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지리산은 말이 없다. 천년만년 묵언정진 중이다. 배춧속처럼 꽉 찼다. 물 벙벙한 연못이다. 물푸레나무 갈매나무 졸참나무의 푸른 잎들이 가득하다. 세상을 모두 담고서도 요지부동 흔들리지 않는다.
지리산 둘레길 인월∼운봉∼주천 구간은 5월에 열린 총 23.7km 길이다. 슬슬 걸어도 9시간이면 너끈하다. 지금까지 열린 지리산 둘레길은 모두 70km. 2011년 둘레길이 모두 이어지면 총 300여 km가 예상된다.
인월∼운봉∼주천 구간은 우묵 배미 분지를 가로지르는 코스다. 운봉고원은 해발 450∼580m에 자리 잡은, 움푹 들어간 하늘함지박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타원형의 큰 배와 같다. 나갈 곳은 여원치(450m) 팔랑치(1010m) 부운치(1115m) 정령치(1172m) 등 큰 고개와 가장마을 쪽에서 인월로 흐르는 시냇물 람천뿐이다.
람천은 함양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전북 동부 산간인 무주 진안 장수의 물은 대부분 섬진강이나 금강으로 흐르지만 운봉의 물은 경상도 쪽으로 흐른다. 운봉은 옛 신라 땅이다. 백제가 40여 년 지배한 것을 빼곤 대부분 신라의 손안에 있었다.
이성계가 고려 우왕 6년(1380년) 왜구를 막은 곳은 운봉고원의 목젖인 황산(荒山·692m) 협곡이다. 황산은 람천이 인월로 빠지는 길목 어귀에 있다. 만약 이곳을 빼앗기면 전라도 곡창지대가 고스란히 왜구의 손안에 떨어진다. 이성계는 이곳에서 약 6km 떨어진 인월의 중군리(中軍里)에 본대를 주둔시키고 왜구와 맞섰다. 인월(引月)이라는 지명도 이성계가 ‘달빛까지 끌어당겨 가며’ 한밤까지 활을 쏘며 싸웠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 그만큼 전투가 치열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근 사창리(社倉里)는 군량창고가 있었던 곳이다.
이 구간은 인월에서 주천 쪽으로 가는 게 낫다. 그 반대는 초반 오르막이 힘들다. 낮은 주천(170m)에서 가파른 구룡치 고개(580m)로 올라야 하므로 힘이 더 든다.
인월∼월평∼흥부골휴양림∼화수교(대덕리조트) 4.2km 구간은 운봉고원 함지박 테두리를 내려가 분지 배 속으로 들어가는 숲길코스다. 끝부분인 대덕리조트 위쪽에는 옥계댐이 있다.
화수교∼비전마을∼신기마을∼운봉∼행정마을∼가장마을로 이어지는 9.8km는 람천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는 평평한 둑길이다. 들판은 넓고 기름지다. 아늑하고 옹골차다. 왼쪽엔 지리산 서북능선 산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덕두산(1115m)∼바래봉(1165m)∼세걸산(1220m)∼고리봉(1304.5m)∼만복대(1433.4m)∼작은 고리봉(1248m).
람천 마른 갈대숲의 몸 부비는 소리가 들린다. 백로들이 냇물에 코를 박고 있다. 둑길엔 벌써 코스모스 꽃이 하늘거린다. 노란 달맞이꽃, 하얀 개망초꽃, 연분홍 패랭이꽃이 웃는다. 바람이 살갗을 간질인다. 호젓하다. 문득 아등바등 살아온 게 부끄럽다.
‘잠든 아기를 들여다본다/아기가 자꾸 혼자 웃는다/나도 그만 아기 곁에 누워 혼자 웃어 본다/웃음이 나지 않는다/바보같이/바보같이/웃음이 나지 않는다’ (정채봉 ‘바보’)
비전(碑前)마을은 ‘비석 앞 동네’라는 뜻이다. 비석은 이성계의 황산대첩비를 가리킨다. 임진왜란 발발 15년 전인 1577년(선조 10년)에 세웠다. 원래 못난 후손이 자꾸 조상을 앞세우는 법. 선조는 태조 이성계를 영웅으로 만들어 왕권 강화를 꾀했다.
비전마을은 판소리 동편제의 가왕 송흥록(1801∼1863)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국창 박초월(1917∼1983)도 어린 시절을 이곳에서 보냈다. 송흥록의 초가집 생가에선 녹음된 박초월의 춘향전 사랑가가 구성지게 울려 퍼진다.
