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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남도에 원문보기 글쓴이: 광주 나형주
제주는 삼신나라인 '마고지나'에서 나온 '영주'
제주도는 삼신산에서 건너간 섬이다. 그래서 옛 이름이 영주(瀛洲)이다. 영(瀛)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瀛洲山)에서 갈라져 나간 산이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영주산이 새끼를 쳐서 옛 영주가 된 것이다. 옛 영주가 지금의 제주이다. 영주산이 의미를 갖게 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14000년∼에서 12000년 전 사이의 일이다. 동 이의 조상인 마고가 그의 후손과 함께 삼신산에 세운 신시(神市)에서 생활을 시작하면서 비 롯한다.
그가 세운 '마고신시' 즉 마고의 나라인 '마고지나'가 있었던 곳이 지금의 봉래와 발 해만을 잇는 일직선상에 징검다리처럼 일곱 섬이 칠성의 형상으로 늘어서 있는 바다 한가운 데였다.
이 곳의 섬들을 묘도군도(廟島群島)라고 한다. 여기에 두 섬이 있으니 이 두 섬이 영주로 비정할 수 있는 장산도(張山島)이다. 북쪽에 있는 섬을 북장산도라고 하고, 남쪽에 있는 섬을 남장산도라고 한다. 영주산은 남장산도나 북장산도 두 섬 중의 하나에 있는 산으 로 볼 수 있다. 필자는 우리가 '남과 북'을 '북남'이라고 하지 않고 '남북'이라고 하는 점으로 보아서 남쪽이 북쪽보다 우선하므로 남쪽에 있는 남장산도를 영주로 보고자 한다. 제주도의 옛 이름이 영주인 것은 마고시대 사람들이 이 고장에 건너와서 살았기 때문에 생겨난 이름일 것이다.
제주의 옛 이름 두 가지 '영주'와 '탐라'
제주도의 옛 이름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영주'이다. '영주'는 마고가 다스리던 '마고지나'의 삼신산(三神山)인 '영주', '방장', '봉래'의 세 산 중의 하나인 '영주산'에서 퍼져 나온 이름이다. 제주신화에 따르면 삼신이 이 고장의 시조인 고씨 양씨 부씨에게 시집을 옴으로써 비로소 영주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신화에 나오는 삼신은 태초의 삼신인 마고 궁희 소희 세 분의 후손이다. 둘째는 탐라(耽羅) 또는 탐랑(耽浪)이다. '탐라'는 북두칠성의 첫째 별인 탐랑성(貪狼星)이 관장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 곳을 다스리는 사람은 성주(星主)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곧 성주가 '마고'라는 의미가 된다. 이 말은 마고가 직녀성(織女星)의 화신이므로, 탐랑성 을 관장하는 마고가 성주가 된다는 말이다. 제주도 사람은 제사를 지낼 때, 자기의 직계 조 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성주상'을 차리고 자기 조상과 함께 성주에게도 제사를 지낸다. 여기에서 "직녀성이 탐랑성을 관장하는 별"이라는 데에 대하여 설명이 필요하므로 설명을 해 보면, 마고가 우리의 직계조상으로 직녀성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데에서 설명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지금 우리는 천추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마고는 직녀성이 북극성이 되어 지구에 영향을 미치던 시 대에 살았던 사람이다. 지금으로부터 14000년∼12000년 전에 지구중력의 회전축의 중심이 직녀성을 향하고 있었던 시대의 사람이었다는 말이 된다.
삼신산에서 바다를 건너가는마고 삼신.영등바람을 타고간다
영중의 삼조탄생지인 삼성혈 삼조는 바다를 건너온 마고삼신과 결혼했다.
삼신의 나라 영주 탐라
우리나라의 전국 방방곡곡엔 신화나 설화나 무가나 지명에 마고삼신이 남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 흔적은 다른 고장에선 대부분 깊이 파고 들어가야 찾아 낼 수 있으나, 제주에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고장에 남아 있는 것과 달리 기록과 구전으로 나타난 것들로 사실적이고도 구체적이라 쉽게 찾아 진다. 먼저 역사기록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고려사 지리지(高麗史 地理地, 단종端宗 2년 1454년 간행)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탐라현(耽羅縣)은 제주도 남쪽에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세 신인(神人)이 땅에서 솟아났다. (지금 진산鎭山:한라산 기슭에 구멍이 있어, 모흥혈毛興穴이 라 하니, 이것이 그 땅이다) 맏이를 양을라(良乙那)라 하고, 다음을 고을라(高乙那)라 하고,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했다. 세 신인은 황량한 들판에서 사냥을 하여 가죽옷을 입고 고기 를 먹으며 살았다.
