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고등학교때 친했던 친구들과 모처럼 한잔 나누면서 예전 이야기,
요즘 이야기 등을 두서없이 하다가 보니 아스라히 기억속에 멀어졌던
추억이 불현듯 생각 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77년 초 나태하게 생활한 업을 받아 당연히
대학에 떨어지던날 뭐가 잘났는지 친구들과 술을 잔뜩 먹고 집에
전화를 걸어 1년뒤 성공해서 들어가겠다고 횡설수설 하면서 끊었다.
지금도 그러지만 쓸데없이 자존심은 있어서 술을 먹건 안먹건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지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라 그 다음날 친구집에서 눈을 뜨니
전날 술김에 집에다 전화한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는데 그걸 지킬 생각을
하니 앞이 캄캄 했다.
그래도 할수있나. 입으로 뱉은 말 남자로서 책임을 져야지.
불행중 다행이라고 이번에 같이 한잔한 친구가 정릉에 방을 하나 얻어 놓은게
있어 그곳으로 입주를 했다.
그친구는 그당시 우리보다 한학년 위인 이대 미대에 다니는 여대생을
사귀고 있었는데 그방을 가끔 이용하려고 얻어논 상태에서 불청객인 내가
끼어 들게 되었다.
집을 나올때 몸만 나온 상태라 갈아입을 속옷이나 돈도 한푼없이
빈털털이 신세로 정말 한심스러운 청춘이었다.
그놈의 쓸데없는 자존심과 고집으로 고생이 시작 되었다.
방주인인 친구는 괜찮게 사는 집안 자식이었으나 그친구에게 밥까지
얻어먹기엔 내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가끔 들리는 친구에게 먹지도
않았는데도 항상 밥을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당시 그친구가 방에 고체연료와 라면 몇개를 놔뒀는데 그게
나의 주식이었다.
하루에 라면 한개, 포식하는날은 두개
그러다보니 내얼굴은 누렇게 떠 가기 시작했다.
그때 잠깐 친선을 나눈 성신 사대부고 출신 영훈동문 B양과도
소식을 끊었다.
자업자득이지만 왜 그리 인생이 서글펐는지...
그러던 어느날 친구와 여대생이 방바닥에서 같이 자고
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는데 지금도 혈기가 왕성해서 겨울에도
이불을 덮지않고 자는 나에겐 정말 고역이었다.
내가 자고 있는걸로 알았던지 그여대생이 내가 없으면 좋겠다는
말을 소곤소곤 이야기 하는데 더이상 이곳도 있을때가
아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약 한달정도 그곳에서 지냈으니 떠날때도 된것 같았다.
지나가는 친구들이 입던 옷이나 속옷을 적선해주고 불쌍한지
몇푼 놓고 간돈을 아끼고 아껴 군자금 만원을 만들어
고속터미널로 나갔다.
약간 싸늘한 날씨에 마이크에선 그당시 유행했던 방랑자가
울려 퍼지는데 정말 처량했다.어디로 가야할까?
갈데도 없고 오라는데도 없는데 집에는 죽어도 들어가기 싫고
무작정 전라도 광주행 버스를 올라탔다.
광주에 도착하니 어둠이 서서히 내리기 시작하였는데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지 막막했다.
불빛이 밝은데로 걸어갔더니 광주 최고의 번화가 충장로가 나왔다.
그곳에서 생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나는 상아탑이란 막걸리
고고장으로 들어갔다.
그곳은 그당시 풍경이 무교동 싯다운 고고장과 같은 형태로
운영되는곳이라 꼭 마음의고향에 온듯 차분해지고 기분이
포근해졌다.
그래도 서울출신인데 지방에서 풀 죽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당시 유행했던 허슬,범푸,알리 고고등 한차원 높은 춤을 선보여
그곳 젊은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는데 나이를 네살 속였다.
서강대 R.O.T.C라고 거리낌없이 속이며 방학이라 놀러왔다고
하니까 의심을 별로 안하고 전남대생 들과 어울렸는데
너무 재미있고 또한 그친구들도 서울 대학생이라고 상당히
호감을 갖고 잘 대해줘 조금 가슴이 찔렸다.
자기네 동네에 왔으니까 자기네들이 사겠다고 해서 첫날부터
이상하게 일이 잘 풀렸다.
이야기 하다보니 한여학생이 집이 나주인데 광주에서 남동생과
자취한다 해서 그여대생을 찍었다.
광주에서 생활하려면 근거지를 마련해야 앞날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리라는 마음으로 집중적으로 그여대생에게 관심을
표명하여 산수오거리에 있는 그여대생 자취방 까지 가는데
성공 하였다.
전남대 국문과 3학년인 그여대생은 자기랑 같은 나이로 나를
알고 동등하게 대해주는데 마음이 여린 나로선 굉장히
미안 했지만 그때 내형편이 형편인지라 어쩔수 없었다.
그 인연으로 조대부고 일학년인 그여대생의 남동생과 친구2명을
말도 안되게 내가 맡아서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운이 좋아선지 남동생과 같은방에서 생활하면서 전라도에서의
서글픈 인생이 시작되었다.
