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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5:10-12(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24. 12. 29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1885년 톨스토이의 단편이 있습니다. 이솝 우화 같은 내용으로 참 재미있는 단편소설입니다. 이 소설에 보면, 가난한 구두 수선공 시몬과 그의 아내 미트료나, 그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 미하일이 엮어가는 이야기입니다.
구두 수선공 시몬은 어느 날 밀린 외상값을 받으러 갔다가 수금도 제대로 못하고 돌아오다가 건물 담벼락에 기대 서 있는 남루한 옷차림의 젊은이를 발견합니다. 그냥 지나치려 하다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이 걸인을 집으로 데려옵니다. 아내 미토료나는 돈도 받아 오지 못하는 남편이 밖에서 걸인이나 데리고 돌아오니 탐탁치 않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에 걸인이 된 청년이 불쌍해서 따뜻한 스프를 끓여 먹입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거러지 청년은 하나님의 명을 어겨 인간 세상으로 떨어진 천사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청년 미하일은 시몬에게서 구두 만드는 법을 배우고, 함께 구두를 만들면서 몇 년 동안을 시몬의 집에서 함께 살게 됩니다.
하루는 어떤 부자 귀족이 와서 튼튼하고 아름다운 가죽 구두를 만들어달라고 주문을 합니다. 그런데 미하일은 구두대신 죽은 사람이 신는 슬리퍼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다음날 그 귀족의 하인이 와서 귀족이 간밤에 갑자기 죽었으니 구두를 만들지 말고 죽은 사람이 신는 슬리퍼로 바꾸어 만들어 달라고 말합니다.
한참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어떤 여인이 딸들이 신을 예쁜 구두를 지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그 여인의 친딸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인은 사랑으로 자신의 딸들처럼 보살피면서 예쁜 구두를 신겨 줄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을 겪고 난 뒤에 미하일은 자신이 천사인 것을 시몬에게 밝힙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자신에게 세 가지 질문을 주었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야 다시 하늘로 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 이 땅에서 6년 동안이나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세 가지 질문이란 “1)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는가?”, “2)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천사 미하일이 찾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은 이렇습니다.
1) “사람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나?”첫째 질문의 답은 <사랑>입니다. 미하일이 처음 시몬의 집에 왔을 때에 시몬의 마누라가 툴툴대었지만, 배 고프고 불쌍한 걸인을 위해 따뜻한 스프를 만들어 주는 것을 보고, 사람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다고 해답을 찾습니다.
2)“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이 무엇인가?”두 번째 질문의 답은 사람은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귀족이 와서 오늘 밤에 자신이 죽을 것도 모르고, 며칠 후에 신을 것으로 멋진 구두를 주문하는 것을 보고 두 번째 답을 알아 냅니다.
3)“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세 번째 답은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친자식이 아니지만 친자식처럼 사랑으로 돌보는 여인을 보면서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미하일은 커다란 날개가 빛을 내며 미하일은 하늘로 올라가 버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사랑으로 삽니다.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도록 만드는 삶의 동력입니다. 요즘처럼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회현실 이라고 해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해답은 “사랑”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삽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들은 ‘사랑으로 삽니다’라고 답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삽니까?”라는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 역시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랑만 가지고 사는 것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은 곧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구세주이며, 주님을 믿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이 복음의 진리가 불신자들을 구원하게 만드는 사랑의 메시지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존재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전파입니다. 성도가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내가 믿는 이 복음을 사랑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 볼 때 그리스도인의 존재이유는 복음입니다.
다가오는 2025년은 우리나라가 일제강점에서 해방된 지 8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입국한 지 140주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이런 중요한 해에 한국교회는 위기라고들 합니다. 어떻게 하면 무너지는 교회의 위상을 회복하고 크리스천의 고상한 이미지를 회복할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단 한 가지입니다. 교회가 복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가 복음을 전파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1.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10절,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말씀은 팔복의 결론에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보훈>의 8복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가장 빛나고 잘 알려진 가르침입니다.
