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적강해(47)
바디매오의 부르짖음
본문 : 마가복음10:46-52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설리번 선생님의 도움으로
이를 극복하고 작가로, 정치 활동으로..,
사회 운동가와 교육자로 일생을 헌신했던
‘헬렌 켈러’(Helen Adams Keller,
1880년 6월 27일 ~ 1968년 6월 1일)라고
하는 분을 성도님들은 아실 겁니다.
그녀가 남긴 글에...
‘만일 단 3일이라도, 단 3일이라도
내가 눈을 뜰 수만 있다면’이란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 “첫날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 모아놓고
그동안 목소리로만 듣던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것입니다.
- 둘째 날은 새벽에 일어나서
밤이 낮으로 변해가는 신비로운 경험을
만끽하고 싶습니다.
- 셋째 날은 다시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 뜨는 광경을 바라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거리에 나가서
많은 사람들을 응시할 것입니다.”
그는 끝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장님이 될 것처럼
당신의 눈을 사용하여 많은 것을 보십시오.
내일이면 귀머거리가 될 것처럼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귀담아 들으며
아름다운 음악을 즐기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십시오.
<여리고에서>....
예수님의 일행이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의 일입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남쪽에 있는
작은 도시로 ‘종려의 성읍’이라고 불리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이 도시에는 향나무, 뽕나무,
장미 나무 등 아름다운 나무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리고성은 다른 지역에 비해
비교적 풍요로운 지역이었습니다.
일자리도 많았고, 먹을 것이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도시 여리고에 ...
그 아름다움도 풍요함도 누릴 수 없는
한 불행한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바로 바디매오라고 하는 맹인 거지였습니다.
그런데 본문 46절을 보면
그를 소개하는 말과 그의 이름이
같은 뜻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6절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본문은 그를 ‘디메오의 아들’이라고 소개하고,
그의 이름을 ‘바디매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결국 같은 말의 반복입니다.
히브리어로 ‘바’라는 말은 ‘~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매오’라는 이름은
사실 이 사람은 변변한 자기 이름도 없이 그냥...
‘디매오의 아들’로 불리어진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 - 우리나라 옛 이름 - 갓난이).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버려진 것과 같았습니다.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소경들은 대개 거지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육체적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대부분이던 당시의 상황으로는......
신체가 온전치 못한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로
맹인을 정죄하는 풍조마저
있었기 때문에(요 9:1,2)....
그들이 정상인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맹인들이나
장애인들에게서 소망이나 희망, 삶의 열정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저 구걸하여 하루 하루를 연명할 뿐
그 어떤 희망이나 꿈도 상실한 채 ....
자포자기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놀라운 것을 발견합니다.
바디매오라는 맹인 거지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아직도 삶의 희망을 버리지 않고
소망을 품고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가 본받아야 할
귀한 신앙의 모범을 찾을 수 있습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첫째,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47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부른 것은
예수님이 나사렛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나사렛 예수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는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사람들은 바디매오에게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시다’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매오는 예수님을
나사렛 예수로 부르지 않고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표현은
당시 오실 메시야에 대한 공식적인 표현입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오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란 메시아에 대한
다른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구원자로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적어도 다윗의 자손인 메시아가 오면 ....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게 될 것’
(사35:5)을 믿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믿음의 고백이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처음 고백한 사람은
귀신들린 자였습니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비록 나사렛 사람으로
초라한 모습을 하셨지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고
그 앞에서 두려워 벌벌 떨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고백한 사람이 베드로이고.....
세 번째로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공식적으로 고백한 사람이 바로 바디매오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도 가장 중요한 지식은.....
‘육체를 입고 오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예언된 메시아(그리스도)이심을 정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바른 신앙고백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첫째,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둘째,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때를 놓치지 않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46절 “그들이 여리고에 이르렀더니
예수께서 제자들과 허다한 무리와 함께 여리고에서
나가실 때에 디매오의 아들인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길 가에 앉았다가.”
지금 바디매오가 만난 예수님은
지금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이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이 들어오실 때가 아니라
“나가실 때”였습니다.
이 때 소경 바디매오가 이 순간이
마지막임을 알았을까요?
아마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오늘 만약 예수님을 만나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그는 주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성공자는 기회를 포착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고후6:2 b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기회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은혜 베풀 때 은혜를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구원의 날에 구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때 기도하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심어야 할 때 심는 사람에게 거두는 축복이 있습니다.
충성할 때 충성을 하면
하나님의 상이 있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는 자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첫째,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둘째,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때를 놓치지 않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셋째,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겸손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47절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소서'라는
이 말은 소경 바디매오의 겸손을 의미합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이 겸손한 부르짖음은
주님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고...
주님의 인자하신 마음이 그에게 쏟아지게 했으며,
그의 눈이 떠지는 체험을 하게 했습니다.
