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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 강해(46)
위기는 기회다
본문 : 삿15:1-13
어제 새벽에 우리는
삼손의 결혼식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우리를 실망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블레셋 다곤을 섬기는 이방 여인과 결혼하려 했고,
포도원을 찾았고, 젊은 사자를 만났음에도
돌이키지 않았고, 사자를 죽인 후
다시 그 시체를 찾아갔고,
거기에 모인 꿀을 떠먹고
또 자기 부모에게도 가져다주는
매우 경박하고 불신앙적인 행동을
반복하였습니다.
또 불필요한 수수께끼를 내어
불필요한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먹는 자(eater)에게서 먹는 것(food)이 나오고,
강한 자(the strong)에게서 단 것(sweetness)이 나왔다.”).
속옷 30벌과 겉옷 30벌 내기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그의 아내를 협박했고....
결국 그는 그 답을 알아낸 그의 아내는
그들에게 정답을 말해 주었고
(“무엇이 꿀보다 달겠으며
무엇이 사자보다 강하겠느냐 ”),.......
아내의 배신에 분노한 삼손은
첫날밤을 치르지 않고
혼자 자신의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에 삼손의 장인은 집으로
가버린 삼손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
들러리 청년 중 한 명에게
딸을 줘 버리고 맙니다.
장인이 생각하기에 다시는
삼손이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에 이런 막장드라마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결혼은 한마디로 대실패였습니다.
망신만 당한 꼴이었습니다.
<다시 돌아간 삼손>
그러면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고
그녀를 빨리 잊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그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녀에 대한 분이 풀렸습니다.
다시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고
자기 아내를 데려오려 장인의 집을 찾아갑니다.
화해의 표시로 염소 새끼
한 마리를 들고 갑니다.
<1-2절>
1절 “얼마 후 밀 거둘 때에
삼손이 염소 새끼를 가지고
그의 아내에게로 찾아가서 이르되
내가 방에 들어가 내 아내를
보고자 하노라 하니 장인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2절 이르되 네가 그를 심히 미워하는 줄 알고
그를 네 친구에게 주었노라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답지 아니하냐
청하노니 너는 그를 대신하여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 하니.”
돌아온 삼손을 보고
블레셋 장인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삼손의 분노가 두려웠던 장인은
급한 마음에 다른 제안을 합니다.
당시엔 딸은 아버지의 재산(상품)처럼
아버지가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을 때였습니다.
“그의 동생이 그보다 더 아름다우니
대신 동생을 아내로 맞이하라”는 것입니다.
<보복의 악순환>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다는
장인의 말에 삼손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심히 노했습니다.
<3-5절>
3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블레셋 사람들을 해할지라도
그들에게 대하여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니라 하고
4절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 마리를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가지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5절 홰에 불을 붙이고 그것을 블레셋 사람들의
곡식 밭으로 몰아들여서 곡식 단과
아직 베지 아니한 곡식과
포도원과 감람나무들을 사른지라.”
“이번은” 이 말에 엑센트가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수수께끼 내기에서 졌을 때...
삼손이 블레셋의 다른 성읍
아스글론으로 내려가서 그곳 사람들을 죽이고....
그들의 옷을 약탈해 갚은 것은
조금 지나친 면이 있었습니다.
원망 들을 만한 짖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블레셋 사람을
해할지라도 내게 허물이 없을 것이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삼손은 보복에 나섭니다.
어떻게 보복을 가할까 고민하며
들판을 바라보니 무르익은 황금벌판이
바람에 넘실대고 있었습니다.
들판을 돌아다보는데 마침
여우 떼가 눈에 들어옵니다.
무려 300마리나 잡아 두 마리씩 꼬리를 묶었습니다.
그 꼬리에 기름 막대기를 매달고
불을 붙여서 밀 타작을 하기 위해서
쌓아놓은 밀밭 더미로 보내기도 하고,
아직 타작은 안 한 밀밭으로 보내고
포도원, 감람나무 숲으로 몰았습니다.
여우는 꼬리에 달린 불을 피해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무려 150쌍의 불붙은 여우가
온 밭과 포도원과 감람나무 숲 사이로
뛰어다니며 불을 지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딤나의 황금 들판이 온통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한순간에 추수할 곡창지대를 잃어버린
블레셋 사람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당황했겠지요.
알아보니 삼손이 아내를 빼앗긴
분풀이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화가 난 블레셋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6절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되
누가 이 일을 행하였느냐 하니
사람들이 대답하되 딤나 사람의 사위 삼손이니
장인이 삼손의 아내를 빼앗아
그의 친구에게 준 까닭이라 하였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 여인과 그의 아버지를 불사르니라.”
