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대와 심화,
혼란과 좌절의 1930년대, 일제 말 암흑기의 시문학사
양상들
3. 1930년대 시단의 경향과 조류
1) 계급주의 시
1920년대 후반기 이후의 프로시단은 외형상 상당히 활기를 띤 것처럼 비쳤다. 신경향파 이래로 줄곧 이들 진영에 몸담았던 이상화 • 김창술 • 유완희 • 박세영 • 박팔양 등의 활동이 이 시기 들어 다시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으며, 이외에도 당시 카프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던 소장파 그룹의 신진 시인 임화와 권환 • 안막 등의 작업도 창작과 이론 양면에서 고루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후 각종 경로를 통해 이들 진영에 합류하게 된 백철 • 조벽암 • 이찬 • 이용악 • 박아지 등의 활동 역시 문단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었다.⁶ 이들은 팔봉이나 회월과 같은 전대의 프로 문학자들이 앞서 이해하였던 프로문예이론을 보다 조직화되고 체계화된 형태로 정리하는 한편, 창작 과정상에서 이 이론의 효과적인 적용 및 형상 화를 위해 다방면의 모색을 병행하였던 것이다.
조벽암의 시집 향수팔봉과 임화 사이에 벌어졌던 '단편 서사시' 논쟁이나, 백철 • 박세영 • 이찬 등에 의해 시도되었던 ‘슈프레히 콜’ 양식의 도입 등은 이러한 모색 과정에서 빚어진 것들로, 이 무렵 프로시단이 펼쳤던 내적인 노력을 상징적으로 대변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현실 상황이나 여건이 그들에게 반드시 유리하게만 돌아간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로진영의 시인들은 카프를 중심축으로 하여 『카프 시인집』⁷ 발간과 같은 의욕적인 사업을 전개하였으며, 그런 그들의 노력의 결과 1930년대 초반, 한동안 이들 프로진영 시인들의 활동은 탄력을 얻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였다.
전대의 경향문학이 문학을 계급투쟁의 도구로써 이해하고 생경한 선전선동성 구호만을 남발하였던 점에 비한다면, 이 시기 이후의 카프 시인들의 활동은 프로문학에서 요구되는 계급적 시각을 확보하고 있으면서도 문학적 의장이나 질적 수준 확보에도 일정 부분 관심을 기울였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앞서 본 바와 같이 다수의 역량 있는 시인들이 이들 진영에 속속 합류하였고, 질적 • 양적인 면에서 그들의 작업은 프로시단 자체를 더욱 풍성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권환과 같이 교조적인 볼셰비키화에 집착하다 결과적으로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진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1930년대 초반 이후 프로진영 시인들의 활동은 주로 시대의 모순을 다루는 데 있어서 비극적 세계 인식과 목적의식의 우회적 표출, 내성화된 진술 방식의 도입 등을 통해 그 나름의 세련된 양식적 틀을 선보이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태도 변화는 한편으로 상황의 가중되는 압력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던 당대 식민지 프로시인들의 좌절과 허무, 그리고 위기의식과 일정 부분 관계된 것이긴 하나, 그런 시대적 불안과 위기의식 속에서도 카프 해산 이후인 193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들의 활동이 끊임없이 이어질 수 있었던 데에 보다 문학사적 의의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시기 대표적인 프로시인 임화의 향배는 프로시단 전체의 동태와 관련하여 하나의 시사점을 던져주는 것일 수 있다. 소장파 프로문인들의 구심점으로서, 이 시기 실질적으로 카프라는 조직체를 이끌고 나갔던 시인 임화의 역할은 프로시단 전체의 기류 형성에서도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대중화론을 놓고 팔봉과의 치열한 논쟁 과정을 거치는 동안 줄곧 계급적 목적의식을 선명히 할 것을 주장해온 그였지만, 이후 실제 창작면에서 그러한 태도가 그대로 연장될 수는 없었다. 논쟁 이후 한동안 시작에서 손을 떼었던 그는 1933년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 이불을 덮고」를 발표함으로써 재차 시단에 복귀했는데, 이 시의 경향은 그대로 팔봉과의 논쟁에서 자기비판을 감행했던 소위 '단편 서사시'의 형식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로 볼 때 1930년대 들어 발표된 그의 시들 역시, 대개가 목적의식의 직접적인 표출에 매달리기보다는, 비극적 세계 인식의 연장에서 짤막한 서사적 이야기 틀 속에 시대의 모순을 다소 우회적인 형태로 담아 세련되게 전달하는 데 힘을 모은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그 한 본보기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아래에 인용하는 그의 시 「다시 네거리에서」이다.
