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로국에 버금가는 나라, 영천의 골벌국(骨伐國)
기원전후 지금의 영천지역에 있었던 소국 집단
영천지역의 자연환경과 고고학적 자료들을 참고하여 보면 일찍이 금호강 상류 남천과 북천유역에 고인돌 축조 집단이 취락을 형성하였으며 이웃의 대구 ․ 경산지역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금속문화가 유입되어 보다 큰 정치집단이 금호강 유역의 들판을 낀 구릉을 중심으로 기원전후에 골벌국을 형성하였다.
골벌국은 신라 3대사 장소의 하나이며 신라 초기의 많은 소국들 가운데 비교적 왕경과 인접한 곳이면서 3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사로국에 복속되었다. 사로국에 흡수되기 전 골벌국은 진한 소국 가운데서는 사로국에 버금가는 독자적인 세력을 갖춘 대표적인 소국의 하나였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사로국에 흡수되었으나 후대에까지도 호국의 성소로 여길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문헌에 나타난 골벌국의 성립과 발전
영천지역은『삼국사기』의 골벌국, 또는『삼국지』동이전 한전의 진한 호로국(戶路國)의 중심지로 비정되기도 하는 지역으로서 일찍부터 금호강 유역의 들판을 낀 구릉지를 중심으로 정치집단을 형성, 발전시킨 곳이다. 영천지역을 중심으로 성장한 골벌국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살펴본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 이는 진한 소국들에 관한 문헌자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이를 보완할 고고학적 성과도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골벌국에 관련된 기록으로는『삼국사기』와『삼국유사』에 나타나는 몇 줄의 기록이 전부이다.『삼국사기』신라본기 조분왕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7년 봄 2월 골벌국왕 아음부가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하여 왔다. 이에 왕은 그들에게 저택과 전지를 주어 편히 살게 하고 그 땅을 군으로 삼았다.”
이 내용은『삼국사기』에서 골벌국에 관련된 기사로는 처음 나오는 기록이다. 그리고『삼국사기』지리조 양주 임고군조를 보면, 임고군은 원래 절야화군이었던 것을 경덕왕이 개칭한 것으로 장진 ․ 임천 ․ 도동 ․ 신녕 ․ 민백 등 5개의 영현이 있었다. 그 중 임천현은 조분왕 때 편입된 골화소국 지역으로 경덕왕 때에 개칭되었다고 한다.
역시『삼국사기』신라본기 지증왕 5년조에 “가을 9월 역부를 징발하여 파리 ․ 미실 ․ 진덕 ․ 골화 등 12개 성을 축조하였다.”고 하는데 그 중 골화성을 비롯하여 4개의 지명이 나온다. 같은 책 권32 잡지1 제사조에도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에 대 ․ 중 ․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대사를 지낸 3산은 나력(습비부) ․ 골화(절야화군) ․ 혈례(대성군)이며 이 중 골화는 당시 절야화군에 있었다고 한다.
이상이『삼국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골벌국과 관련된 내용의 전부이다. 그러므로 기존의 문헌자료의 기록으로는 골벌국의 성장 과정은 물론, 이들 정치집단의 성격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골벌국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헌자료와 더불어 지금까지 영천지역에서 발견된 고고학적인 성과를 토대로 삼을 수밖에 없다.
골벌국의 흔적 : 고인돌과 선돌, 그리고 암각화.....
인류의 문화가 강 유역에서 발달한 것처럼 금호강 원류지점인 영천에서도 선사시대 유적과 유물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영천지역에는 기원전 취락집단의 존재, 정치적 지배자의 출현과 사회체제를 입증하여 주는 고인돌이 영천지역 전역에 걸쳐 300여기가 넘게 분포하고 있다. 고인돌과 더불어 이 시기의 거석유물인 선돌도 10여기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고인돌 축조 집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방형기하문 암각화도 청통면 보성리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수 백기의 고분이 영천지역 전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며 고경 대의동성지와 백학산 일대의 가상동성지를 비롯하여 성곽이 축성되었던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영천지역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출토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신녕면과 화산면 일대에서는 기원전 3〜2세기경의 세형동검 ․ 동과와 같은 청동기가 발견되고 있다.