하루는 자주빛 진흙으로 봉인한 목함(木函)이 동해빈(東海濱)에 떠밀려 오는 것을 보고 나아가 이를 열었더니, 석함(石函)이 있고, 붉은 띠를 두르고 자주 빛 옷을 입은 사자가 따 라와 있었다. 돌함을 여니 쪽빛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과 송아지, 망아지, 그리고 오곡의 씨가 있었다. 이에 사자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국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세 따님을 낳으시고 이르시되, 서해(西海) 중악(中嶽)에 신자(神子) 세 사람이 계셔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다고 하시며 신에게 명하여 세 따님을 모시도록 하므로 왔으니, 마땅히 배필 을 삼아 대업을 이루소서."하고 사자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사람이 나이 차례에 따라 장가를 들고, 물이 좋고 땅이 기름진 곳으로 나가 사시복지 (射矢卜地)하니, 양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일도(第一都)라 하고, 고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 이도(第二都)라 했으며, 부을나가 거쳐하는 곳을 제삼도(第三都)라 했다.
이와 유사한 기록으로 세종 32년(1450년)에 간행한 영주지(瀛洲誌)에 실린 삼성신화(三姓神 話)가 있다. 실린 내용은 고려사 지리지에 실린 것과 거의 같으나 다른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만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① '탐라'를 '영주'라고 하였다.
② 세 처녀와 사자가 온 나라 '일본국'을 '동해(東海碧浪國)'이 라고 하였다.
제주대학의 현용준(玄容駿) 교수의 <무속신화와 문헌신화>에 자세한 연구가 실려 있으므로, 중복되는 부분은 피하기로 하고, 마고삼신과 관련하여 아직 연구가 안된 부분만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먼저, 국호(國號)에 관한 것이다. '탐라'는 북극성인 탐랑성에서 온 것이고, 영주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탐라'는 인류가 아직 대량으로 출현하지 않고 소수의 인종만 살았던 선천시대(先天時代, 지구의 회전축이 천추성을 향하기 시작한 천추성시대)부 터 지명으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영주'는 동이(東夷)의 시조인 '마고'가 삼신산 (三神山)에 신시(神市)를 열게 됨으로써 갖게 되는 이름이므로, 후천시대(後天時代)부터 쓰 였을 가능성이 있는 이름이다. 그러므로 '탐라'와 '영주'는 선천개천이냐, 후천개천이냐 하는 시대적 차이를 보이는 이름이라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동해빈(東海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동해바다 해안가'로 해석을 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동해빈'을 지명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고선(李固 善)이 쓴 '조선기(朝鮮紀)에 이와 똑같은 지명이 이미 단군조선시대에 나온다. 평제(平帝) 구을(丘乙) 단군 때인 병인 5년(BC2092)여름에 신독(身毒, 지금의 인도)국 사 람이 표류하여 '동해(지금의 황해)빈'에 닿았다는 기록이다. 세 번째는,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이라고 한 , 한 대목도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고기'가 고려사에서 영주와 탐라의 출전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고기'는 옛 사서(史書)의 이름이다. 그러므로 '고기'의 기록을 옮겨서 고려사 를 편찬할 때, 당시 기록자들이 고려사를 폄하하기 위하여 저지른 '붓 장난'이 있었을 수 있 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기'에 '을나(乙那)'가 어떻게 기록 되었는가 하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지나(之那)'가 '을나(乙那)'로 곡필이 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고려사 충혜왕조에, 고려의 옛 이름을 '마고지나(麻古之那)'라고 하였다. '마고의 옛 나라'라 는 뜻이다.