밤에는 막걸리 고고장으로 원정도 다니면서 그렇게 젊음을 쓸데없이
소비하며 두~어 달 지내다 너무 지겨워 다른곳으로 이동하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사람일이란 정말 모를 일이다.
그당시 잠시 가르쳤던 남동생을 5년전 우리회사 철문을 맡기면서
그친구와 재회 했으니 말이다.
철문을 용접하는 친구가 어딘지 낯이 익어서 이야기 하다보니
그친구가 맞더라.
그래서 옛날 신세도 갚을 겸해서 나하고 같이 일좀하자 하여
같이 일하게 되었는데 지금 우리회사 공장장으로 없어서는 안될
직원으로 열심히 업무에 임하고 있으니 참 인생이란 알수가 없는것 같다.
어느날 불현듯 광주를 떠나 서울로 와서 친구들을 만나고 다시
여장을 꾸려 청평쪽으로 향했는데 아주 오랜시간이 흐르는듯 느껴졌으나
실지론 약4개월 밖에 안지나 8개월을 채워야 집과 약속한 1년이 되는지라
진짜 괴로웠다.
그래도 빈몸으로 나왔는데 제법 살림살이도 늘어나 한손으론 못들고
양손에 나눠 들었으니 생명력이 끈질긴것 같았다.
청평에서 조금 더 가면 아주 물도 맑고 경치도 좋은 현리가 나오는데
그곳 개울가에 방하나를 얻고 다리를 쭉 피니 내자신이
대견스럽더라.
빈몸으로 나와 냄비,이불,옷,등등 입에 풀칠이라도 하면서
살수있었으니 말이다.
그때 친구들과 편지를 주고 받다가 꼬리가 잡혀 가출 육개월 만에
형들에게 포박되 집으로 끌려가게 되여
그 아름답던 한때를 접게 되었다.
지금도 개울가의 방이 잊혀지질 않는다.
밤이면 물 내려가는 소리에 벌레 우는소리 ,거기에
인위적인 불빛은 하나도 없이 별빛이 아름답게 비칠때
혼자서 김치 한가지에 기우리는 한잔술 ...
정녕 그맛은 다시는 맛보지 못하리라.
아~사는게 뭔지....???
첫댓글 두라야 여기 영화 소재 좋은거 하나 나왔다. 동생한테 빨리 연락해
민수도 한가닥 혔구먼. 음~~~ 6개월이라. 아쉽구먼 1년을 채웠으면 어케 ?을지 모르는데. 아쉽지만 잘 들어갔다. 그게 다 약이 되었을겨.
민수야 참 이상하다 니가 거친 곳이 다 내가 살던 곳이야~ 광주 충장로(광주 서석 국3때) 가평 현리(국4~6때; 사령관 숙소가 있어서 주말마다 갔었어)... 눈물 흘리며 라면을 먹어보지 않은 자와는 인생을 논하지 말랬는데....너 진짜 불쌍했네^^
민수야 그 공장장이 아마도 조대부고 29회일꺼다소설을 읽는듯했고 광주와 조대부고라는 이야기에 마냥 재미있었다(내가 조대부고26회라면 믿겠냐?)본인의 말에 대한 책임을 지기위한 알량한? 사춘기를 겪은 민수가 아주~~낭만적이었다
전국구 김실장 오랬만이고 그날 분위기 메이커로서 훌륭했다만나서 진정 즐거웠네~~친구야..
민수야 두라가 스토커 기질이 있나보다. 너의 과거를.....
상호야~ 니네 엄마도 서석국민학교랬지?!! 조대 보니까 나도 반가웠다 조선대~ 나 광주서 1년 밖에 안살았는데 다 생각나~ 찰흙 캐러 다니던 산과 까맣게 칠한 나무다리며 군인관사며~~ 그 날 전화해서 아빠 챙기던 이쁜 딸들 잘 있지?
김실장! . 우리딸들이 예쁜것 까지 알아버렸어? 날 닮아서 무지무지? ~~예뻐.ㅋㅋㅋㅋㅋ.우리어머니가, 동생들 둘이 서석국민학교 동문들이야. 난 다시 중학교3년때 그 서석동으로 이사를 갔지~~
여기 우이국민학교 19회 모임 맞아?
민수가 젊었을 때 확실한 방황을 해서 인간적인 폭이 넓어졌구나.
우리 오빠도 질풍노도의 시절에 가출좀 했지? 애타 하시던 아버지 ( 오빠들이 패싸움 해서 학교도 불려가시고 경찰서도 불려가시고~~ ) ( 그래도 맞고 들어 오는거 보다 낫다고 은근히 뿌듯해 하셨던것 같기도 하고~~그 속을 썩여도 우리 4남매 손 대신적 없었는데~~ )
오빠가 나중에 얘기해 줬는데 그 때 아버지 한테 산에 끌려 가서 디지게 맞았 다더라....니들이 부모 마음을 알어!!! 지금은 제일 효도 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