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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盡淸要(역진청요)라
청요라고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자리. 맑고 요긴한 자리를 다 지냈어. 이 사람이 벼슬살이 하면서.
此是世間(차시세간)에 第一等受福底人(제일등수복저인)이나 能知慙愧(능지참괴)하야 回心向道(회심향도)하야 學出世間脫生死法(학출세간탈생사법)하니
此是世間(차시세간)에 第一等受福底人(제일등수복저인)이라
당신이야말로 세상에서 제일 일등가는 복을 받은 사람이다.
能知慙愧(능지참괴)
그런데 거기서 능히 그 사실에 대해서, 그렇게 살아온 사실에 대해서 부끄러워할 줄을 알아.
回心向道(회심향도)
마음을 돌이켜서 道를 향하게 해. 道를 향했어. 그래서
學出世間脫生死法(학출세간탈생사법)하니
세간을 벗어나서 생사를 벗어나면 세간에서 뛰어나고,
탈생사-생사를 벗어난 그런 법을 배우니
又是世間(우시세간)에 第一等討便宜底人(제일등토편의저인)이라
저 앞에는 세간에 제일등수복저인이고, 거기서 또 한걸음 나아가서 道를 공부하니 이것은 세간의 제일등편의를 찾은 사람이다. 편의라고 하는 말이 편리라고 하는 말과 뜻은 같은데 여기는 대단한 뜻을 포함하고 있어요. 세간에서 뛰어나고 생사를 벗어나는 그런 공부를 하는 사람이니, 출세중에서도 최고의 출세를 하는 사람을 편의지인-최고로 출세한 사람이다. 이렇게 표현해도 좋아요.
須是急差手脚(수시급차수각)하며 冷却面皮(냉각면피)하야 不得受人差排(부득수인차배)하고
須是急差手脚(수시급차수각)하야
그러니 요컨대 모름지기 급히 수각을 붙여서, 말하자면 지금 이 자리에서 손발을 붙여서. 그 말이야.
冷却面皮(냉각면피)하고
아주 얼굴을 싹 안면몰수하고. 딱 그 말이야. 면피를 아주 냉각시켜 버리고
不得受人差排(부득수인차배)
다른 사람의 차배-차정안배. 세상을 살려면 사람도 만나야 되고, 사람 노릇도 해야 되고. 그런 게 있잖아요? 그게 차배야. 오라는 데 가야되고, 인사해야할 데 해야 되고, 얼굴 내야할 데 내고. 그런 것 사람들의 차배를 받지 말라. 벼슬 그쯤 하고 있으니까 어디 가서 자리를 빛내야 할 때도 있고 그렇잖아요? 그런 것 하지 말라 이거예요. 사람들의 차배를 받지 말고. 모셔서 축사도 해 달라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게 다 차배예요. 사람들이 차배 하는 것을 받지 말라. 공부 좀 하려고 하면 사람 노릇 안해야 돼요. 사람 노릇 하면 자기 일 못해요. 아주 냉정하게. 근년에 큰스님들, 공부 좀 제대로 한 큰스님들도 보니까 거의 사람 노릇 안했어요. 공부할 때 보니까. 전화해서 그렇게 나오라고 해도 나오지 않고. 천하의 못된 놈이라고 손가락질 받고 살았는데 나중에는 그 스님이 큰소리 쳤어요. 그런 큰스님들이 많아요. 그렇습니다. 공부 좀 할 때는 사람 노릇 아예 안해야 돼요. 인간 취급 안 받아도 좋고. 인간 취급 해주는 게 뭐 대수입니까?
自家理會本命元辰(자가이회본명원신)하야 敎去處分明(교거처분명)하면
自家理會本命元辰(자가이회본명원신)하야
자신의 본명원신을 이해해서. 본명원신-이것도 본래면목, 근본 마음자리라고 할까요? 본래의 생명 그것을 이해를 해서 스스로가 그것을 이해를 해서
敎去處分明(교거처분명)하면
자기 갈 곳으로 하여금 분명히 할 것 같으면.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죽어서 어디로 갈 건지 하는 그 문제에 대해서 분명히 할 것 같으면
便是世間出世間(편시세간출세간)에 一箇了事底大丈夫也(일개요사저대장부야)리라
便是世間出世間(편시세간출세간)
세간 출세간에
一箇了事底大丈夫也(일개요사저대장부야)
세간 출세간에 있어서 일개 일 마친 대장부다. 일을 마친, 요사, 요사한. 禪家에서 요사한이라는 말을 얼마나 높이 씁니까? 요사한. 일 마친 사람이다. 좋은 뜻이죠. 일개 요사한이다. 일 마친 사람! 그래서 무사한. 일 없는 사람. 그러니까 일 없는 사람이면 된 거죠.
