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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맬서스 이론의 기원(起源)과 지지(支持)
지금까지 생각하여온 이론 이외에도 검토하여야 할 이론이 또 하나 있다. 임금의 기원과 법칙에 대한 현대학설은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으며 맬서스가 자기이름을 부치고 있는 학설 즉 인구는 자연적으로 식량보다는 더 빨리 증가한다는 맬서스의 학설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다. 서로 상통(相通)되는 이 두 학설은 현 정치경제학이 해석하려고 하는 난(難)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전에 검토한 것과 같이 임금은 자본과 노동자의 비율에 의하여서 결정된다는 현대학설은 완전히 무근(無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일반적으로 그렇게 장구(長久)하게 유지되어왔는지 실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이 대다수의 노동자가 자기들의 고용과 임금을 개개의 자본가 계급에 의존하고 있는 사회상태에서 발생하였다는 것은 하등 놀라울 것이 없다. 또한 이런 상태 하에서 이 이론이 내용과 형식을 하등 숙고(熟考)하지도 않고 구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지되어 왔다는 것도 하등 놀라울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검토하여 보면 하등의 근거도 없는 이론이 현세기에 있어서 정치경제학을 과학으로 설명하고 발전시키는데 정력을 바치고 있는 많은 예리한 사상가에 의하여서 성공적으로 용납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불가해한 사실에 대해서는 맬서스 이론이 일반적으로 용납되고 있다는 사실로써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임금에 대한 현대이론은 맬서스 이론의 지지를 배경으로 하여 정치경제학자가 자명의 진리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자세하게 연구되어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이 두 이론은 상호간 혼합(混合)되어 있으며 서로 강화시켜 주며 서로 상호방위하여 주기도 한다. 그와 동시에 이 이론은 또한 일정한 점을 초과하면 토지에 자본과 노동을 투하한다 하더라도 수확은 체감(遞減)된다는 지대론의 논의에는 우선적으로 등장하는 원리에 의하여 가일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들 모든 이론은 고도로 조직된 선진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해주고 있으며 모든 사실에도 적합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연구가 진보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이론 중에서 어느 것이 역사적으로 선재하였는지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구이론은 임금이론에 대한 정설이 결정된 후에야 과학적으로 정설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이론은 정치경제학에 관한 제도를 설정하려고 기도하기 훨씬 전에 자연적으로 같이 발생하였으며 같이 성장하면서 다소 원시적인 형태를 지속하여 왔던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맬서스의 이론을 완전하게 발전시키지도 않았지만 이 이론을 초보적인 형태로서 구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담 스미스의 책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임금문제에 관한 이론을 오도(誤導)케 한 것은 이 때문이라는 것도 확실한 것 같다. 그러나 여하튼 이 두 이론은 밀접하게 관련되고 있으며 상호간 완전하게 보완하고 있었기 때문에 “18세기 스코틀랜드의 지성에 관한 검토”라는 책에서 경제사의 발전사를 회고하면서 버클은 인구가 식량에 주는 압력에 관한 현대이론을 발전시키므로 현대임금이론을 결정적으로 증명한 공적을 맬서스에게 돌리고 있다. 또한 버클은 “영국문명사”란 책의 제3권 제5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8세기를 경과하자 노동에 대한 보상은 임금지불의 원천이 되고 있는 국가기금의 대소와, 기금을 분배받고 있는 노동자의 수라는 두 가지 사실에 전적으로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증명되었다. 이러한 지식의 괄목할만한 향상은 전부는 아니라 하더라도 대부분 추론적 사상사에 있어서 획기적일 뿐만 아니라 이미 상당한 실제적 결과를 산출하였으며 앞으로 다른 결과를 현저하게 나타낼 인구론을 저작한 맬서스의 덕택이다. 