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길안지방) 탐방(2025. 8. 19) 안내자료
1. 묵계서원 묵계서원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있는 서원으로 응계 옥고(1382∼1436) 선생과 보백당 김계행(寶白堂 金係行 1431~ 1517) 선생의 덕행과 청백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13년(1687)에 지었으나, 고종 6년 서원철폐령 때 사당은 없어지고 강당만 남아있다가 최근에 복원되어 1980년 6월 17일 경상북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김계행은 조선 초기 성종 때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고,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옥고는 세종 때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 정4품)을 지낸 바 있다.
묵계서원 2. 보백당 종택 특히 보백당 김계행의 종택에는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편액이 걸려 있다. ‘내 집에 보물은 없다. 보물이 있다면 오로지 맑고 깨끗함 뿐’이라는 유훈으로 유명한 청백리 김계행은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을 지낸 인물로 연산군의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직언하는 선비였다. 낙향해 고향인 안동에서 자연과 벗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냈는데, 묵계서원에는 고고함을 더해 준다.
보백당 종택 김계행 선생의 보백당 당호 출처 김계행 선생 유훈 보백당 용계당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주련이 눈길을 끈다. 天地靜時能造化 천지는 고요할 때 조화를 부리고, 聖賢憂處是工夫 성현은 근심스러운 곳에서 공부가 이루어진다.
3. 만휴정(晩休亭) 이곳에는 또 보백당 종택과 만휴정(晩休亭)이 유명하다. 만휴정은 조선 전기의 문신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지은 정자다. 마흔아홉이 돼서야 대과에 급제한 김계행은 쉰이 넘어 벼슬을 시작해 일흔한 살에 벼슬을 내려놓고 안동으로 낙향했다. 늦을 만(晩)과 쉴 휴(休)자를 써 만휴정이라는 이름을 붙인 건 늦은 나이에야 쉬게 된 자신의 인생을 반영한 것 같다. 그래서일까. 명승으로 지정될 만큼 뛰어난 비경을 자랑하는 만휴정 원림(명승 제82호)에 만휴정을 세웠다. “합시다, 러브. 나랑 같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유진(이병헌)이 고애신(김태리)에게 건넨 이 대사를 기억한다면 이 장면도 떠오를 것이다. 두 사람은 계곡 너머 고즈넉한 정자로 향하는 통나무다리 위에 서 있었다. 이 장면을 촬영한 곳이 길안면 묵계리 묵계계곡에 있는 만휴정이다. 드라마가 끝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안동 여행 코스로 인기다. 만휴정은 안동 도심에서 한참 떨어진 남동쪽에 치우쳐 있다. 만휴정과 가까운 묵계서원과 묵계종택을 묶으면 알찬 일정이 된다.
만휴정
만휴정으로 향하는 통나무다리는 사진 포인트다.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처럼 사진과 추억을 남긴다. 만휴정으로 향하는 통나무다리는 사진 포인트다. 드라마 주인공이 된 것처럼 사진과 추억을 남긴다. 인공적이지만 소박한 건물은 자연과 제법 잘 어울린다. 청백리로 유명했던 옛 선비의 의지가 아닐까. 만휴정으로 가는 계곡 위에 놓인 통나무다리는 사진 포인트. 드라마 속 주인공이 된 것처럼 이곳에서 사진과 추억을 남긴다. 겨울이라 숲은 황량하고 계곡이며 폭포도 꽁꽁 얼어버렸어도 겨울만의 만휴정 운치를 느낄 수 있다.
만휴정 외나무다리(미스터 션샤인의 한 장면)
'노년에 쉬는 정자'라는 뜻을 가진 만휴정은 연산군 폭정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보백당 김계행의 별장으로 1500년(연산군 6)에 세워졌다. 안동시 길안면 묵계서원에서 개울 건너 들어서면 웅장한 계곡에 반석 위로 폭포를 동반한 곡간수(谷澗水)가 흐르는 절경을 이루는 곳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만휴정에는 김계행 선생이 81세에 유훈으로 남긴 ‘지신근신 대인충후(持身謹愼 待人忠厚)’이라는 글귀가 적힌 액자가 걸려 있다. 이는 곧 “자신의 몸가짐을 삼가고 신중히 하며, 남을 대할 때는 진실되고 후덕하게 대하라”는 뜻이다.
