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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이끼의 시간 / 김준현
우물 위로 귀 몇 개가 떠다닌다
검은 비닐봉지 속에 느린 허공이 담겨 있다 나는
내 빈 얼굴을 바라본다 눈을 감거나
뜨거나, 닫아놓은 창이다
녹슨 현악기의 뼈를 꺾어 왔다 우물이 입을 벌리고
벽에는 수염이 거뭇하다 사춘기라면
젖은 눈으로
기타의 냄새 나는 구멍을 더듬는, 장마철이다
손가락 몇 개로 높아지는 빗소리를 누른다 저 먼 곳에서
핏줄이 서는 그의 목젖, 거친
수염을 민다
드러나는 싹이여, 자라지 마라
벌레들이 털 많은 다리로 밤에서
새벽까지 더듬어 오른다
나는 잠든 그의 뒷주머니에
시린 손을 숨긴다 부드럽고 가장 어두운
비닐봉지 안에 차가운 달걀 몇 개를 담아
바람에 밀려가는 주소를 찾는다
귀들이 다 가라앉은 물에도
소름이 돋는 중이다
김준현 시인 : 1987년 포항 출생. 영남대 국문과 졸업. 현재 동대학원 국문과 재학.
[당선소감]
더 정갈한 글로 보답하겠습니다
어릴 때, 저녁이면 부모님은 저와 동생에게 과일을 깎아 주셨습니다. 지켜보며, 사과껍질을 끊기지 않게 깎는 법을 배우고 싶었죠. 그러나 손놀림이 서툴렀던 저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한 번도 긴 곡선의 껍질을 남긴 적이 없었던, 제 사과.
서툴렀던 건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병아리를 길렀던 적이 있었죠. 어쩌다 다리를 다친, 이름도 잊어버린 그 병아리 역시 제 서투른 사육의 증거였습니다. 베란다의 사과박스 속 홀로, 한 쪽 다리로 서 있던 병아리를 보며 저는 ‘쓸쓸’이라는 감정을 배웠습니다. 의무처럼, 저는 병아리의 배설물이 묻은 신문지를 갈아주었습니다. 오래된 신문지와 새 신문지의 날짜 사이 점점 간격이 벌어지던 어느 날, 병아리는 눈을 감고 있더군요.
방에서 홀로 쓰다가 그렇게 지칠 때면 저는 밝고 따뜻한 집으로 돌아갑니다. 늘 믿고 기다려주신 아버지, 어머니, 동생에게- 늘 사랑하고 고맙습니다.
문학을, 사람을 대하는 자세를 몸소 보여주시고, 늘 제 서투른 감각들을 짚어주시는 김문주 교수님. 감사합니다, 그 이상의 인사는 좋은 작품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더불어 영남대 국문과의 교수님들, 제가 지나온 모든 선생님들과 친구들, 특히 승협, 명재에게 감사를 전합니다. 정끝별 손택수 두 심사위원께는 더 정갈한 소리로 보답을 드리겠습니다. 오래 가라앉고자 합니다.
[심사평]
‘따로 없는 詩 쓰는 법’ 모험에 박수를
추사에 따르면, 묵죽을 그리는 데는 법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법이 따로 없는 것도 아니다. ‘따로 있는 법’을 성실히 참조하면서도 과감히 떨쳐버리고 어떻게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설 것인가.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는 모험을 향해 떠난 외롭고 고단한 열정들과의 뜨거운 만남의 자리였다.
꼼꼼하고 균형 잡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총 20여명의 작품 중 최종심에 오른 것은 ‘새라는 가능성’, ‘고동의 길’, ‘만찬’, ‘이끼의 시간’ 등 모두 네 편이었다. 예리하게 벼린 언어 감각이 돋보이는 ‘새라는 가능성’은 높은 시적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기시감이 있었다. 새, 새장, 온도, 울음, 바람 등 선택된 오브제들과 그 엮음의 방식이 표절 시비로 이미 당선 취소된 바 있는 작품들과 유사해 또 다른 표절 시비를 몰고 올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 하에 가장 먼저 제외되었다. ‘만찬’은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 칼이 허공의 날개처럼 살 사이를 휘젓는다”와 같은 감각적인 언술에 호소력이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과잉된 수사욕망을 절제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고동의 길’과 ‘이끼의 시간’이었다. ‘고동의 길’은 수많은 시 창작론의 정석이라고 해도 될 만큼 균형 잡힌 구조와 투박한 시어들을 장악해 들어가는 사유의 힘이 돌올했다.
반면에 미성년의 실존적 내면을 다룬 ‘이끼의 시간’은 우물, 검은 비밀봉지, 현악기(기타) 등으로 변주를 거듭하는 은유와 신경증적인 감각들로 이미지와 이미지, 의미와 의미 사이의 연결고리가 불안으로 술렁였다. 동봉한 작품들 또한 같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지만 이 불안은 그 무엇도 결정되지 않는 혼돈 속에서 돋아나는 새로운 가능성의 감각과 열기로 꽉 차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완숙한 포도주의 맛과 아직 미숙하긴 하되 미래를 잠재한 떫은 포도주의 맛 사이에서 장고 끝에 심사위원들은 ‘따로 없는 법’을 찾아나선 자의 모험에 손을 들어주기로 하였다. 새로운 시인의 탄생에 매운 채찍과 응원을 함께 보낸다.
심사 : 정끝별(시인), 손택수(시인).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오늘의 의상 / 정지우
성당의 느티나무 그늘이 무더위에 끌리고 있다
팔랑거리는 양떼들을 데리고
계절 속으로 입성하려면 가벼운 체위는 가리고 고딕의 시대를 지나야 한다
폭염은 언덕에 한낮으로 누워 있다
구름의 미사포를 쓰고 그늘을 숙이던 오후는 초록의 전례를 들려주더니
밀빵을 혀에 얹고 한동안 입들이 닫혀 있을 것이다
종탑에는 귀머거리 새가
종소리를 둥지로 삼아 살고 있다
회색을 입고 묵상에 잠긴 성전엔 돌기둥을 돌던 저녁의 의복이 걸쳐져 있다
미사의 요일엔 검은 머리카락을 버리고 히브리어를 닮은 숟가락으로 점심을 먹는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디저트가 없는
주일 맛 나는 테이블
중세의 햇빛이 스테인드글라스로 들어오는 창문
귀가 잘려진 무늬에선
단풍잎 맛이 나는 오래된 말들이 달그락거린다
촛대처럼 나무가 자꾸 떨어뜨리는 중얼거림들
대신 읊고 가는 가을 울음소리가 스르르 바닥에 끌린다
계단이나 혹은 의자로 배치되어 있는 한 철을
나는 양치기 소년으로 지나고 있다
정지우 시인.
1970년 전남 구례 출생. 경희사이버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논술 언어력지도교사.
[당선소감]
시름의 골목 지나는 어린 나에게 돌아가고 싶어
입술을 달싹였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한 날들이 되풀이됐다. 한동안 소리를 잃었을 때 모든 밤과 낮을 모아 구겨버린 일들이 소소한 날의 뒤편을 떠다녔다. 내 옆엔 언제나 불면의 그림자만이 작아졌다 커지곤 했다. 시어를 쌓았다 허물어버린 기억이 어제의 눈송이로 내리고 그 위로 겨울비가 내렸다. 차가운 빗물에 미끄러질 뻔한 손을 간신히 잡아준 아침처럼 당선 소식을 받았다. 아직 어린 아이로 골목을 지나고 있는 나에게 먼저 찾아가고 싶다. 내가 나를 잃어버린 시간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타인의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를, 양떼를 몰고 성당 주위를 돌고 있는 양치기 소년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묵상을 의복처럼 걸치고 사물의 바깥에서 길을 잃어도 멀리 성당 종소리에 귀를 붙들려도 중세로 돌아가는 길을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잠시 쉬어가야겠다, 라고 생각했을 무렵이었다. 몸으로 시를 써서 왼쪽엔 통점을, 오른쪽엔 고독을 모시고 살았다. 문득 뒤돌아보게 되는 연말엔 더욱 지치고 힘들었던 것 같다. 매번 마침표를 찍고 싶은 순간을 지나치곤 했는데 이제는 그 시름을 넌지시 위로할 수 있겠다. 무수한 날들, 삶의 전환점을 돌아 어린 나에게 돌아가는 일이 헛되지 않음에 감사한다. 오랜 기다림에 손을 내밀어주신 황동규, 정호승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시의 근원이신 엄마에게 생애 최고의 선물을 전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언제나 곁에서 독자로 조언과 힘을 실어주었던 남편과 소망을 주는 딸 이주, 이정 그리고 동생 애정이에게 지면을 빌려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봉일, 이문재, 이영광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학우들, 목동 문우들과 행복을 나누고 싶다. 그리고 힘들 때 벗이 돼주었던 동료 논술 선생님들과 나를 선생님으로 부르는 아이들이 보고 싶다.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면서 희망을 견디기로 한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풍성한 비유로 우리 시대의 삶에 화두 제시
최종심까지 남은 작품은 박도준의 ‘빨대’, 한그린의 ‘어떤 악기’, 최원의 ‘이웃의 중력’, 정지우의 ‘오늘의 의상’이었다.
‘빨대’는 인간에게 죽임을 당하는 새끼 곰에 대한 어미 곰의 모성을 역설적으로 드러냈으나 설명이 지나쳐 시적 형성력을 잃고 말았다.
‘어떤 악기’는 비뇨기과 탁자 위에 꽂혀 있는 ‘오줌 컵’들을 하나의 악기로 파악한 점이 신선하고 기발하나,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신선함과 기발함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 큰 단점이었다.
‘이웃의 중력’은 이웃과 함께 살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의 관계를 투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수작이었다. 보통 그 투명함 속에는 냉소적인 차가움이 있게 마련인데 인간적인 따스함이 돋보여 호감이 갔다. 그러나 타 신문사에 중복 투고한 탓으로 더는 심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된 ‘오늘의 의상’은 풍성한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 시대의 삶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화두를 제시하고 있다. 특정한 모임에 예의상 입고 가는 의상을 일컬어 ‘드레스 코드’라고 할 때 오늘 우리의 삶에도 특정한 의상이 필요하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의상’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 신뢰가 갔다.
이 시는 전체적으로 종교적 은유성을 지니고 있으나 결코 종교성에 함락돼 있지 않다는 점이 또한 큰 장점이었다. 함께 투고한 ‘향신료 상인’이나 ‘발소리를 포장하는 법’ 등도 시인으로서의 앞날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작품이었다.
앞으로 한국시단의 발전을 위해 자기만의 개성이 두드러진 시를 쓰는 시인으로 성장해주길 바란다.
심사 : 황동규·정호승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 정선희
눈동자를 자주 쳐다보는 사람은 언젠가 떠나게 되어있지
눈동자는 또 다른 눈동자를 부추기지 검은 눈동자 흰 눈동자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
하늘에 있는 구름이 눈동자 속으로 흘러들면
그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지
구름이 풀린 사람을 본 적 있니? 흰구름이
검은 구름을 침범한 걸 본 적 있니?
