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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를 겸전 한 유복자 이필완
31世 이필완『李弼完,1697년(숙종 23)∼1785년(정조 9)』은 조선후기의 효자로.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무오사화(1498) 때, 난을 피해 제주도에 입도한 상서공 후 25世 장사랑(裝仕郞) 이희관(李希寬)의 6대손이다. 그는 제주도(濟州道) 한림읍(翰林邑) 대림리(大林里)에서 1697년(숙종 23) 3월 19일 유복자로 태어났다.
독자인 그는 제주(濟州) 기관(記官: 옛 관청의 하급관리)을 지냈으며 백세가 되신 어머니 고(高)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한성부 좌윤겸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漢城府左尹兼五衛都總府副總管)을 지낸 아버지 이세훈(李世薰)의 제사를 예법에 따라 정성껏 지내었고,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무덤 앞에 여막을 짓고 살며 제사를 모셨다.
어머니가 생전에 소고기를 드시지 아니하여 제사에서도 꼭 꿩과 닭고기만 사용하였는데, 하루는 제사에 쓸 꿩고기를 구하지 못하여 걱정하고 있었는데, 매가 꿩을 잡아 묘 앞에 떨어뜨려 주어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그리고 1776년(영조 52) 3월 이필완의 나이 80이 되던 해 영조대왕이 승하했다. 그는 석 달 동안이나 쇠마(衰麻, 상복)를 벗지 않고 소식(蔬食: 채소 반찬뿐인 음식)하였으며 왕릉을 조성하는 능역(陵役)에 나가 흙짐을 져 날랐다.
이러한 사실들을 1781년(정조 5) 선산 구미 봉곡리 출신 제주 순무어사 박천형(朴天衡,1737~?)에 의하여 조정에 알려져 효자로 포양(襃揚)되었고, 1862년(철종 13) 임금으로부터 예조참판에 증직 되고, 정려(旌閭)가 내려졌으며 그의 아버지와 조부는 물론 그 증조까지 벼슬이 추증되었다.
배위 정부인 울산이씨(配位貞夫人蔚山李氏)와의 사이에 8남매(아들 6. 딸 2)를 두었다.
오늘날 제주시 애월읍(涯月邑) 금성리(錦成里) 상동(上洞) 입구에 그의 충효비가 세워져 있다.
▲제주시 애월읍 금성리 이필완 효자비
이필완 효자비는 높이 151cm의 비각에 보존되고 있는데 비의 높이 86cm, 너비 윗부분 54.5cm, 아랫부분 53.5cm, 두께 윗부분 24cm, 아랫부분 23cm이다.
비 앞면에 < 충효가선대부이공필완지려(忠孝嘉善大夫李公弼完之閭)>라고 새겨 있고, 뒤쪽에 < 동치원년정월 일(同治元年正月 日)> 그 옆으로
< 일구육오 년 삼월 일 중수(一九六五年三月 日 重竪)>라 새겨져 있다. 1862년(철종 13년) 1월에 정려비를 세우고 1965년 3월에 보수한 사실을 알 수 있다. <끝>
[참고문헌]
◇제주충효열지 ◇증보탐라지 ◇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