承(승)호니 連日去(연일거)하야 여참정(여참정)으로 道話(도화)라하니 甚善甚善(심선심선)이로다
承(승)호니
편지를 받으니
連日去(연일거) 如參政(여참정)으로 道話(도화)라
이참정 편지 다음에 놓은 이유가 거기 있네요. 매일매일 가서 이참정과 더불어 道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고 하니
甚善甚善(심선심선)이로다
매우 좋고 매우 좋은 일이로다.
此公(차공)이 歇得馳求心(헐득치구심)하야 得言語道斷(득언어도단)하고
차공은 이참정을 말하는 거죠. 이참정은 치구심을 쉬었어. 그리고 언어도단을 얻었어. 언어도가 끊어진 자리를 얻었어.
心行處滅(심행처멸)하며 差別異路(차별이로)에 覰見古人脚手(처견고인각수)하야
心行處滅(심행처멸)
또 심행처멸을 얻었어. 그래서
差別異路(차별이로)에
세상의 온갖 차별 현상에 대해서
覰見古人脚手(처견고인각수)이라
고인의 각수-이건 고인의 행장이라고 하죠. 고인의 살아온 길에 대해서 잘 엿보는 사람이다. 엿봐서
不被古人方便文字(불피고인방편문자)의 所羅籠(소라롱)일새
옛사람들의 어떤 행리, 옛사람들의 수단, 또는 법 쓰는 것. 각수, 수각 다 해당되는 건데 그래서 고인의 방편문자-옛사람들이 말씀하신 것에 걸려들지 않는다.
所羅籠(소라롱)
얽혀들지 않는다. 나롱하는 바를 잊지 않을 새
山僧(산승)이 見渠如此(견거여차)하고 所以(소이)로 便不曾與之說一字(갱부증여지설일자)는 恐鈍置他(공둔치타)어니와
山僧(산승)이 見渠如此(견거여차)하고
그래서 산승이 저 사람 보기를 이와 같이 했을 새
所以(소이)로 便不曾與之說一字(갱부증여지설일자)는
그래서 이 사람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아니한 것은, 한 글자도 더 이상 말하지 아니한 것은
恐鈍置他(공둔치타)이니라
저 사람을 오히려 더 못쓰게 만들까? 둔치하게 만들까 염려해서 그렇다. 이 편지가 바로 이참정에게 들어가겠죠. 이참정을 생각하고 쓰는 편지입니다. 이참정에게, 본인에게 쓴 것과는 좀 다르지 않습니까?
直候渠將來(직후거장래)하야 自要與山僧說話(자요여산승설화)하야사
直候渠將來(직후거장래)하야
바로 저 사람이 가져오기를 기다려서
自要與山僧說話(자요여산승설화)하야사
스스로 산승과 더불어서 설화하여- 그러니까 저 사람이 편지를 가져오거든 그때사 내 얘기를 하라 이거야. 먼저 쫓아가서 그렇게 하지 말고. 스스로 그렇게 할 때
方始共渠(방시공거)로 眉毛廝結(미모시결)하야 理會在(이회재)언정 不只恁麽(부지임마)코는 便休(편휴)로라
方始共渠(방시공거)로
그때에야 비로소 저 사람과 더불어 같이
眉毛廝結(미모시결)
눈썹을 미모- 마주 겨룰 수 있다. 마주 쳐다보고 그야말로 道談에 대해서 제대로 진지하게 이야기해서
理會在(이회재)언정
서로 이해할지언정
不只恁麽(부지임마)코는
다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便休(편휴)로라
그냥 가만히 있으라 이거여.