운봉 서림공원 느티나무 숲 돌장승은 퉁방울눈 뭉툭코에 얼굴이 울퉁불퉁하다. 우스꽝스럽다. 북쪽의 방어대장군, 남쪽의 진서대장군. 운봉이라는 큰 배가 떠나지 못하도록 그 배 속 한가운데에 묵직한 돌장승을 세웠다.
둘레길은 운봉읍 양묘사업소 안마당을 가로지른다. 양묘사업소는 국유림이나 가로수로 쓸 묘목을 키우는 곳. 잣나무 전나무 금강소나무 느티나무 묘목이 많다. 1만8000여 평의 땅에 각종 나무와 들꽃 300여 종이 있다. 식물 현장 공부에 안성맞춤이다. 미리 연락하면 전문가의 무료 해설도 받을 수 있다. 요즘엔 이산화탄소통조림이라고 불리는 튤립나무 묘목이 최고 인기다.
이곳에서 일하는 숲 해설가 윤길자 씨(43)는 “요즘 휴가철엔 하루 100∼150여 명의 지리산 둘레꾼이 이곳을 지나간다. 인월∼주천 구간은 소나무와 참나무가 많다. 잎에서 향이 나는 비목나무나 지리산오갈피나무 서어나무 정금나무 닥나무 등도 있다”고 말했다.
행정리 서어나무숲은 2000년 임권택 감독이 영화 ‘춘향뎐’을 찍었던 곳. 춘향이의 그네 뛰는 장면이 그것이다. 수백 살 서어나무의 근육질 질감이 빼어나다. 서어나무숲은 2000년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뽑혔다.
가장마을∼노치∼회덕∼구룡치∼내송∼주천 9.7km 구간은 운봉고원 배 속을 가로질러, 함지박 테두리를 올라 넘어가는 숲길이다. 회덕마을의 키가 껑충한 억새집이 눈길을 끈다. 억새집은 한번 이으면 10년 넘게 간다고 한다. 노치마을은 둘레길과 백두대간 길이 만나는 곳. 노치(蘆峙)는 ‘갈대가 많은 고개’ 즉 ‘갈재’라는 뜻이다. 정령치(6km)와 여원치(6.7km) 중간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백두대간과 둘레길 길손들은 시원한 노치샘물을 마시고 몸을 추스린다. 샘 앞에 있는 가게 가재구판장(063-626-0838)에선 라면이나 국수 등으로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다.
회덕마을∼구룡치 사이에 있는 사무락다무락이란 곳도 재밌다. 작은 돌탑 밭에 늙은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곳이다. 다무락은 이곳 사투리로 담벼락이라는 뜻. 사무락은 바람을 뜻하는 ‘소망(所望)’이 변한 말이다. 한마디로 ‘소망을 비는 돌담’이다. 길손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돌탑에 돌을 하나씩 놓으며 소원을 빈다. 늙은 소나무는 한 발로 서있는 학처럼 외로 꼬고 먼 산을 보고 있다. 그 시선 끝엔 지리산 서북능선 산들이 아슴아슴 그림처럼 겹쳐있다.
지리산 둘레는 짙푸르다. 발치 논에서는 벼 이삭이 패기 시작했다. “찌르르∼ 찌르∼” 풀벌레들은 이미 가을을 노래한다. 밭두렁 길섶 생풀냄새도 한풀 죽었다. 싸하게 콧속을 찌르더니, 이제는 들큼하고 구수하다.