그는 눈동자에 발목을 잡힌 사람,
그의 눈동자는 지금 여기를 보지 않고
언제나 저 멀리 허공을 보고 있지
오래 전 김시습이 그랬고 임제와 김삿갓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세상에 없는 길을 찾고 있지
구름처럼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고 있지
만약 저들 중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당신도 벌써 구름이 선택한 사람,
만약 스튜어디어스나 등반가를 꿈꾼다면
당신은 벌써 구름에 중독된 사람
사람 마음이 열두 번도 더 바뀌는 것도
구름 때문이야
마음을 붙잡고 싶다면
눈동자를 매달아 두는 게 좋을 거야
쉿! 저기 저 구름
조심해!
정선희 시인
44세. 경남 진주 生. 논술학원 운영
[당선소감]
이젠 마음껏 하늘을 쳐다볼 수 있을 것
시는 내게 순간의 진실을 포착한 스냅사진 같은 것. 나는 늘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시는 내 삶을 맑히는 거름망이고 어지러운 내 삶의 발자국이다.
그동안 참 바보같이 살았다. 남들이 다 가는 길 두고 혼자서 멀리 돌아서 가곤 했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고 더러 손가락을 세우기도 했다. 시인이 되었다고 하면 이제 좀 이해해 줄까? 당선 소식을 듣고 무슨 면책특권을 얻은 것 같다.
이제 좀 엉뚱한 행동을 해도 시인이니까 능히 그럴 수도 있겠지…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이상한 안도감. 제일 먼저 남편에게 당선 소식을 전한다.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은 나를 가장 많이 참고 기다려준 고마운 사람이다. 다음에는 시 때려치우라고 구박한 시인 유홍준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다. 자존심 상해서라도 좋은 시 써서 복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공부한 로모 친구들한테도 참 고맙다. 끝으로 이렇게 당선소감을 쓸 기회를 주신 강원일보와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 세상에 자꾸 두들겨 맞다 보니 눈은 가자미눈이 되고 목은 자라목이 되는 중이었는데 “옴매, 기 살아!” 이젠 짧은 목 길게 뽑아 하늘도 맘껏 쳐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심사평]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 언어감각 놀라워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은 20명 100여편이었다. 그중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이주상의 `풍금소리'와 박명삼의 `두타연', 정선희의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이었다.
` 풍금소리'는 전통적인 삶을 소재로 묘사는 뛰어났으나 신선한 현대적 감각이 뒤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두타연'은 주제가 선명하고 묘사는 뛰어났으나 참신함과 현대성이 약했고, 추상적 어휘들이 장애 요소가 됐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눈동자에 살고 있는 구름'은 흔한 소재인 `구름'을 참신한 상상력과 현대적인 언어 감각으로 새로운 시의 가능성이 돋보였다. 시의 생명인 리듬감도 잘 살려낸 것은 물론 개성적 발상이 놀랍고, 아이러니와 위트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다만 시의 마무리가 다소 가벼운 느낌을 준다.
심사 : 이승훈 한양대명예교수·이영춘 시인
2013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떠도는 지붕/ 장유정
바람으로 벽을 세운다.
해와 달을 훈제하는 뾰족한 꼭대기에는 바람의 뚜껑이 있다.
날씨 사이에 계절이 끼여 있는 벌판에
조립식 숨구멍을 튼다.
이것을 바람의 집이라 부르고 싶었다.
예각이 없는 벽,
구겨진 바람을 펴 문을 만든다.
환기창으로 들어 온 햇살은 시침만 있는 시간이 되고
불의 씨앗을 들여놓으면 집이 된다.
집에서 흔들리는 것은 연기뿐이라는 듯
발굽이 있는 흰 연기들이 꾸물꾸물 날아오른다.
한 그루 귀한 자작나무, 벌판의 한 가운데 서서 시계로 운영되고 있다 푸른 지붕은 바람의 소관이다. 반짝거리는 나무의 초침이 다 날아가도 재깍재깍 부속품들만 돈다. 흐린 날에는 시간도 쉰다.
빈집을 알리는 표시가 열려 있다
정착하는 곳마다 그 곳의 시간은 따로 있다
자작나무에 붙은 시간이 다 떨어지면 지붕을 걷고
게르! 하고 부를 때마다 게으른 잠이 눈에 든다.
바삭거리는 시간들이 날아간다.
집은 버리고 벽만 둘둘 말아 트럭에 싣는다.
떠도는 것은 지붕뿐이다.
장유정 시인
1962년 평택 출생. 현재 군포 거주.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 수료. 2007년 경기사이버문학상 입선.
[당선소감]
"시의 공간에 가구 하나씩 들여놓을것"
아무 것도 없이 가구 하나 없는 방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낭랑한 울림, 허허벌판은 텅 비어있음과 벌거벗음, 집의 출발점입니다. 그 나머지는 시간이 다 알아서 만들어줍니다.
2009년 여름, 문예창작학회에서 몽골을 방문했습니다. 상식 없이 따라나선 길, 주먹 크기만한 별들이 쏟아진다는 초원의 지도를 따라가는 버스는 열 몇 시간을 덜컹이며 달려갔습니다.
지친 방문객들에게 별은 깜빡 졸다 놓쳐버린 공연이었습니다. 갔던 길을 되돌아오는 길엔 드문드문 말과 양떼의 무리와 게르! 간혹 건너편으로 오색 무지개가 떴고, 비가 왔고 그리고 맑게 갠 하늘의 노을이 붉었습니다. 끝이 뾰족한 지붕 밑에 누워 아궁이 같은 난로에 불 지펴 잠이 들었습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집을 구성하는 유별난 상상구조를 한 가지 차원이 결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보았습니다. 걸어 올라가고 그에 맞먹도록 걸어 내려오는 행위로 이루어진 수직적 차원이 빠져 있는 계단, 단층뿐인 집.
여행에서 돌아와 숨차게 써내려갔던 시.
정확히 시가 무엇인지 갈팡질팡하는 저에게 '조금만 더'라고 격려의 눈빛으로 일러주시는 김수복 지도교수님, 문학 지도를 펼치며 명작의 길을 안내하시는 박덕규 교수님, 늦은 나이에 '문학공부를 하는 것으로도 그래도 복이다' 하셨던 강상대 교수님, 수업시간에 '이번 생은 실패했다'고 철학적 눈빛으로 항상 물으셨던 이시영 교수님,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으로 예리한 김용희 교수님, 엉뚱함이 좋은 시를 쓰는 데 장점이 될 거라고 말하셨던 박샘, 시의 가지와 살을 냉정함으로 평해주는 혜숙샘, 처음 문학의 씨를 싹트게 해주셨던 경사대 교수님들과 동기들, 빛나는 시인과 작가를 꿈꾸는 대학원 선배님과 동기들, 군포여성문학회 회원들, 사는 것에 항상 촌스러워도 따뜻한 마음을 아끼지 않는 초등학교 오랜 벗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아내의 자리를 불평 없이 보듬어 주는 남편과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나섰던 엄마를 도리어 인정해주는 자랑스러운 아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봅니다. 며칠 전, 두세 개의 보따리를 안고 있는 엄마를 꿈속에서 보았습니다. 지붕을 둘둘 말아 하늘로 가신 지 꼭 일 년 기일. 당선통보를 받고 먹먹했습니다.
미성숙한 제 시 평가에 날개를 달아주신 최동호 교수님과 김기택 시인님께 감사드립니다. 감았다가 풀었다가 감고 감기는 실패처럼 둘둘 말았다가 펴는 시의 공간에 가구며 의자를 하나하나씩 들여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심사평]
"보이지 않는것 읽어내는 힘 돋보여"
본심에 오른 열 명의 작품은 안정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다 저마다 밤을 새운 듯한 치열한 절차탁마의 노력도 보였다.
떨어뜨리는 것이 잔인하다고 느껴질 만큼 그 정성과 노고는 커 보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작품들의 완성도가 자유로운 시 쓰기를 즐기기보다는 경쟁에서 이겨야겠다는 집념으로 자신을 학대하여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였다.
당선작의 모델을 미리 머릿속에 그려놓고 시의 형태와 창작방법과 사유를 그 틀에 억지로 맞추려는 듯한 태도가 여러 작품에서 보였기 때문이며, 어떤 작품들은 같은 사람이 쓴 것처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를 깨뜨리고 시 쓰기를 즐기면서 자유로워져야 남들과는 다른 개성도 나오고 새로움도 나올 수 있다. 창작은 이래야 한다는 경직된 태도는 시 쓰기를 괴롭게 만들고 나아가 호기심과 상상력까지 고사시킬 수 있다.
장유정의 '떠도는 지붕'은 이런 우려를 어느 정도 덜어준 수작이어서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쉽게 의견이 일치하였다. 유목민의 천막집인 게르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은 보이는 것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읽어내는 관찰력이 돋보인다.
게르의 잠재적인 구성 요소인 바람과 시간과 불의 운동을 역동적으로 묘사한 솜씨도 볼 만하다. 하늘과 바람으로 숨 쉬고 자연의 움직임을 읽으며 떠도는 유목민의 자유와 야생의 정신을 집이라는 시공간의 형식으로 구현한 시적 인식도 탄탄하고 믿음직하다. 당선을 축하한다.
박복영의 '골동품 가게를 둘러보다'는 평범한 대상에서 서정적 미적 체험을 이끌어내는 관찰력과 자연스럽고 차분한 어조가 돋보였지만, 상투적인 직유와 동어반복이 많아 긴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했다. 남시우의 '리어카 화단'은 대상에 대한 따뜻하고 긍정적인 시선과 꽃의 이미지를 거리의 풍경으로 변주하는 상상력이 흥미로웠지만 과거를 회상하면서 전개하는 시적 인식과 형식이 상투적이었다.
장서영의 '시소의 빨간 경사는 때때로 무료하다'는 당선작과 겨룰 만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고 상상력도 신선하여 호감이 갔지만, 신춘문예용으로 만든 듯한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은 수준이 떨어져서 신뢰하기 어려웠다.
심사 : 최동호·김기택
201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탑 / 최길하
탑은 탑보다
탑 그림자가 더 좋다
그림자도 그냥 그림자가 아니라
물고기떼 집이 돼주는 물 속 그림자가 더 좋다
물 속 그림자도
뭉게구름 몇 장 데리고 노는
늙으신 탑이 더 좋다
아침마다 마당을 쓸어놓고
등불같은 까치밥 쳐다보는
우리 종손같은 탑이 더 좋다
[당선소감]
제게 불경을 풀어놓은 책이 있는데 그것이 고등학교 교과서인 화학, 생물, 물리 등의 책입니다. 공고 화공과를 졸업하고 그것으로 지금까지 밥도 만들고 글도 만들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참 재미없는 책이 전공이었던 화학이었는데 졸업을 하고 어느 날 헌책방에서 일본사람들이 쓴 갈잎만한 크기의 자연과학문고를 만났습니다. 그 사람들은 물리 수학 화학 천문을 세상 이치와 비교하면서 너무 재미있게 풀어놓았더군요.
