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씨가 ‘러브(love)’의 ‘L’자를 손으로 만들어 보이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 |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2007년부터 연봉의 80%를 털어 어려운 곳에 기부하고 있다”라며 “마이너스 통장을 쓰는 것은 필요할 경우 대출을 받아 남을 돕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2007년 2월 유산기증운동을 벌이고 있던 유니세프(유엔아동기금)에 자신이 살고 있는 21㎡짜리 원룸 전세계약금 1500만원을 사후 기증하기로 하고 그 내용을 서울 서초동 법무법인 한별에서 공증까지 받았다. 그해 4월에는 이러한 내용의 신문 기사를 본 교도소의 한 남성 재소자(35)가 “상담심리사가 되고 싶은데 공부할 돈이 없다”라는 편지를 보내 오자 그때부터 지금까지 매달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 동포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NGO(비정부기구)인 ‘동북아 평화연대’의 회원인 그는 지난해 2월 설날 때 4박5일 일정으로 현지를 방문했다가 종자를 살 돈이 부족해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고려인들을 보고 마이너스 통장 대출까지 받아가며 2500만원을 지원했다.
그가 처음으로 큰 액수를 기부한 것은 2006년 11월의 일이다. 리더십 학교에서 알게된 이은하씨(27·대학원생)의 아버지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새로 늘려 이사 갈 자췻집의 전세금인 1000만원을 내놨다. 자신은 작은 자췻집에 그대로 남았다. 이씨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는데 먼저 도와줘서 너무 고마웠다”라며 “항상 남의 일이 먼저인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이러다 보니 주변에서 “제 앞가림부터 잘해라”는 핀잔을 하는 이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지금 통장 잔고가 일시적으로 비었다고 두려울 건 없다고 봅니다. 많이 주면 또 얻게 되는 게 세상 이치인 것 같아요. 그리고 월급의 20%만 가지고도 아껴가면서 살면 그런대로 참을만합니다. 줄일 수 있는 건 다 줄이는 것이지요. 그리고 열심히 살다 보니 주변에서 옷이며 보약이며 보내주는 분이 많아요. 제가 결혼하면 2000만원을 부조금으로 내놓겠다는 기업인도 있습니다.”
그가 하고 있는 또 다른 일은 재능 기부다. 자신의 재능과 지식을 바탕으로 남을 돕는 일이다. 고려대 경영대학원을 나와 컨설턴트로 일하고 있는 그는 쉬는 날이나 휴가 때 짬을 내서 사회적 기업과 NGO의 운영 컨설팅을 무료로 해주고 있다. 2007년 3월부터 10월까지 ‘아름다운 가게’의 컨설팅을 무료로 해줬다. 기증받은 중고품을 판 돈으로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을 하는 사회적 기업이다. 아름다운 가게의 김대호 기획팀장은 “직무설계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컨설팅 업체를 알아보던 중, 고씨에 대한 이야기를 우연히 듣고 만났는데 먼저 흔쾌히 무료로, 개인 시간을 내서 해주겠다고 제의했다”라고 말했다. 2007년 12월부터 지난해 6월까지는 자신이 회원으로 있는 동북아 평화연대의 운영 컨설팅을 해줬다.
새해엔 더 바쁘게 움직일 작정이다. 뜻을 함께하는 컨설턴트·변호사 등 24명을 모아 만든 전문직업인 재능기부 단체인 ‘소셜 컨설팅 그룹(Social Consulting Group: SCG)’을 본격 가동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이 단체는 지난달 비정부기구 ‘함께 일하는 재단’과 협약을 맺고 도움을 주기로 했다.
SCG의 대표인 고 씨는 “선진국에선 전문가들의 재능기부가 활성화돼 있다”라며 “이들을 가리키는 ‘프로 보노’라는 용어도 있다”라고 말했다. ‘프로 보노’란 ‘공익을 위하여’라는 뜻의 라틴어 ‘프로 보노 푸블리코(pro bono publico)’를 줄인 말로 지식 봉사를 하는 전문 직업인을 가리킨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각 분야 전문 직업인의 재능을 활용해 남을 돕는 것이지요. 기부라는 게 그렇게 어렵고 거창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자신의 돈이나 재능을 조금씩 남을 위해 나누는 게 바로 기부라고 생각합니다. ”
그의 기부 활동은 대학 시절 어려웠던 경험에서 비롯됐다. 외환 위기 당시 사업하던 아버지가 빚 보증을 잘못 선 바람에 일시적으로 집안이 기울었다. 그래서 휴학을 하고 군대를 갔다가 제대 뒤 과외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주변 사람을 조금씩 돕기 시작했다. “어려울 때 저를 도와주셨던 분들을 잊지 않기 위해 조금씩 기부를 시작한 것이 이렇게 커졌습니다. 새해에는 프로 보노들과 손잡고 더욱 많은 재능 기부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