삼손에게 이 원인을 제공했던 장인과 딸을 화형시켰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삼손이 또 다시 복수를 합니다.
<7-8절>
7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이같이 행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원수를 갚고야 말리라 하고
8절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쳐서 죽이고 내려가서
에담 바위틈에 머물렀더라.”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크게 쳤다”는 것은
관용어귀로서 힘쓸만한 젊은이를
다 죽였다는 뜻입니다.
정강이와 넓적다리는 힘의 중심이
기기서 나오지 않습니까?
힘쓸만한 놈들은 다 죽였다고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야말로 보복의 악순환입니다.
<블레셋의 반격과 유다 지파의 부끄러움>
삼손의 보복에 블레셋 사람들이 뭉쳤습니다.
<9-10절>
9절 “이에 블레셋 사람들이 올라와
유다에 진을 치고 레히에 가득한지라
10절 유다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올라온 것은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 하는지라.”
블레셋 사람들이 유다에 진을 쳤습니다.
깜짝 놀란 유다 사람들이
“너희가 어찌하여 올라와서 우리를 치느냐”고
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결박하여
그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그에게 행하려 함이로라”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유다 사람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11절 “유다 사람 삼천 명이
에담 바위 틈에 내려가서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같이
행하였느냐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들이 내게 행한 대로
나도 그들에게 행하였노라 하니라.”
무려 삼천 명이 모였습니다.
블레셋에 대항하여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낸 구원자
사사를 체포하기 위해서는
무려 3000명이나 벌 떼처럼 들고일어났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11절에 가관입니다.
“삼손에게 이르되
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
어찌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부끄러운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더군다나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최대 지파 아닙니까?
삼손은 작은 단 지파이고요.
보호하지는 못할망정 잡으러 온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왜 하나님이
가장 큰 지파인 유다 지파를 들어 쓰시지 않고....
가장 작은 단 지파에서
‘삼손’ 한 사람을 들어 쓰시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노예근성에 사로잡힌
유다 지파를 하나님이 사용하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모인 유다 지파 3천 명이
힘을 합쳐 블레셋을 쳤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의 숫자도 천여 명에 불과. 15절).
그러나 그들은 블레셋의 지배 아래서라도
그저 편하게 살고 싶었을 뿐입니다.
자유가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애굽에 나온 아스라엘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었던 노예근성
- 애굽의 고기 가마를 그리워함.
출16:3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
이러한 말(“너는 블레셋 사람이 우리를
다스리는 줄을 알지 못하느냐.”)을
공공연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그 당시 유다 사람들이 얼마나
영적으로 타락하고 침체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위기는 기회다
-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위기는 영적 각성의 기회).
앞서 기드온을 사사로 부르셨을 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내린
첫 번째 명령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삿6:25-26>
25절 “그 날 밤에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네 아버지에게 있는
수소 곧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 오고
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며
그 곁의 아세라 상을 찍고
26절 또 이 산성 꼭대기에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규례대로 한 제단을 쌓고 그 둘째
수소를 잡아 네가 찍은
아세라 나무로 번제를 드릴지니라 하시니라.”
먼저 아버지의 집 안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상’을 찍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산성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칠 년 된 둘째 수소’를 끌어다가
‘아세라 상을 땔감으로 삼아’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근본적인 문제를 그대로 두고는
아무리 전쟁에서 이기게 한들
아무 소용이 없음을 잘 아셨습니다.
참된 회개가 동반되지 않고는
외부의 환경이 변경된들 하나님께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신 것입니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합니다.
‘밤’에 종 열 명을 데리고
‘바알의 제단’을 헐고 그 곁에 있는
‘아세라상’을 찍어 그것을 땔감으로 사용하여
둘째 수소를 번제로 드린 것입니다(27).
밤사이에 일어난 엄청난 일을 본
성읍 사람들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고자 하였습니다.
범인을 밝히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네 집 소가 제물로 드려졌는지
확인하면 됩니다.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의 ‘둘째 수소’가
드려진 것을 확인한 성읍 사람들은
그 범인이 기드온인 것을 밝혀냈습니다.
그리고는 요아스의 집으로 몰려가
기드온을 내어놓으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기드온이 이렇게 바알을 성나게 했으니
이제 큰 재앙이 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기드온을 죽임으로서 바알의 분노를
잠재우려 했던 것입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영적 각성을 합니다.
이 문제를 일으킨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음을 알았습니다.
요아스의 사람들 앞에 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바알이 진짜 신이라면
자신의 제단을 파괴한 자를
그냥 놔둘 수 있겠느냐.’ ...
요아스의 이 한마디에 험악한 상황은
그대로 종료되었습니다.
