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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강해(47) 2019. 7. 24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다
삼상 24:1-22
<셀라하마느곳>
다윗이 십 광야에 있을 때 어떤 사람이 다윗이 위치를 사울에게 밀고를 하였습니다. 사울은 그에게 복을 빌면서 보다 정확한 위치를 알아보고 보고하라고 부탁한 뒤 돌려보냅니다. 이 사람은 다윗이 ‘마온 광야 아라바’는 굴에 숨어 있다고 구체적인 위치를 알려줍니다. 이에 사울은 군대를 동원하여 아라바를 포위합니다. 다윗은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습니다. 다윗은 급히 피하려 했지만 이미 주요 길목은 포위가 된 상태였습니다. 이제 꼼짝없이 잡힐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친히 개입하셨습니다. 블레셋이 때 마침 이스라엘을 침공한 것입니다. 전령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사울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기일발의 순간을 겪은 다윗은 자신과 사울 사이에 있던 계곡을 ‘셀라하마느곳’(‘경계의 절벽’, ‘분리의 절벽’) 라고 불렀습니다. 사울이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음을 기념하여 이러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건과 환경을 주관하셔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섭리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마온 광야에서 사울의 군대에게 포위된 경험을 하자 자리를 옮겼습니다. 온통 험한 바위로 가득한 엔게디 광야에 있는 동굴 속으로 피합니다. 엔게디는 해발 200m에 위치한 천연요새입니다(사해 서쪽). ‘엔게디’라는 말은 ‘염소의 샘’이라는 뜻입니다. 이곳에 일종의 오아시스 같은 샘이 있어 염소들이 와서 물을 먹곤 했습니다.
<다윗을 다시 잡으러 오는 사울>
사울이 블레셋을 물리 친 후 다시 궁으로 돌아오자 어떤 사람(지난 번 밀고했던 그 사람?)이 다윗이 ‘엔게디’라는 곳에 있다는 정보를 사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1-3절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이에 사울이 무려 3천명의 특공대를 동원하였습니다. 아마도 지난번처럼 다윗 일행을 포위하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이 숨어있다는 엔게디의 들염소 바위를 향해 가던 중, 사울이 용변을 보고 싶어졌습니다(개역성경에 ‘발을 가린다’는 말을 개역개정에서는 ‘뒤를 보러 들어간다’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어에는 ‘발을 가리운다’로 되어 있고, 그 뜻은 ‘잠을 잔다’, ‘용변을 본다’의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이 옷자락을 자를 때까지 사울이 전혀 알지 못한 상황이니 여기에서는 용변을 보는 것보다는 잠을 자러 들어간 것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주변을 보니 길 가 양의 우리 근처에 굴이 있어 홀로 그 굴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마침 그 굴 깊은 곳에 다윗의 일행이 숨어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다. 그러나...>
다윗으로서는 사울을 죽일 절호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4절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다윗의 부하들이 다윗에게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원수를 넘겨주신다고 하셨는데 바로 오늘이 그날이라”고 하면서 사울을 죽이자고 합니다. 이 말은 요나단이 다윗과 언약을 맺을 때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을 치실지어다”(20:16)하고 맹세한 말씀에서 드러납니다.
아마도 다윗 역시 내심 사울을 죽이고 이 죽음의 방랑생활을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상황을 ‘하나님께서 주신 상황’이라고 주변에서 말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눈 딱 감고 사울을 죽여도 누구도 뭐라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합니다.
그리고는 사울의 겉옷 자락만 조금 베어냅니다.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요? 그 이유가 5-7절에 나옵니다.
5-7절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다윗은 사울을 ‘내 주’라고 칭하면서, 여호와의 기름 부으신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신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그 겉옷 자락 자른 것도 마음이 찔렸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지도력에 도전을 금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출애굽기에 보면 모세가 이방 여인은 아내로 맞이한 것을 두고 미리암과 아론이 비난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미리암에게 문둥병을 내려 징계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력을 흔드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모세의 행위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도 이러한 내용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타락한 왕이고,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원수이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임을 잊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귀히 여기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라면 손해가 나더라도 행하지 않는 다윗의 믿음을 봅니다.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고 그 기회를 잡으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와 도덕이 어떠하든지 간에 그 기회를 잡아서 성공적인 삶을 살라”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든지 선한 목적만 분명하다면 어떤 수단이든지 어떤 방법이든지 다 사용할 수 있다고 도전하고 있습니다. 돈만 벌수 있다면, 출세를 할 수만 있다면, 인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교회의 성장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어떤 수단이나 방법도 가리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성경적인 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쌓아올려도 언젠가는 무너지고야 말 것입니다. 목적이 선하면 반드시 방법도 선해야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의 성공을 위해서 사울왕의 목숨을 빼앗는 것으로 그 기회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결백 호소>
사울이 나간 후에 다윗도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부릅니다.
