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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장마
일기예보 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적은 비가 아니었다.
a, 개들의 사랑
b, 투정
c, 여름과 함께 좋은 일이...
d, 장마
e, 호숫가 삶
a, 개들의 사랑
장마가 시작됐다고 했다.
비는 제법 센 바람을 동반하여, 꽤나 요란하게 내렸다.
그 바람은 마당 끝 축대 위에 보기 좋게 자라던 코스모스를 지저분하게 해 놓다 못해 어떤 것들은 누워지거나 줄기가 휘어진 것도 여럿 만들어 놓았다.
'에이, 한두 포기도 아니고.. 일일이 지줏대를 해 줄 수도 없는데, 이를 어쩐다냐?' 기로는 걱정이었다.
격의 짝을 데려온지 이틀이 되어 가는데, 기로가 보기엔... 개들 사이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았다.
오히려 격이 적극성을 띠는데, 수놈의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 역시 은근히 신경이 써지면서, 기로는 걱정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면서 기로는 본인의 과거 처지와 비슷한 모양새의 개들의 관계를 보면서, 자꾸만 자신이 이혼한 상황이 겹쳐져 그려지기도 했고... 급기야 기분이 상해지기까지 했다.
'아니, 실컷 모셔까지 온 녀석인데... 발정난 암캐에 별 의욕을 보이지 않으니, 그러면 다른 녀석을 불러 와야 한단 말인가? 어디서, 어떤 개를?' 하면서,
그 개의 집에 전화를 걸어보았는데, 거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그 집에 있던 강아지 티를 벗어난 개들이 백풍이 새끼들이라면서......
'그렇다면, 백풍이에게 격이가 맘에 안 드는 걸까? 우리 격이는 아주 반듯하고 이쁘게 생긴 갠데......' 하는 생각에 미치면서는,
아무래도 이미 몇년 전에 끝났던 자신의 결혼생활과 자꾸만 겹쳐 생각나는 바람에, 오전 내내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아침에 격의 용변을 보게 하면서, 백풍이도 함께 데리고 나갔다.
일단 격은 풀어주면서 수놈은 개줄에 묶고 걸었는데, 삼 일째 똥을 누는 걸 못 보았기 때문에(그 놈도 진돗개라 똥을 가리나 보았다. 마당에다 똥을 누지는 않는 것으로 보아)... '얼마나 불편할까?' 생각하다가, 백풍이의 줄도 풀어 주어 보았다.
그러자 백풍이는 바로 언덕길로 해서 쏜살같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안 되는데......" 하는 말까지 내뱉었지만, 개는 어쩐지... 자기 집을 찾아가는 것 같기도 했고, 그 모습이... 도망가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그러자 이번엔 격도 함께 그 쪽으로 달려가는 것 아닌가.
깜짝 놀라다 못해 당황하기까지 한 기로가,
"격! 격!" 역시 뛰어가면서 개를 불렀지만,
개 두 마리는 쏜살같이 언덕길로 해서 이미 그의 시야에선 사라진 뒤였다.
아무튼, 큰일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개줄을 풀러준 걸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고,
'내 개야, 없어진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만... 교미를 위해 일부러 데려온 남의 개가 없어진 건 내 책임인데......' 순간 기로는, '일단 그 집에 사과를 하고, 만약... 그 쪽에서 돈을 요구한다면, 어떻게라도 보상을 해야만 한다.'는 각오까지 했다.
그러자면 어쨌거나, 바로 집에 돌아가... 그 개의 집에 전화를 걸어 (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알려야 할 것이었다.