學道人(학도인)이 若馳求心(약치구심)이 不歇(불헐)하면 縱與之眉毛廝結(종여지미모시결)하야
學道人(학도인)이 若馳求心(약치구심)이
도 닦는 사람이 치구심이 만약에 쉬지 않을 것 같으면
縱與之眉毛廝結(종여지미모시결)하야
비록 그 사람하고 눈을 딱 서로 쳐다보면서 눈썹 맞대고 겨루어 봤자 거기에 대해서 서로 이야기해도 치구심이 남아있으면 서로 열만 내고 언성만 높아지지 아무런 득 될 게 없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공부에 대해서 한 생각 푹 쉬어야죠. 치구심 정도는 사라져야 이야기가 된다고요. 그러니 열만 내고 자기 잘 한다는 소리만 듣게 되지 아무런 소득이 없다. 그런 뜻입니다. 여기서. 그 사람하고 자주 만난다고 하니까, 거기서 이참정이 들으라고 하는 간접적인 말도 있고, 이 사람들에게 주의를 주는 말도 있고. 그렇죠.
理會(이회)인달 何益之有(하익지유)리요 正是癡狂外邊走耳(정시치광외변주이)니라
正是癡狂外邊走耳(정시치광외변주이)니라
이거야 말로 미쳐서 엉뚱한 대로 돌아 다니는 일일 따름이다.
古人(고인)이 云(운)호대 親近善者(친근선자)는 如霧露中行(여무로중행)하야 雖不濕衣(수불습의)나 時時有潤(시시유윤)이라
親近善者(친근선자)는, <치문>에도 나오죠. 아마 <치문>에서 배웠을 겁니다. 선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것은 마치 안개 속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비록 옷은 젖지 아니하나 때때로 축축이 윤기가 돌죠. 윤택해지죠. 그 안개 속에 다녀 봐요. 그냥 옷이 축축해지죠. 그렇듯이
但頻與參政(단빈여참정)으로 說話(설화)를 至禱至禱(지도지도)하노라
但頻與參政(단빈여참정)으로
이참정과 더불어
說話(설화)를 至禱至禱(지도지도)하노라
그 사람과 자주자주 만나라. 그 사람은 아주 도가 높은 사람이야. 자주 만나라. 이렇게 또 부탁도 합니다. 그런데
不可將古人(불가장고인)의 垂示言敎(수시언교)하야 胡亂穿鑿(호란천착)이니
不可將古人(불가장고인)의 垂示言敎(수시언교)하야 胡亂穿鑿(호란천착)하지 말지니
괜히 옛날 조사스님들 법문하는 고준한 이야기를 가지고
胡亂穿鑿(호란천착)
어지럽게,아주 어지럽게 천착-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지고, 이렇게 분석하고 저렇게 분석하고 그러지 말라. 고인의 어록을 보는데 그냥 순수하게 보지 그걸 뭐 눈 좀 열렸다고 둘이 이리 저리 천착하면 좋은 것 아니다 이거여.
如馬大師-遇讓和尙(여마대사-우양화상)하야 說法云(설법운)호대
如馬大師(여마대사)
마조 대사가
遇讓和尙(우양화상)
남악 회양 대사. 남악 회양 대사 밑에 마조 대사죠. 마조 대사가 남악 회양 대사를 만나서
說法云(설법운)호대
譬牛駕車(비우가거)에 車若不行(차약불행)이어든 打車卽是(타거즉시)아 打牛卽是(타우즉시)아
譬牛駕車(비우가거)에
유명한 말이죠. 비유컨대 소가 수레를, 멍에를 했는데 수레가 만약 가지 않으면
打車卽是(타거즉시)아 打牛卽是(타우즉시)아
수레를 때리는 게 옳으냐? 소를 때리는 게 옳으냐?
馬師聞之(마사문지)하고 言下(언하)에 知歸(지귀)하니 遮幾句兒言語(자기구아언어)를 諸方(제방)이 多少說法(다소설법)호대
마사가 이걸 듣고
言下(언하)에 知歸(지귀)하니
돌아갈 줄을 알았다. 회양 화상이 그걸 물으니까 마조 스님이 그걸 듣고는 비로소 그만 깨달았다.
