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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강해(45) 2023. 11. 1
승리하는 다윗의 군대
삼하18:1-8
<다윗 군대의 편성>
요단강을 건넌 다윗 왕 일행은 마하나임이란 성읍에 도착하였습니다. 그곳에 도착한 이후 다윗 왕이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자신을 따라온 군사들을 재편성하는 일이었습니다.
1~2절 “이에 다윗이 그와 함께 한 백성을 찾아가서 천부장과 백부장을 그들 위에 세우고/ 2 다윗이 그의 백성을 내보낼새 삼분의 일은 요압의 휘하에, 삼분의 일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동생 아비새의 휘하에 넘기고 삼분의 일은 가드 사람 잇대의 휘하에 넘기고 왕이 백성에게 이르되 나도 반드시 너희와 함께 나가리라 하니.”
다윗 왕의 입장에서는 후새가 시간을 벌어준 것이 큰 공로였습니다.
시간을 벌어주어 군대를 다시 재편성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가운데 천부장과 백부장을 세웁니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국군은 대항하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주공인 1군단이 신속히 서울을 점령하고, 조공인 중부 전선의 2군단이 춘천과 홍천, 원주를 점령한 뒤 서울 남쪽 한강 이남 지역으로 진출하여 국군 주력을 포위하는 속전속결 전략이었습니다. 1군단은 계획대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습니다. 그런데 2군단이 춘천지역에서 국군 6사단에 막혀 3일 동안 지체한 것입니다. 만일 국군 6사단이 춘천에서 허무하게 뚫렸으면, 인민군 2사단은 가평을 거쳐 수원을 측면에서 공격했고, 그러면 수도권의 국군 전체의 퇴로가 막히면서 전세는 최악 중 최악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인민군은 2군단이 들어올 때까지 3일 동안 한강을 넘지 못하고 기다립니다. 우리 국군의 입장에서는 천만다행입니다. 후퇴한 국군을 다시 재편성하여 지연 작전을 펼 수 있는 시간을 벌었기 때문입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전사는 한국전쟁을 초기 전투(6.25~28), 한강 방어 전투(6.28~7.3), 지연 작전(7.1~31), 낙동강 방어 전투(8.1~9.23), 인천상륙작전(9.15~18), 서울탈환작전(9.16~28) 등으로 구분합니다. 즉 낙동강까지 후퇴하기까지 한 달의 시간을 번 것입니다. 이 사이 미군 등 UN군이 참전할 시간을 번 것입니다. 만일 6사단이 즉시 무너졌으면, 한강 방어 전투 자체가 아예 없었을 것이고, 낙동강까지의 지연 작전은 한 달이 아니라 1~2주 정도밖에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면 낙동강 방어선을 제대로 구축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국군 6사단의 춘천 전투는 한 마디로 나라를 구한 전투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새의 계략은 국군 6사단의 역할을 해 준 것입니다. 다윗 군대가 재정비할 시간을 벌어준 것입니다. |
그럼 다윗의 군대의 숫자는 얼마나 되었을까요?
유대 역사가인 요세푸스는 당시 다윗 군의 병력이 그렛군과 블렛군 및 가드에서 온 육백 용사, 기타 추가 병력을 합하여(15:18) 약 4천 명에 이르렀다고 주장합니다. 압살롬의 군대에 비하면 소수입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경험 많고, 용맹하고, 충성스러운 장수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요압과 아비새, 그리고 잇대입니다.
다윗은 군대를 세 개의 부대로 나누어 한 부대는 요압에게, 한 부대는 아비새에게, 그리고 나머지 한 부대는 가드 사람 잇대에게 맡깁니다. 요압과 아비새는 가장 믿을 만한 용사들(사촌들)이니 수긍이 갑니다.
그러나 잇대는 파격적인 인사라 할 수 있습니다. 잇대는 누구입니까?
