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기곡제 성립과정의 의미
①고려초기의 왕들은 태조 왕건(王建)을 비롯하여 모두 불교에 심취하여 사직(社稷)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나, 6대 성종은 최승로(崔承老)의 건의를 받아들여 국가 통치의 원리를 유교(儒敎)에 두고 유교적인 제도와 의례(儀禮)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사직제(社稷祭)도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성종(成宗) 2년(983) 봄 정월 신미일에 왕이 원구단(圜丘壇)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태조를 배사(配祀)하였다. 을해일에는 적전(藉田)에 나아가 친경(親耕)하고 신농씨(神農氏)를 제사하고 후직(后稷)을 배사(配祀)하였다. 기곡(祈穀)과 적전(藉田)의 예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二年春正月辛未王祈穀于圓丘, 配以太祖. 乙亥躬耕籍田, 祀神農, 配以后稷. 祈穀籍田之禮, 始此) 〈고려성종 2년(983) 계미년〉
②조선왕조에 와서는 제천의례(祭天儀禮)의 설치와 폐지가 거듭되었다. 즉, 제천의례는 천자(天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렸다. 건국 직후 예조전서 조박(趙璞)이 원구제는 천자(天子)의 예이므로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원구(圓丘)는 천자(天子)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예절이니, 이를 폐지하기를 청합니다.(圓丘,天子祭天之禮, 請罷之。)〈태조 1년 8월 11일 경신〉
그러나 2년 뒤인 1394년에 원구제는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위해 삼국시대부터 지내온 것이라는 예조의 주장에 따라 ‘원구단(圓丘壇)’은 ‘원단(圓壇)’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회복된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원구단(圓丘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곡(祈穀)과 기우(祈雨)를 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경솔하게 폐할 수 없습니다. 사전(祀典)에 기록하여 옛날 제도를 회복하되 이름을 원단(圜壇)이라 고쳐 부르기 바랍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禮曹啓曰: "吾東方自三國以來, 祀天于圓丘, 祈穀祈雨, 行之已久, 不可輕廢。 請載祀典, 以復其舊, 改號圓壇。" 上從之。)〈태조 3년 8월 21일 戊子〉
1404(태종 4)에는 천도한 한양에서 기곡제(祈穀祭)를 지내고, 다음해 7월에는 한양에 새로 원단(圓壇)을 축조하여 비를 빌었다.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원단제(圓壇祭)를 한경(漢京)에서 행하였으니, 해마다 행하는 일이었다.(○行祈穀圓壇祭于漢京。歲事之常也。) 〈태종 4년 1월 9일 신해〉
그러다가 세조 2년(1456) 원구제(圓丘祭)는 일시적으로 제도화되기도 하였다. 〈상정고금례(詳定古今禮)〉에 실려 있는 〈고려 원구단〉을 참작하여 1457년 원구단을 신설하고 제사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원구제도 세조 10년(1464)에 실시된 제사를 마지막으로 원구제는 중단되었다. 즉 조선은 황제가 아닌 왕이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천제(天祭)를 지낼 수 없다 하여 원구제가 폐지되었다.
③기곡제(祈穀祭)가 부활된 것은 조선후기 숙종(肅宗) 때부터였다. 숙종9(1683) 1월 20일에 판부사(判府事) 김수흥(金壽興)이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맹춘(孟春)달에는 천자(天子)가 원일(元日)에 곡식 풍년들기를 상제(上帝)에게 빌었습니다. 『좌씨전(左氏傳』에는 후직(后稷)에게 교사(郊祀)하여 농사(農事)를 빈다고 하였습니다. 교사(郊祀)하는 예절은 비록 우리나라에서 감히 의논할 것이 아닙니다만 곡식 풍년들기를 비는 한가지 조목은 오히려 행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니 원월(元月)이 다가기 전에 국사단(國社壇)의 제사지내는 것이 『예기(禮記)』의 뜻에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나라의 사전(祀典)에 기재된 것이 아니니 여러 대신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도록 하소서.’하니 임금이 대신들에게 이를 의논하도록 명령하였다.
☞○判府事金壽興上箚曰:
(《月令》孟春之月, 天子以元日, 祈穀於上帝。 《左氏傳》曰: ‘郊祀后稷, 以祈農事也。’ 郊祀之禮, 雖非我國之所敢議, 至於祈穀一節, 尙可行之。 趁元月之未盡, 祀於國社之壇, 似合禮意, 而旣非我朝祀典所載, 詢之諸大臣而處之。上令議大臣。) 〈숙종 9년(1683) 1월 20일 임술〉
이에 대해 영부사(領府事) 송시열도 김수흥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송시열(宋時烈)이 말하기를, "월령편(月令篇)과 좌씨전(左氏傳)에서 말한 것은 모두 천자(天子)의 일입니다. 그러나 《주례(周禮)》에는 ‘모든 나라에서 전조(田祖)에게 풍년들기를 빈다.’는 글이 있습니다. 비록 천자(天子)가 아니라도 불가(不可)할 것이 없겠습니다. 그 절목(節目)을 강구(講究)하여 거행함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여러 대신들도 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서 의논에 의거하여 시행하기를 명하여 이달 28일에 대신을 보내어 비로소 국사단(國社壇)에서 제사를 거행하였으며, 이 뒤에는 인하여 항례(恒例)로 삼았다.