遮幾句兒言語(자기구아언어)를 諸方(제방)이 多少說法(다소설법)호대
遮幾句兒言語(자기구아)
이 몇 마디의 말, 이 몇 구절의 말을
諸方(제방)이 多少說法(다소설법)호대
너도 나도 입이 있는 사람은 다 이야기한다. 오늘날까지도 이야기하는 거야. 打車卽是(타거즉시)아 打牛卽是(타우즉시)아!
우리나라 선지식 중에서도 이 설법 잘 하는 사람이 있어요. 타거즉시아 타우즉시아. 제방에서 이 이야기가 나자마자 多少說法(다소설법)을
如雷如霆(여뢰여정)하며 如雲如雨底(여운여우저)하야 理會不得(리회부득)하야 昔下名言(차하명언)하야 隨語生解(수어생해)어뇨
如雷如霆(여뢰여정)이야
우레와 같이, 번개와 같이 우레 소리하듯이 세상을 풍미했다 이거야.
如雲如雨底(여운여우)라
구름 몰려오듯이, 비가 막 쏟아 붓듯이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해서
理會不得(리회부득)하야 昔下名言(차하명언)해서
이회를 제대로 못해. 그렇게 말은 많이 하지만 이회를 못하고, 그릇 또 명언을 달아. 토를 달아. 착어를 붙여.
隨語生解(수어생해)하며
말을 따라서 알음알이를 내느냐?
見與舟峯書尾(견여주봉서미)에 杜撰解注(두찬해주)하고 山僧(산승)이 讀之(독지)코 不覺(불각)에 絶倒(절도)호라
見與舟峯書尾(견여주봉서미)에
보니 주봉서미-주봉에게 보낸 편지 끝에
杜撰解注(두찬해주)하고 山僧(산승)이 讀之(독지)코
거기에 뭐라고 주해를 붙였는데 아주 엉터리 주해, 그걸 두찬장로, 두찬주해. 두찬이라는 말도 잘 쓰죠. 杜는 상대의 주장을 막아버리고 자기 것만 자꾸 드러내는 거야. 그걸 두찬이라고 그래요. 남의 이야기도 좀 들어주고, 남의 생각도 좀 생각해주고, 왜 그런 이야기를 했는가? 하는 것을 들어줄 줄 알아야 하는데, 무조건 남의 주장은 막아버리고 자기 것만 자꾸 드러내는 것. 그걸 두찬-엉터리 주해다 이거지. 엉터리 해주하고 산승이 그 글을 읽어보니까
不覺(불각)에 絶倒(절도)호라
넘어질 뻔 했대. 몰란 결에 내가 꺼꾸러 질 뻔 했다.
可與說如來禪祖師禪底(가여설여래선조사선저)로 一狀領過(일장영과)하야 一道行遺也(일도행유야)어다
可與說如來禪祖師禪底(가여설여래선조사선저)로
여래선이니 조사선이니 하는 이런 말을 거기서 했더라. 여래선 조사선. 우리나라 조선말에 와서 제일 이야기가 많이 되었어요. 조사선이라는 것으로
一狀領過(일장영과)하야
한 페이지에다 조서를 받아. 허물이 서로 다르고 범죄 사실이
달라야 조서를 따로 받을 건데 이건 너무 똑같으니까 한 장에다가 조서를 꾸며도 똑 같겠다, 되겠다. 일장영과라는 말이 한 장에다, 한 페이지에다 조서를 받아서
一道行遺也(일도행유야)라
같은 길로 귀향을 보내야 된다. 귀향 보낼지어다. 그러니까 강급사가 주봉이라고 하는 사람과 같이 어울려 놀면서 주봉 편지 끝에다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나는 그렇게 본다 이거지.
來頌(내송)을 子細看過(자세간과)호니 却勝得前日兩頌(각승득전일양송)이어니와 自此(자차)로 可已之(가이지)어다
來頌(내송)을 子細看過(자세간과)호니
보내온 게송을, 게송을 지어서, 조금 소견이 들면 게송 잘 짓는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 소견이 확실히 달라졌을 때 그런 게송을 짓는 건 좋은데, 게송 쓰는 게 습관이 되어버리면 그것도 문제야. 그 보내온 게송을 자세하게 몇 번 보니까
却勝得前日兩頌(각승득전일양송)이라
지난날- 저번에 보내온 두 개의 게송, 이 사람은 게송을 잘 지어 보내나 봐요. 그 두 개의 게송보다는 조금 나아. 그렇지만 이것만 하고 끝내라.