신약학자 메렌레이 박사님은 7가지 복이 아니고 8가지 8복을 주신 의미를 이렇게 해석하였습니다. “복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사람, 복음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며, 완전한 복으로 사는 사람이다. 고로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8가지의 복만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온갖 복을 다 누린다는 의미이다”
복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왜 복이 찾아올까요? 그것은 하나님 자체가 복된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당연히 복이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복음(福音)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이란 문자적으로 복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복음으로 살아간다면 당연히 복이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복음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유앙겔리온”이란 말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기쁜 소식(good spell)’이란 말입니다. 이 말에서 영어의 ‘gospel’이란 단어가 생겼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며 복된 말씀입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자에게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일까요? 질병에서 낫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난 주간에 저희 집 막내 아이가 독감에 걸려서 회사도 쉬면서 고생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걱정할까 싶어서 일절 문자도 안하고 내색도 안 했더라구요.
뒤늦게 안 뒤에 아이에게 ‘힘내라’라는 짧은 문자만 날렸습니다. 그 짧은 문자가 무슨 큰 힘이 되겠습니까만, 그래도 부모가 날려주는 짧은 문자나 전화 한통은 자식들에게는 복음처럼 힘이 되는 법 입니다.
짧은 문자나 전화 한 통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신 복음은 질병을 낫게 하는 힘이 있고, 죽은 자를 살리게 하는 능력이 있는 말씀입니다. 병든 자를 건강하게, 가난한 자를 부요하게, 사탄의 종노릇 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굳게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이 왜 복이 있는 말씀입니까? 복음은 죄를 지은 사람을 의롭게 하고, 구원받게 하는 말씀이기에 복이 있는 말씀입니다. 엡 1:3에는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라고 합니다.
복음을 들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복음을 믿으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죄를 지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입니다. 이런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역상 4:10에는 “야베스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야베스의 기도에서 등장하는 “나의 지역을 넓혀 주시고”라는 말은 “육적인 복으로서 내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내 영역이 넓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야베스의 기도가 아름다운 기도가 되는 것은, 지경만 넓어지는 육적인 복에만 만족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육적인 복도 받고, 그리고 내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을 받아 “내가 환난에서 벗어나고 내가 근심이 없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기도인 것입니다.
무당종교라 불리는 ‘샤머니즘’은 중간매개자인 무당(샤먼)이 없으면 사람이 직접 신을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샤머니즘 복의 특징은 지극히 “현실 의존적인 복”입니다. 샤머니즘에서 추구하는 모든 복은 현실적 복입니다. 샤머니즘은 내세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현재적 복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현실의 복을 말하고 있지만, 성경의 복은 현재의 복보다는 “미래적이고, 영원하며, 보이지 않는 복을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인 복만 추구하는 것은 바른 성경적 자세가 아니며, 하나님이 주시는 참 복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8복에 나오는 복을 살펴봅시다. 현실적으로 볼 때 애통하는 것이 무슨 복이겠습니까? 육신적으로 볼 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이 무슨 복이겠습니까?
이것은 복이 아니고 고통이고 슬픔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현실적으로 애통하고, 핍박을 받는 것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성경의 복이 현실적으로, 육신적인 부분을 뛰어 넘는 내세의 복이며 영혼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로 돈이 소중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건강함이 가장 우선되는 기준이 됩니다. 하지만 진정한 복은 돈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도 잃어버리고 건강하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이란 영혼의 복이며 복된 말씀, 복음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2. 복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늘에서 상이 큰 사람입니다.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요즈음 방송을 보면, 각종 연말 시상식이 풍성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연말이 되면 방송국마다 연기대상, 연예대상 등 상을 정하여서 한 해 동안 인기가 많았던 연예인들을 선정하여 상을 줍니다. 시상하는 상의 종류도 매우 다양합니다. 신인상도 있고, 특별 공로상부터 조연상도 있습니다. 상의 종류는 다르지만 상을 받는 사람들 대부분은 상을 받는 것에 감격하면서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올 프로 야구도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각종 타이틀로 뛰어난 선수들에게 시상을 하였습니다. 프로야구는 일 년 동안 성적을 통하여 각 포지션에서 가장 훌륭한 선수에게 “골든 글로브”상을 줍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선수에게 최우수선수상(MVP)을 줍니다.
