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졸업 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니까 37년쯤 되려나? 누구나 부러워했던 고등학교였고 나 또한 경기인이 된 것을 무엇보다 기뻐했다. 그러나 아카데미를 나온 후 감성적으로 제도권과 비제도권의 차이를 느꼈고, 그 차이에 대해 그때는 아직 이론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때였다. 하여튼, 내가 그런 느낌을 느끼고부터 나는 제도권의 사람이 아니라 비 제도권의 사람이었다.
학교는 멀어졌고 공부의 방식도 달라졌고 세상에 대한 가치도 달라졌다. 겉으로는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지만 내가 제도권으로부터 이탈하여 비 제도권에 정착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입학 할 때의 벅찬 기쁨은 그러나 졸업을 할 때는 그냥 덤덤한, 아쉬울 것도 이제 미래에 그리워할 것도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의 삶은 일관했으며 모교에 대한 뼈저린 애정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탓일까? 어느 순간 내게는 제도권과 비 제도권의 문제 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 간의 정리에 더 무게를 두게 된 것 같다.
동창들 중에 친하게 지낸 사람은 바로 아카데미를 같이 활동한 사람들이었고, 그 나머지 사람에 대해서는 그리 아쉬울 것도 없었는데, 최근 회사 일로 이리 저리 다시 동창들과 연관되며 보니 이 사람들이 지닌 정이란 것이 내가 바로 이 아카데미에서 느끼고 지니고 갈구하던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나는 그런 것은 아카데미에만 존재하는 것이라 여기며 4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 온 것이고 그러므로 아카데미에만 집중했었다.
이 안에서 기뻐하고 이 안에서만 나눌 수 있고 이 안에서만 안타까워하는 수 십 년....
그리고 이제야 조금씩 알게된 것이다. 사람이 모인 집단 안에는 어디나 다 좋은 사람도 가치있는 사람도 그리 좋지 않은 사람도 무가치한 사람도 모두 섞여 있다는 것! 이재에 밝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가치지향의 사람도 있고 다만, 적어도 그 시절, 어린 그 시절에 아카데미는 내게 모두가 가치 지향의 존재인 것처럼 느끼게 하는 집단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그 중에는 진심이라기 보다는 아니, 스스로 주체적이었다기 보다는 그 무리 속에 의지하는 사람들도 꽤나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어쩌다 우연히 인연이 되어 함께 섞이게 된 사람 또한 많다. 세월이 갈수록 집단의 성격은 일반화되고 결국 사회의 일원이 된 후 그 사회 속에서 아카데미라는 개성은 소멸되는 것을 참 많이도 목격한다. 제도권의 부당한 여러 모습 때문에 당당히 비 제도권을 선택해 살아왔다 생각하는 나로서는 어지간히 허망한 일이다.
나 스스로 선 그은 제도권 속의 사람들 중에도 아직 나름의 가치관을 지니고 성실하고 옳곧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고 비 제도권을 선택해 출세의 발판을 삼는 계산이 비 제도권 속의 사람 중에는 또 얼마나 많은지 나는 분명하게 느끼고 있는 것이다.
미련한 탓일 게다. 나는 분명 많이 미련한 삶을 살아왔다.
그리고 산이다.
내가 졸업한 경기고등학교에는 각 기별로 산우회가 있고, 당연 우리 동기들의 모임도 있다.
아리고 쓰릴 것은 없지만 한 울타리에서 함께 지낸 벗들이 가끔은 아련하게 그리울 때도 있다. 최근 들어 다시 만나고 다시 인연을 나누고 이어가며 어릴 때는 관심도 없던 그들의 인성을 이해하게 되고, 이만큼 훌쩍 자라 모두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의 나이보다 더 큰 아이들까지 두도록 점점 더 좋은 인격으로 자란 모습들은 감동이다.
언제부터 인가 벼르던 산행모임이 이번엔 일요일이었다. 그러므로 내 산행은 당연히 이 동창들과 함께 하는 것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거기에는 이리 오랜 세월 동안의 첫 번째일 만큼 무심했던 나의 동창들에 대한 사과의 뜻도 담겨있다. 특히나 학교동창이자 아카데미 동기인 아무개에 대해서는 더하다. 늘 좋은 친구고 늘 한결같다. 알고지낸 평생 동안 그리 일관하는 사람도 흔하지 않은 것이 언제나 고마운 친구다. 그의 아내 또한 아카데미 동기고 활동할 당시 무척이나 성실했던 친구로 기억하고 있다.
