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내일은 어린이날. 이번 어린이날 선물은 몇 달 만에 떠나는 ‘육지여행’ 이다. 마냥 즐거워야 할 이 연휴에 전국적으로 강한 비가 함께한다니 괜히 나까지 실망스럽다. 한참 초록이 예쁜 요즘, 아이들의 오늘을 사진으로 예쁘게 남겨두고 싶은데 말이다.
어린이날을 생각하니 어린이날 노래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시절, 여러 동요 중에 나는 이 노래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특히, ‘오월은 어린이날, 우리들 세상’ 부분이 너무 좋았다. 5월 5일만이 아닌 ‘오월은 어린이날’이라니, 한 달 통째로 어린이날이라는 생각에 신나서 그 부분을 더 힘껏 불렀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할 만큼 유년기의 나는 대체로 맑음이었다.
부모님은 내가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식당을 시작하셔서 늘 바쁘셨다. 어릴 땐 네 살 터울의 오빠가 데리고 다니며 세심히 챙겨주었지만, 초등학교에 가면서는 오빤 내게 어설픈 호신술을 알려주었고 나는 그걸 무기삼아(?)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매일같이 해가 질 때까지 학교와 동네 놀이터에서 놀고서는 종종 저녁도 굶은 채 입던 옷도 그대로 입고 온종일 노느라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잠들곤 했다. 모든 식당이 그렇듯 저녁 시간이 제일 바쁜 터라 부모님은 내 저녁밥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30여 년이 지난 나는 요즘 또다시 매일 놀이터 행이다. 막내 유치원 하원 후 두어 시간은 놀이터에서 놀게 해 주고 싶어서이다. 둘째도 같이. 가끔 같이 공놀이도 해주느라 그 짧은 시간도 이젠 버거워졌지만 어릴 적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임을 알기에 노력해본다.
19세기 독일의 교육가 프뢰벨은 놀이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충분히 끈기 있게 몸이 피곤해서 더는 놀 수 없을 때까지 노는 아이는 자기뿐 아니라 타인의 행복을 위해 희생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란다.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p.24)”고 하였다. 회사를 다닐 때 야근에, 철야도 해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래도 다음 날 믹스 커피 한잔이면 끄떡없는 나를 보며 이건 다 어릴 때 잘 닦아놓은 기초체력 덕분이라 생각했다. 체력과 정신력과 비례한다고 하는데 틀린 얘기 같지 않다. 아마 프뢰벨의 이야기도 일정 부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바쁜 부모님이셨기에 방학 때는 나를 돌보는 일은 더 난감하셨을 거다. 지금 부모가 된 우리가 방학이 긴 병설 유치원에 아이 보내기를 꺼리는 이유와 같다. 나는 방학이면 시골 할머니 댁에 보내져 한 달 이상을 보냈다. 농촌의 바쁜 일상을 보내는 어른들과는 달리 나는 매일이 따분했는데 그래서 그 동네 또래들과 어울려 산과 들을 누비며 어떻게든 재밌는 놀이감을 찾아 돌아다녔다. 어른들의 돌봄이 없는 동안 우리는 가끔 위험한 순간들도 마주했지만, 그럭저럭 잘 헤쳐나갔다. 여러 시행착오로 적절한 수준의 재미와 스릴을 느낄 수 있는 우리만의 놀이도 찾아내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없으면 무지 심심할 것을 잘 알기에 방학에만 만날 수 있었지만 너무 사이좋은 친구였다.
유년기는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처하는 기술을 배우는 때가 아닌가요? (p.41) 나는 낯선 곳도 두려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갖고 여행을 떠나는 편이다. 이곳 제주에 혼자 아이 셋을 데리고 내려오겠다고 마음 먹은 것도 어릴 적 경험에서 비롯된 약간의 용기와 호기심 덕분이 아닐까 싶다. 이런 모습이 나의 아이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으면 하고 바란다.
한편 요즘 나의 걱정거리 중 하나가 바로 아이들의 교우관계. 중간에서 이야기를 듣고 조언해 주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복되는 문제에 듣기만 해도 지칠 때가 많고 그냥 서로 좀 잘 지내면 좋으련만 싶을 때도 많다. 근데 인간관계 어려움이 어디 유년기에만 있는 일인가, 마흔이 넘은 나에게도 현재 진행형의 일이다. 각양각색의 친구들을 만나고 그들과 적절히 관계를 맺어가는 기술을 지금부터 조금씩 익혀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어린 시절 내게 방학은 친구도 못 만나는 지루한 시간이기만 했고, 개학만 눈 빠지게 기다렸다. 나에게도 학교 수업 시간은 종종 지루했지만, 친구와의 쉬는 시간 놀이와 체육 시간이 즐거웠기에 학교 가는 일은 늘 즐거운 일이었다. 부모님께서 바빠 잘 놀아주지 못한 것이 내게 순기능 역할을 해 주었던 것이다. 나 역시 제주에 오며 TV를 없애고 노트북도 잘 안 보여주니, 우리 아이들도 월요일을 은근 기대한다. 역시 학교는 집이 조금 재미없어야 가고 싶어지는 곳인가.