상금도 중요하지만 최우수 선수상은 가장 명예로운 상입니다. 그래서 축구든, 농구든, 프로야구이던, 모든 선수들이 자기 분야에서 최우수 MVP상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름을 날리는 세상의 상도 복음으로 일생을 살았던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받을 상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복음에는 반드시 보상과 상급이 따라온다는 점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대한 약속이 32,500가지나 있다고 합니다. 제가 다 세어 보지 않았지만, 성경을 연구한 학자들이 내어 놓은 자료에 보니 3만가지가 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점입니다. 고로 3만 가지가 넘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의 명령인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앞에 말과 뒤에 말이 다른 분이 아닙니다. 사람은 앞 말과 뒷말이 다를 수 있습니다. 어제 했던 약속이 오늘 지키지 못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하고, 사람이기 때문에 거짓말도 하며 약속을 어깁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음으로 사는 성도를 절대로 모른 체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피를 흘린 성도를 절대로 나 몰라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찬송 중에 “저 장미꽃 위에 이슬”(442장) 의 후렴에 보면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고 합니다. 슬퍼하고 우울해야 할 때에 기뻐하는 그리스도인의 기쁨을 세상 사람들이 알 리가 없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핍박을 받는 성도가 가지는 기쁨, 주님을 위해 헌신하면서 한평생을 살아가는 성도가 가지는 기쁨, 이런 기쁨은 세상의 물질에만 사로잡혀 있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내면의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나요? 442장 후렴가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주님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을 알 사람이 없도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동행 하기 때문에 나에게 이런 놀라운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엄청난 돈방석에 앉아 있는 것이 기쁨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하고,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할 때에, 나에게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부산외국어대 김문길교수의 “임진왜란은 문화전쟁이다”라는 책에 보면, 오늘날 채점 방식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수우미양가>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秀, 優, 良, 可라는 용어는 15-16세기 센코쿠시대 무사들의 용어로서 무사가(武士家) 문서에 자주 나오는 말입니다. 싸움으로 날을 지새우던 사무라이들의 목 베는 실력에 따라, 가장 목을 잘 베는 무사에게 수(秀)란 빼어나다는 말을 하고, 다음으로 우(優)란 우수하다는 뜻이고, 양(良)이란 양호하다는 뜻이고, 가(可)란 옳다는 뜻입니다. 미는 한국에서 나중에 덧붙인 말입니다.
이런 인본의 잔재가 남아 있는 채점방식이지만, 부모님들은 다들 아이들의 성적표에 “빼어날 수”가 많이 들어 있기를 바랍니다. 다들 상 받기를 원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히 11:6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고 합니다.
믿음장이라고 알려져 있는 히 11장에서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상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믿음을 지키고 말씀대로 사는 성도들에게 상 주시는 분임을 잊지 마십시오.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자신이 한 일에 대해서 합당한 댓가가 따라온다는 말입니다.
나쁜 죄를 지으면 그 죄의 댓가를 받게 되어 있는 것이 인과응보의 원리입니다.
불교재단의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불경을 가르치면서 인과응보를 설명하면서 살생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개를 죽이면 다음 세상에 개로 태어나고, 개미를 죽이면 다음 세상에 개미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어느 학생이 불경을 가르치는 스님에게 이렇게 되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 그럼 사람을 죽이면 다음 세상에서 사람으로 태어납니까?”라고 하더랍니다. 아이의 이 질문에 대해 윤회와 인과응보에 대해 가르치는 스님이 벙어리가 되었답니다.
“인과응보”란 자신이 한대로 보상을 받는다는 뜻이지만,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보상은 이런 정도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복입니다. 이 하늘의 복을 바라보면서 2024년을 잘 마무리하고 2025년을 소망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