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여자로 사는 것
얼마 전 우연히 사주를 봐주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기독교인인 나로서는 일부러 찾아간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무심코 차를 마시러 간 터여서 핑계 삼아 재미로 내 운명이나 들어보자 싶어 생년월일시를 알려주었다. 그리 역술가 같아보이지 않는 젊은 남자는 열심히 무엇인가를 적더니 첫 마디가 대뜸 “당신은 시대를 잘 타고 났어요.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소박맞았을 거요”라는 기분 좋지 않은 것이었다.
얘기인 즉 나는 전형적인 현대 여성형으로 평생 자기 일을 갖고 살아야 불만이 없을 정도로 일복을 타고나 무엇이든 자기 이름을 걸고 사회에서 활동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람이 집에 가만있으면 아이들에게 과도하게 집착하는 치맛바람형이라며 늦 결혼이 잘된 일이라는 것이다. 내심 아직 결혼하지 않아 걱정을 듣던 터라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천생 여자 성격이라는 얘기를 많이 듣고 현모양처를 꿈꾸는 입장이니 그냥 재미로 넘겨 버렸다.
생각해 보면 여성들의 지위가 많이 오른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어머니 세대만 해도 여자가 무슨 공부니 사회 활동이냐며 좋은 사람 만나 빨리 시집가는 것이 가장 성공한 여자의 일생으로 여겼다. 순종적으로 가사를 전담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는데 이제는 여성의 가사노동을 법에 의해 금전으로도 환산해주고 있다.
직장에서 기혼 여성을 ‘아줌마’로 부르며 은근히 그만두기를 종용하다간 남녀 불평등으로 낭패를 겪게 된다. 오히려 직장 때문에 출산을 꺼리는 추세라 이를 막기 위해 출산휴가를 늘리고 양육비 세제 혜택을 주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현장에서 뛰면서 피부로 느끼는 것은 조금 다르다. 방송 시작 초창기의 일이다.한 여성이 신혼여행을 다녀와 방송에 출연한 모습을 지켜보던 남자 스태프가 “저 친구,어쩐지 김치 냄새가 나지 않아”라는 말을 던지며 지나쳤다.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내심 결혼하면 저런 소리를 듣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한 번은 잠시 방송활동을 쉬다가 다시 프로그램을 맡았을 즈음인데 “시집이나 가지 무슨 방송을 또 하냐”는 말을 듣고 그 자리를 나와버린 적도 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도 내가 일을 잘 해내는 것만이 해결책이라고 다짐하곤 했는데 여성 관련 세미나 사회를 보면서 너무 맥빠지는 이야기를 또 들었다. “당신은 남성들이 구축해놓은 여성상을 아직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거요.”
이런 일들은 개인적인 경험이긴 하지만 이 시대에 여성으로 살아 간다는 것은 조선시대보다 더 많은 인내를 요하는 듯하다. 나는 진짜 시대를 잘 타고난 것일까.
박정숙 방송인 * 국민일보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