간판이 죽 매어달렸던 낯익은 저 이계(二階) 지금은 신문사의 흰 기(旗)가 죽지를 늘인 너른 마당에
장꾼같이 웅성대며, 확 불처럼 흩어지던 네 옛 친구들도
아마 대부분은 멀리 가버렸을지도 모를 것이다.
그리고 순이의 어린 딸이 죽어간 것처럼 쓰러져 갔을지도 모를 것이다.
허나, 일찍이 우리가 다만 몇 사람의 위대한 청년들과 같이
진실로 용감한 영웅의 다-ㄴ(熱한) 발자국이 네 위에 끊인 적이 있었는가?
나는 이들 모든 새로운 세대의 얼굴을 하나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건재하라! 그대들의 쓰린 앞길에 광영이 있으라'고
원컨대 거리! 그들 모두에게 전하여다오!
잘 있거라! 고향의 거리!
그리고 그들 청년들에게 은혜로우라 지금 돌아가 내 다시 일어나지를 못한 채 죽어가도
불쌍한 도시! 종로 네거리여! 사랑하는 내 순이야!
나는 뉘우침도 부탁도 아무것도 유언장 위에 적지 않으리라.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1935) 부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네거리의 순이」(『조선지광, 1929)의 후속편이라 할 수 있는 위의 시에서, 임화는 종로 한복판에 엎드려 의지할 곳 없이 울고 있는 한 가녀린 여인 순이의 이미지를 통해 시대의 아픔과 민족적 현실의 질곡을 형상화하여, 보다 효과적으로 표출하려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적 경향은 팔봉과의 논쟁 이후에도 사실상 실제 창작면에서는 그의 시적 기조가 전과 동일하게 유지되었던 것을 말하는 바,⁸ 문단 차원에서 볼 때 그의 이런 태도는 프로시의 보급과 저변 확대에 적잖이 기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런 양상은 특히 1930년대 초·중반, 카프에 대한 일제 당국의 조직적인 탄압이 강화되면서 상대적으로 점차 확산되어가는 추세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시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프로시단의 이러한 변모에는 초기 단계의 경향문학이 갖는 한계로부터의 탈피와 이를 통한 한 단계 도약이라는 내부적 계기와 더불어, 날로 강화되어 가는 일제의 검열을 피해나가기 위한 우회적 표현 기법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며, 당대 시단에서 경쟁관계에 있었던 모더니즘 진영 및 순수시파와의 교섭 과정에서 일부 이들의 시작 경향이 수용되었던 외적인 계기들이 함께 작용한 결과로 이해될 수 있다.
흔히들 1930년대 중반, 카프의 해산을 고비로 하여 프로문예운동은 더이상 상황의 열악함을 견디지 못하고 급격히 퇴조한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만일 프로문예를 계급주의에 기초한 하나의 새로운 사조요 그 사조를 널리 보급하기 위한 조직적 운동으로 이해한다면, 이러한 설명은 문학사적인 관점에서 정당한 것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달리 문예학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경우에는 프로문예, 특히 프로시는 카프 해산 이후에도 상당 기간 질적인 성숙의 과정을 거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다음에 보이는 박세영과 이찬·이용악 등의 시는 바로 그러한 예들에 속한다.