그렇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격!" 하고 불렀는데,
기로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격은 산 모퉁이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더니 바로 기로에게 뛰어왔다. 그래서 이번엔 '백풍'이도 불러보았으나, 개는 감감 무소식이었고...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이미 호수 외곽도로의 아스팔트까지 와 있었던 기로는, 길만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녀석도 영리한 개라고 했으니, 아무 사고 없이... 자기 본 집에 찾아가 주면 좋으련만(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 결코 가까운 거리가 아닌 데다가... 차가 많이 다니는 아스팔트여서, 그 녀석을 데리고 온 것도 차로 왔기 때문에... 쉽게 찾아가지는 못할 거라는 염려가 아니 될 수가 없었지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숨과 함께 포기를 하고, 그나마 격이라도 데리고 다시 고개를 내려오는데,
뭔가 휙! 앞으로 내닫는 것이었다.
아!
'백풍'이 다시 돌아온 것이었다.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을 몰라서 돌아온 걸까, 아니면 격의 발정기라 거기에 자극되어 떠나기 싫어 돌아온 걸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어쨌든 개가 다시 돌아와... 얼마나 다행인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夢想?'에 돌아오게 되었다.
비는 계속 내렸다.
바람도 계속 불었다.
그래서 날씨가 마치 가을로 달려가는 양 스산하기까지 했다.
아직 덥지도 않은 시점인데, 벌써... 날씨가 선선하니...... 한편으로 겁마저 나는 기분이었다.
'가을인가? 아, 가을......'
점심이 지났는데 기로의 군산 형 부부가 김치를 가지고 도착했다.
그래서 기로는 그들과 함께 밭에도 올라보고, 돌미나리도 뜯고, 날씨가 쌀쌀해서 방에 들어와 얘기도 하는 등... 같이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이제는 돌아가야 한다는 형 부부에게,
"왔다가 그냥 가면 어떡해요?" 하면서, "이른 시간이지만, 저녁은 해 먹고 가세요!" 하고 잡자,
그들도 다섯 시도 되기 전에 밥을 해먹고는 돌아갔다.
날씨는 왼종일 고르지 못했다.
잠깐 비가 멈추는 듯하다가 몇 방울 떨어지기도 하고, 언뜻 약한 햇빛이 나는가 싶다가 숨거나 바람도 잤다가 다시 일고......
그러다 보니 기로에게는 저녁 시간이 무척 긴 느낌이었다.
그래서 하모니카를 불었고, 그 뒤에도 멀거니 컴퓨터 앞에서 시간만 보내다가... 작업 방에 가서 스케치 북을 폈다.
그리고 모처럼 간단한 드로잉 하나를 했다.
그림을 벽에 걸면서 보니, 6 월 들어 세 번째 한 드로잉이었다.
'곧 6월도 끝나가는데, 여태까지 세 점밖에 못했다니......' 하고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새벽, 드디어 격이 교미에 성공했다.
기로가 보기에,
'왜 그렇게 개 두 마리가 ‘소 닭 보듯’ 있곤 하나......' 했는데,
산장아저씨 말대로 아직 때가 되지 않았었나 보았다.
그런 것도 모르고, 기로는 수놈을 본집에 데려다 줄 생각까지 했었는데, 아무튼... 새벽에 개 두 마리가 붙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고서야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그래, 이제 우리 격이가 새끼를 낳을 것이다. 검은 격이와 하얀 백풍(검은 유전인자가 있는)이 사이에 태어날 새끼들은 어떤 모습일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검은 것 세 마리, 하얀 것 세 마리만 나와 주면 좋겠는데......' 성급하게도 기로는, 어느새... 몇 마리의 강아지들이 오물조물 몽실몽실 기어 다니는 모습(산장 집의 강아지들이 지금 그런 모습이다.)까지 그려보는 것이었다.
오후에 기로는, 토마토 윗가지가 벌어져 있어서... 지줏대 끝 부분에다 끈을 다시 매 주었다.
'얘들이 얼마나 자라려고 이렇게 큰다지?' 하면서도, '그건 그런데, 왜 익지는 않는 거지?' 하고도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고추밭에 가면서는,
'풋고추도 제법 열리고 있긴 한데... 내가 심은 것과, 상범 처형 네가 심은 것, 그리고 한국 토종 고추 세 종륜데... 아무튼 이 중에서 내가 제일 기대를 갖는 것은, 한국 토종 고추(마을 사람들 얘기론, 그 맛이 달짝지근하면서도 껍질이 얇아 좋다는...)인데... 어째, 그 놈들은 아직도 자그마하니......' 하면서 고추를 쓰다듬어주기까지 했다.