이 책은 1798년에 출판되었는데 아담 스미스가 1790년에 사망하기 때문에, 스미스가 자기의 견해가 이 인구론에서 수정되지 않고 확대되어가는 커다란 기쁨을 나누지 못한 것은 유감지사(遺憾之事)다. 참으로 스미스가 존재하지 않았던들 맬서스가 존재할 수 없다. 즉 스미스가 기초로 확립시키지 아니하였다면 맬서스가 상층구조를 건설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 유명한 학설은 발표된 후 계속하여서 정치경제학계뿐만 아니라 고도의 사상계에 있어서까지 강력하게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학설은 북미의 식민지의 성장에서처럼 인구의 자연적 경향은 적어도 25년 만에 배가 되어서 기하학적으로 증가하는데 반(反)하여 “인간노동의 가장 적당한 환경에 있는” 토지로부터 취득하는 식량은 “산술적 비율보다 더 많이 증가될 수 없다는 것 즉 25년간마다 현재 생산하고 있는 것과 동량을 증가할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맬서스에 의하여서 형성(形成)화된 것이다. 또한 맬서스는 의기양양하게 말하기를 “이런 두 상이한 비율은 이것을 대비시킨다면 이 두 상이한 증가율의 필연적 효과는 경이적인 것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그는 (인구론 제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섬의 인구를 1,100만이라 하고, 현재의 생산이 위의 인구를 부양하는데 하등의 부족이 없다고 가정한다. 첫 25년간에 인구는 2,200만이 될 것이며 식량도 2배가 되므로 식량은 인구증가와 동량이 될 것이다. 다음 25년간에는 인구는 4,400만이 될것이나 식량은 3,300만을 부양하는데 불과하다. 그다음 기간에 인구는 8,800만이 되나 식량은 이 인구의 반밖에 부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세기의 종말에 가서는 인구가 17,600만이 되는데 식량은 5,500만 밖에 부양하지 못하므로 12,100만의 인구에 대해서는 하등의 대책이 없는 것이다.” “이 섬만이 아니라 전 세계를 포함한다면, (이민은 물론 제외된다) 이때 현재의 인구가 1억이라고 할 경우, 인류는 1, 2, 4, 8, 16, 32, 64, 128, 256, ...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1, 2, 3, 4, 5, 6, 7, 8, 9, ...로 증가한다. 2세기 내로 인구와 식량의 비(比)는 256 대 9가 될 것이며, 3세기 내로는 4,096 대 13이 될 것이며, 2천년 후의 차(差)는 상상할 수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식량 이상으로는 인구가 존재할 수 없다는 물리적 사실로 인하여 장애(障礙)를 받고 있다. 그리하여 맬서스는 인구가 무한히 증가하려는 경향은 증식력에 대한 도덕적 억제(抑制)나 혹은 죄악으로 발생하든지 곤궁으로 발생하든지를 불문하고, 인간의 천수(天壽)를 단축시키는 여러 가지 원인으로 억제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증식을 억제하는 원인은 맬서스는 예비적 장애라 하였으며 사망을 증가시키는 원인을 적극적 장애라고 하였다. 이것이 “인구론”에서 맬서스 자신이 선포한 유명한 맬서스 학설이다.
기하학적이나 산술학적인 비율의 증가라는 가정에 포함된 모순을 오래 생각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가정은 마치 토끼가 거북을 영원히 추적하여도 미달한다는 유명한 토끼와 거북의 수수께끼만큼의 권위도 없는 비율에 관한 장난이기 때문이다. 이 가정은 맬서스 학설에 전적으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예를 든다면 “정확성을 부여할 수 없는 사물에 정확성을 부여하려고 한 불행한 기도였으며 또한 추리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적으로 무용한 토론이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주1)라고 말한 존 스튜어트 밀 같이 이 학설을 전적으로 용납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적어도 이 가정만은 명백하게 거절하였던 것이다. 맬서스 학설의 요점이란 인구의 증가경향은 식량의 생산력보다는 빠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가 맬서스처럼 인구에 대해서는 기하학적이고 식량에 대해서는 산술학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밀과 같이 인구에 대해서는 일정비율이 되고 식량에 대해서는 수확체감률이 된다고 말하는 것은 다만 기술적인 차이인 것뿐이다. 양 인이 동의하고 있는 중요한 점은 맬서스의 말을 빌린다면 “인구가 식량이상으로 증가하려는 것은 자연적인 경향이며 지속적 추세인 것이다”에 있는 것이다.
맬서스 학설은 현재에 있어서도 가장 강력하며 반대라고는 별로 없는 형태로 기술(記述)되고 있는 것이다.