우리가 폭력 영화를 보게 그냥 놔두면서 어떻게 계속 순진한 아이로 자라길 바라는 거죠?
인터넷을 무한정 쓰게 놔두면서 우리가 폭탄 만드는 법을 안다는 사실에는 왜 놀라는 거죠?
왜 딱 잘라서 “안 돼”라고 말하는 걸 두려워하죠? (p.55)
첫째가 6학년, 집에 TV가 없으니 가끔 불금을 맞아 OTT 사이트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를 보여준다. 친구들이 다들 웹툰을 본다고 하니 허용은 하되 TV나 웹툰 모두 나는 시청 연령에 맞게 보라고 한다. 알겠다고는 하면서도 친구들은 다 보는데 나만 이런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최근에 인기였던 ‘더글로리’도 친구들은 다 봤다고...분명히 청소년 관람불가인데...보여준 부모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나만 너무 고지식하게 이러는 건가 고민이 되었는데, 이 책을 보고는 다시 마음도 다잡고 아이에게도 전했다. 엄마는 여전히 네가 네 나이에 맞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그런 폭력물은 아직 접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부모 세대에 비해 좀 더 가까이에서 아이를 지켜볼 수 있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에게 하는 조언의 수위가 늘 고민이다. 몰랐으면 걱정도 잔소리도 덜했으려나 싶은 마음에 눈과 귀를 좀 더 닫아야 하나 싶은 마음이 든 적도 한 두번이 아니다. 종종 더 챙기고 아끼려는 생각에 마음 쓴 것이 스스로 스트레스가 되어 아이들에게 더 안 좋은 모습으로 폭발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 책 저자의 조부는 아이들을 바로미터(지표)라고 불렀다. 아이들은 부모의 행동과 태도, 개성과 성격을 거울처럼 비춘다는 뜻이다. (중략)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에서는 “매일 매시간 그리고 매순간마다 자기 주변을 거닐면서 당신의 모습이 훌륭한지 살피도록 하십시오. 당신은 어린애 곁을 지날 때 상스러운 욕을 내뱉으며 자기 성미를 참지 못하는 나쁜 사람의 모습으로 지나치기도 합니다. 아마도 당신은 그냥 지나칠 수 있겠지만, 그 아이는 당신을 눈여겨보고 당신의 추하고 더러운 모습을 아무 방비도 없는 자신의 가슴속에 남겨둘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그걸 알지도 못하겠지만, 그로 인해 아이의 마음속에는 추악한 씨앗이 뿌려지게 되며 그것은 점차 자라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이 아이들 앞에서 주의를 게을리한 탓이고, 조심스럽고 활동적인 사랑을 가슴속에 키우지 않은 탓입니다. (p.56)
사실 이 책은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집 책장에 꽃혀 있었다. 그런데 읽어보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나니 반가웠다. 이번 육지여행의 목적지는 아이들의 외가. 가서 아직도 이 책이 있나, 있다면 이 대목도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러며 나의 유년기가 대체로 맑음이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의 오늘 날씨도 맑음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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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 중에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어요..좀 줄여야 할 것 같은데 일단 올려 놓습니다. ^^;
그리고 오늘은 아무래도 참석이 여의치 않을 것 같은데, 육지 도착해서 상황보고 참석할게요! :)
첫댓글 우와, 유년시절 이야기가 책 이야기랑 버무려지면서 풍성해졌어요. 여전히 진행중인 고민들을 잔잔하게 써주셔서 공감이 많이 됩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얘기 나온 김에 유미샘 고민들도 현재 시점으로 정리를 한 번 해주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와,, 이렇게 멋진 글을 쓰고 참석하셨던 거군요. 저는 겨우 책을 읽고 글은 한 줄도 시작을 못하고 귀로만 들으며 참석했었는데요.. 어렸을 적 이야기가 생생하게 느껴져요.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아이들이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조언해주시는 선생님의 따듯한 모습이 그려집니다. ^^
서울 올라오는 준비를 해가며 이런 글을 쓰시다니 쌤의 열정에 감탄했습니다. 제목이 아주 좋습니다. 후반부의 조부는 바로미터이다에서 이어지는 인용문과 마지막 단락의 연결이 조금 아쉽습니다. 육지에 도착하셔서 참여하시는 걸 보니 노워리 기자단을 향한 선생님의 애정을 느낄 수 있어 기쁩니다.
샘, 이렇게 부지런하시니, 일할 때도 얼마나 열심히 하셨을까;;; @.@
일단 박수부터 👏
어린이날 노래를 힘껏 부르는 어린 유미, 시골 할머니댁 동네 친구들과 방학마다 탐험하는 유미가 환히 그려져서 시종 미소 지으면서 읽었어요. 그래서 어린이날 '일간 노워리'는 유미 샘 글로 낙점 ㅎㅎ
https://blog.naver.com/noworry21/223093537781
제가 마지막 카라마~ 인용문 뒤에 이어지는 한 단락을 빼고 업로드했는데요. 마무리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손보시면 더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