또한 기원전 1세기경에 이르면서 북방계 청동기 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새로운 세력집단이 대두되고 있다. 화산면, 신녕면 지역이 아닌 금호읍 어은동에서 북방계 문화요소를 주류로 하는 일괄 유물군이 발견되었다. 이 속에는 방제경을 비롯하여 한식경, 마형 ․ 호형대구 등이 반출되고 있어, 이곳을 중심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는 이전보다 상대적으로 유력한 정치집단이 성립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최근에는 고경면 용전리 일대에서는 기원전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투겁창, 청동꺾창(동과), 청동노기와 쇠투겁창, 쇠꺾창, 딘조쇠도끼 등 다량의 유물이 다량으로 발견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청동노기는 지금까지 우리 나라에서는 평양지역의 정백동, 석암리 등의 낙랑무덤에서 출토된 바 있으나 한강이남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되어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골벌국은 어디쯤, 어떤 의의를 지니나?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자료와 고고학적 자료를 통해 볼 때 기원전후 영천지역에서 성장하였던 정치집단으로는 북천일대의 신녕을 중심으로 한 세력집단과 남천일대의 완산동을 중심으로 한 세력집단이 존재하였으며 이들 두 집단간의 경쟁과 복속을 통해 골벌국이라는 강력한 소국을 형성, 발전시킨 것으로 보여 진다. 그리고 골벌국의 주치소를 추정해 볼 때 오늘날 완산동 일대로 비정되며 그 영역으로는 오늘날 영천지역의 대부분과 포항의 죽장일대까지를 그 세력 범위로 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서 주목할 사실은 골벌국 아음부왕이 조분왕 7년에 항복하는 기사이다. 사로국이 병합한 진변한 여러 소국들의 기사 중에서 국왕의 이름이 직접 나오는 경우는 법흥왕 때의 금관가야 김구해왕의 내항기사와 조분왕 때의 골벌국 아음부왕의 기사뿐이다. 따라서 이는 금관가야 김구해왕의 내항기사와 비견되는 기록으로 신라에 있어서 골벌국왕의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골벌국이 사로국에 통합되는 시기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즉 경주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인접하여 있으며 지형적으로 큰 장애물도 없이 도달할 수 있는 골벌국이 더 멀리 떨어진 경산의 압독국이나 청도의 이서국 뿐 아니라 훨씬 북쪽에 위치한 김천의 감문국과 조문국보다도 늦은 3세기 중엽에 사로국에 병합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비록 당시의 사로국의 복속은 바로 영토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거점의 확보나 공납의무 등 불완전한 지배체제를 인정하더라도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고 하겠다.
이처럼 사로국과 가장 인접한 지역에 있으면서도 주변의 진한 여러 소국들보다 늦은 시기까지 독자적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은 곧, 골벌국이 사로국에 버금가는 정치집단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3세기 중엽에 이르러 사로국이 주변의 대부분 소국들을 병합하고 낙동강 상류쪽으로 세력을 확장시키자 더 이상 버틸 능력이 없게 되어 아음부왕이 스스로 항복하여 사로국에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골벌국은 사로국과 더불어 진한의 여러 소국 중 가장 두드러진 정치집단의 하나로 사로국에 버금가는 독자적 세력을 갖춘 대표적인 소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사로국에 병합된 후에도 서북쪽 죽령로 진출의 전초기지로서, 또한 왕경 방어의 보루지로서 신라국가 성장의 모태가 된 것으로 보여 진다.
신라 호국의 성소로 남았던 골벌
『삼국유사』김유신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하고 있다.
....(상략) 김유신이 기뻐하며 친히 백석을 데리고 밤에 떠나서 고개 위에서 막 쉬고 있을 때 어떤 두 여인이 나타나 공을 따라왔다. 골화천에 이르러 유숙하게 되었는데, 또 한 여자가 홀연히 와서 공이 세 낭자와 더불어 기쁘게 이야기 하였다. .....(중략) “원컨대 공께서 백석을 떼어놓고 우리들과 함께 저 숲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말 하겠습니다. 이에 그들과 함께 들어가니 여인들은 문득 신으로 변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들은 나림, 혈례, 골화 등 세 곳의 호국신이다. 지금 적국 사람이 공을 유인해 가는데도 알지 못하고 따라가므로 우리는 말리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하고 말을 마치자 자취를 감추었다. ....(후략)
이 기록은 고구려 첩자인 백석의 꾐에 빠져서 고구려로 유인되어 가는 김유신이 골화에서 유숙할 때 나림, 혈례, 골화 등 3곳의 호국지신들이 각기 낭자로 화신하여 사실을 말하면서 그를 되돌아오게 하였다는 유명한 삼국호국지신에 관한 내용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록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사기』제사조에 삼산오악 이하 명산대천에 대 ․ 중 ․ 소사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대사를 지낸 3산중의 한곳이 골화였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골화 지역은 나라의 큰 제사였던 삼산 대사지의 한곳으로 신라가 고대국가로서 성장함에 있어 그만큼 이곳을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하고 있으며 호국의 성지로 여기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겠다.