즉 항구(恒久)적으로 증가하려는 경향이 있는 인구는 억제되지 않는다면 고정된 장벽으로서가 아니라 식량획득을 누진적으로 점점 곤란케 하는 탄력적인 장벽으로서 식량의 한도(限度)에 대하여 무한히 압력을 가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증식력이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곳에서는 신중하게 억제되지 않는다면 부족분이 생겨서 인구를 식량의 한도 내에서 유지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창조적인 덕행(德行)과 예지(叡智)로 받아들인 조화있는 감각에 대해서는 원인을 탐구하지도 않고, 빈곤과 거기에 따르는 부작용이 하나님의 불가사의(不可思議)적 섭리(攝理)에 책임이 있다는 자기만족의 비(非)이론보다 더 반대되는 것은 없다. 더욱 이 이론은 가장 순결하고도 감미로운 애정과 연결되어 있는 자연적 본능의 결과를 죄악시하거나 고통을 주면서, 인간의 심리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관념과 황당하게 불화(不和)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은 형식화되자 논리도 무시해 버리는 만용으로 싸우면서 세력을 확장시켰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이론은 엄한 시련에도 승리를 거두면서 확고하게 서 있는 것이다. 고드윈의 논박이나 코빗의 비난이나, 이 이론에 반대하는 모든 토론이나 풍자나 조소나 감정(感情)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오늘날에 있어서 사상계에서 용납된 진리로서 취급되고 있으며 용감하게 이 이론을 불신하는 사람의 존재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이 승리를 거두는 원인이나 이 이론이 강력하게 된 원인 등은 명백하다. 즉 계속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는 식량을 공급해 주고 있는 지구의 능력을 종국에 가서는 초과하여서 설 장소도 없을 것이라는 소위 불가침의 산술적 진리를 배경으로 하여서, 맬서스 이론은 비유 즉 어디서나 생명이 다른 종류를 억제하고 있는 장벽을 무용하게 타파하고 있는 동물계나 식물계에서의 비유론과 상이한 생활형태의 구별을 균등히 하려는 현대사상에서 점점 중요성을 나타내고 있는 비유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이론은 인구가 조밀한 데서 유행되는 빈곤, 죄악 및 곤궁 등의 여러 명백한 사실에 의하여 권위가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구빈법이 없어질 줄 모르는 인구증가라는 물질적 진보의 일반적인 효과로도 명백하게 인정되고 있으며, 신개척 국가에서의 인구의 급속한 증가와 빈곤계급의 사망으로 인한 인구조밀한 국가에서의 인구증가의 지연(遲延) 등으로 명백하게 인정되고 있다.
맬서스 이론은 이런 사실이나 혹은 이와 유사한 사실을 설명하고 있는 일반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것도 임금은 자본에서 염출된다는 학설과 이 학설에서 연역된 모든 원리와 조화되는 방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현대 임금학설에서는 노동자의 수가 증가(增加)하는 데 따라서 자본은 더 세분(細分)되는 것이므로 임금은 하락한다고 한다. 맬서스 이론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는 데 따라서 식량이 더 세분되는 것이므로 빈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본과 식량을 동일하게 하고 노동자 수와 인구를 동일하게 한다면 이 두 개의 명제는 형식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동일한 것이 된다. 이들 용어들이 혼용되고 있는 현 정치경제학설에서는 이 두 명제가 동일한 내용으로 되고 있는 것이다.(주2) 그리하여 전에 인용한 바와 같이, 버클은 “맬서스가 발전시킨 인구이론은 스미스가 발전시킨 임금이론을 결정적으로 증명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인구론”이 출간된 지 수년 후에 리카도는 스미스의 지대의 성격과 원인에 대한 오류를 시정한 바 있었다. 그러나 리카도는 인구가 필연적으로 증가하는데 따라 저(低)생산지의 경작이 불가피하게 되거나 동일한 토지의 저생산점의 경작이 불가피하게 되므로 지대는 증대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방법으로 세 개의 이론이 결합하였다. 맬서스 이론은 양면 즉 하나는 전에 받아들인 임금학설과 그 후에 받아들인 지대학설이라는 양면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런데 맬서스 이론의 관점에서 본다면 임금이론이나 지대이론은 맬서스의 이름이 붙어있는 일반원칙의 특수한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즉 인구가 증가하는 데 따라서 나타나는 임금의 하락과 지대의 등귀(騰貴)는 식량에 대한 인구압력을 표시하는 형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미미한 점은 명백해지기도 하고 설명도 되고 있지만, 리카도 이후로는 현재 용납되고 있는 과학은 실질적인 변화나 발전이 없었으므로) 정치경제학의 체계(體系)를 형성하고 있는 맬서스 이론은 소견(所見)에 대해서는 반대를 한 후에야 언급되고 있으면서도, 기성국의 노동계급에 적어도 일반적으로 유행되고 있는 타 관념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와 반대로 맬서스 이론이 지지하고 있으며 지지를 받고 있는 임금이론과 같이 맬서스 이론은 이러한 타 관념과도 조화되고 있다. 