잇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삼하 15장에 나옵니다. 다윗 왕이 압살롬을 피해 급히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나온 후, ‘벧메르학’이라는 곳에 도착하여 인원 조사를 할 때, 블레셋 가드 사람 600명이 지나가는 가운데, 다윗은 특별한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잇대’입니다. 그는 블레셋 가드 출신의 장수로써 많은 가족과 부하들을 거느리고 다윗에게로 망명하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20절 ‘너는 어제 왔고’). 다윗은 그를 불쌍히 여겨, 자신을 따라가면 또다시 고생길이 될 테니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타국의 내란에 휩쓸려 위험을 자초하지 말고, 새로 권력을 얻어 강성해지고 있는 압살롬에게 가담해 안전을 도모하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잇대는 “진실로 내 주 왕께서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사나 죽으나 종도 그곳에 있겠나이다.”(21절)고 맹세합니다. 그동안 자신의 은혜를 입었던 많은 사람이 자신을 배반하고 압살롬의 편에 가담한 상황에서 잇대의 맹세는 다윗에게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그가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성을 기억하고, 그에게 부대를 맡긴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영적 교훈을 줍니다. 저는 다윗과 잇대의 관계를 ‘하나님과 성도’의 관계로 해석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혈통을 따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롬9:24~26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25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행10:34~35(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설교한 후)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분이 아니시고(엡6:9), 중심으로 보시는 분이십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을 들어 쓰시는 것입니다. 다윗이 잇대의 충성스러움을 보고 장군으로 세웠듯이, 저와 여러분의 충성스러움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일꾼으로 쓰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
<직접 출전하려는 다윗>
이렇게 부대를 편성한 후에 다윗은 자신도 같이 출전하겠다고 선언합니다(2).
저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밧세바와의 잘못된 만남의 원인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방심하여 죄 가운데 빠진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의 이 전쟁이 자기의 잘못으로 인해 일어났으므로 속죄하는 마음에서도 이 같은 자세를 보였을 것입니다.
둘째는 실추된 왕권을 다시 회복하려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지금 다윗의 왕권은 구겨질 대로 구겨졌습니다. 이제 앞장서서 싸움으로 참된 지도자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출전을 말리는 백성들>
하지만 백성들은 다윗의 출정을 막습니다.
3~4절 “백성들이 이르되 왕은 나가지 마소서 우리가 도망할지라도 그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요 우리가 절반이나 죽을지라도 우리에게 마음을 쓰지 아니할 터이라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시오니 왕은 성읍에 계시다가 우리를 도우심이 좋으니이다 하니라/ 4 왕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는 대로 내가 행하리라 하고 문 곁에 왕이 서매 모든 백성이 백 명씩 천 명씩 대를 지어 나가는지라.”
백성들은 다윗을 향해 “왕은 우리 만 명보다 중하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다윗이 이끄는 군대와 백성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은 진심으로 다윗 왕을 아끼고 사랑하였던 것입니다. 비록 큰 실수를 저질러 위기에 몰렸지만, 그를 향한 신뢰와 사랑은 변치 않았습니다.
여러분! 아직 전쟁의 결과를 보지 않았지만, 전쟁의 승패를 예견할 수 있으시지요?
솔선수범하려는 왕과, 왕을 아끼는 백성들의 아름다운 모습 속에서 이미 전쟁의 승리를 예감(豫感)할 수 있습니다.
예, 전쟁에서의 승리는 물론 무기와 숫자 등 전력의 차이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역할은 지도자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승패를 결정합니다.
결국, 다윗은 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성에 남았고 대신 출정하는 그들을 배웅해줍니다.
저는 오늘날 교회가 영적 전쟁을 위한 부대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분위기가 곧 영적 전쟁의 승패를 좌우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신뢰와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사단은 감히 공격을 해오지 못합니다.
목회자나 성도들 모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성함으로 그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다윗의 특별한 부탁>
다윗은 출전하는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한 가지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5절 “왕이 요압과 아비새와 잇대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하니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모든 군지휘관에게 명령할 때에 백성들이 다 들으니라.”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즉 압살롬을 살려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압살롬을 살려야 할 이유를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첫째는 자신(다윗)을 위해서라는 것입니다(‘나를 위하여’).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비록 자신의 자릴 탐내는 반역자이지만, 그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내리사랑’이라고, 압살롬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좀 봐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자녀가 있으시니, 다윗의 말뜻을 이해하시지요? 못된 자식이라도 잘되기를 바라는 사랑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못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자식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이와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라도,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면 반드시 용서하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사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탕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못된 아들이라 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길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잃은 양 비유’를 통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둘째로 압살롬이 아직 젊다는 것입니다(‘젊은 압살롬을’). 예전 개역 성경에서는 ‘소년’라고 표기했습니다. 즉 압살롬이 아직 천지 분간 못하는 소년(아이)라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니 좀 이해해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한편, 다윗은 군대 장관들이 이 명령을 지키게 하려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군대 장관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요압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용맹스러운 장수인 것은 맞지만, 때때로 자기 못대로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이 다 듣는 데서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승리하는 다윗의 군대>
그러면 전투의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요?