그런데 밭에 풀이 얼마나 무성한지,
'이 풀들을 어쩐다냐?' 하면서 심란해지기는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면서 오늘도 풀을 뽑아준답시고 뽑아냈는데, 겨우 고추 주위거나 토마토 부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있는데, 언뜻 전화벨 소리가 들려... 뛰어 내려와 받으니, 서울의 G였다.
"야, 왜 이리 전화를 늦게 받는 거야?" 하는 투정에,
"응, 밭에 있다가... 뛰어 와 전화를 받는 거야." 하고 헐떡이자,
"너, 이제는... 완전히 시골사람이 다 된 것 같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 내 얼굴도 시커멓게 타있고, 사는 모습도... 많이 시골에 익숙해진 모습이니까......" 하고,
몇 마디 근황에 대한 얘길 하다가,
그가,
"나도 조만간에, 거기... 한 번 가봐야겠다." 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도 기로는 다시 마당으로 나왔는데, 감나무에서 매미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 번 여름들어 처음으로 듣는 매미 소리였다.
'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하면서 보니,
마당 오른편 할머니 댁 축대 틈사이에 심었던 나팔꽃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 줄기에, 하루에 하나씩의 꽃이 피고 진지 며칠이 지나고 있었던 것인데,
자세히 관찰해 보니, 이파리가 세 종류라 꽃의 색깔이나 모양이 다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잎이 다섯 부분으로 갈라진 엷은 남색 계통의 그리 크지 않은 꽃이 피고 있는 중이지만,
각 줄마다 일정하지 않은 나팔꽃 넝쿨이 점점 지붕을 향해 힘차게 올라가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였다.
그래서 드로잉을 염두에 두면서, 나팔꽃의 그런 모습까지를 자세하게 관찰하고 있었다.
다음 날이었다.
해가 나더니, 상당히 더운 날로 이어졌다.
오전에 기로는 평상에 나가 키큰 아저씨와 도란도란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도 박 만석이 슬쩍 오는 것이었다.
'늘 바쁜 저 양반은, 우리 둘이 평상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보면... 좀이 쑤시나 보다......' 기로는,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며 배시시 웃으며 걸어오는 박 만석의 모습을 보며, 웃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일어나, 어제 군산 형 부부가 가져온 수박을 썰어 내 왔다.
호숫가 나무 아래,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는 기분......
사실, 요즘엔 그런 게 일상이 되다보니... 처음에 들떴던 감정은 많이 무뎌져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마을 토박이 두 사람도,
"이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는 말은 하고 있었다.
그렇게 셋이 앉아 있는데, 전화 벨 소리가 들렸다.
기로가 다시 뛰어 와 전화를 받아보니, 산장 아주머니 김 순임이었다.
"화가 선상님, 내가 봉게... 세 분이서 재밌게 앉아 있는디... 그려서 점심을 준비혔거든요? 그렁게, 세 분이 같이 와서... 점심을 드셔요." 하는 것이었다.
"정말요?" 하고 반색을 했던 기로는, 그것 역시 너무나 아름다운 일로 여겨져,
전화를 끊고 나오면서는,
"산장 아저씨, 바로 오시랍니다." 하자,
"무슨 일인디?" 하고 어리둥절해 하는데,
"아주머니가요... 우리 셋이 여기서 이렇게 앉아 있는 게 너무 보기가 좋아서... 한 턱을 내시겠답니다." 하고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그건 또 무신 소리여?" 하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니,
"아이, 그 사이에 점심을 해 놓고... 이미 밥상까지 차려놓았다고, 어서들 와서 점심 먹으라잖습니까? 하 하 하..." 하자,
"아니, 그려?" 이젠 키큰 아저씨가 좋아했다.