自此(자차)로 可已之(가이지)어다
그만두어라. 이로부터 그만 두어라. 게송이나 짓는 그 따위 짓은 그만 하시죠.
頌來頌去(송래송거)에 有甚了期(유심요기)리요 如參政相似(여참정상사)하라
頌來頌去(송래송거)에
게송이 오고 게송이 감에
有甚了期(유심요기)리요
무슨 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게송 짓니 화두 한 번 더 들지. 게송 지으려고 머리 짜내고 말이야 그 뭐 공부냐 말이지.
如參政相似(여참정상사)하라
이참정처럼 못 닮아 가냐 그거여. 그 사람은 모범생이야. 그러니까 이참정처럼 공부에 임했으면 좋겠다. 이참정인들 어찌 게송 지을 줄 모르겠어? 천하의 선비 참정 벼슬까지 한 사람인데 왜 게송 지을 줄 모르겠어?
渠豈是不會做頌(거기시불회주송)이리요만은 何故(하고)로 都無一字(도무일자)오 乃識法者-懼耳(구이)니라
何故(하고)로 都無一字(도무일자)오
왜 한 마디도 없느냐 그 사람은. 게송 한 번 지어올 줄 모르느냐 말이야. 왜냐?
識法者-懼耳(구이)니라
법 아는 사람이 들었기 때문에 함부로 게송 못 지어.
間或露一毛頭(간혹로일모두)하면 自然抓着山僧痒處(자연조착산승양처)니
間或露一毛頭(간혹로일모두)하면
혹 사이에 조금만치라도 자기 공부에 대해서 보인다든지, 드러난다든지 할 것 같으면
自然抓着山僧痒處(자연조착산승양처)니
그 조금 한 마디씩 하는데 그 사람이 그것은 결국은 산승이 내가 가려운 곳을 너무도 정확하게 잘 긁어주는 말을 해. 그 뭐 게송 지어서 보내오고 보내가고 그렇게 안한다 이거야. 어쩌다가 편지 한 마디 씩 하는데 그건 너무 너무 내 가려운 곳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그런 글을 보내온다. 그런 뜻입니다.
答 江給事 少明 [勸不受差排 善自理解]
人生一世(인생일세)에 百年光陰(백년광음)이 能有幾許(능유기
허)오 公(공)이 白屋起家(백옥기가)하야 歷盡淸要(역진청요)하
니 此是世間(차시세간)에 第一等受福底人(제일등수복저인)이
나 能知慙愧(능지참괴)하야 回心向道(회심향도)하야 學出世間
脫生死法(학출세간탈생사법)하니 又是世間(우시세간)에 第一
等討便宜底人(제일등토편의저인)이라 須是急差手脚(수시급차
수각)하며 冷却面皮(냉각면피)하야 不得受人差排(부득수인차
배)하고 自家理會本命元辰(자가이회본명원신)하야 敎去處分
明(교거처분명)하면 便是世間出世間(편시세간출세간)에 一箇
了事底大丈夫也(일개요사저대장부야)리라 承(승)호니 連日去
(연일거)하야 여참정(여참정)으로 道話(도화)라하니 甚善甚善
(심선심선)이로다 此公(차공)이 歇得馳求心(헐득치구심)하야
得言語道斷(득언어도단)하고 心行處滅(심행처멸)하며 差別異
路(차별이로)에 覰見古人脚手(처견고인각수)하야 不被古人方
便文字(불피고인방편문자)의 所羅籠(소라롱)일새 山僧(산승)이
見渠如此(견거여차)하고 所以(소이)로 便不曾與之說一字(갱부
증여지설일자)는 恐鈍置他(공둔치타)어니와 直候渠將來(직후
거장래)하야 自要與山僧說話(자요여산승설화)하야사 方始共渠
