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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7:15~20(10) 그 열매로 알리라 2023. 12. 3
‘은퇴 후 쿼바디스(Quo Vadis After Retirement)’라는 유별난 제목을 가진 책이 있습니다. 원로 언론학자이자 고려대 명예교수인 원우현 장로님이 쓰신 책입니다. 2007년 고려대 언론학부에서 정년 퇴임한 원 교수님은 2016년 울란바토르로 향합니다. 몽골국제대학교(MIU)의 부총장 겸 미디어학부 교수를 맡으면서 국제 언론미디어 연구원을 신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외형적 모습은 교육사업이지만, 원장로님을 몽골로 이끈 건 신앙이었습니다.
일흔이 넘는 나이에 평안을 뒤로 하고 몽골의 힘들 생활로 떠난 모습은 아브라함의 삶과도 겹쳐 보인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75세 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고향 땅 갈대아 우르를 떠나서 이방 지역에 정착합니다. 그리고 그 이방 지역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면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원장로님 또한 70이 넘은 나이에 몽골에서 다시 학생을 가르치고, 학생을 가르치는 것에서만 끝나지 않고,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알려주고, 그리스도가 구세주 임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책에 보면, 서울에선 빛의 속도로 스쳐 가던 시간이 몽골에서는 천천히 흐르기 시작함을 느낍니다. 온누리 교회의 장로로 너무나 바쁘게 섬겼던 모습에서 개인의 기도시간이 늘어나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기도 중에 하루하루가 행복해지기 위한 방법을 깨닫게 됩니다.
무너지며 흔들리고 있는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놓고, 원장로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칭찬하라, 만남을 소중히 여겨라, 일이 있어야 행복하다, 용서를 배워라, 난관에는 뜻이 숨겨져 있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 영성은 긍정의 씨앗을 뿌려주는 행복의 길잡이다”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원우현 장로님은 ‘열매 맺는 삶을 많이 강조’합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인생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로 화려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의와 진리의 성경적 열매를 맺는 분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악하고 세상적인 열매에만 몰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우리 모두가 정성을 모아서 강단을 장식하고 하나님에게 아름답게 헌신하였습니다. 사진 한 장을 보시지요. 지난 주일 여러 과일로 강대상을 장식하였던 모습의 사진입니다. 오곡백과를 모두 강대상에 진열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의 사랑과 정성, 그리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아름답게 꾸민 추수감사주일 헌물이었습니다.
여러 과일들이 등장합니다. 여러 과일들의 열매가 보입니다. 가을은 열매 맺는 시기입니다. 가을은 결실하는 시기입니다. 들과 산에서 논과 밭에서 온갖 종류의 과수들이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때입니다.
이렇게 열매를 맺고 결실하는 이 시기에 어울리는 설교를 오늘 준비하였습니다. 설교 제목 또한 ‘그 열매로 알리라’라고 정하였습니다. 열매에다가 초점을 맞추는 설교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성경 말씀을 잘 되새겨 보십시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였나요? 하나님은 ‘꽃을 피우라 하지 않고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꽃이 먼저 피어야 열매를 맺는 순리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모습을 뽐내고 향기로운 냄새까지 휘날리는 꽃을 먼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꽃을 먼저 피우라는 말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곳곳에서 ‘좋은 열매를 맺으라, 하나님과 사람에게 쓰임 받는 귀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그 뜻을 잘 헤아려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꽃은 화려해서 사람들의 눈과 시선을 사로잡지만, 꽃은 곧 시들어 버리는 것으로 끝나 버립니다. 제 아무리 꽃이 화려하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꽃이 사라지지 아니하고 계속 피어 있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며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관심 받는 꽃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영광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을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에게 쓰임을 받다가 조용히 사라지고, 그리고 나의 행실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가 맺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꽃은 사라지지만 열매는 끝까지 남습니다.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 보면 어떤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좋은 열매 맺기를 원하십니다. 먹지 못하고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진 들포도가 아니라 극상품 포도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합니다.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여 온갖 좋은 열매와 과실을 대하면서 나는 하나님에게 어떤 좋은 열매로 인정을 받는 것인가? 고민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산상수훈 안에 있는 내용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과 전통을 내세우며 예수님이 주시는 복음을 거부합니다. 당시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학자, 서기관들은 잎만 무성한 나무처럼 가르칠 때는 그럴듯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르침에 걸 맞는 책임 있는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교훈하신 것입니다. 열매는 나무에 좌우됩니다. 근본이 못된 나무라면 나쁜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나무라야 아름다운 열매를 맺습니다.