물론 박 만석의 입가에도 만족스런 미소가 어리고 있었고,
그렇게 크고 작은 세 사람이(키큰 아저씨는 키가 180이 넘는 사람이고, 기로와 박 만석은 고만고만했다.) 마을길을 여유 있게 걸어가고 있었다.
산장 집에 닿으니, 이미 한 원두막엔 점심상이 차려져 있었고,
"어서들 오셔요..." 하고 김 순임이 반기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세 공기와, 뭔가 찌개로 보이는 냄비가 쟁반에 들려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키큰 아저씨는,
"내가 늘 얻어만 먹어 빚진 기분인디..." 하더니, "오늘 오후에, 내가... 고기하고 술을 준비헐 팅게, 우리 다시 모여... 술 한잔 하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심을 맛있게 먹은 뒤... 또 오후엔 셋이서 나란히 트럭을 타고 정자리까지 가서 고기를, 그리고 운암대교 앞에서는 막걸리를 사와... 또 다시 술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렇게 술이 또 몇 잔 들어가자,
'아, 정말... 이렇게만 산다면, 세상 일 다 잊어버릴 것 같다......' 기로는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서도, '아, 이런 행복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 세상엔... 뭐든 영원한 건 없는 법인데......' 하기도 했다.
저녁까지 날은 더웠다.
내일도 장맛비가 제법 내릴 거라는데, 날이 은근하게 더웠던 것이다. 그러니 기로는,
'여기도 이런데,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울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초저녁 어스름에도 배를 타러 나갔다.
약간의 취기가 남아 있었지만, 스스로... 위험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기로가 호수에서 '夢想?'을 바라보니,
언뜻 토방엔 하얗고 검은 개 두 마리가 다시 붙어있는 모습이었다.
*
비가 온다.
콸콸 흙탕물을 쏟아내도록 많은 비가 내리고 있다.
하루 종일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나는 골이 다 아프기까지 했다.
아이 따분해......
의자가 넘어지도록(?) 뒤로 재키며 기지개를 켜봐도, 몸이 찌뿌듯하기만 했다.
숫캐도 따분한지 하품을 하거나 낑낑대는 소리를 내곤 한다.
나도 오늘은 공치는 날인가?
방문을 열어놓고 바깥의 비오는 풍경을 보고 싶은데, 그러면 파리가 들어오니... 하는 수 없이 마루에 앉아 우두커니 마당과 그 너머 호수의 비오는 모습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길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없어 그런 나를 방해하는 건 아무도 없었다.
비가 잠시 멈춘 듯하기에 나는 산장할머니 댁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종일 내린 비로 고춧대 몇이 쓰러지거나 휘어진 것도 있었다.
문을 열고 내가 부르니 할머니가 나오셨다.
"비가 멈췄어?"
"예, 조금 멈춘 것 같은데요......"
그런데 할머니 댁 마당에 있는 한 복숭아나무가 이상했다. 같은 나무에 두 가지가 벌어졌는데, 한 가지엔 자디 잔 복숭아가 수도 없이 열려있었고, 다른 가지엔 큰 복숭아 몇 개만이 달렸는데... 벌써 익어가는지 불긋불긋 했다.
"저거 하나 따 먹어 봐." 할머니가 하시기에, 내가 하나를 따 깨물어보니... 완전히 익은 상태는 아니었지만 맛은 들어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몹씨 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바람을 좋아하는 난데, 요즘 그렇게 센 바람은... 싫기만 했다.
내가 애지중지 가꾸는 코스모스를 다 쓰러트리거나, 토마토 가지도 꺾이거나 휘어질 염려 때문에......
아무튼 저녁이 되면서, 그런 위협적인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근데 왜, 오늘은 전화 한 통 없을까?' 하다가,
나는 밤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까지 했다.
바람이 부는지 바깥에선 끊임없이 스산한 소리가 들려오고, 언뜻... 개구리 울음도 들려왔다.