<화엄경>이 참 심오하고 좋다고 하여 그것만 터득하면 마음에 환한 꽃밭이 한 마지기 생기는 줄 알고 책을 사서 읽어보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요. 그래도 심심하면 바람이 책장 넘기듯 뒤적뒤적하다 덮고 하기를 몇 십 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 화학책 내용 중에 ‘질량불변의 법칙’이 바로 <반야심경>과 한통에 붙은 배와 등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는 <반야심경> <화엄경>이 엉킨 실 풀리듯 술술 다 풀리는 겁니다.
<법화경> <화엄경>은 자연과학을 은유와 상징으로 세상이치를 말씀하신 자연과학책이었고, 화학 천문 물리 등은 경전에 그려놓은 법계를 수치로 정량계산 할 수 있도록 증명한 경전이었습니다. 가장 큰 발견은 등호(=)입니다. 모든 수학은 좌변과 우변을 평등 즉 균형을 이루게 하라는 것이잖아요. 균형이 되면 정답이고 어느 쪽으로 기울면 오답입니다.
이 세상의 이치인 성주괴멸 이것은 산화와 환원인데 항상 동시에 이루어지며 좌우가 질량불변, 균형을 유지합니다. 요즘 정치사회의 화두가 통합이고 통합의 방법으로 격차를 줄이자는 것인데 층의 높낮이차를 낮추자는 것도 등호(=)의 세상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시조를 쓰고 있습니다. 성을 쌓고 스스로 성에 가두어진 성주와 성 안에 백성이 있는 연방을 바라보면서 소외자가 치고나갈 방편으로 시를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신문사와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것을 약속합니다
[심사평]
“번잡 벗어도 ‘결핍’은 없었다
또 묵은 인연으로 <불교신문> 새해의 시를 만나게 되었다. 500인의 응모작 가운데서 나에게 온 92인의 작품들을 읽기를 거듭했다. 우선 소재의 폭이 넓다.
절간 해우소와 노모의 응가에도 시의 시야가 꽂혀 있다. 쓰레기 분리수거와 환경미화원의 미덕에도 가 있다. 찜질방에도 가 있다. 멀리 아프리카 수단에서부터 스페인 그라나다도 지나친다.
물론 <불교신문> 응모이므로 산사나 불교정서에 발걸음을 상습적으로 하는 것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조쪽이 저조한 반면 자유시 쪽의 역량은 그야말로 당당한 군웅할거(群雄割據)이다. 자유시의 경우 그 지적인 표현능력의 수준이 놀라울 정도였다.
‘월식’은 착실하다. 어머니의 내실 반지고리에 성장과정의 향수가 밀집한다. ‘호미로 새긴 금성모자’ 역시 농경사회의 한 정경이 군더더기 없이 단정한 사상(事象)을 구현한다. ‘농점 6호’ 역시 벼농사의 첫 사례가 정교한 공감을 자아낸다. 농업적 지성이 여기에 있다. ‘궁극의 시간’은 청각언어의 묘미를 재미나게 살리고 있다. 우리말의 의성어로 궁극의 의미를 포착하는 재치가 있다.
‘탑’은 번잡을 다 벗어나 있다. 그렇다고 결핍은 눈에 띄지 않았다. 단호하고 단정하다. 참 경지가 엿보인다. 다만 이것과 다른 작품의 수준에 차이가 나서 이것이 의외적이다. ‘노도서신’은 서포 김만중을 통한 강개가 절절한 궁중언사가 묘미를 더한다. 유장하다. ‘둠벙에게 물어봐’는 고향에서의 유년체험이 성숙한 의식에 대해서 근본에의 환원을 일깨운다. 시다운 시다.
‘배꼽이다’는 이만한 현실감각에서의 깊은 자의식은 기성시단에서고 귀중한 현상이다. 하지만 의식의 노출이 감동보다는 충돌하는 기호의 역설에 기울어지고 있다. 이런 나머지 ‘탑’으로 당선작을 삼는다. ‘둠벙…’과 ‘배꼽…’이 아깝다. 내 마음으로는 셋을 한꺼번에 뽑고 싶었다.
심사 : 고은(시인)
2013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고로쇠 옆구리 / 김정애
뚫어야만 다스려지는 상처가 있다
뭉툭한 옆구리에 핏물을 가두고
거친 호흡으로 살아가던 나무가
잎사귀의 언어로 조용히 말을 걸어올 때
꿈의 밑동에서 올라오는 것이 있었다
세상에 저문 울음들을 끌어안고
복수腹水를 다스리는
노모의 시간
살갗 밑으로 가는 뿌리가 자라나고
산을 들어 올릴 듯 무거워진 몸으로
때론,
내 것의 체취도 조금은 빼내고 살자며 옆구리를 들춘다
콸콸콸 쏟아내는 물속에는
어머니의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이 우러나 있고
혈관을 따라 울려 퍼지는 피의 음악이 스며 있어
꿀떡 삼킬 순간을 놓치고 숲에 안겨본다
바람을 휘저으며 폭포를 향해 뻗어가던 기상과
쇳물을 다스리는 철의 여인 같던 고집이
명치 한복판을 뚫고 뼈의 무늬로 흐르고 있다
우글거리는 잎사귀를 향하여
응달을 다스리고 있다.
김정애 시인
여수출생. 방송통신대 국문과 졸업, 여수화요문학회 회원. 여수해양문학상 (2009년), 하동소재 문학상 (2009년) 등
[당선소감]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을 밝혀주는 새해 첫날 같은 시 쓰고 싶어"
한 그루 나무가 제 가슴속에 부리를 묻고 있는 아침, 옆구리를 들추는 노모는 싱싱한 잎사귀를 어루만지며 가슴속에 살고 있는 바람들을 놓아 주고 몸을 바꾼다.
오래 쳐다 본 그 나무, 그늘을 베풀어 주고 답답할 때 말 걸어 주던 그 나무,
나무가 새의 몸을 빌려 울듯 노모의 몸을 통해 더욱 단단해진 뼈의 무늬를 만들면서 어둠을 다스렸고 생각이 깊어지고, 가슴에 멍이 든 이름들을 불러 보았고 이른 봄날 혼자 착해지기도 했다.
미칠 듯 기억 하나 꺼내 들고 물소리보다 먼 세월을 바라보는데 쉼 없이 어루만졌을 물의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혀있다. 물살의 굳은 흔적으로 깊은 한숨과 불면의 시간들을 밝히고 오랜 응달의 시간을 다스리는 새해 첫날 같은 시를 쓰고 싶다.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가는 이웃 같은, 그래서 더욱 살가운 시를 쓰고 싶다.
생각나는 얼굴들이 많다.
빈약한 시를 올곧게 붙들어 주신 심사위원님, 방향 없이 헤매는 것들을 가능성으로 옷 입혀주신 스승님, 시 쓰기에 한 없이 게으르다 싶으면 울컥 해질 때까지 껴안아주고 함께 위로 받던 문우들, 청춘의 소리를 가슴으로 새겨듣겠다는 소리와 민철, 가까이 있으면서 먼저 좋아하고 기뻐하는 가족들이 겨울햇살처럼 환하게 다가온다. 쓰자마자 휘발되는 것 말고 뭉근히 피어나는 시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볼 참이다.
[심사평]
올해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투고된 작품수는 400 여 편이 조금 넘었다. 전국 각지에서 응모한 120여 명의 예비 시인들의 작품을 읽는 일은 흥미롭고 긴장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투고된 작품들은 아직도 시가 개인적인 고백의 양식이라고 생각하거나 낭만적인 감정의 표출 정도로 생각하는 구태의연한 시들이 많았다. 또한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도 대체적으로 발상 자체가 보편적이거나 산문적인 경향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보게 하는 경험을 선사해준 좋은 시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적 세련미나 시적 완결성보다는 시적 치열성과 참신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란 삶과 현실에 대한 성찰과 열정의 산물이다. 시적 치열성이 없이는 좋은 시가 나올 수 없다. 사소한 일상에서 구체적으로 시를 발견하는 시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좋았다.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최재호의 '자두나무 변성기', 김재홍의 '빈센트 반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 김정애의 '고로쇠 옆구리' 였다.
세 작품은 모두 시적 역량이 뛰어나고 다년 간 습작기를 거친 흔적들을 느낄 수 있었다. 우선, '자두나무 변성기'는 꽃 피는 자두나무와 사춘기 소년를 비유한 작품으로 감성이 풍부하고 '햇살 한 무리 잉태한'이라든가 '우람한 목피 속에 바람의 숨결' 같이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세련됐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의미구조가 모호하고 주제의 응집력이 약하다는 것이 흠이었다.
그리고 '빈센트 반고흐의 낡은 구두 한 켤레'는 고흐의 그림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작품이다. 낡은 구두를 통해 삶의 애환과 삶의 무게로 인한 고통를 노래하고 있는데, 그림이 주는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였다. 또 시상을 끌고 가는 힘이나 언어 구사력은 뛰어난데 알맞은 내용을 알맞은 분량으로 압축하는 절제의 미덕이 아쉬웠다.
마지막으로 '고로쇠 옆구리'는 고로쇠 나무를 '세상에 저문 울음을 끌어안고' 살아온 어머니의 삶에 비유한 작품으로 자신의 삶의 주변에서부터 우러나온 경험을 형상화하는 시적 능력이 뛰어났다. 평이한 시어로 삶에 대한 깊이을 들어내는 깊은 안목을 가지고 있으나 마지막 부분에서 긴장이 좀 풀린 감이 있었다.
이 세 작품을 갖고 숙고한 결과 최종적으로 김정애의 '고로쇠 옆구리'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구조의 완결성 면에서 다소 부족한 점은 있지만 함께 응모한 '섬진강을 굽다'와 '꽃잎을 번역하다'에서 보여준 뛰어난 언어감각과 사물과 삶에 대한 이면을 성찰하고 탐색하는 태도가 녹록하지 않음을 높이 평가하기로 했다. 좋은 시를 당선작으로 뽑게돼 기쁘다. 보다 치열하게 정진하여 한국문단을 빛내는 좋은 시인이 되길 바란다.
