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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Cyrus 590/576(?)~530;재위 BC 559~530)
1.이름
공동 번역 성경은 히브리어 발음인 고레스(כורש Koreš)왕으로 기록되었다. 새 성경은 그리스 발음으로 키루스로 표기한다. 키루스 대왕은 페르시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이며 현대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다. ‘이란’은 1971년 키루스의 제국 창건 2,500주년 기념식을 가진 바 있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크테시아스와 플루타르크는 키루스라는 이름이 태양을 뜻하는 “쿠로스”에서 유래한다고 기록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태양과 같다”라는 말은 “코르 (태양)+바시 (같다)”라고 쓸 수 있다는 것과 관련한 것이다. 그의 친할아버지 이름이 키루스였으니까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면 키루스 2세이다. 대부분 기록에서 키루스라고 제시한다. 재위 기간은 안샨 제후왕으로 기원전 559-550년까지 9년간, 주변국을 정복한 뒤 아케메네스 왕조로 기원전 550-530년 동안 29년을 통치했다. 재위 20년 동안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전 지역을 정복했고 중앙아시아 유목민과 전투 중 죽었다.
2.생애
키루스는 기원전 580년경 메디아 왕국의 속령이었던 페르시아 안샨 지방의 군주 캄비세스1세와 메디아 제국의 마지막 왕 아스티아게스의 딸 만다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출생에 대해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메디아의 왕인 아스티아게스는 어느 날 딸 만다네가 어마어마한 양의 오줌을 누어 그의 나라가 잠기는 꿈을 꾼다. 그는 사제들을 불러 해몽을 해 보니 '만다네의 아들이 왕이 되어 나라를 지배한다' 고 했다. 해몽을 들은 그는 겁이 난다. 만다네가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는 그 꿈이 두려워 자신의 위상에 걸맞은 메디아인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지 않고, 캄비세스라는 절대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인 페르시아의 남자와 결혼시켜버린다. 얼마 후 만다네가 임신을 하자, 아스티아게스는 다시 꿈을 꾸는데 이번에는 딸의 생식기에서 포도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온 세상으로 뻗어 나가는 꿈이었다. 사제들은 이번에도 '만다네의 아이가 왕이 되어 아시아를 지배한다'고 해몽하자, 임신 중인 딸을 페르시아에서 불러오게 했다. 그는 딸을 곁에 두고 감시하다가 딸이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그 아이를 죽일 참이었다. 아스티아게스는 메디아인들 중에서 가장 신뢰하는 심복인 하르파고스를 불러 자신의 외 손자가 태어나거든 '죽여 땅에 묻어 주라'고 명령한다. 하르파고스는 아기를 건네 받았지만 차마 죽일 수가 없었다. 당시에 아스티아게스는 이미 노인이었는데 남자 왕손이 없었고, 만일 그가 이 상태로 죽으면 만다네에게 왕위가 넘어갈텐데 그렇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은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하르파고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소치기에게 아이를 건네주며 '죽여 땅에 묻어 주라'는 같은 명령을 내린다. 신의 섭리였는지 소치기가 아이를 안고 집에 도착했을 때 마침 임신하여 해산을 기다리던 그의 아내는 혼자서 아들을 낳았는데 죽은 채 태어났다. 소치기는 자신의 죽은 아이와 만다네의 아들을 바꿔치기 한 후에 왕자답게 장신구로 장식한 다음 하르파고스가 파견한 호위대가 보는 앞에서 땅에 묻었다.
세월이 흘러, 키루스가 동네 아이들과 왕 놀이를 하던 중 왕으로 뽑혔다. 그런데 어느 고위 관리의 아들이 자신은 고관의 아들이니 소치기집 아들의 명령은 들을 수 없다고 복종하기를 거부하자, 키루스는 왕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며 이 소년에게 때렸다. 자식이 소치기집 아들에게 수모를 당한 것에 화가 난 고관은 아스티아게스에게 달려와 하소연한다. 아스티아게스가 키루스를 불러 심문해보자 키루스는 '놀이이기는 하지만, 왕의 명령을 거역해서 벌했다'며 자기를 변론했다. 이때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의 나이와 놀랍도록 자신을 닮은 외모가 이상해서 소치기를 불러 심문해보자 하르파고스가 맡긴 아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실토했고, 하르파고스도 사실을 인정했다.