16절,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상반절에 중요한 말이 등장합니다. ‘열매로 그들을 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이 맺는 열매를 통해서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의 모습을 알 수 있고, 또한 그 사람이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모습 또한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보여주는 말의 열매, 행동의 열매로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는 열매가 나타나야 합니다. 본문의 ‘그 열매로 알리라’는 구절은 학벌이나 사회적 위치보다, 인격의 열매, 믿음의 열매, 즉 속사람의 열매에 초점을 맞추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한 열매를 맺어야 할까요?
1. 아름다운 입술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에게 드려야 합니다.
폴란드의 철도 노동자였던 얀 그르젭스키(Jan Grzebski 1942-2008)는 1988년 일하는 도중에 그만 달려오는 기차에 부딛쳐서 큰 사고를 당합니다. 연약한 사람이 쇠로 만든 기차에 부딛친다는 것은 바로 사망입니다. 그런데 그르젭스키는 죽지 않고 중상을 입게 되는데, 뇌에 큰 손상을 당합니다. 중요한 것은 의식을 잃어 버리고 혼수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중상을 입고 19년 동안 완전 혼수상태에 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깨어 납니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간호하던 부인의 정성으로 2007년에 기적처럼 깨어났습니다.
여기서 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깨어나서 보게 된 폴란드는 더 이상 그가 알던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르젭스키는 19년 전 상황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사고 당시만 폴란드는 공산주의 국가라서 고기는 배급제였고, 주유소에는 석유를 사려는 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던 배급제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19년 만에 깨어난 나서 마주하게 되는 폴란드는 자본주의 국가가 되었고, 거리의 사람들마다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상점에 물건이 너무 많아 정신이 돌 정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19년 만에 깨어난 그를 더 혼란스럽게 만드는 현실이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또 겪게 되는 당황스러운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전보다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더 많은 물질의 풍요로움을 즐기고 있지만, 불평을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배급제로 근근이 살아 갈 때는 불평하지 아니하고 살아갔던 사람들이 풍요로운 자유를 누리면서 모두가 불평과 불만을 쏟아 내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들의 모습은 어떠한가요? 그로젭스키의 모습을 우리 개인 자신에게 투영해 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분명 19년 전보다 더 많이 가졌고, 더 좋은 것을 누리고 있으며, 더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19년 전인 2004년보다 모든 것이 더 살기 좋은 세상에 우리가 머물고 있습니다.
이렇게 풍요로움과 안락, 그리고 풍요로움과 자유를 누리고 있는데, 우리의 입술에서는 과연 어떤 말이 나오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에 먼저 감사해야 하는데, 더 많이 가지지 못하고 더 많이 누리지 못한 것을 먼저 불평하지는 않는지, 우리들의 입술의 열매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고난과 어려움 가운데도 입술을 지켜야 합니다. 불평의 말을 버리고 감사의 말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풍성함 가운데도 없는 것으로 인해 불평하는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눅 6: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여 있는 선한 것에서 선함을 드러내고, 악한 사람은 그 마음에 쌓여 있는 악에서 악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제가 여기저기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참으로 예쁘고 사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고 상대방에게 예의를 표하면서 상대방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과는 대화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힐링이 되고 행복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반면, 말끝에 날카로운 칼을 달고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입만 열만 거짓말과 속임수, 증오와 미움의 말을 하고, 말로서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을 죽이는 살인의 입술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입만 열면 상스러운 욕을 하고, 상대방을 험담하면서 자기자랑에 빠져 있는 입술도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스러운 입술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쩌다가 불가피 하게 만났다 해도,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저와 같은 생각과 판단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더러운 말과 속이는 말이 입에서 나옵니까? 더러운 영과 속이는 영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몸에서 배설되어 나가는 것들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 나의 입술에서 정제되지 아니하고 나가는 험하고 상스러운 모든 말들이 나를 더 더럽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혀는 작지만 배의 키와 같아서 인생을 움직입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려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음을 주지해야 합니다.