끝으로 최재호, 김재홍 두 분께도 격려를 보내며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심사 : 김경윤(시인·광주·전남작가회의 회장)
2013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말(馬) / 정와연
수선집 사내의 어깨에 말의 문신이 매어져 있다
길길이 날뛰던 방향 쪽으로 고삐를 묶어둔 듯
말 한 마리 매여 있다
팔뚝에 힘을 줄 때마다
아직도 말의 뒷발이 온 몸을 뛰어다닌다
고삐를 풀고 나갈 곳을 찾고 있다는 듯 연신 땀을 흘린다
저 날리는 갈기를, 콧김을, 이빨 드러내는
투레질을 굵은 팔뚝에 가둬두고 있다는 것을
저 사내 알기나 할까
어쩌면 질풍노도의 시절에 스스로 마구간을 짓고
지독한 결심으로 고삐를 매어두었을지도 모른다
말은 복종하는 발굽과 항거하는 발굽이 다르다
앞발을 굽힐 때 뒷발은 더 빡세게 버티는 법이다
어느 뒷골목의 시간들을 붙잡아
사내의 안쪽을 향하게 단단히 묶었으나
꿈틀거리는 역마살이란 언제까지 갇혀 있을 발굽이 아니다
비좁은 마방에서 수년 째 구두를 깁는 일이
자못 수상하기까지 하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偶然)이 있다면 그것은 다 길의 파본이다
발굽을 갈아 끼울 때마다 사내는
박차고 나가려는 팔뚝의 불뚝한 말을 오래 쓰다듬듯 주무른다
이제야 말 한 마리를 다룰 줄 안다는 듯
말과 주인이 따로 없다는 듯이
정와연 시인 (본명 정길례)
1947년 전남 화순 출생.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당선소감]
젊은 정신으로 세상을 보겠습니다”
젊은 시를 공경하며 사는 일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잘 타일러 멀리 보내버렸습니다.
왜 나이를 먹어갈수록 우둔해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가장 믿는 것은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우둔함을 믿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정하고 갈 뿐입니다. 젊은 정신으로 사물을 보겠습니다.
꿈을 현실로 바꿔놓은 전화 한 통은 실로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떨리고 겁이 났습니다. 몸을 흔들어 정신을 차려봅니다.
이토록 멋진 장을 열어주신 영남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리며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저의 글을 뽑아주신 이하석 선생님, 송재학 선생님께 진심어린 큰절 올립니다. 이제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온 힘을 다해 걸어가겠습니다.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님과 여러 선생님 감사합니다. 등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버팀목이 되어준 남편, 시 쓰는 엄마가 자랑스럽다는 세 딸, 음악활동에 열중인 아들(나무)의 원대한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 끝으로 이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심사평]
명쾌한 논리와 탁월한 언어감각
자신만의 ‘감각의 통점’ 짚어내”
장유정씨의 ‘나무 옮겨 심는 법’, 정와연씨의 ‘말’, 김묘숙씨의 ‘편자꽃’, 이인숙씨의 ‘모자이크’ 등이 우리가 마지막까지 읽은 작품들이다.
본심에 올라온 수십 편의 시들은 그 내부에서 서로가 서로를 카피한 혐의가 있다. 원본은 사라지고 카피본들의 베껴쓰기가 다반사로 이루어진 세간의 형편과 다르지 않다. 수사와 기교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했다는 점은 위안이지만, 카피의 스펙트럼이 광범위하기에 이번 심사는 곤혹스러운 체험이다.
본심의 작품들은 대체로 비슷한 감각의 폴더를 공유했다. 어떤 책의 감동이 블로그를 통해 흔적처럼 남겨지고, 이후 같은 책을 읽은 사람은 앞선 사람의 블로그를 거치면서 비슷한 감정을 공유한다.
음악도 영화도 같은 폴더라는 소비패턴을 반복한다. 그것은 또한 감각에서조차 트렌드를 생산한다. 즉, 문화의 접점이 개별적이지 않다는 비효율성을 생산한다. 문학의 본질이 사유의 진보와 확장이라는 점에서 문학은 필사적으로 개별이자 개성적이어야 한다. 숭고미가 있다면 추악한 아름다움이라는 대구(對句)의 필연성이 문학의 범주다.
문학은 대상과의 적절한 타협이 아니다. 필경사가 철필로 새겨가는 심정으로 처절하게 모든 것들의 바닥까지 내려가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저잣거리에 널리 유통 중인 수월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직 자신만이 가진 ‘감각의 통점’을 짚어내는 것이 문학이다.
장황해졌지만 그런 점에서 정와연씨의 ‘말’은 다소간 독보적이다. 게다가 명쾌한 논리성과 우월한 언어 감각에 기대고 있다. 당선작 ‘말’은 구두수선공의 어깨 문신에 주목한 작품이다.
문신 속의 말(馬)은 수선공의 내면과 수작하면서 수선공이라는 개별적 삶의 문어체를 획득한다. “닳고 닳은 뒤축을 깁는 일”과 “말의 박차를 박는 일에 우연이 있다”는 두 갈래 상상력을 길의 파본이라 파악하는 삶의 성찰성에 우리는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그의 다른 작품 ‘의태 계절’과 ‘샌들의 감정’에서도 독특한 감각이 드러난다. 그 두 작품은 ‘말’보다 더 풍요로운 문학 생태를 드러낸다.
신춘문예 당선이 일희일비가 아니라 행복한 감정이 되려면, 오랜 훗날에도 진정성을 유지하는 시인이어야 할 것이다.
심사 : 이하석, 송재학
2013년 영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목련꽃 지다 / 권행은
저 집, 독거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목련꽃 져 내리고
조문하듯 비가 지난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허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 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
툭, 떨어질 때
공기가 잠시 출렁했을 뿐
저 꽃은 첫 번째 고백부터
쪽방 밑에 버려진 마이너리티
뒤척이는 바람이
한 계절 백발이 성성하던 꽃의 외로움을 뒤집고
풍문처럼 누르스름하게
해묵은 발자국도 잠시 석양에 문지른다
한 때 속절없이 눈부시던 봄빛에
하얗게 저항하던 그녀의 몸짓을
그 누가 아름답다고 했을까
붓을 들어 마지막 유서를 쓰듯
혼신으로 써내려간 꽃의 낙화를 안다면
어둑어둑 밤의 담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내리는
한 장 어둠이 이불인
저 독거의 노추老醜를 함부로 밟지는 못할 것이다
권행은 시인
1962년 전남 광양 출생. 2006년 미네르바 신인상.
[당선소감]
원고를 보내던 그날은 하늘 보자기가 풀린 듯 함박눈이 쏟아졌습니다. 하늘도 무언가 쏟아내고 싶은 말이 있었을까요? 조곤조곤 하늘의 하얀 말씀을 들으며 돌아오는 길이 미끄럽지만은 않았습니다. 올해 신춘은 어쩌다 보니 주요 일간지의 마감일을 놓치고 포기하고 있었는데, 동인들 덕에 마감일 전날에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당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번에는 눈발이 쌀밥처럼 부풀다가 한 줄 물이 되어 주루룩 흐릅니다. 모자라는 시를 선하여 빛을 보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손 모아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포기하고 싶을 때 말없이 응원해준 남편과 아이들, 늘 웃음으로 격려해주던 친척들과 친구들, 시의 열정으로 한 식구가 된 아바동인들, 그리고 뒤늦게 시의 길로 인도해주신 문효치 선생님과 박남희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하늘이 어두울수록 별은 더 밝게 빛납니다. 시는 저에게 길을 밝히는 별이자 빛입니다. 빛을 잃은 별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아 겨울 숲의 나무들에 매답니다. 제 우듬지의 빙점을 통과하며 아름다운 눈꽃 세상을 만드는 나무들, 그 신비한 찰라 속에서 나무들의 인내를 배우며 낮은 걸음으로 시를 통하여 세상과 만나고 싶습니다.
[심사평]
삶의 진정한 피투체로서의 시
겨울 들어 내린 대설이 다음해에 풍년이 들 것을 예고하듯, 이번 영주 신춘문예에 투고된 만만찮은 분량의 수작들을 접하면서 우리 시의 밝은 미래를 예감하게 된다.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분포된 투고자들은 이 신춘문예의 위상과 공신력을 말해주는 한편, 새삼 우리 사회에 시인 지망자들의 폭이 넓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어 마음 든든하다.
이같이 전국에서 답지한 많은 응모작들 가운데서 당선작을 가려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열을 가려야 하는 신춘문예의 성격상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의 서기 위한 탄탄한 레토릭과 공감대를 넓게 하면서 주제를 이끌어가는 힘 등에 우선 주목하였다. 하지만 기교를 위한 기교나 작위적인 면이 지나친, 이른바 공모 제도에 병폐를 노정하고 있는 작품들에는 눈길을 빼앗기지 않는 데 유의하였다.
이번에 공모된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우수함에도 불구하고, 최근 공모 제도에 횡행하는 낯선 소재 선택 및 지나치게 작위적인 레토릭 구사에 치중한 시편들이 적지 않았다. 시는 무엇보다 진정한 삶에 바탕하여야 하며, 지나침이 없이 시인이 염두에 둔 주제에 걸맞는 수사를 강구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경향에 편승하기보다 더욱 삶의 진정성을 추구하면서 그에 어울리는 수사가 강구된 시편들을 찾는 데 주력하였다.
그 같은 고심의 결과 장고 끝에 손석만 씨의 「사월」과 권행은 씨의 「목련꽃 지다」가 선자들의 손에 끝까지 남게 되었다. 「사월」은 예전에는 풍성한 호수였으나 지금은 물이 말라버린 타클라마칸 사막을 둘러싼 드라마를 알레고리로 하여 우리네 삶에 내재된 삶의 삭막함과 그로부터 일탈하고픈 욕망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눈썹 깜박거리는 모반을 꿈꾸는/ 이 모래먼지는 우주의 피부다’ 등의 구절을 통하여, 모래먼지로 상지되는 무소유의 정신이 현대를 새롭게 하리라는 사유를 펼쳐 보이고 있다.
「목련꽃 지다」의 경우에는 독거노인의 삶을 둘러싼 생의 비의를 ‘목련꽃’을 환유로 하여 풀어낸 작품이다. 오늘 우리 사회가 앓고 있는, 물질적 풍요에 역행하는 비인간화의 풍경을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 가운데 선명한 이미저리와 함께 제시하고 있다. 또한 낯선 수사를 찾아내는 데 골몰하지 않고, 목련의 눈부신 개화와 쇠락을 새로운 눈으로 들여다보고 있는 점에 눈에 띈다. ‘꽃은 새의 깃털처럼 하공에 기대었을 때에도/ 신의 영역을 탐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인지/ 맨땅에 누워 듣는 하늘의 말씀이 희다’는 대목에 보이듯, 비록 육신의 쇠락은 어쩔 수 없이 맞았지만 내면에 간직한 영혼은 깨끗하다는 사유가 잘 녹아 있다.
두 작품이 다 일장과 일단을 갖고 있다는 데 선자들은 동의하였다. 앞의 작품은 소재의 신선함과 잘 다져진 수사가 선뜻 눈길을 끄는 반면에, 추체험만에 바탕하여 구축한 사상의 전개와 다소 작위적인 수사가 마음에 걸렸다. 권행은 씨의 작품은 명징한 이미저리의 구사를 바탕으로 한 수사와 공감대가 넓은 주제의 구현이 강점이지만, 다소 다양하지 못한 시상의 전개와 결구의 미진함이 엿보였다. 선자들은 두 사람의 여타 투고 작품들을 함께 검토한 끝에 권성은 씨의 작품들이 고른 수준을 견지하고 있으며, 흔히 신춘문예 응모작들이 노출하기 쉬운 상투적인 골격에서 벗어나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아 그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기로 합의하였다.