6~8절 “이에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가서 에브라임 수풀에서 싸우더니/ 7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이 다윗의 부하들에게 패하매 그 날 그 곳에서 전사자가 많아 이만 명에 이르렀고/ 8 그 땅에서 사면으로 퍼져 싸웠으므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문구가 나옵니다. “백성이 이스라엘을 치러 들로 나갔다”는 표현입니다. 당시 압살롬의 군대가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할 만큼,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에서 차출된 군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상황을 부각하는 표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이스라엘 백성을 치러 나가는 상황입니다.
이 비극이 다윗의 범죄로부터 연유되었음을 기억할 때, 지도자 한 사람의 타락(죄)의 결과가 그 민족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오는지를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수풀'이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현재 학자들 간에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에브라임 수풀' 하면 우선 요단 서편의 에브라임 경내(境內)에 있는 무성한 숲을 연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수17:15,16). 그러나 본문에는 다윗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 다시금 서편 땅으로 들어갔다는 언급이 없습니다.
다윗의 군대와 압살롬의 군대 간의 전쟁은 요단 저편(동편), 곧 마하나임 근처(17:24, 26, 27)에서 벌어졌습니다. 아마도 에브라임 지파의 기업 중 일부분이 요단 동편의 므낫세 지파의 땅에도 있었다는 점(수16:9)을 고려하면, 본문은 요단 동편의 마하나임에 가까운 어느 수풀에서 벌어진 전쟁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 군대가 압살롬 군대를 에브라임 수풀로 유인했다는 점입니다.
싸움의 정석은 자신이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숫자가 적은 다윗의 군대가 숫자가 많은 압살롬의 군대와 들판에서 정면 대결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정유재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이 일본 수군을 크게 이긴 대첩 가운데 하나가 ‘명량 대첩’입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에게는 고작 13척의 함선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홈그라운드의 장점을 십분 이용했습니다. 정면 대결을 하기보다는 해협이 좁고 물결이 센 ‘울돌목’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하여 일본 수군 함선 330여 척을 거의 전멸에 가깝게 격퇴하였습니다.
다윗의 군대는 압살롬의 군대를 '에브라임 수풀'로 유인하였습니다. 이 지역은 나무들이 많고 지형이 복잡한 숲으로 전쟁 경험이 많고 계속 요단 동편에 주둔하고 있던 다윗 군대와 요단 동편 지역에서 모인 군대는 이 지형에 익숙하였습니다. 반면 압살롬의 군대는 주로 요단 서편 지파들에서 모인 부대로 요단 동편 지형에 익숙하지 않았고, 아마사도 요압만큼 전쟁에 능숙한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압살롬의 군대는 다윗의 군대에 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압살롬의 군대에서 이만 명 정도가 전사하였는데, 패인은 군대가 사방으로 퍼져서 싸웠기 때문입니다. 지형이 복잡하기 때문에 압살롬이 원하는 것처럼 대군을 이끌고 멋지게 정면 승부를 겨룰 수 없었고, 복잡한 숲속에서 결국 군대는 이리저리 흩어졌으며, 이렇게 흩어진 군대를 요압의 군대는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이나 유인 작전 혹은 게릴라전으로 격퇴하였던 것입니다.
특히, 8절에서 “그 날에 수풀에서 죽은 자가 칼에 죽은 자보다 많았더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에브라임 수풀에는 좁은 협곡이나 가파른 벼랑, 또는 늪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 군대의 효율적인 공격에 뿔뿔이 흩어졌던 압살롬의 군사들은 이러한 곳에 떨어지거나 빠져 그곳에서 헤어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계략을 듣지 않고 후새의 계략에 빠진 것이 치명적인 패인입니다.
기억해보세요. 아히도벨이 압살롬에게 요청한 군사가 1만 2천 명이었습니다. 그때 압살롬이 아히도벨의 말을 들었다면 다윗 왕을 잡고 왕위에 오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한 번의 어리석은 결정이, 그 고칠 수 없는 왕자병이 오늘 수많은 아무 잘못도 없는 젊은 군사들을 다 죽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
그러나 꼭 기억할 것은 이 전쟁에 하나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구원하시기 위해 압살롬의 귀를 막으시고, 판단을 흐리게 하신 것입니다.
삼하17:14 “압살롬과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아렉 사람 후새의 계략은 아히도벨의 계략보다 낫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압살롬에게 화를 내리려 하사 아히도벨의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 명령하셨음이더라.”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심판하시려고, 아히도벨의 좋은 모략을 좌절시키신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뒤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삼하7:16(다윗의 성전 건축을 금하신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 약속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한 이후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맺는 말씀 –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롬5:21)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강해 보여도 그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습니다.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누구의 편에 서 있습니까?
비록 난관 속에 처해 있더라도, 최후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있음을 믿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끝내 승리의 기쁨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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