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에 '피 죽' 한 그릇도 못 먹다
이원우
벼 수확을 앞두었을 무렵 들길로 나갔었다. 농부들의 손길이 무척이나 바빴다. 그런데 벼이삭 사이에 그 피란 녀석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아내에게 물었다. 피를 아느냐고. 아내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는 한 녀석을 뽑아들고 말했다.
“당신 사흘에 피 죽 한 그릇도 못 먹은 모습이야.”
아차 싶었지만 엎질러진 물이다. 아니나 다르랴, 아내는 더 기운 빠진 모습이 되어 울상이다. 괜한 소릴 했다 나왔다 싶었다. 후회하다가 가까스로 부축하여 길가에까지 나와 택시를 집어타고 집으로 왔다. 피 죽이라니 그게 아픈 사람에 할 소리인가 싶어 난 실소를 흘릴 수밖에.
그러고 몇 달이 지났건만 아내의 병세는 차도가 별로 없다. 그마나 나는 잡문도 쓰고, 실용 음악 학원에 가서 색소폰 연습은 물론 노래도 부르는 등으로 일과를 보낸다. 하지만 아내는 손자 뒷바라지와 집안일에 모든 걸 앗길 따름이다.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한다.
어제 저녁에 딸애가 제 어미 입맛 없다며 죽을 사 왔다. 포장부터가 그럴싸하다. 아내에게 들길에서 얘기했었던, 피 죽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그러나 아내는 그 맛있는 죽조차 먹지 못했다. 내가 대신 숟가락을 들자 가족들이 웃었다. 이튿날 아침에도 나는 남은 죽으로 끼니를 때웠다. 오래 두면 상할 염려가 있어서였다.
그런데 설거지를 하다 말고 '죽(粥)'이 한자에서 온 말이라는 게 기억이 나서 다시 사전을 펼쳐 들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죽! 쌀 米가 좌우로 활 弓을 거느린 글자라니 미덥지 않아서다. 弓이 가난하다는 뜻이라도 지녔다면 모르지만…….옥편을 아무리 뒤져봐야 그 근처에 가지 않았다.
사전을 훑어나간다. 죽에서 만들어진 말들과 맞닥뜨리면서 거듭거듭 놀란다. '죽밥간에(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죽사발(죽을 담는 사발-사발도 한자로 쓴다니, 민요에도 나오지만 아리송하다)/ 죽술 (지에밥 대신에 죽을 쑤어 누룩과 섞어서 술밀을 만들어 빚은 술/ 몇 숟가락의 죽)/ 죽식간에('죽밥간에'와 동일)/ 죽엽죽(댓잎과 석고를 물에 달여 웃물을 따라 멥쌀을 넣어 끓인 죽)…….세상에 많기도 하다. 죽의 분신이.
그런가 하면 속담 비슷한 것도 그에 못지않다. 죽도 밥도 안 된다/ 죽 떠먹은 자리/ 죽 끓듯 하다/ 죽을 쑤다(일을 망치거나 실패하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국밥간에와 동일). 다만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죽 쑤어 개 주다'랄 때는. '쑤다'라는 동사에 굉장한 의미나 정성을 들였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데, 뭔가 앞뒤가 맞지 않은 것 같아 실망했다.
뒤늦게 오늘 아침 신문을 읽으면서 나는 또 혼란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한문학을 전공한 사람 같은데 그가 뜬금없이 대던진 화두가 '한자에서 온 우리말'이었다. 그는 대표적인 것으로 양말이라는 단어를 들었다. 양말은 순수한 우리말이 아니라는 게 아닌가? 그 근거로 우리 조상들이 신던 버선보다 훨씬 편리하고 실용적인 물건이 하나 들어왔는데, 마땅한 이름이 없었단다. 그래서 급조한 게 큰 바다 洋에 버선 襪 자를 붙여서 洋襪이라 합의하고, 이거야말로 손뼉이라도 치고 남을 일이었다는 것.
설마하니 그럴까 싶어 약간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사전에서 문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수십 장을 넘기자는데 아, 드디어 '양말(洋襪)'이 얼굴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내친김인 데다 심심하기도 하여 사전을 샅샅이 훑다시피 했다. 그리고 군데군데서 차라리 신음 소리를 뱉어야만 했으니, 이걸 내 무식 무지라 해야 하나. 아니면 까짓 죽은 한자말에 뭐 신경을 쓰다니 언어도단이라고 해야 하나?
원고지를 뒤집어 놓고 몇 개를 옮겨 적는다.
주전자(酒煎子)/ 남편(男便)/ 편지(便紙)/ 야속(野俗)하다/ 야단(惹端)맞다/ 야단법석(野壇法席)/ 간신(艱辛)히/ 구역(嘔逆)질 등등 끝이 없는 걸 어쩌나. 물론 아무리 모자란 나지만 '야단맞다'는 정말 순수한 우리말인 줄 알았는데, 한자와 관련이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주전자'나 '야속하다' 혹은 '구역질', '간신히' 따위를 내가 쓰는 어떤 글에도 한자로 인용할 생각은 없다. 그래도 갓 결혼한 제자에게 보내는 편지에다 男便은 하늘 어쩌고저쩌고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일곱 달 전 특별한 종교를 믿는 신랑 신부의 결혼식 주례를 섰는데, 맞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더라. (마흔이 넘은 재혼 부부)
아둔하기만 한 내 눈이 번쩍 뜨이게 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돼지고기를 말하는 제육이다. 제육볶음, 식당에서 얼마나 많이 들어왔으며 먹어본 음식인가. 사전에는 제육(-育)이라 표기해 두었다. 손오공에 나오는 저팔계(豬八戒)의 얼굴이 돼지 형상을 하고 있어, '豬가 제로 바뀐 줄 짐작했는데, 아뿔싸 컴퓨터에는 이미 제육(猪肉)으로 등장하고 있다. 하기야 같은 돼지 '저'인데 무슨 상관일까만.
아내에게 거듭 미안하다. 나는 죄인임을 다시 한 번 고백한다. 아기를 가졌을 때-워낙 가난해 17일 동안 국수만 먹었던 기억이 있다. 나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도 이미 저승에 갔고- 장모님이 잉어를 고아 오셨다. 그걸 제대로 못 먹어내는 아내의 입에 억지로 숟가락으로 떠 넣어줄 생각을 하기는커녕 조금 남기기 무섭게 닁큼 빼앗아(?) 먹었으니…….
오늘 따라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머릴 어지럽힌다. 아내가 죽을 못 먹으면 나도 굶을 일이지 언감생심 달려들어 그릇을 비우다니 화적이나 진배없다. 아내가 어디 언년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지금은 돈이나 양식이 없어 사흘에 피 죽 한 그릇 못 먹는 게 아닌 아내에게 연민의 정을 보낸다.
(15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