결선에서 함께 논의된 몇몇 작품들도 선자들의 손에서 놓기가 아까웠다. 정순 씨의 「빈 통장 같은 오후」는 디지털 세상이 노출하고 있는 비인간화와 과소비의 문제를 실감있게 다루고 있으나 좀더 치밀한 수사의 강구가 아쉬웠다. 주대생 씨의 「태안 검은 얼굴 앞에서」는 서해 오염 문제를 소재로 삼아 시상을 전개하고 있지만, 보다 폭넓은 환기력과 적절한 수사가 요구되었다. 김창호 씨의 「감기」는 신선한 이미저리의 처리가 일품이지만 소재의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주제의 모호함이 지적되었다.
이상 결선에서 논의된 작품들은 당장 기성 시단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역량을 보여주어 선자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분발한다면 어느 지면을 통해서든 우리 시단의 일원이 될 역량을 지닌 이들이니만큼 더욱 정진을 게을리 하지 말기 바란다. 아울러 어려운 관문을 통과한 당선자에게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리며, 더욱 정진하여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시단의 일가(一家)를 이루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심사 : 변종태(시인), 박몽구(시인․문학평론가, 글)
2013년 동양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낮잠 훔쳐보기 / 양성숙
달아나려는 바쁜 오후가 아기의 손에 잡혔다
오가는 발소리 배달하는 오토바이도 옴짝달싹못한다
허공을 말아 쥔 채 공기까지 부여잡고,
요람 속에 깊숙이 빠져든 아기가
놔줄 기미 보이지 않자 풀 죽은 오후가 잠잠하다
찬찬히 탐색하는 눈길을 아는지
아기입술에 꼬리가 생겼다 사라진다
살짝 벌어진 살구꽃잎에 나른한 웃음이 고여있다
이백팔십일간의 비밀을 가득 담고 깊게 잠든 손
내막이 궁금한 커다란 손이 얇고 투명한 손가락을 열면
움츠러들며 더 힘껏 말아 쥐는 아기의 손
나팔꽃처럼 오무라든 주먹이 숨겨 논
아기의 비밀을 가만가만 펴보니
저항 없이 하나씩 하나씩 열리는 아기의 손
돌돌말린 하얗고 긴 먼지가 살포시 누워있다
하얀 손수건이 조심조심 아기의 비밀을 캐내자
고스란히 따라 나오는
아기의 내력이 기록된 솜털뭉치들
천천히 한 올 한 올 닦아내면
다시 순서대로 접히는 미모사 같은 아기 손가락
작정하고 한 번 으깨보고 싶은 큼지막한 손이 꼬옥 감싸자
깨끗하고 까만 눈이 활짝열린다
그제야 정보가 누출된 것을 알았는지 맑게 웃는다
악착같이 감추지 못한 아기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공범을 밝히려 손을 뻗자
아기에게 잡혀 들통 날까 안달 난 오후가 재빠르게 달아난다
낮잠 속에서 깨어난 아기, 몸을 늘린다
양성숙 시인
1968년 서울 출생. MERIX 학원 원장. 시마패·숲 동인회 회원
[당선소감]
“내게 시는 풀고 싶은 실타래”
무척이나 시끄러운 거리에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대선홍보차량, 서울시교육감재선거 홍보차량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소리들이 짜증날 때 즈음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제 이름을 확인하고 시가 당선되었다는 선명한 목소리에 순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순해졌습니다. 마음이 너그러워졌습니다. 웃음이 입을 넘쳐흘렀습니다.
제게 있어 시는 안 풀리는 실타래였습니다.
잘 풀리지 않는 실타래였기 때문에 항상 제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실타래를 풀기 위해 오늘밤도 자판위에 공손히 두 손을 올려놓을 것 같습니다.
이 기쁨을 알리기 위해 당선 소식 듣고 제일 먼저 전화 드렸더니 젊잖게 큰소리로 축하해주신 김기택 선생님과 항상 얄미운 자극을 주신 이명우님, 그리고 시마패 문우님들, 마경덕 선생님, 숲동인님들과 옆에서 열심히 응원해준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해주는 가족들과 이 즐겁고 행복한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더 열심히 실타래를 풀어보라고 등을 토닥거려주시고, 맘껏 제 실력을 펼쳐보라고 넓고 푸른 초원을 제게 주신 동양일보와 정연덕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심사평]
따뜻한 숨결로 생명을 노래
심사위원에게 넘겨준 작품은 75명의 작품 403편이었다. 예년에 비하여 높은 수준’의 작품들이 많았다. 산문적 기법을 도입하여 시의 진술방법을 확장하려는 산문시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또한 고등학생들의 응모작품도 늘어나고 그 수준도 많이 향상되고 있음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응모작 중에는 깔끔한 소품 같은 작품도 눈에 띄었지만 하이퍼 시(?)를 빙자한 난잡한 시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남아 우열을 겨루었던 작품을 보면 이명선의 ‘정류장을 떠나오다’와 양성숙의 ‘낮잠 훔쳐보기’ 그리고 이현정의 ‘손바닥 유전’이란 작품이었다.
이명선의 ‘정류장을 떠나오다’는 발랄한 감수성이 돋보이고 있으나 표피적인 일상을 뛰어넘지 못한 작품이었고, 이현정의 ‘손바닥 유전’과 ‘뉴킨’ 그리고 ‘자국의 내력’의 작품들 모두가 발상이 디지털시대의 시로 하이퍼성 작품으로 분류되지만 낯설게 하기와 건너뛰기가 아닌 해석에 치우치고 있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양성숙의 ‘낮잠 훔쳐보기’란 작품은 정감과 생기가 있는 시어를 찾아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모성과 아기의 호흡이 하나로 활기를 찾고 있는데 침착한 관찰과 욕심 없는 묘사가 읽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주기 않고 생명의 신비와 존엄성을 느끼게 한다. 기교 없이 긴장을 끌고 나가는 솜씨가 돋보이고 있다. 또한 표피적인 상황 전개, 과대한 묘사나 상투적인 어휘에 매달리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앞으로 절제된 자기 목소리 내기, 관념의 탈출을 통한 사물시 쓰기에 더욱 정진해 주기를 바란다. 응모자 여러분들에게 격려를, 당선자에게 축하를 드린다.
심사 : 정연덕 (시인)
2013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섬, 이유 / 김유경
이 섬에선 사람이 죽으면 바람에 묻는다
그건 섬의 풍토병 같은 내력이어서 여자는
바다로 떠나 돌아오지 않는 아비의 아이를
박주가리 씨앗처럼 품은 채 바람에 묻혔다
은행나무가 여자의 무덤이며 묘비명이었다
남은 여자들이 제 주검을 보듯
길게 울다 돌아갔다, 섬에서 여자가 죽으면
살아서 뜨겁고 애달팠던 곳이 먼저 젖는다
바람은 젖어 있는 것부터 시나브로 말린다
소금에 간이 밴 깊이를 모두 말려
눈물의 뿌리가 마른 우물처럼 바닥을 드러내면
영혼을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바람의 법이다
하루 두 번 물마루 끝이 어물어물 붉어지고
꼭 쥐고 있던 바람의 손아귀가 스르르 풀리면
섬은 귀를 열고 듣는다, 먼 바다에서 들려오는
돌아오지 않는 아비들의 빈 배가 웅웅 우는 소리를
죽은 여자는 그 소리에 기대어 바람 몰래
혼자서 아이를 키운다, 뭉텅뭉텅 사라지는 몸에서
눈동자는 빛을 잃고, 머리칼은 제멋대로 자라나온다
아이를 품은 움 같이 보드라운 궁륭, 그 곳에선
바다 밑바닥에서만 나는 해초 내음이 나날이 짙어졌다
마침내 바람이 여자를 온전히 데려갈 때
죽은 여자는 아이를 은행나무 잎 속에 묻어두고
떠난다, 홀로 누워 있었던 자리에
노란 은행잎이 수북수북 쌓인다, 가을 한 철 내내
바람의 장례가 제 열매 다 익도록 잎을 물들이지 않는
은행나무의 사랑 같은 것인지 아무도 몰랐다
바람이 먼 바다 부표를 향해 치솟아 올라 길을 잡고
여자의 푸른빛 인광은 그리운 바다를 향해
따뜻하게 흘러간다, 아이는 그 바다 어디쯤에서
돌아오지 못한 제 아비를 그대로 빼닮았지만
섬도 바람도 그 아이를 알아보지 못했다.
김유경 시인
1985년 경남 창원 출생. 부산대 사범대학 졸업. 경남대 교육대학원 재학. 현재 경남신문 문화부 기자.
[심사평]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상식으로 굳어져 최초의 경이를 상실해버린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삶과 사물에 대한 실감을 끌어올 수 있을까.
예심과 본심을 겸한 1차 심사를 거쳐 오른 작품들은 시 장르 고유의 구심점을 향한 몰입과 그로부터의 탈주로 크게 구별되었다. 서정성에 충실하였으나 새로운 모험의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 작품들 그리고 과잉된 탈주의지로 설명적인 산문투들이 먼저 제외되었다. 조립은 잘 되었으나 맥이 빠져 시적 울림에 실패한 작품들 또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최종심에 오른 것은 박다닌, 최희명, 김유경 세 사람의 응모작이다. 우선, 박다닌은 소외된 삶을 조명하는 따듯한 시선에 호감이 갔으나 이미지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고리가 작위적으로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최희명과 김유경의 작품을 들고 팽팽한 긴장 속에 심사를 이어갔다. 최희명은 '고려인 집성촌'이라는 무거운 오브제를 절제된 감각으로 구조화하는 솜씨가 녹록잖았다. 견고한 형식미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오히려 그 형식미가 시상의 확장을 방해한다는 의견이 있었다.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주제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길어올리는 김유경의 시는 시상을 끌고 가는 기량에 있어서나 시어를 낯설게 만드는 방식에서 단연 돋보였다. 넘치는 수사의 욕망에 절제가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으나 서사를 내장한 이미지들의 날렵함이 그 흠을 오히려 더 빛나게 하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함께 보내온 작품들의 고른 수준도 신뢰감을 주었고, 무엇보다 시 너머에 대한 지향을 통해 고정된 형식을 뒤흔드는 신인다운 패기가 압도적으로 다가왔다.
장고 끝에 김유경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뽑는데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합의를 보았다. 이 새로운 시인이 시 장르만의 특장을 고집스럽게 파고들어 가면서도 그 너머를 사유할 수 있는 무서운 신인으로 성장하길 바란다.
