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 국권회복과 근대적 시형의 모색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
성씨보 오래인 관습 - 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오장환 |
내 성은 오씨. 어째서 오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 청인一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출처 《오장환 전집》(2002) 첫 발표 조선일보」(1936. 10)
오장환 吳章煥 (1918~1951)
충청북도 보은 출생, 고등학교 시절 정지용에게 시를 배우고, 1933년 16세의 나이에 《조선문학》에 <목욕간>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에 첫 시집인 《성벽 》 을 발간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해방의 감격 속에서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놓치지 않은 시집 <병든 서울>(1946)을 발간하였다.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당대의 현실을 애정 어린 비판의 시선으로 바라본 작품들로 193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 '민감人'오장환
행의 구분 없이 산문체로 쓰인 시를 산문시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오장환의 첫 시집 《성벽》에 수록된 22편의 시 가운데 15편이 산문시였다. 이는 당시에 흔하지 않은 사례였다. 게다가 그의 산문시 대부분은 대상에 대한 거리 두기를 유지한 상태에서 비판적 시선이 깔린 묘사와 진술이 주를 이룬다. 첫 시집의 이러한 특징은 오장환의 초기 시세계를 모더니즘으로 규정하게도 한다.
<성씨보>도 《성벽》에 수록된 산문시 중 하나인데, 다른 산문시에 비해 시인 스스로를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는 시인이 당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자신도 그러한 사회의 자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성찰로 이어진 결과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은 염상섭의 소설 《만세전》(1924)에서 조선의 현실과 자신을 분리시키려 했던 인물 이인화와 대조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시인 본인을 문제의 소용돌이에서 분리시키지 않는 <성씨보>의 특징을 통해, 세계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거기서 발견된 문제의 원인을 끝까지 천착하려는 그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문학사에서는 오장환의 시세계를 둘로 나누어 후기(後期)를 리얼리즘의 시세계로 규정하지만, 그것이 오장환의 민감한 시선이 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늘 전위(前衛, avant-garde)로서의 태도를 유지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 대립 자체를 철저하게 허구화한 시인" (유성호, 2013: 71)이라는 평가가 타당해 보인다. 한국전쟁 직전 발간된 《붉은 기》 (1950)의 시편은 시인이 추구하던 이념적 이상향에 대한 열망에 경도된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 먼저 발간한 《병든 서울》(1946)의 경우만 하더라도 사회 문제들을 바라보는 민감한 시선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 '프로 불만러'의 방법적 회의
어린아이들이 언어를 습득하기 시작하면서 묻는 질문 중 하나가 명칭의 유래 혹은 명칭 부여의 원리에 대한 것이다. "창문은 왜 '창문'이야?"와 같은 질문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어 형성법이나 어원에 대한 설명으로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기 어렵다. 그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애당초 왜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장환도 마치 아이처럼 자신이 왜 '오씨인지 묻는다. 그의 민감한 시선이 본인에게 부여된 사회적 명명(命名)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래도 진짜 어린아이의 질문보다는 덜 까다롭다. 그나마 자신의 이름이 왜 '장환'이냐고 묻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 사회를 바라보는 민감한 시선에는 고유명사로서의 이름보다는 보통명사의 성격을 가지는 성씨가 먼저 포착되는 모양이다. <성씨보>는 자신에게 부여된 사회적 명명과 관습에 대한 방법적 회의의 극단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화자는 자신의 성씨를 먼저 밝힘으로써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을 제시한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기도 한 화자의 시선에 이 상황은 문제적으로 포착된다. "어째서인지 나는 모른다."와 같은 진술은 누구나 묻고 싶지만 묻지 않은, 혹은 물어봐야 신통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체득한 이들이 마음 깊숙이 숨겨 두어서 본인조차 잊어버린 질문이다. 이런 점에서 오장환은 민감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용감하기까지 하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필요 없는 것을 필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가. 