(방시공거)로 眉毛廝結(미모시결)하야 理會在(이회재)언정 不
只恁麽(부지임마)코는 便休(편휴)로라 學道人(학도인)이 若馳
求心(약치구심)이 不歇(불헐)하면 縱與之眉毛廝結(종여지미모
시결)하야 理會(이회)인달 何益之有(하익지유)리요 正是癡狂
外邊走耳(정시치광외변주이)니라 古人(고인)이 云(운)호대 親
近善者(친근선자)는 如霧露中行(여무로중행)하야 雖不濕衣(수
불습의)나 時時有潤(시시유윤)이라 但頻與參政(단빈여참정)으
로 說話(설화)를 至禱至禱(지도지도)하노라 不可將古人(불가
장고인)의 垂示言敎(수시언교)하야 胡亂穿鑿(호란천착)이니
如馬大師-遇讓和尙(여마대사-우양화상)하야 說法云(설법운)호
대 譬牛駕車(비우가차)에 車若不行(차약불행)이어든 打車卽是
(타거즉시)아 打牛卽是(타우즉시)아 馬師聞之(마사문지)하고
言下(언하)에 知歸(지귀)하니 遮幾句兒言語(자기구아언어)를
諸方(제방)이 多少說法(다소설법)호대 遮幾句兒言語(자기구아
언어)를 諸方(제방)이 多少說法(다소설법)호대 如雷如霆(여뢰
여정)하며 如雲如雨底(여운여우저)하야 理會不得(리회부득)하
야 昔下名言(차하명언)하야 隨語生解(수어생해)어뇨 見與舟峯
書尾(견여주봉서미)에 杜撰解注(두찬해주)하고 山僧(산승)이
讀之(독지)코 不覺(불각)에 絶倒(절도)호라 可與說如來禪祖師
禪底(가여설여래선조사선저)로 一狀領過(일장영과)하야 一道
行遺也(일도행유야)어다 來頌(내송)을 子細看過(자세간과)호
니 却勝得前日兩頌(각승득전일양송)이어니와 自비(자차)로 可
已之(가이지)어다 頌來頌去(송래송거)에 有甚了期(유심요기)
리요 如參政相似(여참정상사)하라 渠豈是不會做頌(거기시불회
주송)이리요만은 何故(하고)로 都無一字(도무일자)오 乃識法
者-懼耳(구이)니라 間或露一毛頭(간혹로일모두)하면 自然抓着
山僧痒處(자연조착산승양처)니 如出山相頌(여출산상송)에 云
(운)호대 到處達人驀面欺之語(도처달인맥면기지어)는 可與叢
林(가여총림) 으로 作點眼藥(작점안약)이라 公(공)이 異日自見
矣(이일자견의)일새 不必山僧注破也(불필산승주파야)하노라
某_ 近見公(모_근견공)의 頓然改變(돈연개변)하야 爲此事甚
力(위차사심력)일새 故作此書(고작차서)하야 不覺縷縷(불각루
루)하노라
강급사에게 답하는 편지
[狀旨] 사람들의 가르쳐 지시함[差排]을 받지 않고, 스스로 잘 깨닫기를 권함
인생의 한 세상에 백년이라고 하는 시간[光陰]이 능히 그 얼마나 되겠는가? 그대가 초라한 평민으로 집을 일으켜서 높은 관직[淸要]을 다 역임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세간에 있어서 가장 으뜸으로 복 받은 사람이나, 능히 부끄러운[慙愧] 줄을 알아서 마음을 돌이켜 도를 향하여 출세간의 생사(生死)를 벗어나는 법을 배우니, 또 이 세간에서 가장 으뜸으로 편의[便宜]를 찾는 사람이다. 반드시 손과 다리를 급히 붙이며 낯가죽을 차게 하여 사람들의 명령[差排]을 받지 않고, 자기의 본분도리[本命元辰]를 깨달아 갈 곳으로 하여금 분명하게 한다면, 문득 세간 ․ 출세간에 한낱 일을 마친 대장부이니라.