심사 : 허만하, 최영철, 손택수(이상 시인)
2013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네팔상회 / 정와연
분절된 말들이 이 골목의 모국어다
춥고 높은 발음들이 산을 내려온 듯 어눌하고
까무잡잡하게 탄 말들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는 골목을 만들고
늙은 소처럼 어슬렁거리는 휴일이 있다
먼 곳의 일을 동경했을까
가끔은 무명지 잘린 송금이 있었다
창문 없는 공장의 몇 달이 고지대의 공기로 가득 찬다
마음이 어둑해지면 찾는 네팔상회
기웃거리는 한국어는 이국의 말 같다
달밧과 향신료가 듬뿍 배인 커리와 아짜르
손에도 엄격한 계급이 있어 왼손은 얼씬도 못하는 밥상
그러나 흐르는 물속을 따라가 보면
다가가서 슬쩍 씻겨주는 손
그쪽에는 설산을 돌아 나온 강의 기류가 있다
날개를 달고 긴 숫자들이 고산을 넘어간다
몇 개의 봉우리가 창문을 두드린다
질긴 노동이 차가운 맨손에서 목장갑으로 낡아갔다
세상에는 분명 돌아가는 날짜가 있다는 것에 경배,
히말라야줄기를 잡아끄는 골목의 밤은
왁자지껄 하거나 까무잡잡하다
네팔 말을 몰라 그냥 네팔상회라 부르는 곳
알고 보면 그 집 주인은 네팔 사람이 아니다
돌아갈 날짜가 간절한 사람들은 함부로
부유하는 주소에서
주인으로 지내지 않는다
정와연 시인(본명 정길례)
1947년 전남 화순 출생. 숭의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당선소감]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아"
꽁꽁 언 날에 훈훈한 전화 한 통을 받습니다. 마음은 화끈 달아올랐으나 몸은 덜덜 떨고 있었습니다. 한참을 서성거렸습니다. 아, 이런 기분이구나, 이런 날이 내게도 오는구나,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이쯤에서 돌아설까 하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기쁜 소식이 전해지려고 그랬을까요. 세상이 달리 보였습니다. 젖은 땅에 달라붙은 낙엽을 보며 행복했습니다. 빙판길에서도 여유가 생겼습니다. 마음을 비운 자리에 긍정의 힘이 솟았습니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날마다 감탄하며 살아간다는 어느 노인의 말이 실감 나는 한 해였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당선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마음이 급변해 요동을 쳤습니다.
먼저 부산일보사에 감사를 표합니다. 아직 많이 부족한 글을 뽑아 주신 심사위원들께도 큰절을 올립니다. 갈팡질팡하는 길목에 주단을 깔아 주셨습니다. 그 길로 선뜻 들어서기가 왠지 두렵지만 들어서렵니다. 주단이 끝나는 지점에는 더 높은 갈래의 길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열심히 찾아가겠습니다.
큰 도움 주신 숭의여대 강형철 교수님, 김양호 교수님, 박상률 교수님, 전기철 교수님께 감사 드립니다.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마경덕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 고맙습니다. 문우들과도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묵묵히 지켜봐 준 존경하는 남편 김종갑 씨, 시 쓰는 엄마가 멋지고 자랑스럽다는 세 딸 명륜 소나 안지, 아들 재환 모두 모두 사랑합니다.이 무한한 기쁨과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립니다.
[심사평]
"세상의 관절염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
나와 너, 나와 우리, 나와 세상 사이에 관절염이 심한 시대에는 통증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언어의 직녀나 기존의 형식을 개성적인 칼로 쳐내는 새로운 검객이 필요하다. 때문에 시력과 시세계가 각각 다른 심사위원들의 눈에 띄는 직녀나 검객은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라 내공의 깊이였다. 안타깝게도 용감하게 수사의 촘촘한 그물망을 벗어나 검을 날리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고 드문드문 보이는 축에도 문장과 문장을 뛰어넘는 검법에 개연성이 부족했다.
'맥문동 재봉골목'은 예쁘고 앙증맞은 묘사의 보폭이 너무 조심스러워 골목을 벗어나 골목 밖의 세계를 아우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나스카라인'은 대상을 도형화하는 섬세한 솜씨에 깊이 치중하여 도형을 그리는 이유를 상실하지 않았나 싶었다. 그것은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나 언어의 숙련을 제고해 봐야 할 것 같다. 당선작으로 합의에 이른 '네팔상회'는 영리한 작품이다. 관계의 관절염을 앓는 시대를 인식하는 깊이와 언어를 직조하는 내공, 표현하고자 하는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시작점을 찍는 노련함은 유려하게 흘러 과장되지 않게 세상의 관절염을 어루만지는 숙련된 직녀로서 심사위원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다. 그 영리함에는 안전을 보장해 주는 기존의 직조법을 거듭 재탐색할 것이라는 자세도 포함해 주기로 한다.
심사 : 오탁번•강은교•조말선
2013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쇼펜하우어 필경사 / 김지명
안개 낀 풍경이 나를 점령 한다
가능한 이성을 다해 착해지려한다
배수진을 친 곳에 야생 골짜기라고 쓴다
가시덤불 속에 붉은 볕이 흩어져 있다
산양이 혀를 거두어 절벽을 오른다
숨을 모은 안개가 물방울 탄환을 쏜다
적막을 디딘 새들만이 소음을 경청한다
저녁 숲이 방언을 흘려보낸다
무릎 꿇은 개가 마른 뼈를 깨물어댄다
절벽 한 쪽이 절개되고
창자 같은 도랑이 넓어진다
사마귀 날개가 짙어진다
산봉우리 몇 개가 북쪽으로 옮겨간다
초록에서 트림 냄새가 난다
밤마다 낮은 거래 되고
낮이 초록을 흥정하는 동안
멀리 안광이 흔들린다
흘레붙은 개가 신음을 흘린다
당신이 자서전에서 외출하고 있다
김지명 시인
1960년 서울 출생. 논리논술 강사
[당선 소감]
꿈 높이 구두를 갈아 신은 아침 같았다. 불현듯 다가온 당신이 동굴 밖에 인형 하나를 그리며 소란했다. 당신의 소리 없는 노래를, 안무 없는 춤을, 감정 없는 사랑을, 동굴 속 어둠을 빌려 수없이 적었다. 당신과 내가 짝짝이 신발이란 걸 알아차린 어느 날, 당신은 떠났다. 당신을 그리워하는 것이 호흡인 나날을 보냈다. 불안은 짐승 여럿이 사는 움막에서 동거했다. 침묵으로 수태 기간을 보내고 당신을 찾아 나선다. 당신이 날 알아볼 줄 알았다. 꿈 높이 구두로 능동의 영토에 첫 발자국을 만든다. 이제 또 다른 불안을 내 허파에 기른다.
모험할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멀리 볼 수 있는 안목과 죽음을 담보로 시작에 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신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무작정 시를 좋아하던 설렘을 어깨 힘줄로 길러 준 선목문학회, 에이스동인 혜경, 정현, 성진에게 고마운 마음 전한다. 끝으로 오랫동안 후견인으로 지켜봐 준 남편과 딸에게 기나긴 고마움을 표한다.
[심사평]
해마다 시 쓰기 열정 많아 향후 발전 가능성에 무게
예심을 통과한 열네 분의 작품들을 선자들이 숙독하고 논의했으나, 아쉽게도 올해엔 한눈에 띄는 당선작을 찾지 못했다. 전반적으로 일정한 수준의 기본기는 갖췄으나, 그 ‘너머’에 이르도록 끌고 가거나 들어 올리는 힘을 내재한 시편을 찾아내기란 꽤나 지난한 일이었다. 그러한 추동력이란 삶을 바라보는 서정적 진정성의 관점에서는 물론이려니와 언어 자체가 직조해내는 미묘한 ‘아우라’를 통해서도 발현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최종적으로 네 분의 작품들이 집중 숙고되었는데, 김지명의 ‘쇼펜하우어 필경사’, 지연식의 ‘가금의 서’, 박은선의 ‘흔적 하나’, 이도은의 ‘엄마는 외계인’이 그것들이다. ‘가금의 서’는 가장 활달한 지적 실험정신과 개성 있는 텍스트적 상상력을 보여주어 주목되었는데, 과유불급이랄까 시에 녹아들지 못한 생경한 언술이나 비유들이 흠결로 드러나 완성도라는 점에서 아쉬웠다. ‘흔적 하나’는 창문 틈에 죽은 곤충의 시체를 화자로 한 묘사적 상상력이 진정성에 닿아있어 끝까지 고려되었지만, 군더더기라 할 언술들이 많아 정련미가 부족했다. ‘엄마는 외계인’은 동화적 상상력이라 할 나름의 발성법을 갖고 있어 발전 가능성이 보였으나, 좀 더 웅숭깊은 시선과 시적 사유의 깊이와 넓이를 더해주기를 바란다.
고심 끝에 ‘당선작 없음’까지 고려되었으나, 해마다 시 쓰기의 열정을 불태운 투고자들의 고뇌와 절망을 감안하여 향후의 발전 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쇼펜하우어 필경사’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쇼펜하우어 필경사’ 역시 수사적 완성도의 미흡함을 드러내고 있으나 앞으로 각고의 정진을 통해 문체를 획득하게 된다면, 오히려 이런 약점을 자신만의 시학을 구축하는 장점으로 전환시킬 수 있겠다는 기대를 갖게 하는 특유의 힘 있는 시적 언술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높이 산 것이다.
심사 / 본심: 엄원태`조용미(시인), 예심: 안상학`김이듬(시인)
201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난한 오늘 / 이병국
검지손가락 첫마디가 잘려나갔지만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곳에서 자란 꽃나무가 무거워 허리를 펼 수 없었다. 사방에 흩어 놓은 햇볕에 머리가 헐었다. 바랜 눈으로 바라보는 앞은 여전히 형태를 지니지 못했다.
발등 위로 그들의 그림자가 지나간다. 망막에 맺힌 먼 길로 뒷모습이 아른거린다. 나는 허리를 펴지 못한다. 두 다리는 여백이 힘겹다.
연필로 그린 햇볕이 달력 같은 얼굴로 피어 있다. 뒤통수는 아무 말도 없었지만 양손 가득 길을 쥔 네가 흩날린다. 뒷걸음치는 그림자가 꽃나무를 삼킨다. 배는 고프지 않았다.
꽃이 떨어진다.
이병국 시인
1980년 인천 강화군 출생.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인하대대학원 석사 수료(현대문학)
[당선소감]
대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창이 나 있었습니다. 늘 한쪽 창의 불이 꺼져 있기를 바라며 집으로 향했던 때가 있습니다. 어둔 방에 불을 켭니다. 그렇게 십여 년이 흘렀고 빈방에서 저와 아버지에 대한 시를 씁니다. 월미도 유람선에서 쓴 시를 교실 뒷벽에 붙여놓았던 고등학교 2학년에서 어느덧 미끄러져 서른을 훌쩍 넘겼습니다. 신문에 제가 쓴 시가 놓이게 된다니 제 마음에 창 하나가 밝게 빛나게 되네요.
심사위원님들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이번 생일이 1월 1일인데, 생일 선물을 너무 거창하게 받네요. 밖에 내놓은 아들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그 곁에 함께 하는 분당 아버지께도 감사드려요. 최원식 선생님, 김명인 선생님을 비롯한 인하대학교, 대학원 선생님들과 동문들께도 감사드립니다. 탁경순 선생님, 꼭 찾아뵐게요. 강영숙 선생님, 이름 고맙습니다. 그리고 지금 옆에서 절 응원하고 같이 웃어주는 그녀, 고마워요.