아스티아게스는 외손자를 또 죽이고 싶지는 않았는지, 오래 전 꿈을 해몽해줬던 사제들이 '놀이지만 이미 왕이 됐으니 두 번씩이나 왕이 되지는 못할 것'이라며 염려치 말라고 안심을 시키자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를 페르시아에 있는 친부모에게 돌려보냈다. 그리고 하르파고스의 13살짜리 아들을 궁으로 부르고, 하르파고스도 식사에 초대했다. 임무 실패로 처벌받을까 두려워 하던 하르파고스는 왕이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자 안심하고, 아들을 치장해 궁으로 보내고 자신도 왕의 식사에 참여했다.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에게 고기 요리를 대접했고, 하르파고스가 식사를 마치자 하르파고스에게 대접한 것은 특별한 고기라며 바구니를 줬는데 그 안에는 하르파고스의 아들의 머리통과 사지가 잘려 담겨 있었다. 하르파고스는 아들의 참혹한 시신을 보고도, 자신이 아들의 고기를 먹었다는 것을 알고도 안색 하나 바꾸지 않고 왕에게 임무를 거부한 것을 사죄하고 이 처벌을 달게 받아들이겠다며 다시 충성을 다짐했고, 아스티아게스도 만족했는지 하르파고스를 다시 중용했다. 얼마 후 장성한 키루스는 페르시아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아스티아게스는 하르파고스에게 진압을 명령하며 대부분의 병력을 맡겼다. 그리고 하르파고스는 바로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초에 키루스가 반란을 일으키도록 사주하고 충동질한 게 하르파고스였다고 한다. 하르파고스의 배신 덕에 키루스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은 메디아를 멸망시켰다. 기원전 554년, 키루스는 자신의 외할아버지이며 황제인 아스티아게스의 폭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제압한 후 기원전 549년 나라 이름을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재위 20년 동안 이집트를 제외한 오리엔트 전 지역을 정복했다.
3.페르시아 제국 건설
메디아 (BC 549)
키루스는 성년이 되자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 왕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549년 메디아 제국과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 왕을 쓰러트리고 왕이 되었다(다니 14,1). 키루스는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리디아 (BC 546)
기원전 546년 리디아(현 터키 서부)왕 크로이수스는 기원전 547년경 먼저 페르시아를 공격했다. 그러나 대패하였고 리디아의 사르디스(Sardis)는 546년경 함락되었다. 리디아 왕의 신하국이던 에게해 해안의 그리스계 이오니아 국가들이 542년까지 페르시아에게 종속되었다.
신바빌로니아(BC 539년)
기원전 539년 키루스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바빌로니아를 침략했다. 이 침공은 비교적 별다른 저항 없이 이루어졌는데 많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키루스의 정복은 별 저항없이 신속하고 이루어졌다.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하기 전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다 왕국과 시리아 왕국등 많은 왕국들을 지배하고 있었기에 모두 키루스 수중에 떨어졌다.
4. 죽음과 후계
고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키루스는 기원전 530년 8월경 카스피해 동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조언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동쪽으로 진군해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과의 격렬한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하는데 마사게타이족을 이끄는 여왕이 자기 아들이 키루스에게 죽자 그에 대한 복수로 키루스를 공격했고 결국 키루스는 전투 중 전사했다.
키루스의 시신은 파사르가다에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사지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정복 정책을 계승해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나 7년 만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살해되었다. 키루스의 집권 이전에 페르시아를 통치한 아르사메스의 손자인 다리우스 1세이다. 그는 키루스의 사위로 캄비세스 2세의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황제로 등장했다. 제국을 안정시켰고 유대인에겐 성전 재건의 은인이었다. 다리우스는 법령을 내려 제도적으로 도움을 줬던 것이다(에즈 6,3-18;기원전 519년).다리우스 아들이 넷째 임금 크세르크세스(Xerxes)다. 다리우스 1세와 키루스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쟁에 시달리다 측근의 반란으로 죽었다. 구약성경 에스테르기에 의하면 그의 왕비가 에스테르이며(에스 8,1), 유대인 축제 푸림절에 관여된 왕이다. 크세르크세스 아들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즈 8,1)이다. 그는 키루스 증손자로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파견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마무리했다(에즈 7,11).
5.평가
키루스는 인류역사상 최초로 대왕大王 또는 대제大帝의 칭호를 받은 군주로 걸맞은 대업을 이루었기에 호칭에 손색이 없는 통치자이다. 서아시아를 모두 정복하여 통일하였다. 지배국과 그 민족들이 신봉하는 종교 자유를 전격 허용하였다. 정복지에 자국민 지도자를 총독으로 파견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노예제도를 금지하여 최초의 인권선언자라고 한다. 이러한 통치는 이전의 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키루스 통치 전 번성했던 아시리아와 신 바빌론에서 찾아 가혹한 피정복민 정책에 틈만 나면 반란이 일어나 결국은 피 지배인들에 의해 멸망한 것에 대한 반면교사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사회에서 정복지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것은 대단한 통치 수완이고 자신감이었다.
성경은 더욱더 위대한 통치자로 제시한다. 그는 인간이 인간을 억압하는 불의한 역사와 제도를 근절할 하느님의 사람 구원자 메시아로 해석한다. 키루스 2세부터 아케메네스 왕조의 왕들은 관용과 자비를 통치의 으뜸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속국의 모든 종교를 존중해 줬고 포로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정복지 문화를 인정한다는 건 대단한 지혜였고 자신감이었다.
