문에서 희사한 부지에 세워졌다.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와서 풍수적인 지형을 갖춘 게 형국의 터임을 알 수 있다. 주민들은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게가 거품을 품을 수 있어서 마을이 잘 살았는데 둑이 막히고 바닷물이 끊기면서 게의 거품도 일어나지 않아 마을이 가난하게 되었다고 믿고 있었다. 또한 마을 앞에 게의 밥에 해당하는 조그마한 섬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그 둔덕은 당산거리라고도 불려졌으며 큰 당산나무가 있었다. 어느 날인가 논 주인이 그늘진다고 당산나무를 베어버렸다. 그 일이 있은 후 마을에도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지만 논 주인에게는 재앙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당산나무가 있을 때는 당산
제를 지내며 마을의 평안과 한 해 농사의 풍년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산나무가 없어지면서 현재는 당산제를 지내지 않고 있다." - 무안문화원
회관 앞에 회관신축록碑가 세워져 있다.
태통산 정기 받은 외현화마을은 삼백오십여 년 전 장수 황씨, 인동 장씨, 무송 유씨, 광산 김씨가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후 전주 최씨가 임진왜란 때 난을 피하여 전주에서 몽탄을 거쳐 이곳에 입주한 후 자손이 번창하여 집성촌을 이루었고 태통산을 중심으로 동편은 내현화, 서편은 외현화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 마을은 현재 30여 호가 살고 있으며 오랜 숙원이던 회관 신축을 하게 되었다. 전주 최씨 상효 종중으로부터 회관 부지를 희사 받고 주민 및 출향인의 성금과 무안군의 지원금으로 마을회관을 신축하고, 성금을 내주신 분들의 행적을 길이 남기고자 그 분들의 이름을 이 비에 새겨 세운다. 2002년 9월 20일 외현화마을 주민 일동
삼강문(三綱門)은 군신의 도리(忠)인 君爲臣綱(군위신강), 부자의 도리(孝)인 父爲子綱(부위자강), 부부의 도리(貞烈·節)인 夫爲婦綱(부위부강)을 기리는 문이다. 전주 최씨 집안에서 세운 것이라 한다.
"전주 최씨 삼강문은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2003년에 세운 건물로 정면3칸 측면1칸에 팔작지붕이다. 忠에 임진왜란의 충신으로 병조참판을 역임한 제남, 孝에는 지극한 효성으로 하늘의 감응을 이끌어낸 달신과 그의 아드님인 상효, 烈에는 상효 부인인 죽산 안씨가 주인이다. 안씨는 결혼한 지 3년만에 남편이 전염병으로 위기에 처하자 허벅지살을 베어 약제로 사용함으로써 병을 낳게 하였다. 삼강문 안에는 이를 기리는 두 기의 비석이 있다."
태통산 아래 외현화마을이 자리하고 있다.
"태통산(兌通山)은 화합의 장이었다. 추석이 되면 현화리의 주부들이 모여 강강수월래를 하며 정을 확인하였다. 또한 정상 부근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우거져 풍치가 대단히 좋았다. 그러나 산 소유주인 무안 박씨 문중에서 납골묘를 만들면서 예전의 멋스러움은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산은 세 가지의 풍수적 지형을 갖고 있다. 먼저 외현화와 청룡마을에서 보는 태통산은 용이 승천을 하려는 형국으로 보고 있다. 반면 내현화와 절동 마을에서는 와우형으로 보고 있다. 세 번째는 지망재의 형국을 거미형국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인물은 용으로 보는 형국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 무안문화원
우리 마을은 선조들의 구전에 의하면 옛날 옛적부터 동쪽은 구터, 북쪽은 새터로 마치 손코리 형으로 형성된 아담하고 풍성한 부자마을로 이름이 높았고, 미풍양속 예절을 잘 지키는 자손 대대로 전통이 이어진 살기 좋은 마을이요, 한문학자가 많이 나와서 국가와 사회 각 분야에서 봉사하고 이바지하는 명성 높은 분들이 많이 배출된 마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숙원사업이었던 유정각이 도, 군 지원금 이천만 원을 보조받고 온 주민들의 화합이 혼연일체가 집결되어 너와나 모두가 편안하게 쉬어가는 안식처 유정각이 건립되었습니다. 이 유정각을 천추만대 길이 보전관리를 위해 건립기념비를 세웁니다. 2010년 4월 15일
왼쪽 뒤에 외현화마을회관, 그 앞에 삼강문, 오른쪽에 유정각이 세워져 있다. 유정각 앞에 유정각 건립기념비와 진입로 포장기념비가 있다.
외현화마을을 나가 언덕을 넘어 내현화마을로 이어간다. 외현화마을은 태통산 남서쪽, 내현화마을은 북동쪽에 있다.
평화! 벽화가 평화롭다. 인류의 평화는 이런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