그저 말 많은 선배에서 그래도 신춘문예 당선된 선배로 남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네요. ‘멋진수요일’, ‘청하’, ‘시선’. 대학 때 만난 학회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제가 있었을까요. 숱한 세미나와 술자리들이 모두 기억에 남습니다. 그 곁을 함께 한 선후배 모두 고맙습니다. 이제 즐겁게 시, 쓰겠습니다.
[심사평]
통념을 깨는 상징을 찾아라, 감각의 명증성을 보여라, 생명의 도약에 공감하라, 세계의 찰나를 경이로써 보여주라. 좋은 시의 덕목으로 꼽을만한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껍질을 깨라! 도약하는 힘을 보여라! 마치 “알맹이의 과잉에 못 이겨 반쯤 벌어진 단단한 석류들”이 그렇듯이. “제가 발견한 것들의 힘에 겨워 파열”하고, 사물의 새로움과 내면의 고매함을 융합하며 붉은 보석이 밖으로 터져 나온다.(발레리, 「석류들」) 상상력은 늘 그렇게 독자를 익숙한 것들에 대한 놀라운 개안(開眼)으로 이끈다.
「이모의 가까운 해변」「골목을 들어올리는 것들」「향리의 저녁 일지」「발의 원주율」「어제의 인사」「끌어안는 손」「오늘 너의 이름은 눈」「친구들」「가난한 오늘」「迷路庭園」「밀의 기원」「꽃 앞의 계절」 등을 최종심에서 읽었는데, 그것은 개성과 환유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속에서 무르익어 스스로 내면을 깨고 터져 나오는 시를 찾는 일이다. 익숙한 서정을 찾기 힘든 대신에 낯선 감각과 의도된 착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흐름은 주목할 만했다. 우리는 서너 편의 시를 손에 쥐고 오래 망설였다.
「가난한 오늘」을 두 시간이 훌쩍 넘는 고심 끝에 골랐다. 신체 말단이 잘리고 헐고 바랜 자는 상처 받은 자이고, 그 상처는 가난의 흔적일 것이다. 일체 엄살이 없다. 아픔을 과시하는 헤풂을 절제하고 가난에 형상을 부여하는 힘은 정신의 야무짐에서 나온다. 싯구와 싯구 사이에 여백이 그 시적 물증이다. 수사가 덜 화사하고 주제가 소박했지만 아픔과 미망에 대한 표현의 간결함에서 사물에 감응하는 시인의 정직과 내핍의 염결성을 느꼈고, 그것에 깊이 공감했다. 이 시인의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게 분명하다. 지금보다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이 「가난한 오늘」을 당선작으로 뽑는 우리를 설레게 한다.
심사 : 장석주, 장석남 시인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손톱 깎는 날 / 김재현
우주는 뒷덜미만이 환하다, 기상청은 흐림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쏟아지는 빛 속에는
태양이 아닌, 몇 억 광년쯤 떨어진 곳의 소식도 있을 것이다
입가에 묻은 크림 자국처럼 구름은 흩어져 있다
기상청은 거짓, 오늘
나는 천 원짜리 손톱깎이 하나를 살 것이다
태어났을 때부터 내 손톱은 단단했다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나의 바깥이었다
어릴 적부터 손톱에 관해선
그것을 잘라내는 법만을 배웠다
화초를 몸처럼 기르는 어머니를 보고 자랐지만
나는 손톱에 물을 주거나 낮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일 따위에 대해선 상상할 수 없었다
결국 그것은 문제아거나 모범생이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과 같았지만
나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모범이었으며 문제였을 뿐
그러므로 손톱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나 또한 그것의 바깥에 불과하다
오늘, 우주의 뒷덜미가 내내 환하다
당신은 매니큐어로 손톱을 덮으려 하고 나는 손톱을 깎는다
우리는 예의를 위해 버리고, 욕망을 위해 남기지만
동시에 손가락 위에 두껍게 자라는 것들이
어느 쪽에 가까운지 알 수 없다
다만 휴지 속으로 던져둔 손톱들과, 날씨
그리고 나에 대해서만 생각할 뿐
버려진 손톱들은 언제나 희미하게 웃고 있다
김재현 시인
1989년 경남 거창 출생. 경희대 국문과 재학 중
[당선 소감]
"아이처럼 엉엉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김재현 찌개가 끓고 있는 밥집에서 연락을 받았습니다. 텅텅 비어 있던 배 속이 밥알 대신 알 수 없는 감정들로 차올랐습니다. 먹지 않아도 배부를 수가 있구나. 우습지만, 당선 연락을 받고 처음 깨달은 게 그것입니다. 연락을 받은 친구들이 달려와 볼에다 마구 뽀뽀를 해댔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고 금세 두려움이 차올랐습니다. 제가 그동안 무엇을 써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습니다. 훈련을 마치고 첫 전장에 나가는 병사의 심정이 이랬을까요.
시인이 된다는 것과 시인이 되고 싶은 것 사이에 이토록 깊은 거리가 있다는 걸 몰랐습니다. 간밤의 꿈에서 누군가에게 사과를 했고 그는 받아주지 않고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가 시였을까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는 아직 텅 비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실은, 시 쓰기에 방점을 찍는다는 생각으로 투고했던 글이었습니다. 그 방점이 새로운 문장을 쓰기 위한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놓으면 온다는 이치를 알 것 같습니다. 이제 이 길을 숙명이라 믿고 묵묵히 걸어가겠습니다.
제 가능성을 봐주신 심사위원분들께 우선 감사드립니다. 부끄럽지 않게 써나가겠습니다. 끝까지 저를 놓지 않으셨던 박주택 선생님, 김종회 선생님, 서하진 선생님. 평생을 다해도 갚을 수 없는, 너무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처음으로 시의 길을 알려주셨던 정우영 선생님. 항상 건강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격려와 확신을 주었던 이체, 강진, 동운. 주모동의 단테. 문예창작단의 선후배들. 당신들이 제게는 써야 하는 이유들이었습니다. 고향 친구들인 용준, 한상, 지홍, 경록, 정훈. 내일도 오늘처럼 끈끈하게 살아갑시다. 지금은 이름을 부르기 힘든, 하지만 언젠가 나를 용서해주길 바라는 그에게도 하고픈 말이 있습니다. 절망과 방황을, 성장과 배움을 당신을 통해 겪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를 나 자신보다 아껴주는 금희와 부모님에게 진심을 담은 사랑을 전합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는데, 갓 태어난 기분입니다. 집에 돌아가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자꾸만 새로워지겠습니다.
[심사평]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 돋보여
어느 해보다 많은 응모작을 보며 새롭고 다양한 개성과 시세계에 대한 기대 또한 더욱 높았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시 가운데 이소연의 ‘활과 무사’ 외, 노정균의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 외,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 외로 의견이 좁혀졌다. 이 세 사람의 작품은 우선 언어 장인으로서의 기량과 그것을 삶의 지렛대로 끌고 가려는 진정성이 돋보였다. 최근 한국시에서 자주 지적되는 산문화, 언어 낭비, 소통의 문제도 비교적 잘 극복해 가고 있었다.
이소연은 ‘활과 무사’ ‘늑골이 빛나는 발레 교습’ 등의 작품을 통하여 감각적 투시, 대담한 언어 구사로 산뜻함을 드러내었고, 노정균은 ‘우산은 어디서 파나요?’와 ‘입양’을 통하여 우리말의 어미를 “…다.”로 끝내지 않고 이어지는 각운을 통하여 사유가 리듬을 불러오는 작법의 시도를 보여주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김재현의 ‘손톱 깎는 날’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삶의 구체성을 통한 사유, 그것을 언어화하는 능력과 밀도를 주목했다. 함께 응모한 다른 작품들 또한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신뢰를 보탰다. 뱀처럼 섬뜩한 이미지의 ‘아야와스키의 시간’, 태어날 것들을 위해 스스로를 앓아 주렁주렁 매달린 ‘몰식자(沒食子)’에서 예사롭지 않은 재능을 보았다. 하지만 미개척지를 향한 탐색과 언어 실험자로서의 패기가 지나쳐서 억지스러운 조어가 이물(異物)처럼 박혀 있는 것이 다소 눈에 거슬렸다. 시란 사물과 사유를 언어로 갈고 닦아 가장 명징하게 본질을 드러내는 생명체이다. 삶의 타성과 시류와 진부에로의 수압을 잘 견뎌내어 부디 좋은 시인으로 훨훨 날아오르기를 바란다.
심사 : 조정권, 문정희
201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녹번동 / 이해존
1
햇살은 오래전부터 내 몸을 기어다녔다 문 걸어 잠근 며칠, 산이 가까워 지네가 나온다고 집주인이 약을 치고 갔다 씽크대 구멍도 막아 놓았다 네모를 그려 놓은 곳에 약 냄새 진동하는 방문이 있다 타오르는 동심원을 통과하는 차력사처럼 냄새의 불똥을 넘는다 어둠 속의 지네 한 마리, 조정 경기처럼 방바닥을 저어간다 오늘은 평일인데 나는 百足으로도 밖을 나서지 않는다
2
산이 슬퍼 보일 때가 있다 희끗한 뼈마디를 드러낸 절개지, 자귀나무는 뿌리로 낭떠러지를 버틴다 앞발이 잘리고도 언제 다시 발톱을 세울지 몰라 사람들이 그물로 가둬 놓았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곪아가는지 파헤쳐진 흙점에서 벌레가 기어나온다 바람이 신음소리 뱉어낼 때마다 마른 피 같은 황토가 쏟아져 내린다 무릎 꺾인 사자처럼 그물 찢으며 포효한다
3
저마다 지붕을 내다 넌다 한때 담수의 흔적을 기억하는 산속의 염전, 소금꽃을 피운다 옷가지와 이불이 만장처럼 펄럭이며 한때 이곳이 물바다였음을 알린다 흘러내리지 못한 빗줄기를 받아내는 그릇들,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방안에 고인 물을 양동이로 퍼낼 때 땀방울이 빗물에 섞였다 오랫동안 산속에 갇혀 있던 바다가 제 흔적을 짜디짠 결정으로 남긴다 장마 끝 폭염이다 살리나스*처럼 계단을 이룬 집들을 지나 더 올라서면 산봉우리다 계단 끝에 내다 넌 내 몸 위로 햇살이 기어다닌다
* 페루 고산의 계단식 염전
이해존 시인
1970년 충남 공주생 △여러 출판사의 편집자 생활을 거쳐 현재 월간 ‘현대시학’ 편집장
[당선소감]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습니다”
사무실 마감 일 때문에 정신없을 때 당선 전화를 받았습니다. 올해도 이렇게 지나가버리는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잊기 위해 일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 다행스러울 때였습니다. 연말연시를 생략하고 2월의 어느 일상으로 앞질러가고 싶을 때였습니다. 믿기지 않아 당선 전화를 받고난 후, 누군가 잔인한 위로의 장난 전화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확인 전화까지 해야 했습니다.
