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밥 먹듯이 쉬운 일이, 또 누군가에게는 힘든 싸움일 수 있다. "그러면 이제껏 믿어왔던 내 신앙이 온전한 것이 아니었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당하는 느낌이고, 그래서 집에 오면 그로기 상태가 되어버려." "요즘 들어오는 설교를 옛날처럼 액면 그대로 받지를 못하겠어."라고 말하며 흘리는 지체의 눈물 속에서, 한 사람이 고수하던 인식의 틀을 조금씩 깨뜨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하심을 보았다면 너무 인정머리 없는 판단일까.
목사님께서 말씀 하신대로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망을 가진 이들"을 제자로 부르셨던 것처럼, 하나님과 교회를 마음의 중심에 놓고 늘 기도하던 지체를 더욱 깊고 새롭게 하시기 위해 마음의 어려움으로 위장한 축복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조금 더 버텨서 이 고비를 넘기고 계속 공부를 하면 균형 잡히고 깊어진 신앙을 가질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대화를 마쳤다. 말씀 강의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나지는 않은, 어쩌면 계속 할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이다. 냉정하리만치 차분하게 짚어 주시던 목사님에게도 감사드린다.
지난 두 주 동안에는 몇 가지 상황 때문에 내가 살짝 화가 나있었나 보다.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해 여러 모양으로 취사선택된 기록의 묶음이라는 설명을 충분히 이해했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의 아우라를 헤쳐 버리기가 못내 아쉬웠었나보다. 그렇게 사무엘상은 다윗에 대한 나쁜 소문, 즉 "정통성에 대한 의혹제기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편집되어 쓰인 기록이다. 다윗을 정적으로 바라본 사울과 동역자라는 관점으로 함께 한 요나단을 대조해 봄으로 한 사람을 어떤 시각을 가지고 제대로 바라보느냐의 중요성을 알 수 있었다.
다윗은 "조직화의 천재이고, 감성과 음악의 천재이며 정치적 처신이 탁월했던, 삶의 의지가 대단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사람들을 감화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목사님께서는 사울이 이성적으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어 하면서도 그를 보면 격동되어 죽이려 하는 정신분열적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주시며 "옳다고 믿는 바대로 살지 못하는 현대인들" 속에 자리 잡은 "방어막으로 삼는 경향이 있는" 죄성과 순종의 의지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기도를 통해 "당시 사회의 양극화에 대한 치유"를 갈망하며 그 치유를 감당할 아이를 원했던 한나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주셨고, 그녀는 어쩌면 만 3세까지 그를 양육함으로써 후에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과 함께 지냈지만 그들로부터 어떠한 부정적인 영향도 받지 않았던 인물로 키워냈다. 엘리도 그러했고 사무엘도 공적인 활동에 집중하느라 아이들을 잘 양육하지 못하여서 사람들을 실망시켰다. 왕을 요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판단에 사무엘의 실패한 자녀 교육이 한 몫을 차지함도 볼 수 있다. "한 아이 잘 성장시키는 것이 더 귀하다."
<묵상>
다윗의 인생을 통해 우리는 '신앙이 어떻게 단련되어 가는지' '언제 추락하는지' '어떻게 갱신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다윗은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삼상 17:37)"이라는 고백을 통해 자신과 함께 하시며 보호해주신 하나님을 간증한다. 젊은 때부터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견지하던 다윗은 (삼하 5:12)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정한 주권자이심을 고백한다. 그의 믿음은 사울과의 관계의 어려움과 요나단과의 우정 그리고 함께 한 이들과의 공동체 생활을 통해 시험받고, 그 매순간 하나님 안에서의 바른 선택을 통해 단련되어 강해지고 깊어졌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이 원하시던 방법이 아닌,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오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보며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나의 믿음은 어떻게 단련 되어졌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정과 공동체. 다시 보니 같은 의미다. '공동체 안에서의 우정.' 제자 훈련과 사역훈련을 받을 때에는 그 당시 상황에서 행해지던 모든 것이 내 신앙을 형성했다. 요즘은 같은 교구의 순장님들과 카풀로 이동하는 자동차 공간이 또 다른 믿음 단련의 현장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에 간섭하심에 대한 간증, 서로의 힘든 부분들, 순장으로서의 보람, 순원들 이야기, 교회 이야기 등등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가는 시간에 이루어진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한 지체임을 진실로 인식하고 서로 격려하고 눈물을 닦아준다. 그곳이 매주 하루 내가 누리는, 살아있는 또 다른 예배이다. 교제를 통해, 우정을 통해 자라나는 믿음이 참으로 소중함을 새삼 느낀다.
자신을 하나님의 대리자에 불과하다고 겸손히 여기던 다윗의 신앙이 언제 무너지기 시작했을까. 삼상 11장 1절에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했는데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물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안이함 혹은 위험한 현장은 피해 있겠다는 편안함을 추구하는 그 순간이 발단이 된 것일까. 그러다 밧세바를 보게 되고 죄를 짓고 그 남편을 죽이고, 그것도 아주 교활하게. 본문을 읽다 보면 우리아를 헷 사람이라고 강조하는데, 의도가 있다.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인 출신의 사람과 하나님을 경외해마지 않던 다윗을 대조함으로써 다윗의 죄악이 더욱 크고 무거움을 보여주고 있다. 다윗이 실패한 지점이 밧세바와의 스캔들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다윗이 더 이상 겸손하지 않고 어느새 교만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가졌었을 첫마음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그가 새롭게 회복이 되었나. 다윗은 자신의 죄를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 했을 것이다. 우리도 늘 그렇듯이 유혹에 넘어져 죄를 짓는 그 순간에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무도 모른다고 약간의 가책과 더불어 그냥 지나간다. 그런데 또 언제나 그러하시듯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다. 고백하기 보다는 모른 채 그냥 넘어가려던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회복의 기회를 주셨고, 다윗은 변명하기 보다는 바로 자신의 죄를 인정함으로 그 때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 시간에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여러 사건으로 혹독하게 다루실 때에도 다윗은 묵묵히 감내하고 한 마디 불평의 말도 하지 않았던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하나님께 굴복했던 다윗의 그 속마음, 그 용서받고 싶은 마음의 고통을 하나님께서는 받으셨던 것 같다. 손봉호 교수님 표현처럼 "죽었으면 살았을 걸."
<사무엘 상하>는 우리 인생의 많은 문제들이 집약되어 있는 말씀이라고 했다. 과연 다양한 주제들을 끄집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떤 것을 정해서 논의를 이끌어 나가는가도 선택의 문제이다. 목사님께서 다윗의 인생 여정에서 드러난 그의 믿음의 행로를 따라가라 좁혀 주셔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었으면 무엇을 묵상해야 좋을지 몰라서 헤매었을 것인데...
<질문>
1. <사무엘 상하>가 다윗 자신의 왕권에 대한 "자기 옹호적 해석"에 의한 책이라면, 어쩌면
다윗은 겉으로 드러난 것-역사서에 기록된 것과는 다른 생각이나 판단을 했을 수도 있겠지요?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지만요.
2. "훈련된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는 말씀은 모세와 다윗 등 그런 인생의 과정을 거친 사람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거겠지요? 단순히 일반화 할 수 있는 건 아니겠지요? 왜냐하면 그런 훈련의 과정 없이 하나님일 하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일하는 과정 속에서 훈련을 받는다고 하면, 그게 그 말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