바로 이 두 명의 아카데미 동기와 고등학교 동기들이 함께하는 산행. 미안함을 빌고 그러나 또 기쁜 마음으로 함께 했다.
그래서일까? 아마도 도봉산에서는 처음 보는 엄청난 단풍에 놀랐다. 가을은 이제 거의 다 지난 줄 여겼지만, 그리 산을 다녀놓고서도 아직 산 속에 가을은 남아있다는 사실은 서둘러 지워버리고 나는 이제 겨울 마지 할 마음준비를 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시월의 마지막 주에 걸음한 도봉산은 말 할 수 없는 단풍을 속에 품고 있었다. 역시나 도봉산은 명산이구나! 산행 내내 나는 바로 그 점을 느꼈고, 그리 오랜만에 보는 것임에도 기쁘게 품어주는 동창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이번 산행은 각 기수별로 모여 산행을 제 각각의 코스대로 해 대동문에서 일단 집합을 하고 진달래능선을 타고 내려와 박을복 자수박물관이 최종 목적지로 여기에서 모든 기수의 동문이 함께 모여 행사를 진행하는 것으로 짜여져 있고 이 모임은 이야기 듣기로는 1999년인가부터 매 년 4월과 10월, 년 2회 진행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75회 졸업생인 우리 동기들은 아카데미 하우스 앞에서 집합 구천계곡을 타고 오르기로 계획되어 있었고 그것은 아마 부부동반의 산행이었기에 비교적 쉬운 코스로 잡은 것이었다. 그러나 구천계곡을 따라가는 중 오른쪽 대동문을 향해 바로 간 것이 아니고 왼편 칼바위 능선 쪽으로 방향을 잡은 탓에 여인네들은 조금 고생을 했을 것이고 거리상으로도 1키로 이상을 더 한 것이었다.
하여튼, 대강 알고 있었지만 무리들이 그리 움직이는 대로 따랐고 그렇게 발을 들인 이 계절의 구천계곡은 마치 덕유산의 그 구천동이나 되는 양 완전히 단풍으로 별천지여서 황홀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올 가을 몇 개 산의 단풍을 만나고 감탄했지만 갈수록, 점입가경이라던가? 그러니까 기대도 하지 않았던 명성산의 단풍이 아름다웠고, 지난 주 오대산 선재길의 단풍에 넋을 잃었다면 이곳 구천계곡의 단풍은 그야말로 황홀경이었던 것이다.
이번에 오른 구천계곡은 지난 늦겨울 산사모에서 정릉으로부터 출발해 대동문을 거쳐 내려올 때의 방향 즉 구천 폭포쪽 -이 방향이 원래 계획했던 산행코스였다-과는 다른 쪽이었다.
그 때 그렇게 스산하고 추운 날씨에도 유별난 아름다움에 언젠가 아내와 함께 와 봐야겠다고 했던 곳이었는데, 이 구천계곡의 양쪽 코스는 아마 모두 계절마다 그토록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 같다.
감히 권하고 싶다. 그러니까 어느 해 가을이건 단풍이 보고 싶지만 먼 산행이 안 된다면, 혹은 먼 산행을 갈 여유가 되더라도 다른 곳 다 제처 두고 가을의 마지막 시간에 이 구천계곡을 찾아보면 결코 후회 없는 단풍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도봉산이나 북한산이나 워낙에 많은 산행로를 가지고 있고, 그간 꽤나 여러 번, 이 산들을 찾았지만 가을이라도 제대로 단풍을 만난 기억이 없어 몰랐는데, 아니었다.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는 코스 말고 구석구석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행로는 이토록 수려한 단풍이 피어있는 것이다. 비교적 코스도 수월하여 초보자라 할지라도 그리 어렵지 않고, 조금 산행의 느낌을 느끼려면 이번에 우리가 오른 칼바위 쪽으로 간다면 단풍의 묘미와 바위를 타는 묘미 또한 만족할 만큼 얻을 것이다. 아마도 혼자가는 산행이었다면 또 수없이 많은 사진을 찍었을 것이지만 일행이 있고 더구나 일행의 인물사진을 찍어야 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그냥 대부분 마음에만 담고 올랐다.