8-15절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사울이 돌아보자, 다윗은 먼저 엎드려 절을 합니다. 겸손합니다. 왕 앞에 예의를 갖춥니다.
목숨을 살려주었으니 당당히 사울을 조롱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자신의 결백을 호소합니다.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라”고 호소합니다(9). 그것은 ‘가짜 뉴스’라는 것입니다.
오늘 굴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신의 주변 사람들이 “왕을 죽이라”고 권면하였지만 나는 “사울 왕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10)에 할 수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 증거를 제시합니다. 11절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다윗은 그를 “내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친근감과 사랑의 표시입니다. 자신이 아버지이신 사울을 죽일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약속을 합니다. 오직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임으로 자신의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속담을 인용하여 “악은 안인에게서 난다”(13)고 하면서 자신은 악인이 아니기에 왕을 행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다윗은 자신을 ‘죽은 개’와 ‘벼룩’에 비유합니다(14). 이것은 자신의 비천함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는 위선이 아닙니다. 다윗은 단 한 번도 왕위를 넘보고 의도적으로 반역을 꾀하거나 실행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으로 자신을 쫓는 일이 얼마나 허망하고 의미 없는 일인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다윗의 말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15절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자신의 억울함이 하나님께 맡기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다윗의 선택을 통해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시간을 살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내 시간에서 하나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때가 있습니다. 억울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재판관이 되셔서 판단하시 때까지 인내로 기다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일시적이지만 회개하는 사울>
자신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지만 다윗은 자신을 살려주었다는 것에 대하여 잠시 제 정신이 돌아왔습니다. 일시적이나마 회개합니다.
16-21절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17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18 네가 나 선대한 것을 오늘 나타냈나니 여호와께서 나를 네 손에 넘기셨으나 네가 나를 죽이지 아니하였도다/ 19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그를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다윗이 사울의 겉옷자락만 자르고 그를 죽이지 않은 사실을 알리자, 사울이 자신의 옷자락이 잘라 나간 것을 확인한 후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하고 말합니다. 그동안 사울은 다윗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이새의 아들놈’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울었습니다.
나는 너를 학대하였는데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다고 합니다.
사람이 그의 원수를 만나면 평안히 가게 하겠느냐고 하면서 네가 오늘 내게 행한 일로 여호와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를 원한다고 축복합니다.
다윗의 선한 행동은 사울의 회개를 불러왔습니다.
성도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다윗의 행위는 오히려 자신에 대한 사울의 미움을 없애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는 악을 극복하고 이기는 참된 힘은 선에 있음을 교훈해 줍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오히려 미움의 골만 깊게 하고 끝없는 복수의 악순환만 가져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미움과 다툼이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성도들은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미움은 사라지고 공동체 안에는 용서와 화해가 생겨나고 참된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사울의 회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가져왔습니다.
20-21절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 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 하니라.”
이미 사울도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만 욕심에 눈이 멀어 하나님의 뜻을 의도적으로 외면해 왔을 뿐입니다.
회개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받으니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분명한 깨달음과 더불어 순종할 수 있는 힘도 생긴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한 가지 다짐을 받습니다. 네가 왕이 되더라도 “너는 내 후손을 끊지 말고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까지 합니다.
다윗이 맹세합니다.
22절 “다윗이 사울에게 맹세하매 사울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요새로 올라가니라.”
이로써 사울과 다윗 사이의 분쟁을 은혜롭게 마무리가 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 날마다 새롭게 되지 않으면>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사울의 변화된 모습은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변화가 오래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의 눈물은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사울이 거짓으로 연기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는 진짜로 다윗의 태도에 감동했고, 그의 이름을 울면서 불렀으며, 진짜로 앞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면서 살겠다는 마음을 품고 고백한 것입니다.
문제는 지속성입니다. 다시 옛 생각,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사울의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한 번 예수 안에서 은혜를 받았다고 마지막 순간까지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예배를 통하여, 기도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신앙이 갱신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벧전5:8-9a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우리는 자신이 넘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시험에 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늘 겸손히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려놓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날마다 갱신하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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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