따라서 기계공이나 직공이 저임금을 받으며 고용이 불가능한 것은 인구의 압력으로 발생하는 경쟁에 그 원인이 명백하게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결한 주거에서 빈곤에 허덕인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구가 과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맬서스 이론의 승리의 중대한 원인은 기득권(旣得權)을 위협하거나 강력한 이해관계를 적대시하는 것이 아니라, 부의 권력을 사용함으로써 사상계를 거의 지배하고 있는 계급을 우선적 대상으로 하고 재확인시켜 준데 있는 것이다. 즉 기성세력에 대한 지지가 무의미하게 되자 재빨리 맬서스 이론은 이 세상의 재물을 거의 독점하고 있는 소수인의 특권층(特權層)을 옹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핍과 곤궁을 정치적 제도에 책임을 전가시킬 수 있으면 여하한 정부도 존속할 수 없을 텐데, 맬서스 이론은 결핍과 곤궁을 자연적 원인에 돌리고 있다. 그리고 “인구론”은 인간평등원칙을 주장한 월리엄 고드윈의 “정치적 정의에 관한 연구”에 대한 공개적인 대답인 것이다. 그 책이 인간의 균등(均等)을 강조하고 있는데 반하여 “인구론”의 목적은 빈곤의 책임을 인간제도에서 하나님의 법칙으로 전가(轉嫁)시키려는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하등 새로운 사실이 없다. 일찍이 40년 전에 월리스가 부의 균등한 분배를 위한 정의의 요구에 대한 해답으로서 과도한 증식(增殖)의 위험성을 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동일한 관념을 맬서스가 발견하게 되자 그 당시의 환경으로 보아서 이 관념은 특히 특권계급의 환영하는 바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프랑스혁명의 폭발로 인하여 현존상태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맬서스 학설은 개혁에 대한 요구를 회피(回避)하였으며 동료 간에 대하여서 눈을 가리웠을 뿐만 아니라 한 필요성을 가장(假裝)함으로써 양심을 속이었던 것이다. 이 학설은 자기는 성찬(盛饌)을 먹으면서도 문전에서 공복(空腹)으로 기진맥진한 나사로의 모습에 자약(自若)하고 있는 부자 다이브즈에 대한 철학과, 빈곤한 사람이 적선(積善)을 요청할 때에 부자가 호주머니의 단추를 끼우는 철학과, 주일(主日)에 바로 근처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비천한 빈민들의 참상에 대해서는 책임감을 조금도 느끼지를 않으면서 주일에는 화려하게 장식된 예배당 좌석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부유한 기독교인에게 철학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할 것 같으면 빈곤이나 결핍이나 기아를 개인적인 탐욕이나 사회적인 악조정(惡調整)에는 조금도 책임을 돌리지는 않고 자연법칙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으며, 불손한 말이 되는지는 모르지만 인력법칙과 같이 논쟁하여야 무용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한다면, 결핍을 무릅쓰고 부를 축적한 사람은 담만 쌓지 않으면 전부 모래가 침범하였을 작은 오아시스의 담을 쌓는데 불과한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는 자기자신을 위하여서는 이득을 보면서도 아무도 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유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명령을 문자 그대로 순응하여 자기의 부를 빈자에게 분배한다 하더라도 이득을 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이다. 즉 이러한 자선의 결과로서는 다만 인구가 증가하여서 한정된 식량이나 자본에 압력을 가할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공통적으로 빈궁하다는 점에 있어서만 동등한데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력층의 이익과 충돌되는 개혁은 무망하게 되는 것이다. 도덕법칙은 자연법칙이 과잉인구를 제거하고 정어리 통조림 모양으로 지구표면을 인간으로 충일케하려고 증가시키려는 경향을 억제하는 방법의 선수(先手)를 치고 있지는 않는 것이다. 따라서 교육의 효과를 신뢰하고 신중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것 이외로는 개인이나 집단이 빈곤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하등의 대책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이다.
빈곤계급의 관습적인 사상과 일치하여 부자의 탐욕과 권력층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이론은 쾌속도로 확대되며 뿌리를 깊숙이 파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론이 바로 맬서스가 발전시킨 이론이다.