남국에서 왔나,
북국에서 왔나,
산상(山上)에도 상상봉(上上峰).
더 오를 수 없는 곳에 깃드린 제비
너이야말로 자유의 화신같고나
너의 몸을 붙들 자 누구냐,
너이 몸에 이른 체한 자 누구냐,
너이야말로 하늘이 네것이요, 대지가 네것 같구나.
녹두만한 눈알로 천하를 내려다보고
주먹만한 네몸으로 화살같이 하늘을 꾀여
마술사의 채쭉같이 가로 세로 휘도는 산꼭대기 제비야
너이는 장하고나
-박세영, 「산제비」(1936) 부분
시월 중순이었건만
함박눈이 퍽-퍽······
보성(堡城)의 밤은 한치 두치 적설 속에 깊어간다
깊어가는 밤거리엔 「誰何」ㅅ소리 잦아가고
압록강 구비치는 물결 귓가에 옮긴 듯 우렁차다
강안엔 착잡하는 경비등, 경비등
그 빛에 섬섬(閃閃)하는 삼엄한 총검
포대(砲臺)는 산비탈에 숨죽은 듯 엎드리고
그 기슭에 나룻배 몇 척 언제 나의 도강을 경비코 있나
오호 북만의 십오(十五)도구 말없는 산천이여
어서 크낙한 네 비밀의 문을 열어라
여기 오다가다 깃드린 설음많은 한 사나이
맘껏 침통한 역사의 한 순간을 울어나 볼까 하노니
-이찬, 「눈나리는 堡城의 밤」(1937) 전문
그가 아홉 살 되든 해
사냥개 꿩을 쫓아다니는 겨울
이 집에 살던 일곱 식솔이
어디론지 사라지고 이튿날 아침
북쪽을 향한 발자욱만 눈 위에 떨고 있었다
더러는 오랑캐령 쪽으로 갔으리라고
더러는 아라사로 갔으리라고
이웃 늙은이들은
모두 무서운 곳을 짚었다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집
마을서 흉집이라고 꺼리는 낡은 집
제철마다 먹음직한 열매
탐스럽게 욜던 살구
살구나무는 글거리만 남았길래
꽃피는 철이 와도 가도 뒤울안에
꿀벌 하나 날아들지 않는다
-이용악, 「낡은 집」(1938) 부분
이러한 예들은 카프 해산 이후에도 프로시단의 활동이 집단적인 운동의 차원에서는 퇴조하였으되, 개별 시인의 차원에서는 지속적으로 유지·추구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질적인 진전 또한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증명하는 것일 수 있다. 물론 이 단계에서 적지 않은 수의 프로시인들이 그들의 이념과 현실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을 경험하였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스스로 프로시인의 길을 포기하고 순수시인으로, 모더니즘 시인으로, 그리고 또 다음 단계에서 소위 '국책문학'에 충실히 봉사하는 친일시인으로 변신하고 만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몇몇 프로시인들의 활동은 1930년대 후반기까지 꾸준히 이어졌으며, 그 질적인 수준 또한 초기 단계에서 프로진영이 확보하지 못했던 선까지 끌어올려졌음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
6 이외에도 이 시기 프로시 활동에 참가한 시인들로는 박석정 • 이정구 • 안함광· 민병균· 한식 등을 거론할 수 있을 것이다.
7 1931년에 발간된 이 책에는 카프 계열의 시인 김창술 • 권환 • 임화 • 박세영 • 안막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8 한편으로 임화의 이러한 태도는 카프 해산 이후 작품에 직접적으로 계급의식을 노출시키는 일을 유보하는 한편, 넓은 의미에서의 민족적 현실, 혹은 역사를 수용하려 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김용직, 「현대 경향시 해석 / 비판, 느티나무, 1991, 18쪽.
『한국 현대 시문학사』 이승하 외 지음
2024. 11. 20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