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남대 호수의 윤슬.
노덕경
대청호수를 바라보면 내려앉은 햇살이 물고기 비늘처럼 잘게 부서지며 반짝인다. 호수를 품에 안은 채 굽이치는 숲길에는 만개한 벚꽃이 눈부신 화관을 쓰고 나그네를 반긴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문의면 청남대길 646. 한때 이곳은 은밀한 정치적 배경을 품었던 권력자의 성역이자, 공간이었다. “따뜻한 남쪽의 청와대”,라 불렸던 금단의 땅이었다. 일반인이 엄격히 통제되었던 국가 중요 시설이었다. 이제 자연과 인공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오솔길이 되어 대청호의 잔잔한 물결을 마당으로 삼고 있다.
꽃피는 사월, 마침 청남대에는 벚꽃 축제가 한창이다. 방문객들의 머리 위로 분홍빛 꽃비가 흩날리며 반긴다. 잔잔한 수면 위로 내려앉은 윤슬 사이로 바람이 흐르는 이곳은 본래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하고 숙의하던 긴장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세월의 강을 건넌 지금, 그 준엄했던 공기는 사라지고 시민들의 여유로운 휴식과 평온만이 가득한 낙원이 되었다.
청남대는 국토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국토의 중간, 금강, 중류에 대청댐을 건설하며 탄생한 대통령의 별장이다. 지형과 수목의 원형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용수와 전력이라는 국가 자원을 확보하고 호수를 조망하는 최적의 지점(View Point)을 고려한 설계가 돋보인다.
본관으로 들어가는 곳에 황금빛 봉황 휘장은 이곳이 예사롭지 않은 처소임을 짐작하게 하지만, 진입로의 양옆에 늘어선 80년생 반송이 유려한 자태와 정성껏 가꾸어진 조경수들은 권위보다는 자연의 깊이를 먼저 드러낸다.
이곳의 수목 배치는 계절의 순환을 가르치는 무언의 스승이다. 상록수는 공간의 뼈대를 이루며 변치 않는 절개를 보이고, 낙엽수는 잎을 떨구며 시간의 흐름을 기록한다. 봄의 목련과 진달래부터 여름의 이팝나무와 능소화,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침엽수에 이르기까지, 사계절의 꽃과 나무가 어우러진 풍경은 인공의 구조물을 자연의 품으로 너그럽게 끌어안는다.
본관은 1983년 준공된 이후 다섯 분의 대통령이 88회나 이용했던 유일한 휴양 시설이다. 그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아름다운 공간을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이곳에 머물렀다.
소유권이 충청북도로 이전되던 날, 지역 주민들은 고마움의 뜻을 담아 32개 마을 주민이 5,800개 돌을 쌓아 올린 돌탑으로 화답했다. 권력이 머물던 자리에 백성의 마음이 탑이 되었다.
본관 내부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그리고 가족들이 사용하던 비공개 공간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길게 줄을 선 관광객들이 실내화로 갈아 신고 동선에 따라 당시의 숨결을 더듬는다.
지하실은 정상들이 나누었던 외교 선물과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주방용품, 그리고 그들이 즐겼던 자전거와 낚시도구들은 역사의 주인공 또한 한 사람의 자연인이었음을 말해준다. 분수를 지나 마주하는 대통령 기념관은 역대 대통령들의 국정 기록과 소박한 생활용품, 평소에 읽었던 서적, 저서 등 부스별로 전시되어 있어 치열했던 재임 시절의 고뇌를 엿보게 한다.
청남대를 나서는 길, 호수는 지는 햇살을 머금어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윤슬을 빚어내고 있었다. 한때 나라의 명운을 걸고 고심하던 권력자들의 머리를 식혀주던 이 은신처는 이제 이름 없는 시민들의 다정한 쉼터가 되었다. 격정의 역사는 물결 밑으로 가라앉고 청남대는 이제 우리 시대의 소중한 문화적 유산이자 마음의 안식처로 고요히 빛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