1) 성경의 키루스
키루스는 바빌론을 점령 후 ‘키루스 칙령(539년)’을 선포하였다. 통치 동안 그는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 정책을 표방했다. 또한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제 민족의 것을 차용하고 자국민 지도자를 총독으로 파견하여 응용 관리하였다. 이에 따라 유다인을 포함한 유배자들에게 자유 귀환, 성전 재건을 승인하고 장려한 것이다. (2역대 36,22-23;에즈1장.에즈 6,4). 기원전 538년 이스라엘은 바빌론 유배에서 풀려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이사야 예언서는 키루스를 하느님의 메시아로 선언하고 있다. 주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기름 부어 선택한 자’라고 한 것이다(이사 45,1-3). 이방인으로서 이렇게까지 칭송된 사람은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만큼 키루스는 위대한 통치자였다. 키루스는 기원전 530년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 키루스의 아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정복 정책을 계승해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으나 7년 만에 죽었고 둘째 아들은 살해되었다. 혼란을 수습하고 왕위에 오른 이가 세 번째 임금 다리우스(Darius)다. 키루스왕 사위였다. 제국을 안정시켰고 유대인에겐 성전 재건의 은인이었다. 바빌론에서 돌아온 이들이 예루살렘 성전 복구에 매달렸지만 여러 사정으로 중단되곤 했다. 다리우스는 법령을 내려 제도적으로 도움을 줬던 것이다(기원전 519년,에즈 6,7). 바빌론에 남았던 유대인들의 로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은 왕실 문서고에서 키루스 칙령을 찾아내 왕에게 보여줬던 것이다(에즈 6,3). 다리우스 아들이 넷째 임금 크세르크세스(Xerxes)다. 다리우스와 키루스 딸 아토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확실한 신분으로 준비된 왕이었지만 전쟁에 시달리다 측근의 반란으로 죽었다. 구약에 의하면 그의 왕비가 에스텔이며(에스 8,1) 유대인 축제 푸림절에 관여된 왕이다. 크세르크세스 아들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즈 8,1). 키루스 증손자로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파견해 예루살렘 성전 재건을 마무리했다. 키루스는 역사에서 처음으로 대왕이란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그렇게 불러도 손색없는 왕이었다. 속국의 모든 종교를 존중해 줬고 포로들을 해방시켰기 때문이다. 고대사회에서 정복지 문화를 인정한다는 건 대단한 지혜였고 자신감이었다. 훗날 다리우스 황제의 손자였던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이 사제 ‘에즈라’와 총독 ‘느헤미야’를 보낸 뒤에야 성전 재건은 완성된다(에즈 7,11).
2) 역사의 키루스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물론이고 그리스에서도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로운 대왕으로 존경을 받았다. 크세노폰등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를 군주의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메디아 황제 아스티아게스로부터 고난을 받아 양치기에게 길러졌으며 폭군인 외할아버지를 타도하고 대제국을 세운 그의 일대기는 전형적인 영웅 신화로 각색되어있다. 그러나 크세노폰 저서 《키루스의 교육》에서 그가 그의 외삼촌이자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인 키악사레스에게서 메디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그가 정통성을 물려받은 군주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키루스의 이야기를 크세노폰의 가치관에 따라 변화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그는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정책과 포용 정책을 표방했다. 또한 정부 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는데 이것이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등에게까지 전해져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저술 《키루스의 교육》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혔기 때문에, 크세노폰에 의해 다시 서술된 그의 일대기는 현대에까지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6. 키루스 유산
1) 리더쉽
키루스의 관용과 존중의 리더쉽과 인사에 대한 통찰과 식견은 정치뿐 아니라 여러분야의 지도자들에게 참 된 모범으로 전해지고 있다.
2) 인권주의
키루스는 피지배 정복민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안겨주었었으며 노예제도를 금지하였다. 진정한 의미의 인권주의자로 이러한 내용을 담은 키루스 실린더가 대영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3) 무덤
키루스에 대한 내용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 대제의 무덤이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도 어려서부터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읽으면서 키루스를 존경했다고 한다. 그가 페르시아를 점령할 때 키루스 황제의 무덤이 너무나 작고 소박해서 놀라는데 그의 묘비명에 쓰인 글을 보고 예를 갖추었으며 아무도 훼손하지 말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보게, 자네가 누구든 그리고 자네가 어디서 왔든, 나는 자네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네. 나는 페르시아인의 제국을 건국한 키루스라네 나의 뼈를 감싸고 있는 이 한 줌의 흙을 비웃지 말게나”
Patrick Hunt 교수는 키루스에 대하여 "만약 오래 전부터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키루스 대제'야말로 '대왕大帝'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몇 안 되는 대왕이 될 것이다. 키루스 대제는 그 당시 고대 제국이 볼 수 있는 세계 중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키루스의 가장 위대한 업적과 리더쉽은 땅의 정복과 크기가 아니다. 그의 피지배민족에 대한 인권존중과 관용정책이다. 이것은 인류역사에 길이 남을 숭고하고 뛰어난 업적이다.
입력:최 마리 에스텔 수녀 2025년 1월 30일;21시
참조:성서백주간 도움책 예언* 교훈편;위키백과,인터넷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