‘산이 산을 껴안고/겹겹이 잠드는 밤/우리는 길을 잃고 길 찾아 상처 입는다/그 상처/별이 될 때까지/걷고 또 걷는 밤길//산에서 밤을 만나면/육신의 눈 닫힌다/속세의 그리움도 욕망의 겨드랑이도/끊어져/무너져 내리는 밤/빛 삼킨 어둠만 불멸!’(김영재 ‘밤길’)
▽고속버스 △동서울터미널: 지리산 백무동행(함양 인월 경유·오전 8시 30분에서 밤 12시까지 하루 10회 운행) 인월 하차 △서울남부터미널: 함양행(거창 안의 경유)→함양에서 인월행 시외버스 △서울고속버스터미널: 남원행 고속버스→남원에서 인월행 버스 ▽승용차=서울→경부 혹은 중부고속도로→대전→대전∼통영고속도로→함양 나들목→88고속도로(광주 방향)→지리산 나들목→인월 지리산길 안내센터 ▽기차=서울→전라선→남원 하차→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인월행 버스. 인월버스터미널 063-636-2000, 함양지리산고속 055-963-3745
▽지리산 둘레길 안내센터=063-635-0850, www.trail.or.kr
◇먹을거리
△인월시장 내 초록식당(063-635-2273): 통발로 잡은 민물고기(꺽지 피라미 모래무지 빠가사리) 어탕과 매운탕 전문 △두꺼비집(063-636-2979): 참붕어 어죽 어탕 전문
◇민박
매동마을(www.maedong.org)은 지리산 둘레길이 처음 열렸을 때 출발지점이다. 인월에서 택시로 10여 분 거리. 함양(금계 동강 수철)이나 남원(인월 운봉 주천) 양쪽 방향으로 가는 중간지점이라 편리하다. 이층집(표철임 전 부녀회장·011-9789-3549, 016-245-3549)이 넓고 깨끗하다. 식사와 도시락(찹쌀 주먹밥) 온수샤워 가능. 최대 50명 숙식 규모. 황토방도 있다. 약수터 집(063-636-3008)도 친절하고 깔끔하다.
▼“지리산, 눈오는 날 백운산서 보면 황홀”▼
일본인들은 평생에 걸쳐 후지산을 찾는다. 한두 번 가봐서는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민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에 걸쳐 두루 후지산을 봐야 한다. 그것도 봄여름 어디서 보았는지, 가을겨울 동서남북 사방에서 골고루 다 보았는지가 중요하다.
지리산은 한국인들의 어머니 산이다. 한 해 두세 번쯤은 가봐야 마음이 넉넉해진다. 지리산의 뷰 포인트는 어디일까. 지리산은 워낙 큰 산이라, 산 밖이나 곁가지 낮은 산 혹은 둘레길에서 봐야 전체가 다 보인다.
산꾼들은 우선 전남 광양 백운산(1215m)에서 겨울에 보는 지리산을 꼽는다. 반야봉∼삼도봉∼명선봉∼형제봉∼칠선봉∼영신봉∼촛대봉∼연하봉∼제석봉∼천왕봉의 용처럼 꿈틀대는 주 능선이 한눈에 펼쳐진다. 울끈불끈 지리산의 근육질 몸매가 장관이다. 백운산은 흔히 ‘지리산전망대’로 불린다.
지리산 남부능선의 경남 하동 청학동 삼신봉(1284m)에서 북쪽으로 올려다보는 천왕봉(1915m) 주 능선도 황홀하다. 이곳에서 보는 천왕봉∼노고단 주 능선은 사철 어느 때 봐도 색다른 맛을 주지만 4월에 선이 가장 뚜렷하다.
지리산을 45년 동안 1000번 넘게 찾았던 정지섬 씨는 두 곳 이외에 다른 곳을 덧붙여 추천한다. 첫째, 경남 산청 웅석봉(1099m)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둘째, 지리산 황금능선(구곡산∼써리봉 20여 km의 동남부능선)의 산청 국사봉(1037m)에서 바라보는 천왕봉, 셋째, 경남 함양 엄천강 건너 법화산(990m)에서 보는 제석봉 천왕봉 중봉, 넷째, 10월 밤 전북 남원 여원재 부근의 도솔암 마당에서 보는 천왕봉 위로 두둥실 떠오르는 달.
정 씨는 ‘영남에 자리 잡고 있는 천왕봉은 어디서 보느냐에 따라 보는 맛이 달라지고, 호남 땅에 있는 반야봉은 어디서 봐도 모습이 비슷하고 정겹다. 반야봉은 중년 여인의 펑퍼짐한 엉덩이나 어머니의 젖가슴같이 푸근하다’고 지적한다.
“법화산 포인트는 11월쯤이 안성맞춤이다. 고만고만한 높이의 세 봉우리가 목 주름살까지 다 보인다. 목울대가 울컥거리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늦가을 황룡이 꿈틀거리는 황금능선 국사봉에서 보는 천왕봉은 ‘한국판 큰 바위 얼굴’ 같다. 장쾌하고 헌걸차다. 눈 오는 날 백운산에서 보는 지리산은 눈이 시리고 가슴이 아리다. 능선과 능선 사이,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에 묻어있는 그 수많은 인간의 삶과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