저녁을 짜게 먹었는지, 갈증이 났다.
그래서 얼른 나는 통나무 집에 가서 수박 반통을 다시 반절로 자른 뒤 잘게 잘라 쟁반에 담아 '夢想?' 마루에 돌아와 앉았다.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우직우직 단 부분만을 파먹었다.
안 먹고 냉장고에 놔두면 수박이 무를 것 같아서, 그렇게라도 먹어야만 했던 것이다.
바람이 세게 부니, 나방이나 모기가 없어서... 오히려 마루에 앉아있는 게 더 상쾌하기까지 했다.
수박을 먹고, 마당에 섰는데... 비가 멈춰있었다.
아홉 시가 되는데도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은 하늘엔, 검고 낮은 구름들이 찢겨 센 바람에 실려 날려가고 있었다. 그 너머로는 좀 더 맑은 구름이 깊은 하늘 아래에 초연하게 떠 있었는데, 언뜻 깜박이는 빛의 물체가 그 위로 날아가고 있었다.
비행기일 터였다.
'그래, 비행기는 구름 위로 날아가지......' 나는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다움을 두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바람이 맑고 상쾌해서인지, 정말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었다.
호수로 부는 바람은 물결을 만들어서인지 어둠 속에선 철렁철렁 물결소리도 들려왔고, 멀리 운암대교 쪽엔... 비 갠 깨끗한 공기로 화려한 네온사인의 까페들이 불야성처럼 맑고 환상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저절로 나온 내 휘파람 소리에, 머리를 토방에 붙인 채 누워있던 하얀 개가 벌떡 일어서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것이었다.
'그래, 이 밤이 너에겐 이 '夢想?'에서의 마지막 밤이란다. 내일은 네 본집에 데려다 주마......' 하는 내 머리엔,
길을 떠나는 한 사람과 개, 그리고 그들을 따라가려는 낑낑대는 검은 개의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사랑하는 개들의 이별.
당분간은 쟤들도 서로를 그리워할 것이다.
다시 내 머릿속엔,
배낭을 메고 자동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길을 걸어가는 한 사람과 개의 모습이 그려졌다.
'4-50 분은 걸릴 길인데......'
6 . 27
# 개들의 사랑
우리 격이를 시집보낸 게 아닌 '백풍'이란 수놈을 장가보내느라 데려온지 만 일주일이 됩니다.
하얀 진돗개인데, 어째 비쩍 곯은 데다(그 집에 개가 많아 특별히 한 녀석에게만 신경을 써주지 못한 탓일 것 같음), 털을 가느라 볼품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자기 집 뒤가 산이고 또 풀어놓고 키우는 개라, 하필이면 그 날따라 산에 갔다 왔는지 야생초의 씨로 보이는 검은 것들이 온 몸에 붙어있어서... 더 우스꽝스럽고 볼품도 없어 보였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꼴은 저래도, 아주 영리한 녀석이에요." 했었습니다.
아무튼 숫캐를 데려다 놓은지 일 주일이 되었고, 자기 역할(?)은 다 한 것 같아서 이제 데려다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요 녀석이 우리 격이를 아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잠시도 격이와 떨어져 있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녀석을 풀어놓아도 격이 있어서 도망가지는 않겠지만(한 번 그런 적이 있던 걸로 보아), 그래도 녀석을 풀어놓으면 마을의 밭을 헤집고 다닐 우려도 있고 또 지난 번처럼 도망갈 염려도 없지 않아서... 내내 묶어놓고만 있는데,
격을 조금만 풀어놓아 마당 밖으로 나가기만 해도, 녀석이 아우성을 치고 난립니다.
그 뿐 만이 아닙니다.
어제는 아주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하루종일 비가 내리기에 데리고 나갈 수도 없어서 내내 묶어 놓았었는데......