탈무드는 “남의 입에서 나오는 말보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을 더 잘 들으라”고 교훈합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에서 꼬투리 잡고 윽박지를려고 행동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의 입술을 보기 보다는 먼저 내 입에서 나오는 말이 온전한 내용인지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되게 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이라서 한번 더 강조하면서 말씀드립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드리는 기도만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내 뱉는 모든 나의 말들을 하나님이 다 듣고 그 말에 상응하는 응답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언어로 여러분의 입술을 채우시기 바랍니다. 사랑의 언어로, 찬양의 언어가 여러분들의 입술의 열매가 된다면, 여러분 모두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2. 의로움의 열매를 맺어 하나님에게 드려야 합니다.
프랑스 작가 ‘장 드 라 퐁텐 (Jean de la Fontaine 1621-1695)’의 우화입니다. 개구리 한 마리가 강에 있는데, 헤엄을 못 치는 전갈이 나타나 자신을 등에 태워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애원합니다. 개구리가 전갈에게 말합니다. “내가 널 어찌 믿어. 넌 전갈이잖아, 독침으로 내 등을 찌를 수 있어. 그럼 우리 모두 죽게 될 거야”하며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에 전갈이 말합니다. “날 믿어줘, 절대 그런 일은 없을거야. 내가 독침으로 너를 찌르면 우리 둘 다 죽을 텐데 어찌 내가 그런 일을 하겠니?”
마음이 약해진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우고 물살을 가르며 나아갔습니다. 강 한가운데 다다랐을 즈음, 물살이 거세지자 전갈이 갑자기 독침으로 개구리를 찔러 버립니다. 독이 퍼져 죽어 가는 개구리가 “도대체 왜 그랬어? 이러면 너도 나도 다 죽잖아”라고 말합니다.
이에 물속으로 가라앉던 전갈이 개구리에게 대답합니다. “미안해, 상황이 급하면 나도 모르게 독침을 휘두르는 내 본성을 어쩔 수 없었어.”
인생을 지혜롭게 살아갈 아주 큰 교훈을 주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가진 본성이 이처럼 잘 변하지 않고 무섭다는 말입니다. 자신마저 죽을 걸 뻔히 알면서도 찌르고 보는 것이 전갈이 가진 본성입니다. 그만큼 본성이 변하기가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어디 사람은 그런 악한 본성이 없을까요? 아마 전갈보다 더 독하고 악한 본성을 가졌으면 가졌지 덜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영국의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이 움직였다고 하면 믿어라. 그러나 사람의 성격이 변했다는 말은 믿지 말라!”
그토록 사람이 가진 본성은 바꾸거나 고치기 어렵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믿었다가 뒤통수 맞고 상처를 받은 분들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도움이 필요해서 모든 것을 다 끌어 모아 정성으로 도와주었더니 도리어 나를 곤경에 빠뜨리는 사악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세간이 도는 말 중에서 “사람은 고쳐 쓰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서 사람이 가진 본성을 바꾸기 어렵다고 평을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지만 바뀌지 않는 사람의 본성이지만 하나님은 변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 쓰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있는 악한 본성, 하나님을 거역하는 본성, 하나님에게 불순종하는 본성을 고치셔서 나로 하여금 의로움의 선한 열매가 나오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이 사실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 26:7,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하게 하시도다.”
정직하신 하나님께서 의로운 길로 걸어가고자 노력하는 성도들에게 닥친 여러 가지 첩경들을 평탄하게 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을 지켜나가는 모든 성도들은 사기와 속임수가 없고, 거짓과 위선이 없으며, 악의가 없는 의로움의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낙하산을 이용해서 적진에 투입되는 연합군에게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비행기에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 내렸는데 낙하산이 제대로 펴지지 않아 군인들이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낙하산 만드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낙하산을 만드는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알게 된 미국의 조지 패튼(George Smith Patton, 1885-1945) 장군은 미국내에 있는 낙하산 제조 군수 공장에 이렇게 지시합니다. “자기가 만든 낙하산에 자기의 이름을 새기도록 하라. 그리고 낙하산을 실험할 때 만든 사람이 직접 낙하산을 타고 실험하게 하라.” 그때부터 낙하산의 결함이 없어지고 양질의 낙하산을 생산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제품에도 이런 예가 있습니다. 교회당 뒤에서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을 불어주고 겨울에는 따뜻한 온풍을 불어주는 냉온풍기 곁에 보아도, 이 제품을 최종적으로 검수한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제품의 품질을 보증한다는 명예로운 모습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의로움 이름이 있습니다. 이 의로운 이름에 걸맞게 의로운 행동과 의로운 입술의 열매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노력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