4. 호계서원 1973년 8월 31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안동 지방의 대표적인 서원으로 1573년(선조 6) 지방사림들이 안동부(安東府) 동북쪽 여산촌(廬山村) 오로봉(五老峯) 아래에 있는 백련사(白蓮寺) 절터에 여강서원(廬江書院)을 세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위패를 봉안하고 도학을 강론하였는데, 1605년(선조 38)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이황의 큰 제자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1676년(숙종 2) 사액을 받고 ‘호계’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 월곡면(月谷面) 도곡동(道谷洞)에 있었으나 안동댐 건설 수몰지구로 1973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임하댐 호계서원(강당)
호계서원은 선조 5년(1575) 대학자 퇴계의 입향을 기리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선 선조 6년(1576)에 월곡면 도곡동에 여강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지었다. 그러나 1605년(선조 38) 대홍수로 인해 유실되자 중창하였다. 퇴계 선생이 46세 되는 해인 명종 1년(1654)에 관직에서 물러나서 낙향해서 서당을 짓고 후학을 육성할 때 걸출한 제자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학봉 김성일이요, 다른 하나는 서애 류성룡이었다. 퇴계는 학봉을 “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를 못했다.”라고 하였고, 서애를 “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하여 학문이나 인품을 보더라도 두 사람을 우열 가리기 어려웠다. 처음에는 호계서원에 퇴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다가, 광해군 12년(1620)에 이황의 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그러나 주향은 퇴계로 모셨는데, 그 좌우를 누구로 할 것인가 하는 시비가 발생하였다. 나이로 봐서는 학봉이 네 살 위이고, 퇴계를 오래 모셨고, 관직으로 봐서는 서애가 영의정을 거쳤으니, 학봉의 ‘호파’와 서애의 ‘병파’가 서로 양보가 없어 시비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병호시비’로 안동 유림에서 400년 동안 이어왔다. 숙종 2년(1676)에 임금으로부터 ‘호계(虎溪)’라는 이름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았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없어졌다가 7년 뒤에 강당만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영양과 청송에서 흘러 내려온 반변천을 막아 조성한 임하댐 아래로 옮겨졌지만, 습기로 건물 훼손이 우려되자 지역유림은 다시 건의와 함께 서원의 복설을 요청했다. 그간 안동유림의 공론으로 2018년 이곳으로 다시 옮겨 사당을 비롯한 다른 건물들을 재건했었다. 경북도는 2013년부터 총사업비 65억 원을 들여 도산면 서부리로 이건(移建)하고 복원도 추진해 2019년 말 안동시 도산면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호계서원을 복설(復設)했다.
안동 한국국학진흥원 부지에 복설된 호계서원
복설된 호계서원은 '병호시비(屛虎是非)'라는 400년간 이어진 영남 유림 간 갈등에 종지부를 찍는 징표로 평가된다. 경상북도의 중재로 류성룡을 퇴계 위패의 동쪽에, 김성일을 서쪽에, 김성일의 옆에 그의 후학인 이상정을 배향하기로 합의하면서 이 갈등이 해소됐다. 영남 유림과 양편 종손이 모여 합의한 모습
그러나 이를 두고 예안향교 유림들이 "이미 도산서원과 예안향교에 이황의 위패가 있는데, 국가 예산을 들여 새로 복원한 호계서원에도 이황의 위패를 모신다는 건 오히려 이황의 위상을 떨어트리는 처사."라면서 서원 앞에서 시위를 벌여 경찰까지 출동하였고, 이에 반대하는 유림들도 있어서 법정 공방까지 벌어질 가능성과 우려가 높아진 상황이다. 결국 이러한 소모전이 진행되던 와중에 이황의 후손들이 2021년 9월 30일, 호계서원에서 이황의 위패를 모셔 나가는 '소송'(燒送 : 위패를 밖으로 모셔 정갈히 불에 태워 묻음)에 나섰다. "이황의 위패를 빌미로 벌어지는 유림들 사이의 논쟁과 분열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는 없었다."는 게 이유였으며, 얼마나 충격적이었던지 전국 뉴스는 물론 대형 포털의 메인 기사에도 실리게 되었다.
서애 류성룡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물론 이황의 위패만 나갔을 뿐 다른 3인의 위패는 아직 서원 안에 남아 있어서 지금도 다른 단체들의 고소나 고발이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황의 위패를 호계서원의 동의 없이 내보냈다는 점까지 소송에 휩싸였다. 바로 '병호시비'는 퇴계 선생의 제자 서애 류성룡과 학봉 김성일 선생을 배향하는 과정에서 位次(序列) 문제가 불거지면서 발생한 3차례 시비를 말한다. 현재 퇴계는 도산서원, 학봉은 임천서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각각 위패가 모셨고, 지금 이곳은 강당만 남아 있으며, 매년 1회 당회(堂會)를 개최하는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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