개 집이 하나 뿐이라 두 마리가 비를 피할 수가 없을 것 같아서, 격은 마루 가까운 못에 줄을 묶어 놓았더니... 마루 밑으로 쑥 들어가 버리면 되었고,
그 녀석은 격의 집에 들어가 있으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따금 격의 집에 들어가 있기도 하던 녀석은, 낑낑대거나 소리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백풍아, 왜 그래?" 짜증스런 소리를 지르며 내가 마루로 나가면,
녀석이 나를 보면서 꼬리를 흔들다가도, 다시 격을 보며 끙끙대곤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비가 내리는데 데리고 나갈 수도 없었는데,
그러다가 저녁 무렵에 비가 잠깐 그치기에, 두 마리를 다 데리고 나갔더니,
녀석이 오줌을 얼마나 많이 누는지......
백풍이 녀석도 격이처럼, 집에다 오줌을 누지 않아 신통하기도 했고... 또 그 많은 오줌을 참고 견뎌내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면, 미안하기도 하드라구요.
그렇게 집에 돌아왔는데, 녀석이... 또 다시 끙끙거리는 겁니다.
"왜 그래? 요 녀석이..." 하며 야단을 쳤는데,
언뜻 보니...
마루 밑에 들어가 있는 격의 개줄(쇠 사슬)을 녀석이 입에 물고 잡아당기는 거 아니었겠습니까?
아무래도 격이 보다 힘이 센 녀석이라, 격이가 조금 끌려 나오기도 하드라구요.
그러면 격에게 꼬리를 치면서 아양을 떨기도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니, 개가 상대방 개의 개줄을 끌다니요...... 개줄을 끌면, 끌려 나온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실행하다니요......
있을 수 있는 일이겠지만(그래서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겠지만), 퍽 재미있기도 했고... 또 놀랍기까지 했습니다.
'어라? 저 녀석 좀 봐라......'
그래서 가만히 관찰해 보니,
격은 귀찮다는 듯 마루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녀석은 격이를 옆에 두고 싶어... 끙끙거리면서도 개줄을 입으로 물고 잡아끄는 걸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격이가 끌려나와 잠깐 그 녀석 옆에 가서 엎드려있었는데... 그러면 또 아무 불평 없이, 녀석도 나란히 엎어져있는 모습이... 너무 재미있었습니다.
둘이 사랑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리고, 아닌 게 아니라... 녀석이 퍽 영리했던 것입니다.
참내!
자기 집에서도, 주인이 집에 있을 땐... 짖으면서도 방문객을 집안에 들여보내지만, 주인이 없을 경우엔, 아무도 집에 들여보내지 않는다는 개라는데......
아무튼, 영특한 녀석임을... 내 눈으로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격의 신랑감으로는 잘 골랐다' 싶기도 하더군요.
여기저기 수소문하고 다니면서 찾다가 결국 녀석을 데려왔었는데, 성공적이었는 거지요.
엊그제 산장아저씨는,
"장씨, 왜 우리 잘 생긴 수놈을 데려다가 붙여주지 않고... 그 먼데서 볼품도 없는 녀석을 데려왔어?" 하며, 약간은 서운한 듯(?) 아니면, 한편으론... '우리 개를 불신하는 것 아니냐?'는 질타(?)의 말을 했었거든요.
근데, 나는 산장집의 그 녀석이 썩 맘에 들지가 않더라구요. 꼭 그 숫캐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집 개들은... 내가 그렇게 그 집에 드나들어도, 맨날 짖어대거든요. 그게 나에게만 그러는 게 아니고 마을 사람들(특히 키큰 아저씨)에게도 그러니, '그놈의 멍청한 개들'이라고)이 불평을 하시곤 하거든요.
그러니, 내 사랑하는 격의 신랑감으론, 좀 더 멋진 녀석이어야 할 것 같아서... 애를 태우며 신랑감을 물색하러 다녔던 거니까요.
마치 딸을 키우는 아버지 심정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비록 내가 자식도 떼어버리고... 지금은 혼자 사는 사람이지만......
아무튼,
'찾아보다 영 안 되면, 산장 집 개라도 하는 수 없다.' 라는 생각은 있었습니다.