욥기 22:29에 보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고 말씀했고....
시편 147:6에 보면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악인은 땅에 엎드러뜨리시는도다."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의 기도를 응답해주십니다.
교만하면 기도가 나오질 않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을 의지하질 못합니다.
교만하면 “하나님보다 자기 주먹을 믿으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대학교수요 전 문화부 장관 이어령 박사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게 된
간증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철저한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였습니다.
냉철한 분석과 영역을 구분하지 않던
날선 비판으로 ‘시대의 지성’으로 불렸습니다.
살아 있는 백과사전으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한 명의 나약한 인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위기가 찾아옵니다.
잘 나가던 미국 변호사였던
큰딸의 갑상선 암 투병과
뜻밖의 실명 위기가 그것입니다.
딸이 치료차 들른 하와이의 작은 교회에서
아버지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나의 첫 생명으로 태어나 아버지를 쳐다봤던
그 눈을 지켜주신다면 당신을 따라 사역하겠습니다.”
2007년 봄, 딸의 눈은 회복이 됐고,
그해에 아버지는 세례를 받고 크리스천이 됐습니다.
교만할 땐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습니다.
의지적으로 무시하였습니다.
아니 부인하였습니다.
그러나 딸의 죽음 앞에서,
실명 앞에서 그는 낮아졌습니다.
자신의 실존의 한계를 절감하고 겸손해졌습니다.
그 때에야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매달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내 자신이 얼마나 불쌍한 사람인지,
나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직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고는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습니다.
이사야 57:15에도 보면
“지극히 존귀하며 영원히 거하시며
거룩하다 이름하는 이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며
또한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있나니
이는 겸손한 자의 영을 소생시키며
통회하는 자의 마음을 소생시키려 함이라”고
말씀했습니다.
겸손한 자가 되어 더욱 주님 앞에
낮아지시고 날마다 주님의 도우심을 경험하시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첫째,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둘째,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때를 놓치지 않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셋째,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겸손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넷째, 바디매오의 부르짖음은
환경을 초월한 부르짖음이었습니다.
48절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을 때
주위 사람들은 ‘좀 조용히 하라’고
핀잔을 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더 크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그가 소리 질렀다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yelling이라는 단어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yelling은 crying하고는 다릅니다.
소리를 질러도 그냥 지른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르는
외마디 비명과 같은 것입니다.
또 성경은 “더욱 크게” 소리 질렀다고 말합니다.
그는 한번 소리 지른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좀 조용히 하라’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고
더욱 크게 소리 질렀습니다.
그에겐 눈치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는 창피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볼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만이 그에겐 유일한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면 다시 눈을 뜰 수 있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환경을 초월한 기도입니다.
바디매오가 주위 사람들의 책망과
제지에 굴복했더라면,.....
결코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의 은총을
입을 수 있는 기회를 두 번 다시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신앙인은 절대로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타협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신앙인은 장애를 극복하는
불굴의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자신의 눈을 뜨게 해
주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주위 사람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초월하여 더욱 적극적이고
간절한 태도로 예수님께 부르짖었던
바디매오처럼 응답받을 때까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대로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고....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께 끝까지 부르짖는 자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옷을 벗어 던지고>
오늘 본문에 보면 아주 극적장면이
하나 있습니다.<49-50절>
49절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50절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예수님께서 그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님이 부른다”하니.....
그 순간 오늘 성경에 보면
어이가 없는 장면이 나옵니다.
50절 “맹인이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 나아오거늘.”
성도님들 !
소경이 뛰었다는 말 들어 봤어요?
얼마나 반가웠으면 뛰었겠습니까?
게다가 “겉옷을 내버리고” 뛰었답니다.
이 겉옷이란 게 뭡니까?
이 사람의 마지막 유일한 재산이에요.
그리고 거지의 유니폼입니다.
구걸해 먹고 살 수 있는 밑천입니다.
밤이면 덮고 자야 하는 이불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내버렸습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로 나아 가기만하면,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것을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임을 안 것입니다.
맹인 거지로서의 과거의 생활을
청산할 것이라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51절)고
물으셨을 때....
“선생님이여 보기를 원하나이다”(51절)라고
분명히 고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믿음에 감동한 예수님은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러자 그가 곧 보게 되어
예수를 길에서 따랐습니다(52절).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마 7: 7-8>
7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올바른 신앙고백으로,.....
때를 놓치지 않고,......
겸손하게.....
그리고 환경을 초월하여 부르짖은
바디매오의 모범된 부르짖음으로 말미암아 ........
예수님께서 그 자리에 머물러주셨고,
그를 부르셨고, 그의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소경 바디매오의 이 모범된 부르짖음이
바로 저와 성도님들의 부르짖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오늘 우리의 기도가 기적으로
응답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