비록 골벌국이 정치적으로는 사로국에 흡수되었으나 삼산 대사지의 한 곳으로 이 지방이 후대에까지도 호국의 성소로 여길 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신라의 성장에 있어서 단순히 왕경과 인접지역이라는 지리적 요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골벌국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 시대를 살던 영천인의 정신은 아직까지 살아남아 있다. 골화여신이 김유신의 목숨을 구해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게 하고 최무선 장군이 우리나라 최초로 화약제조에 성공하여 누란의 위기에 처한 고려를 구하였으며, 임진왜란 시 전국에서 최초로 복성하였음은 물론, 한말 국권회복을 위해 강력한 대일항쟁을 전개한 산남의진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6․25전쟁 때에는 낙동강 방어선의 최후 보루지로서 반격의 계기를 마련하였듯이 이곳 영천은 항상 나라가 어려울 때는 분연히 일어나 국가를 위란에서 구해낸 호국의 성소로 우뚝 자리 잡고 있다.
골벌국의 흔적을 찾아서
1. 고인돌 유적
영천지역에 산재해 있는 300여기의 고인돌의 분포지역을 보면 대체로 금호강 지류의 구릉에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외형적인 특징은 모두가 이른바 남방식 고인돌의 특징을 갖추고 대부분 지석이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임고 양평리를 제외하고는 3〜5기씩 무리를 지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고 대창 조곡동 경우는 20여기가 2줄로 띄엄띄엄 놓여 있다.
2. 선돌 유적
선돌유적으로는 신녕 완전리를 비롯하여 금호 석섬리, 대창 신광리와 오길리, 청통 계지리 등에서 10여기가 발견되고 있다. 이들 중 신녕 완전리 선돌이 가장 대표적이다. 원래 선돌은 고대 무덤 앞에 비명이나 도로의 이정표로 사용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선돌은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이정표 기능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3. 고분군
영천지역에는 조성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수 백기의 고분이 분포하고 있으며 그 중 완산동 일대의 고분군이 가장 대표적이다. 이곳의 고분군은 대체로 다른 고분보다 비교적 형태가 크고 밀집되어 있으며 분묘의 규모는 큰 것은 직경이 20m에 이르는 대형고분 수기가 존재하나 대부분 도굴되어 훼손되었다.
4. 대의동 성지(현 금강산성)
완산동에서 고경 대의동에 이르는 지역에 걸쳐 축조된 토석혼축성이다. 이 성은 골벌국의 주치소로 비정되는 지역에 위치하고 있어 골벌국과 관련이 있는 골화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신라말기 금강성 성주였던 황보능장이 축조한 금강산성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5. 가상동 성지
화산 가상리 마을 뒷산인 백학산 일대에 토석혼축으로 산정부를 따라 이어진 테뫼식 산성이다. 성의 북동편은 무성절벽구간으로 성벽은 서남쪽에서 확인된다.
6. 보성리 암각화
청통 보성리 입구에 위치하고 있으며 화강암으로 된 거북바위 형상으로 양면에 방형기하문 암각화 16여개와 여러 개의 바위구멍이 새겨져 있다. 시기적으로는 청동기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한반도 남부지역의 토착세력인 남방식 고인돌의 축조집단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보여 진다.
7. 화산 ‧ 신녕면 유물
화산 연계리와 신녕면 일대를 중심으로 B.C. 3〜2세기경의 세형동검 ․ 동과 ‧ 동모와 같은 청동기가 다수 발견되고 있다.
8. 금호읍 어은리 유물
금호 어은리 입구 금호강 남안의 구릉 경사면에 위치한 고분유적에서 다량의 청동기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출토유물 및 발견상태로 볼 때 토광묘 계통으로 기원전 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 출토된 청동유물은 한의 일광경을 비롯하여 방제경, 녹두, 소마형, 그리고 마형‧호형대구 등으로 이는 북방계 문화를 배경으로 한 집단이 성장하였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9. 고경 용전리 유물
이 유적지의 축조연대는 대략 기원전후에 해당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출토된 유물로서는 청동투겁창, 청동투겁창, 청동꺾창집과 청동꺾창, 청동노기, 동전 등 청동류 유물을 비롯하여 쇠투겁창, 쇠꺾창, 단조쇠도끼, 쇠살촉, 쇠낫, 판상쇠도끼, 봉상쇠도끼, 덩이쇠 등 철기류와 흑색 와질토기편 및 원판형의 토제품 등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