대동문에 도착하자 그 분지엔 다이아몬드형의 경기 마크가 크게 새겨진 사각의 대형 현수막이 걸려 있었고, 그 분지에 모인 낮 모르는 사람들이 거의 모두 동문이다. 각 기별로 그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었고, 우리 동기들도 한 장.
문득 82년 여름 지리산이 떠 오른다. 그 때, 난 15기 안종국과 입대하기 전 산행으로 한라산을 거처 부산으로, 부산팀과 합류해 함께 지리산 종주를 했었다. 종주 중에 현준수 형과 김광현 형을 만났고 그렇게 함께 도착한 세석평전엔 까맣게 많은 전국의 흥사단 단우들이 모두 집합해 법석이었던 것이고, 그런 장관은 무척 깊은 인상을 내게 평생 지니고 살도록 한 것인데 그로부터 30년이 넘은 이날 나는 또 다시 그런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모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어느 끄나풀이건 서로 엮일 구석을 가지고 어느 순간, 어느 한 장소에 개미떼처럼 모인다는 일은, 그렇게 하나가 되는 모습일 때 그건 얼마나 아름답고 흥분되는 일인지....
그런 흥분을 뒤로 한 채, 진달래 능선을 타고 내려와 최종목적지인 박을복자수 박물관에 도착했다. 어림으로 수천평이나 되는 참 대단한 집인데, 이 곳은 61회 모 선배 소유의 집으로 매번 이 산행의 집결지로 사용된다고 한다. 이 곳 조금 못미친 곳에도 유사한 규모의 대단한 집이 있는데 이 또한 65회 선배의 집이고 그 앞에도 또한 한 채의 거대한 집이 있는데 이는 원래 박정희가 살아있을 때 와서 즐기던 별장 같은 곳이라하고, 현재는 코오롱에서 샀다고 하던가 그렇다. 이 앞을 지날 때마다 도대체 사적으로 소유하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이런 장소에 이런 어마어마한 집을 지어 놓고 사는 사람이 누구인가 궁금했는데 이 날 모든 궁금증이 풀렸고, 그러나 유신시절의 잔상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다.
어쨌거나 이 날은 그리 비판적인 생각을 앞세우고 싶지는 않고 다만 제도권에 충실한 사람들의 이토록 가늠되지 않는 축적이 마음 한 구석 툭 걸리고, 그러나 그런 것과 상관없이 좋은 벗들과 함께 어울린다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으며 소위 가든파티(?) 비스무레한 시간을 즐겼다.
무려 250여명이 함께 모인 이 모임은 그 안에 정치도 있고, 썩은 냄새도 있고, 세상을 바꾸려는 동력도 섞여 있었지만 모두 벽과 격 없이,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순수한 모임이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 무리로부터 벗어나 사심 없는 동기들과 나눈 한 잔과 또 아쉬워 따로 혜화동까지 가서 단 앞에서 아카데미 동기 셋이 차를 한 잔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 참 무어라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없는 모든 것이 뒤섞인 하루, 산행이었던 것이다.
첫댓글 헉.. 마지막 사진에서 깜딱^^;;
선배님 경기고등 나오셨군요~~ 맞아요.. 대부분, 아카 출신들은 아카 전과 후로 인생의 방향이 조금씩은 혹은 완전히 바뀌는 경험들을 했을거라고 생각 했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도 그저. 삶의 일부인 순간들이었던 것 같아요.. 결국은 모두, 자기 인생을 살고, 또, 뭐..그리 다른 것들도 없고...ㅎㅎㅎ
ㅎ~ 글게 말이다~
난 걸 인제야 안듯~ ㅎ
사람이 모인 집단 안에는 어디나 다 좋은 사람도 가치있는 사람도 그리 좋지 않은 사람도 무가치한 사람도 모두 섞여 있다는 것! ===> 진리(?) 같습니다... 진영선배님 사진으로나마 오랜만에 뵙네요~~
ㅎ~ 고 옆에 피앙새가 최재희14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