물론 이후에 기드온은 ‘바알’의 제단을
허물었다는 이유로 ‘바알’로부터
그 어떤 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에게 ‘여룹바알’이란
별명이 생겼습니다.
‘바알이 싸우게 하라’(Let Baal strive)는 뜻입니다.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은
바알 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조롱의 의미와 함께...
기드온의 용감함을 높여주는
그런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등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나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교훈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가르침보다 더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더욱이 때때로 자신들을 ‘위선자’라고
비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면 자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것이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헤롯이 자신을 비판한 세례 요한을 잡아 죽였듯,
그들도 예수님을 잡아 죽일 궁리를 하였습니다.
결국 반역죄를 뒤집어 씌워 본디오 빌라도와
로마 군병들을 교묘히 이용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은 안 변하겠다는 것입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은 알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도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주고자 하는 유다 사람들이,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도리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의 모습과 무엇이 다릅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문제(위기)가 생겼을 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위기는 영적 각성의 기회).
재난의 원인이 삼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자신들의 타락에 있음을 깨닫고
회개의 기회로 삼았어야 합니다.
지금 삼손은 그들의 영적 타락을
깨우치기 위해 쓰임 받고 있음을
깨달았어야 합니다.
지금 삼손의 하는 일이
상식에도 안 맞고 제멋대로인 것 같아도....
그것을 이용하여 일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에 위기의식을 불어넣고.....
나아가 블레셋으로부터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
저와 성도님들은 위기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기회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삼손의 선택>
유다 지파 사람들이 무려 삼천 명이 모여
자기를 잡으러 왔을 때에 삼손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12-13절>
12절 “그들이 삼손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결박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 주려고 내려왔노라 하니
삼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를 치지 아니하겠다고
내게 맹세하라 하매
13절 그들이 삼손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니라 우리가 다만 너를 단단히 결박하여
그들의 손에 넘겨 줄 뿐이요
우리가 결단코 너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하고 새 밧줄 둘로 결박하고
바위 틈에서 그를 끌어내니라.”
유다 지파가 자신을 잡으러 왔을 때에
삼손이 대단히 중요한 선택을 합니다.
자기 동족과 맞서 싸울 것인가 아니면
순순히 잡힐 것인가?
잡히면 틀림없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죽을 것이요,
싸우자니 하나님의 백성이자
자신의 동족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삼손은 위대한 선택을 합니다.
그는 순순히 잡힐 것을 선택합니다.
마치 한 마리 순한 양처럼
묶여서 끌려 나옵니다.
마치 예수님의 선택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삼손이 힘이 부족해서 잡힌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손으로 동족을 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삼손이 비록 블레셋에서는 망나니 같은 짓을 했지만
그는 자기 동족을 향하여서는
손끝 하나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의 행동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하시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게 해주는 것입니다.
삼손은 자신이 이 땅에 보내진 목적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를 팔아먹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을 보내신 목적은
블레셋의 손에서 그들을 건지는 것이지
그들을 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삼손은
교회관이 좋았습니다.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거룩한 공회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기서 거룩하다는 뜻은 교회가
완전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결정이 항상 옳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셨으며
세상 마지막 날까지 구원의 통로로
사용하심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목회자나 신학자나 성도들에게
‘교회관’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관이 좋지 못하면 교회에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비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비판하되 사랑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교회라고 사람들이 모인 곳인데
욕먹을 만한 일이 왜 없겠습니까?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설 때까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할 공동체입니다.
솔로몬의 재판에 나오는
진짜 엄마처럼 아이의 다리를 찢어
가지지는 않습니다.
삼손은 유다 지파가
제대로 된 교회라서
그들을 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교회가
아무리 모자라도 못나 보여도
그들을 치지는 않겠다는 것이
삼손의 결정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손의 생사를 건
선택은 위대한 선택이었습니다.
삼손을 연속해서 설교하는 가운데
가장 은혜로운 대목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왜 삼손이라는 특정한 사람을
쓰시려는지 그 이유를 보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삼손은 잘못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특히 유다 지파는 더 잘못된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감사한 것은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버리시지 않고
어떻게든 구원해 내시려는
하나님의 열심 때문입니다.
그 구원의 열정 때문에,
하나님은 삼손의 실패를
블레셋을 멸하시는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에 희망을 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소망을 갖습니다.
많이 부족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실수합니다.
실패합니다.
그러나 감사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와 실패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더 멋진 승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삼손의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손을 잡아 주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에,
그의 의를 세우는 일에
우리를 주의 선한 도구로,
일꾼으로 사용하여 주신다는
이 진리를 믿고 순종하며 나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