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박씨 집성촌 "묘골마을과 六臣祠"
*위치 : 경북 달성군 하빈면 묘리(묘골마을)
가 . 묘골마을과 육신사(六臣祠)
성주행 국도를 따라 5km정도 가다가 성주 . 왜관 갈림길에서 왜관쪽으로 약4km정도 가면 묘골마을이 있다. 달성군 하빈면 묘리, 흔히 묘골로 불리는 달성군 하빈면 묘동은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팽년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순천 박씨들의 집성촌이다. 풍수적으로 묘골의 형국을 '용이 몸을 틀어 꼬리를 바라보는 형'(回龍顧尾形)이라고 한다.
구한말까지는 300여호의 집이 꽉 들어차 있었으며 광복이전까지만 해도 100여호가 있었으나 지금은 30여호만 남아 있다. 이 마을 가운데로 곧게 올라가면 맨끝에 외삼문 이 나온다. 높직한 솟을삼문이 박정희글씨로 된 `六臣祠`라는 편액을 달고 있는 사육신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 정문이다
<六臣祠>

현재 六臣祠가 들어선 대지에는 박팽년의 유복손 박일산이 세운 아흔아홉칸 종택이 있었고,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하는 태고정(太古亭)은 그에 딸린 정자건물로 1479년에 처음 세워졌다.
선조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 지붕집으로 보물 제5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대청에는 임진왜란 후 치찰사(治察使)로 온 윤두수(尹斗壽)의 한시를 새긴 현관과 정유재란 후 명군 선무관이 남긴 현판 등이 있다. 太古亭에서 바라보는 낙동강쪽 풍경은 장관이다.
안채 왼편의 너른 터를 차지한 육신사는 처음 절의묘(節義廟)라는 이름으로 후손들이 박팽년만을 배향하던 사당이었다. 그런데 박팽년의 현손 박계창(朴繼昌)이 선생의 제삿날 여섯 분 선생들이 사당문 밖에서 서성거리는 꿈을 꾸었다. 이후 다섯 분의 제물도 함께 차려 제사를 지내고, 이로 말미암아 하빈사(河濱祠)를 세워 사육신을 함께 배향하였다.
나 . 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先生
순천박씨.자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1434년(세종16년) 알선문과에 급제. 성삼문과 함께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1455년(세조1년) 세조가 즉위하자 성삼문.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그후 1691년(숙종17) 신원되었고 1758년(영조34)에 이조판서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忠正이다.
<단종에 대한 그리움의 詩調>
ㅡ 朴彭年ㅡ
가마귀 눈비 마자희는 듯 검노매라
夜光明月이야 밤인들 어두우랴
님 향한 一片丹心이야 변할줄이 이시랴

다 . 태고정(太古亭)
태고정(太古亭)은 일명 일시루(一是樓)라고도 불려서 정자의 정면에 태고정과 일시루두개의 현판이 나란히 걸려있는 이 건물은 1479년에 세워졌고, 임진왜란때 일부만 남아 있던 것을 1614년 중건, 400년 가까이 되는 건물이다. 정면4칸, 측면2칸의 정교한 초익공계(初翼工系) 구조를 한 이 건물은 오른쪽은 팔짝지붕이요, 왼쪽은 맞배지붕에 부섭지붕(석가래의 윗머리를 다른 벽에 지지시켜 달아낸 지붕)으로 마감한 보기 드문 정자 건물로서 보물 제554호이다.

라 . 도곡재(陶谷齋)
도곡재는 1778년(정조2)대사성인 서정공 박문현이 제택으로 건립한 건물이나 1800년대에 와서는 도곡 박종우의 재실로 사용되면서 그의 호를 따 도곡재라 이름하였다. 박종우는 인조 때의 사람으로 문장,절의, 덕행을 모두 겸비하여 동한의 일인자라 칭송받았으며 달성 십현의 한 사람이다.
도곡재는 원래 정면 4칸, 측면 1칸의 건물로, 태백산 지역 제택의 일반적인 사랑채 형태인데 후대에 와서 툇간을 달아내고 대청을 넓혀 누처럼 꾸몄다. 각 방의 후벽에는 개흘개가 설치되어 있으며, 네모 기둥을 세우고 납도리를 돌린 팔작집으로소박한 구조의 건물이다.

마 . 삼가헌
삼가헌은 충정공 박팽년의 11대손인 가선대부 이조참판 삼가헌 박성수가 파회에 분가하여 1769년(영조45)에 건립한 건물이다. 그의 호를 따라 삼가헌이라는 편액을 걸었으며 이듬해 그 서편에 정각을 세우고 주변에 국화와 연꽃을 심어 정자 이름을 하염정이라 불럿다. 특히 이곳은 한때 안방극장 "토지"의 촬영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뒷산 중턱에 낙빈서원이 있다.
이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앞이 사랑채이고, 이를 거쳐 안채에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조선 시대 관아 양식과 비슷하다.
사랑채는 "ㅁ"자형을 이루고 있으나 두 동으로 분리되어 있는 분사형이다. 정면 4칸. 측면 1칸의 일자형 평면으로, 곳간2칸 . 대문 1칸 . 방 1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는 "ㄱ" 자형 평면으로, 사랑 대청 4칸 . 온돌방 2칸을 두었고, 온돌방 앞에는 퇴칸을 두었다. 사랑 대청 안쪽으로는 1칸의 마루방이 있고 그 뒤로 1칸의 온돌방이 있다.

안채는 "ㄷ" 자형으로 2칸의 부엌, 2칸의 안방과 반칸 폭으로 개방된 튓마루, 정면, 측면 각 2칸의 건너방, 2칸 반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와 안채 사이의 서쪽에는 장독대, 우물, 곳간채, 안변소가 자리잡고 있다. 특징적인 것은 초가로 된 중문채이다.
사랑채에서 안채로 진입하는 통로로 180도 회전해야 진입이 가능하며 방아실 등과 같은 헛간채의 일부가 중문이다. 別堂은 원래 書堂으로 썼던 4칸 5행의 "ㅡ"자 집을 1874년 현재의 모양과 같이 개축하였다. 여기에 "ㄱ"자로 돌출된 누마루를 부설하여 연당과 어울어진 운치있는 별당채가 완성되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기도 했던 사당은 1974년부터 75년 사이에 '충효위인 유적정화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으며, 이름도 육신사로 바뀌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육신 뿐만 아니라 박팽년의 부친 중림의 위패도 봉안하고 있는 관계로 사당에는 '숭정사(崇正祠)'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단종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
ㅡ 박팽년 ㅡ
金生麗水라 한들 물마다 金이 나며
玉出崑崗이라 한들 뫼마다 玉이 나랴
아무리 女必從夫인들 님마다 조츠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