특히 이 작품을 발표할 당시 오장환은 19세였다. 이러한 발화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서 옷을 입지 않은 임금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았던 아이의 시선을 떠올리게도 한다. 아이에게 임금의 권력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질문을 띄운 화자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를 단서로 삼아 성씨의 연원을 추적해 가지만 그것이 불만을 시원하게 해결해 주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은 적중한다. 오히려 가계보의 작동 방식이 성씨의 존재를 교환 가치로서 규정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뿐이다. 조상이 가계부에 성씨를 기록함으로써 얻고 차한 것은 '대국 숭배'를 통한 자존감 또는 '매매'를 통한 이윤이었다. 그러니가계부를 본다 한들 자신이 왜 오 씨인지에 대한 답은 얻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 씨의 할아버지가 이 씨인 것(“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가였는지") 또한 질문의 사정권 밖에 놓이게 된다. 화자 자신이 "내 성을 믿지 않으므로, 할아버지가이 씨인 것 또한 전혀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진상'과 불만 사이
그렇다고 해서 시적 화자가 무턱대고 성씨에 대한 부정(否定)만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발화와 행위를 외부로만 표출하는 것이 소위 말하는 진상의 특징이라면, 상황을 종합적으로 파악하면서 자신의 처지까지 고려하는 것은 불만이 건강한 비판으로 거듭나는 것이자 적절한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와 같은 고백은 자신에게 지워진 부담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는 동시에, 그 부담의 원인 중 하나가 자신의 "이기적인 애욕"임을 간파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준다. 영화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가상 세계의 허구성을 간파하고 진실을 향해 한 걸음 딛는 성취를 보여 주는 것으로도 비유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가상 세계란 그저 코드에 불과했지만, 당시 시인이 처한 상황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파도에 의해 의도치 않게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처럼 갑작스레 근대라는 신세계로 올라온 당시 지식인에게, '성씨'라는 껍데기는 아직 자신의 일부인 동시에 부수고 나아가야 할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이라는 구절은 봉건적 관습의 영향을 받고 있는 자신 역시 비판적 시선의 대상으로 삼는, 시인의 기세등등한 자기반성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장환의 시세계는 이러한 출발점을 가지기에 이후 '고향'을 다룬 다른 작품들에서도 현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의식(남기혁, 2012)을 갖고 갈 수 있었다.
| 풀어지기 쉬운 긴장
핵심을 파악한 자는 이제 그것을 응용하고 다른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 부제에서 예고한 것처럼 <성씨보>는 전통으로 대변되는 오래된 관습의 제유일 뿐이다.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에서 '성(姓)'의 자리는 다른 어떤 관습으로 대체되어도 무방하다. 사실 우리는 명제적 지식보다 관습으로 형성된 실천적 행위 속에서 더 많이 배우기도 한다(Wenger, 1998/2007). 그러나 그 관습들에 '왜?'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이미 그 관습에 익숙해진 많은 이들을 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위험을 내포한다. 무거운 껍데기에 적응한 소라가 그 안에서 안락을 느끼듯이, 익숙해지기만 하면 관습만큼 편하고 안전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간행한 《붉은 기》에 수록된 작품들에서는 자신이 설정한 이념적 틀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모습이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오장환이 작품활동을 했던 시간적 범위를 고려한다면 이는 사회의 관습 속에서 기세등등한 자기반성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방증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민재원
참고문헌
김재용 편(2002), 《오장환 전집》, 실천문학사,
남기혁(2012), 「오장환 시의 육체와 퇴폐, 그리고 모럴의 문제: 해방 이전의 시 창작을 중심으로」,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54, 한국문학이론과 비평학회, 155-190.
유성호(2013), 「오장환 시의 흐름과 위상: 임화와의 관련성을 중심으로」, 『한국시학연구』 55, 한국시학회, 71-93.
Wenger, E. (2007),
『실천공동체: 지식창출의 사회생태학』, 손민호·배을규 역, 학지사(원서출판 1998).
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10. 12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