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매를 걷고 앞치마를 두르고 혼자 앉아 흙을 빚고 있다. 그곳은 큰 건물 맨 아래층 외진 곳에 자리한 작업실이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낮인지 밤이지 가늠할 수 없다. 문득 고적해져 몸을 일으켜 조명이 비치는 텅 빈 나무 벽 앞에 선다. 나무 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스르르 작은 감실 형태의 선반들이 파이고 그 속에 든 어떤 빛에 나는 매료당한다.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기울여 들여다보는데 작업실의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고 느낀다. 어떤 기운이 감지되어 고개를 들었다. 작업실 천장을 가로지르는 굵은 나무 들보에 무언가가 앉아서 나를 응시하고 있다. 그 순간의 이미지는 천장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이다. 작업실 바닥에 고정된 채 넋을 잃고 있는 한 인간 여인이 있다. 고개를 든 나와 시선이 마주친 강렬한 기운의 주인공은 까만 표범이었다. 파르스름한 윤기가 흐르는 털에 날렵한 몸매, 노란 눈에 갈색 눈동자. 내 몸짓보다 훨씬 큰 짐승이 들보에 포갠 앞발에 머리를 얹고 고요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름다웠다.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털, 그 아래 느껴질 부드러운 근육을 쓰다듬고 싶다고 생각한다.
두려움은 없었다. 어쩌면 이 공간의 주인은 아주 오래전부터 저 표범이었을 거라고... 나는 당연히 여긴다. 우리는 오래 응시한다. 잠시 후 순간 이동처럼 내 발치에 선다. 나는 나무 벽 곁에 놓인 의자에 앉고 표범은 내 발치에 앉았다. 이 묘한 조우를 박제하듯 멈춘다. 사위는 고요하고.. 어쩐지 아주 오래전부터 내 곁에 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존재가 현현한 느낌이다. 그 순간 나는 예감한다. 이후로도 오래오래 함께 다니겠구나. 나는 빚던 흙으로 돌아가고 표범은 나를 지켜보며 앉아있다.
당시 소조에 빠져있던 나는 식음을 전폐하고 작업실에 처박혀 있었다. 무서움도 잊은 채 혼자 밤을 새우다 출근하기 일쑤였던 시절. 이 꿈을 꾸었다. 너무나 강력한 꿈이어서 그 의미를 오래오래 곱씹어보곤 했다.
오래 우울증을 앓고 난 뒤 억눌렸던 표현 욕구가 나를 압도하던 시간.. 내 속의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에너지가 캐스팅한 이미지일까? 어쩌면...부족 뿐 아니라 개인도 자기만의 토템이 있는 것은 아닐까? 자연의 위력 앞에서 초라했던 인류의 유아기에, 인류를 압도하는 맹수들의 위용은 분명 숭배받아 마땅한 신성한 대상이었을 것이다. 아니 단지 힘겨루기의 패배자였기 때문에 숭배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더 근본적인 존재 방식, 더 자연스러운 존재 방식일지도 모른다. 토템은 영혼의 친구, 영혼의 분신 같은 존재. 생존하느라 전전긍긍하는 중에도 간직하고 싶은 어떤 자연의 빛. 내 속에서도 빛나고 있을 광휘의 거울 같은 존재. 아름다워서 넋을 잃게 만드는 그런 존재는 아닐까?
문명의 발전과 함께, 그리고 산업화 된 도시에서 거주하면서 인류는 토템을 잃었다. 하지만 도시의 거주민들의 영혼은 고독하다. 밀집된 도시에서 채워지지 않는 고독... 그 고독은 무엇으로 채워질 수 있을까? 무엇을 상실한 자리일까? 이 꿈은 그 상실과 회복에 대한 어떤 원형질의 무의식에서 길어진 것은 아닐까?
그 꿈의 이미지를 때론 잊고, 때론 회상하면서 그 후 10년 동안 나는 밀집한 도시의 거주민으로 사람들의 숲에서 살았다. 그러다 어느 겨울 상실의 자리를 더 이상 외면하고 버틸 힘이 바닥나던 날 땅꼬와 마주쳤고 그 힘이 바닥났음을 인정할 용기를 내던 밤 겨울 추위 속을 홀로 헤메다니던 땅꼬를 내 집으로 초대했다. 땅꼬와 꽁냥거리고 사느라고 이 꿈을 오래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꿈을 떠올렸다. 너와 만나려고 그랬을까? 예지몽이었을까? 인류가 아닌 존재와 깊이 맺어지리라 꿈도 꾸지 못했던, 아니 그렇게 맺어지는 세계가 있다는 걸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시절... 찾아온 꿈.
나는 지금도 묻는다. 왜 우리는 인류가 아닌 존재에게 매료당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