나(那)는 나라를 의미하므로, 고씨 양씨 부씨가 탐라(영주)의 시조인 만큼 이들 의 나라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면, 마땅히 을나(乙那)를 지나(之那)로 고쳐서, 그 뜻을 '나라' 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나라로 읽으면 '고을나'는 '고지나'가 되고, '양을나'는 '양지나'가 되 고, '부을나'는 '부지나'가 된다. 네 번째는, '목함'과 '석함'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다. 함(函)의 의미는 문자로 해석할 때,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린 해"가 들어 있는 상자이다. 또한 목함은 '동쪽으로 가는 배'를 상 징하고, 석함은 '서쪽에서 실려 온 귀중한 물건'을 상징한다.
다섯 째는, 세 신인과 세 처녀의 의미이다.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삼이라는 숫자는 이들이 '마고삼신(麻姑三神)'의 자식임을 상징한다. 세 신인은 모흥혈(毛興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모(毛)는 "털이 흰 소의 쇠꼬리"인 모( )로 바꾸어 읽어야 한다. 모는 무당이 모무( 舞, 쇠 꼬리 춤)를 출 때 들고 추는 쇠꼬리이다. 혈(穴)은 모( )를 꽂는 구멍이다. 흥(興)은 모를 구멍에 꽂아 일으켜 세웠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 이상 말한 것을 정리하면, 모흥혈은 춘분 마지굿을 할 때 모를 꽂아 세우는 구멍이다.
그러므로 고 양부 세 사람이 모를 꽂아 놓고 쇠꼬리 춤을 춘 곳이 모흥혈이 되는 것이다. 세 처녀는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를 찾아 온 '마고삼신'의 후예임을 상징한다. 아마 세 처 녀가 가지고 온 것에 종자 이외에 마고의 신표인 '천부삼인'과 '해혹복본'의 메시지가 있었을 것이다. 이런 것은 기록에는 아니 나오나 이 고장 무가사설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고장 무가사설에
"할로(漢拏) 영주(瀛洲) 삼신산(三神山) 상상고고리(上峰) …" 라는 대목 이 있다. 무가에서 한라산을 영주 삼신산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이 고장에서 하는 영등제는 2월 바람으로 오는 마고삼신을 마지하는 마지굿이다. 영등제에 오는 마고삼신은 어디에서나 두 딸을 데리고 나타난다. 이들이 삼신이기 때문에 마고와 궁희와 소희가 함께 오는 것이다.
다섯번째는, 일본국과 벽랑국에 대한 해석이다. 일본국은 사리에 합당하지 않은 붓 장난이다. 탐라나 영주에 걸맞지 않은 상대가 일본국이라는 말이다. 오늘날의 제주가 탐랑성과 마 고삼신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는 후세의 사가가 제주의 역사를 폄하하기 위 하여 붓 장난을 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벽랑국은 '바다나라'라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해석 된다.
제주무가에 나오는 할로 영주 삼신산인 제주도 한라산, 민족의 영산이다.
마고가 보낸 삼신은 삼신신앙의 선교사
마고는 왜 삼신을 '할로 영주 삼신산'에 보낸 것일까? 그 이유는 삼신신앙의 전파에 있었지 않나 한다. 모흥혈에서 삼신신앙의 흔적을 유추할 수 있는데, 모흥혈에서 남삼신과 여삼신을 '할로 영주'의 시조로 모셨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도지(符都誌)>에 따르면, 마고가 생존했던 시대에 지구에 엄청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천문학자가 말하는 "지구가 뒤집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다. 지구에 나타난 이 불가사의한 현상을 기억하게 하기 위하여 마고가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인종 들에게 선교사로 파견한 사람들이 삼신들이었다고 생각된다.
마고는 선교사로 떠나는 삼신들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 보냈다. 그 하나가 북두칠성과 해와 달을 신체로 모신 '천부삼인(天符三印)'이고, 다른 하나가 삼신시대의 삼신신앙의 교리인 '해 혹복본(解惑復本)'이다. 삼신들이 곳곳에서 활동을 함으로써 '해혹복본'을 교리로 하는 삼신 신앙과 칠성신앙이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우리 동이(東夷)가 마고할머니가 가르친 '해혹복본'의 보호막 안에서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다.
첫댓글 감사히 펌해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