더욱 최근에 맬서스 이론은 인간의 기원(起源)과 종(種)의 기원 등에 대한 관념이 급속도로 변하는 데 따라 새로운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맬서스 이론의 선포가 사상계에 한 신기원을 개척하였다고 한 버클의 말이 정당하였다는 것은 용이하게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버클 자신의 저서가 좋은 예가 되어 있는 것같이 철학의 순수한 영역에서의 영향을 살펴본다는 것은, 비록 대단히 흥미가 있을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연구의 범위에서는 벗어나는 것이다. 맬서스 이론은 모든 방면에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새로운 발전철학이 이와 같이 지지하고 있는 것이지만, 어디까지가 부수적인 지지이며 어디까지가 본질적인 지지인지는 이 이론이 현재 행사하고 있는 세력의 원천을 평가하므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치경제학에서는 임금학설과 지대학설에서 받는 지지가 맬서스의 이론으로 하여금 중심적인 진리의 위치로 오르게 하는 것과 같이, 생명의 모든 형태에서의 발달에 관한 유사관념(類似觀念)의 확대가 이 이론을 점점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위치에 서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임종 시까지 새로운 철학에 대하여서 용감하게 반대하던 애거시는 다윈주의를 가리켜서 “맬서스주의 종합”(주3)이라 하였고, 다윈 자신도 생존경쟁(生存競爭)이란 “전동물계와 식물계에 강력하게 적용되는 맬서스 학설이다”(주4)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맬서스 학설이 본질적으로나 필연적으로 진보에 관한 관념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자연도태(自然淘汰)나 혹은 적자생존(適者生存)에 의한 발전이론이 맬서스론을 확장시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진보의 관념은 맬서스 이론에 곧 첨가되었다. 즉 맥컬로크(주5)는 사회적 개량과 기술의 진보가 있는 것은 “증가의 원리”때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또한 증가의 원리로 인하여 발생하는 빈곤은 상류계급이나 중산계급에 의한 산업의 발달, 과학의 진흥, 부의 축적을 촉진시키는 강력한 자극제(刺戟劑)가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인간사회에 관한 “생존경쟁”과 “적자생존”이라는 발전효과에 대한 인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데 자연과학의 권위자들은 이 사실을 가르켜서 지구의 윤택한 생활로서 상상할 수 있는 무한의 다양성을 띄우고 있으며, 경이적으로 적응되고 있는 모든 형태를 발생시키기 위하여서 자연이 사용한 수단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이야말로 표면적으로는 냉혹하고 가혹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억 년이라는 과정을 지나면서 최저형태에서 최고형태로 발달시켰으며, 인간과 원숭이를 구별시켰을 뿐만 아니라, 19세기로 하여금 석기시대를 계승케 한 힘에 대한 인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와 같이 칭찬을 받으며, 표면적으로는 입증이 된 것 같으며 또한 이와 같이 연결되고 있으며 지지를 받고 있는 맬서스 이론 즉 빈곤은 식량에 대한 인구의 압력에 기인한다는 학설 다른 형식으로 표현한다면 노동자의 수가 증가하려는 경향은 노동자가 재생산하는데 필요한 임금을 최저로 감소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는 맬서스 이론은 마치 창천(蒼天)의 현상이 여러 세기 동안 지구의 고정이라는 가상에 입각하여서 설명되었고, 지질학적 사실이 모세의 기록에 관한 문학적인 영감(靈感)에 입각하여서 설명된 것과 같이 절대적 진리로서 용납되고 있는 것이며 이러한 관점에서 사회현상이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고사하고 권위자들이 이 이론을 부정하는 데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선회한다는 의견에 반대하는 십자군을 최근 조직한 흑인 설교가의 담력이 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맬서스 학설은 지식층으로부터 일반적인 찬동(贊同)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중문학이나 순수문학을 통하여 다방면으로 침투(浸透)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경제학자, 정치가, 역사가, 자연과학자, 사회과학협회, 노동조합, 목사, 무신론자, 가장 보수적인 사람이나 극단의 급진론자 등이 다 같이 이 이론에 찬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은 맬서스에 관하여 무식하며 이 이론의 내용을 조금도 생각해본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도 지지를 받고 있으며 추리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임금이론이 공평하게 검토된다면 무가치하게 되는 것과 같이 임금이론과 동질인 맬서스 이론도 그 근거를 상실하리라고 굳게 믿고 있다. 임금이 자본에서 염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면서 이 안타이오스를 지구로부터 들어 올린 바있다.
(주1) “정치경제학원리” 제2권 제9장 제6절- 밀의 언급과는 관계없이 기하학적 비율과 산술학적 비율을 강조하였음은 명백하다. 그리고 맬서스가 명성을 획득한 것도 대부분 이 비율의 덕택이라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비율은 대다수 국민에게는 명백한 추리보다 더 무게를 주고 있는 정확한 공식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2) 자본의 정의에 대한 맬서스 학설의 효과는 맬서스 이전에 제작한 스미스의 정의와 그 후 계승하여서 저작한 리카도, 매컬로크, 밀의 정의를 비교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주3) 매사추세츠 주립 농회에서 1872년에 행한 연설 “미국 농림부 보고서”
(주4) “종의 기원” 제3장
(주5) “국부론에 대한 주석” 제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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