영화 <폴락>에서 피카소는 ‘질서’를, 폴락은 ‘무질서’를 화폭에 담아냅니다. 피카소는 성공을 거둘수록 행복해지지만, 폴락은 그 반대가 됩니다. 성공할수록 질서가 잡히기 때문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겠습니다. 최종심에서의 수많은 고배가 모루가 되어 주었습니다. 그때마다 위로를 건네준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옆에 계신 것만으로도 가르침이 되어주시는, 언제나 현역이신 정진규 선생님 그리고 이승훈, 김소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분화구 절벽에 둥지를 틀어 날아오를 수밖에 없는 태생의 시천동인들, 전형철, 윤성택, 안시아, 최치언, 천서봉, 박성현, 서동균 시인, 김솔 소설가, 고영, 박후기 선배님, 가까이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신 부모님과 최희강 시인 그리고 등단을 손꼽아 기다려준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긴 어둠에서 불을 밝혀 주신 황현산, 박주택 심사위원님과 경향신문사에 감사드립니다. 굳은 결의는 변명의 다른 이름일지 모릅니다. 그냥 지치지 않고 열심히 쓰겠다는 말로 대신합니다.
[심사평]
“시는 자신을 비워줄 때 조금씩 다가오는것”
모든 것이 그렇듯이 시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 동안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여 기예를 넘어 정신의 한 경지를 드러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시다운 시라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온힘을 다하여 시에 헌신하고 시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비워줄 때 시는 온전한 모습으로 조금씩 다가온다. 시는 결코 설익은 자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최종에 오른 네 편의 시 가운데 ‘그 여자의 거실에는 기차가 달려가지’ 외 4편을 응모한 서진배의 시는 발랄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산문적 진술에 기대고 있고 급격히 장면을 전치시키거나 전복시켜 시를 읽는 데 재미만큼의 감동을 주지 못했다. ‘침묵의 불법 점거에 대한 진술서’ 외 4편의 김희정의 시는 소음과 환청, 자본주의와 물신과 같은 도시적 생태를 다루고 있으면서 눅눅한 서정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시의 관절이 부드럽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선외로 밀렸다. ‘귀갓길’ 외 4편의 김창훈의 시는 “그림자에도 단내가 난다” “노을에도 마블링이 있다”와 같이 선후 문맥을 잇는 뛰어난 관찰력과 세밀한 묘사력이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응모작의 수준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겼다. ‘녹번동’ 외 4편을 응모한 이해존의 시는 그간의 적공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어 당선작으로 합의를 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자신을 구조(構造)하고 있는 안과 밖의 경계에 대해 사유와 감각을 적절하게 가로지르며 생의 경험이 곧 시의 경험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어 다른 무엇보다도 신뢰할 수 있었다.
모름지기 시는 시여야 한다는 기원적인 측면을 간과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자신의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조차 모른다면 시는 언제 찾아올 것인가? 당선자의 대성을 기대해본다.
심사 : 황현산(문학평론가), 박주택(시인)
2013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히말라야시다 / 신은숙
나무는 그늘 속에 블랙홀을 숨기고 있지
수백 겹 나이테를 걸친 히말라야시다 한 그루
육중한 그늘이 초등학교 운동장을 갉아먹고 있다
흰눈 쌓인 히말라야 갈망이라도 하듯 거대한 화살표
세월 지날수록 짙어가는 초록은 시간을 삼킨 블랙홀의 아가리다
빨아들이는 건 순식간인지도 모르지, 그 속으로
구름다리 건너던 갈래머리 아이도 사라지고
수다 떨던 소녀들도 치마 주름 속으로 사라지고
유모차 끌던 아기엄마도 사라지고
반짝이던 날들의 만국기, 교장 선생님의 긴 훈화도 사라지고
삭은 거미줄 어스름 골목 지나올 때
아무리 걸어도 생은 막다른 골목을 벗어나지 못할 때
부싯돌 꺼내듯 히말라야시다 그 이름 나직이 불러본다
멀어도 가깝고 으스러져도 사라지지 않는 그늘이 바람 막는 병풍처럼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다
해마다 굵어지고 짙어지는 저 아가리들
쿡쿡 찌르고 찌르면 외계서 온 모스부호처럼 떠돌다 가는 것들
멍든 하늘을 떠받들고 선 나무의 들숨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삼켜지지 않는 그늘 속엔 되새떼 무리들
그림자 하나씩 물고 석양 저편으로 날아오른다
신은숙 시인
1970년 강원 양양 출생. 강원대 국문과 졸업.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재학.
[당선소감]
유리알 닦듯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진
노스트라다무스가 예언한 지구 멸망의 날,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지구는 저녁까지 안녕했지만 그 순간 저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이 떠올랐습니다. 시를 써 온 저와 그 깊은 절망에 대한 멸망을 보았습니다. 또 다른 멸망 앞에서 새로운 우주가 열리듯 오늘 저 밤하늘 너머로 사라지는 유성 하나에도 남다른 눈빛 하나 건넵니다.
필사하던 밤들을 생각합니다. 고급 독자로 시 읽는 행복감을 누리는 게 차라리 편할진대 시를 쓰겠다고 덤비는 순간부터 마음은 어두운 동굴을 혼자 걷고 있었습니다.
덜컥 당선이 되고 보니 기쁨에 앞서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시를 쓰면서 견뎌야 할 고독과 현실 앞에서 다시 태어나는 마음으로 정진하겠습니다. 제게 시는 마음으로 읽는 세상입니다. 그 안에 새소리 바람소리 깃들 수 있도록 마음을 유리알처럼 잘 닦아 놓겠습니다. 낮은 자세로 이름 없는 사물들을 사랑하고 살피겠습니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고 싶습니다. 욕심이 있다면 단 하나 그것입니다.
고마운 분들이 많습니다. 먼저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오세영, 강은교 심사위원께 큰절 올립니다. 묵묵히 지켜봐준 가족들 그리고 ‘히말라야시다’가 있는 초등학교 앞에 사시는 엄마, 사랑합니다. 물방울의 힘을 알게 해주신 정병근 시인님 감사드립니다. 경희사이버대 김기택 교수님을 비롯하여 여러 교수님들, 학우들,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 숙희와 진경에게도 따스한 마음을 보냅니다. 또 저를 알고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과 이 기쁨 함께 나누겠습니다. 마음의 빚은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이제 조용히 히말라야시다에게로 가서 조금만 울고 싶습니다.
[심사평]
신선한 상상력·미학적 논리 통해 세계 재해석
예심을 거쳐 올라온 스물여섯 분의 작품을 놓고 심사숙의한 끝에 두 심사위원은 이의 없이 신은숙의 ‘히말라야시다’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구조적 완결성과 언어적 진솔성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시인이 한 특별한 사물의 인식에서 촉발된 신선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의 미학적 논리를 통해 이 세계를 새롭게 재해석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이 세계란 하나의 큰 학교이며 삶은 그곳에서 이수해야 하는 일종의 학습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그 학습은 학교 운동장 한 켠에 말 없이 큰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히말라야시다’의 존재론적 의미와 같은 것이 되지 않고서는 일상성을 탈피할 수 없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 생의 진정한 완성이란 히말라야시다의 나뭇가지에서 하늘로 날아오르는 되새 떼의 비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당선작이 요즘 우리는 간과하고 있으나 시가 지향해야 될 이상을 소중하게 지키고 신선하게 형상화하려 노력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 상상력에 대한 믿음, 언어적 소통에 대한 가치 부여, 미학성과 철학성의 적절한 조화 등이 그것이다. 오늘 우리 시단이 소통 부재의 언어유희나 정신분열적 사유의 독백 같은 시들로 오염되고 있어 더 그러하다. 본심에 오른 작품 과반수도 이 같은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해 씁쓸했다.
마지막까지 논의되다가 탈락한 작품으로 이시언의 ‘유리창의 파리’는 형상성이나 시상 전개에서 재능을 보여줬으나 상상력이 단순하고 독자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약했다. 구한의 ‘노인목경건조공법’은 묘사력과 수사가 탁월하고 언어의 밀도도 나무랄 데 없으나 시상의 비약이 심했고 대상을 단지 묘사해 보여주는 수준을 탈피하지 못한 게 흠이었다
심사 : 오세영·강은교
201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거,리,기,시,작,했,다
산과 산 사이
沼와 여울, 여울과 沼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 '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이정훈 시인
46세. 강원 평창 출생. 강원대 졸업. 현재 화물트레일러 기사.
[당선소감]
"세 번 도리질했는데… 두 아이 이름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갑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배역 중
왜 제게는 나귀 한 마리와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주어졌는지
밤마다 손바닥을 들여다봅니다
후벼서 미안하다는 듯 흐르는 이 강을
오늘은 애수라고 불러봅니다
내가 강가에 마을 하나 지어 놓으면
밤나무 두 그루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떠갑니다
뇌운 용항 도돈 판운 멀리 주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울 가 삐익 삑,
노루새끼 호드기 붑니다
고지를 받았을 땐 지실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세 번 도리질 했는데
네 번 맞다고 해서 박달재를 넘을 땐
말씀으로 수태한 처녀 같았습니다
딱!
밤톨 떨어지는 소리가 만종처럼 울려
다릿재 꼭대기 노을을 몰고 시속 팔십 킬로미터
붕붕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립고 고마운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만
나경 해오니 두 아이의 이름 울금빛으로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야합니다
고형렬 선생님, 감사합니다
[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세 명의 심사위원이 투고작 전부를 나눠 읽고 거기서 추린 작품을 토대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쏘가리, 호랑이'(이정훈)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 독특한 개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만 그의 시편들에 내포된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의도적인 시대착오성)을 앞으로의 시작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색해주길 바란다는 권고를 덧붙이고 싶다.
'단풍나무 빵집'의 손현승은 심사위원들에게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강요한 응모자였다. 대화체를 적절히 활용한 이 시는 대상이 되는 빵-빵집-빵집 여자에 범용한 일상성을 뛰어넘는 서정적 후광을 씌워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원숙한 시선이 인상적인 이 시는 읽다보면 고소한 빵냄새가 주변에 감도는 듯한 풍미를 선사한다. 심사위원 구성이 조금만 달랐다면 최종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를 만큼 이 작품이 주는 매혹은 상당했다.
'곰이 돌아왔다'의 장유정도 아까운 응모자였다. 투고작 전부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견고한 시적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의 조형이나 어조의 완급조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발상이 새롭지 않다는 난점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누군가의 단검'의 김지연, '애플파이 레시피'의 고태관, '골목은 모퉁이를 돌면 막혀 있다'의 유병현, '불룩한 체류'의 이문정 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을 선보인 응모자들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건필의 응원을 보낸다.
심사 : 황현산(문학평론가) 황지우(시인) 남진우(문학평론가ㆍ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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