☞(領府事宋時烈以爲: "《月令》及《左傳》說, 皆是天子之事。 然《周禮》有凡國祈年于田祖之文, 雖非天子, 亦無不可。 講其節目而行之似宜。" 諸大臣亦無異辭, 命依議施行。 是月二十八日, 遣大臣始行祀于社壇。 是後, 仍以爲例。) 〈숙종 9년(1683) 1월 20일 임술〉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곡제의 시행이 확정되었고, 그 해 1월 28일에 처음으로 사직에서 기곡제가 시행되었다. 이때의 기곡제는 왕이 직접 주관한 친제(親祭)가 아니라 대신을 보내 제사를 주관하도록 한 섭행(攝行)이었다.
기곡제(祈穀祭)는 숙종 21년(1695) 11월에 왕이 대신들에게 정기적으로 시행하도록 명령하면서 정식제사로 부활되었다. 그 동기는 당시의 극심한 흉작과 그로 인한 민생의 도탄으로서 사직에 풍년을 기원하기 위한 것이 없다. 다시 정월 상신일(上辛日)에 기곡제를 지내는 일에 대해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고, 이에 대해 좌의정 유상운(柳尙運)은 “월령(月令)의 기곡제는 교사(郊祀)의 예이지만 전조(田祖)에 풍년을 비는 것은 국가를 소유한 자의 일”이라고 하면서 기곡제의 시행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사직서의궤(社稷署儀軌)』에 기록된 이 기사의 세주(細註)에 “매년 정월 상신일(上辛日)에 기곡제를 지내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기곡제(祈穀祭)는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는 정규 제사가 되었고 이렇게 하여 기곡제는 국가의 항구적인 제사가 되었고 영조(英祖) 때 『속오례의(續五禮儀)』를 편찬하면서 대사(大祀)에 편입된 것이다. 다만 국왕이 친행(親行)하지 않고 대신들이 섭행(攝行)할 때는 소사(小祀)에 준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④영조(英祖)는 농업을 장려하는데 특별히 많은 노력을 기울인 왕이었다. 그는 즉위 2년 정월 2일 한밤중에 강추위를 무릅쓰고 사직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기곡제(祈穀祭)를 행한 이래 거의 매년 이 제사를 친행(親行)하였다. 또 매년 정월 초하루에는 권농윤음(勸農綸音)을 내려 농업을 장려하였다. 영조(英祖)는 만년에 이르러 기곡제(祈穀祭)를 친행하지 못할 경우에도 이를 위한 서계(誓戒)나 전향(傳香) 의식에는 꼭 참석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이 섭행(攝行)하는 기곡제에도 재계(齋戒)를 산재(散齋) 2일, 치재(致齋) 1일로 하여 격을 높이도록 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흑단령 포(黑團領袍)·옥대(玉帶)·흑화(黑靴)를 갖추고 기곡제(祈穀祭)를 의식(儀式)과 같이 거행하였다. 이날 밤 추위가 늠렬(凛烈)하고 사나운 바람이 땅을 휩쓸어서 시신(侍臣)이 몸을 정하여 서지 못하고 위사(衛士)가 얼어 죽는 자가 있건만, 임금은 더운 모자를 물리치고 밤새워 새벽에 이르기까지 엄숙히 서서 게으른 모습이 없었으며 예식을 마치자 시사복(視事服)으로 갈아 입고 환궁하였다.
☞(○上具翼善冠、黑團領袍、玉帶、黑靴, 行祈穀祭如儀。 是夜, 寒澟烈, 猛風捲地, 侍臣不能定立, 衛士有凍斃者, 上却煖帽, 徹曉齋立, 無惰容, 禮畢, 改視事服, 還宮。) 〈영조 2년(1726) 1월 8일 신축〉
⑤정조(正祖)도 영조(英祖)와 마찬가지로 기곡(祈穀)을 농업 장려책으로 중시하였다. 그도 역시 매년 기곡제(祈穀祭)를 친행하였고, 특히 축문(祝文)에 어필로 친압(親押)하는 것을 정례화 하였다. 그리고 정조 11년(1787)에는 대신들이 섭행(攝行)할 경우에 소사(小祀)로 행하던 기곡제(祈穀祭)를 국왕 친행 때와 마찬가지로 대사(大祀)로 승격시키고, 희생(犧牲)이나 악장(樂章) 그리고 의물(儀物)을 친행과 똑같이 하도록 정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직의 기곡제(祈穀祭)는 완전한 대사(大祀)로 편입되었다. 정조도 만년에는 제사를 친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재계(齋戒)에 참석하고 축문에 친압(親押)하여 농업을 중시하는 뜻을 보였다.
⑥그러나 순조(純祖) 이후에는 국왕들이 기곡제(祈穀祭)를 친행하거나 재계(齋戒)와 전향(傳香) 의식에 참여한 사례가 매우 드물었다. 이것은 비록 의례적인 문제이기는 하지만 세도정치기(勢道政治期) 이후 전반적인 국정의 문란과 함께 조정(朝廷)에서 농업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퇴색해 가는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후 1897년 10월에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선포되고 남별궁(南別宮) 터에 새로이 환구단(圜丘壇)이 설치된 이후에는 기곡제(祈穀祭)가 사직(社稷)에서 환구단(圜丘壇)으로 돌아갔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참고문헌〉;①李迎春 社稷祭의 起源과 變遷 ②왕실의 천지제사 돌베개 ③조선시대 문화사(상)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내일도 건강하시고
늘 좋은일 가득하시길바랍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