(이 사실을 산장아저씨가 알면 기분 나쁘겠지만)
그렇지만, 최선을 다해서 한 번 찾아보긴 해야 할 것 같았고, 그런 결과로 백풍이를 데려왔던 것이고... 또 그런 인연으로 사람 좋은 주인도 알게 되었던 기쁨이 있지 않았잖습니까?
아무튼, 녀석은 우리 격이를 몹씨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한시도 지 시야에서 벗어나 있지 못하게 하거든요.
그런데 이제, 시간이 되어... 녀석을 데려다 줘야 될 상황입니다.
두 개를 떼어놓아야 하는 것이지요.
아무리 동물이라지만, 개들도 서로 좋아하는데... 강제로 떼어놓으려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립니다.
그렇다고 그 녀석을 내가 키울 수도 없는데......
사랑하는 사이를 떼어놓는 일.
썩 내키지는 않지만, 그 역할을... 내가 해야만 한답니다......
6 . 28
기로는 오늘 '백풍'이를 제 집에 데려다 줬다.
물론, 개 두 마리는 서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다.
처음 기로가 수놈을 데리고 나갈 때만해도 별 동의가 없었다.
그런데 '夢想?'을 벗어나 마을 길을 걷는데,
뭔가 낌새를 눈치 챈(기로가 집을 잘 보고 있으라며 가방을 메고 나가는 것을 보았던 격이 주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격이 끙끙대는 소리를 지르자,
수놈은 격에게 돌아가려고 몸을 뺐고,
격의 울음소리는 마을을 진동하기 시작했다.
두 개들에겐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기로가 남의 개를 키울 수는 없었던 것인데,
"어디 가?" 기로를 본 박 만석이 소리를 쳤다.
"예, 개 데려다 주려고요."
"비가 오는디 어떻게 갈라고?"
"괜찮아요..."
그러면서 기로가 조금 걸어 나가자, 다시 박 만석이 소리를 쳤다.
"내가 차로 데려다 주께..."
"아닙니다. 괜찮아요..."
"비 맞고 어떻게 갈라고 그려?"
"그래도, 괜찮습니다."
한 손엔 우산을 등에는 조그만 배낭을, 그리고 오른 손엔 개줄을 잡고 기로는 걸어갔다.
개를 데려다 준 뒤, 정읍의 김 선생님 댁에 가려고 나섰던 길이었다.
기로는, 차들이 많이 다니는 아스팔트에선 개의 끈을 바짝 조였다가 조금 여유가 생기면 약간 느슨하게 풀어주는 식으로 걸었다. 그래도 27번 국도로 개를 데리고 걸어가는 건 쉬운 길은 아니었다.
바짝 긴장한 채로 50 분 정도가 소요되는 길이었다.
그 집에 도착했을 땐, 기로 신발의 앞부분 반절이 젖어있었다.
개를 데려다 주고 돌아오려는데,
백풍이는 기로를 따라왔다. 아니, 아예 앞장을 서는 것이었다.
그래서 기로가 개줄로 묶으려 하자, 눈치를 챈 개가... 길목에 서서 돌아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때마침 전주에서 시내버스가 들어왔고, 거기엔 그 집 주인 아저씨가 타고 와서... 조금 더 그 집에서 얘기를 나누다, 그 버스가 돌아 나오는 걸 기로가 타는 식으로, 정읍행 버스가 출발하는 '정자리'로 갔다.
정읍까지는 거의 한 시간이 소요됐다.
정읍에 내려서도 기로는 선생님 댁까지 걸어갔다. 기로가 도착했을 땐 한 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선생님과 점심을 먹고 있는데 전화가 왔고, 역시... 군산의 최원장 부부였다.
그들 부부와 안성의 신원장 부부도 정읍으로 내려오리라는 연락을 받았던 선생님은, 기로가 거기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최원장 부인이,
"장 선생님, 꼼짝하지 말고(돌아가지 말고) 우리들을 기다리고 계세요." 하는 엄포(?)를 놓아서,
김선생님과 기로는 한바탕 웃고 말았다.
요즘 주말만 되면 모두들 좀이 쑤시거나 또 냄새를 맡고 서로에게 연락을 하면서, 이번 주말도.. 결국은 한 자리에 모여 주말축제에 젖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다시 주말축제가 벌어졌다.
막걸리는 선생님의 제자네 집에서 만든다는 걸로 한 통을 사와서, 그들은 밤 새도록 막걸리를 마셔가며 떠들썩하게 축제를 즐겼다.
그러면서 기로는 생각했다.
'야, 정말 체력들도 좋고 또 술도 잘 마신다. 그렇지만... 이제는 조심해야한다.' 하면서, 술 마시는 걸 조절해나갔다.
그 분위기에 휩쓸려 무조건 술을 마셔서는, 다음 날 괴로움에 후회하고 말 것 같아서였다.
기로의 예감은 맞았고, 꼬박 밤을 새웠던 그들은 다음 날 아침에야 잠에 빠져들었다.
두어 시간 뒤 잠에서 깨어난 기로는, 거의 파김치가 되어있었지만... 지난 밤 술을 조절한 이유로 속은 괜찮았다.
그 사이 두어 사람이 구토를 했지만, 이내 멀쩡한 듯 정상을 되찾고... 점심 무렵에 그들 모두는 정읍 시내에 있는 한 보리밥 쌈밥집에 가서 아침 겸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그들은 거기서도 술이었다.
기로는 술을 입에 대는 시늉만 했을 뿐(조금 마시긴 했다.) 그들에 따르지는 않았다. 도무지 몸이 따라주질 않아서였다.
다시 선생님 댁으로 돌아와, 집에서 담근 된장과 고추장을 받고(찌개나 국을 끓이는데 사 먹는 쌈장으로는 맛이 없어서, 선생님이 기로에게 된장을 주신다며 와서 가져가라고 했기 때문에 갔었던 것으로) 최원장의 차로 시내까지 타고, 기로는 다시 시내버스로 갈아탄 뒤 '정자리'까지 돌아왔다.
오후 네시 경의 햇살은 따거웠다.
아스팔트 길을 걷다보니 기로의 T셔츠가 땀에 젖어갔다.
집까지 반절 쯤 걸어갔을까?
한 차의 크락션 소리가 들려서 보니, 때마침 상범 부부가 통나무집에 풀을 뽑으러 가다가 걸어가는 기로를 발견하고 차를 세웠던 것이었다.
애당초 '夢想?'까지 걸어 돌아올 생각이었기에 불평은 없었지만(그 사이 시내버스가 한 대 지나갔지만, 기로는 세우지 않았었다.), 그렇게 우연히 친구차를 만난 것도 싫지만은 않았다.
집에 돌아오니, 만 하루 반을 집을 지키고 있었던 격이 반갑다고 난리였다.
기로는 개를 풀어주고 호숫가 배로 갔다.
빗물이 찬 배의 물을 퍼주고 격에게 호숫가에서 목욕을 시켰다.
날이 더워선지 개는 스스로 물 속에 몸을 담궈 열을 식히기도 했다.
그래도 속이 좋질 않아, 기로는 산장할머니 밭에 가서 아욱 한 주먹을 뜯어다가(언제든 뜯어 먹으라는 할머니의 허락이 있었기에) 선생님댁에서 가져온 된장을 풀어 국을 끓여 저녁을 먹었다.
컴퓨터(인터넷)를 접해보니, 미국인 친구 S는 낼 모레 화요일에 프랑스로 여름휴가를 떠날 거라며... 거기에 가서도 연락은 하겠다는 메일이 있었다.
그리고, '잘 도착했냐'는 두 통의 전화를 받고(최원장부인과 선생님의), 기로는 조금 일찍(아홉시 반쯤) 잠 자리에 들었다.
주말의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