편지를 받아보니, 날마다[連日] 가서 참정과 더불어 도담[道談]을 나눈다고 하니, 아주 좋고 아주 좋음이로다. 이 공(公 : 참정)은 치구(馳驅)하는 마음을 쉬어서 언어의 길이 끊어졌으며, 마음의 활동하는 곳이 멸함을 얻었으며, (고인의) 차별된 다른 길에 고인의 수단[脚手]을 엿보아서 고인의 방편인 문자의 걸림[羅籠]을 입지 않음일세. 내가[山僧] 그 (참정)의 이와 같음을 본 까닭에 다시 일찍이 그와 더불어 한 글자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마 그를 무디게 해 버릴까 염려해서 이니, 곧 그가 방문하여 안부를 묻기 위해 장차 와서 스스로 나와 더불어 이야기하기를 요구한다면, 바야흐로 비로소 그와 함께 눈썹을 겨루어서야 깨달아 앎이 있을지언정, 다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가만히 있어야 하리라.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약 치구하는 마음이 쉬어지지 않는다면, 비록 그들과 눈썹을 겨루어서 깨달아 앎인들 무슨 이익이 있으리오. 꼭 어리석고 미쳐서 밖으로 달릴 따름이다.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착한 이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마치 안개나 이슬 가운데르 행하는 것과 같아서 비록 직접 옷을 적시지는 않지만 때때로 젖음이 있다” 라고 하니, 다만 자주 참정과 함께 이야기하기르 절실히 믿고 절실히 비노라.
고인의 드리워 보이신 말씀의 가르침[言敎]을 가져서 가히 어지럽게 천착(穿鑿)하지 말지니, 이를테면 마조대사가 남악양화상을 만났는데 법을 말씀하여 이르시길 “비유하자면, 소 수레를 타고 가는데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쳐야 옳은가? 소를 쳐야 옳은가?” 라고 하니, 마조대사가 듣고 그 말씀 아래에 돌아갈 바를 알았으니, 이 몇 마디의 말씀을 제방에서 다소 설법하되 “천둥 같고 우레 같으며, 구름 같고 비와 같이” 하여도, 깨달아 앎을 얻지 못해 명언을 잘못 내려서 말을 따라 알음알이를 내는가?
주봉에게 준 편지의 끝에 두찬(杜撰)의 주해를 보고 산승이 저를 읽고는 나도 모르게 졸도(絶倒)할 뻔 하였노라. 가히 여래선 ․ 조사선을 말한 것과 더불어 한 장에 그 허물을 처리하여 한 길로 귀양 보낼지어다.
보내온 송(頌)을 자세히 살펴보니, 도리어 이 앞날의 두 송 보다는 뛰어났으나, 이로부터 가히 그만 둘지어다. 송이 오고 송하여 감에 무슨 마칠 기약이 있으리요. 저 참정과 같이하라. 그가 어찌 송을 지을 줄 모르리요만은 무슨 까닭으로 도대체 한 글자도 없는가? 이에 법을 아는 사람이 두려울 따름이니라. 간혹 한 터럭 끝만큼이라도 드러내면 자연히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나니, 저 ‘출산상’의 송에 이르되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만남에 뻔히 보면서 속인다”는 말은 가히 총람과 더불어 점안(點眼)하는 약이 됨이라. 그대가 다른 날에 스스로 보게 될 것이므로 내가 반드시 주를 붙여 깨트리지 않겠노라! 내가 요즘에 그대가 갑자기 (옛 습관을) 고치고 변화하여 이 일을 위해 몹시 힘쓰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에, 이 글을 지으면서 나도 모르게 세세하고 잗다랗게 썼노라.
如出山相頌(여출산상송)에 云(운)호대 到處達人驀面欺之語(도처달인맥면기지어)는 可與叢林(가여총림)으로 作點眼藥(작점안약)이라
如出山相頌(여출산상송)에
산에서 나온 모습에 대한 게송을 지었는데 이런 말을 했다 이거야.
到處逢人驀面欺之語(도처봉인맥면기)
라는 구절이 있는 거죠. 여기 전체 게송이 28註에 다 있죠.
眼皮盖盡三千界(안피개진삼천계)요
鼻孔盛藏百億身(비공성장백억신)
뒤에 한번 넘겨 보세요. 76쪽에. 이게 유명한 게송이에요. 그전에 옛날 선학원 주렴에 달려 있었는데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네. 비공성장백억신.
箇箇丈夫誰是屈(개개장부수시굴)
靑天白日莫謾人(청천백일막만인)
咄 (돌!)하고
到處逢人驀面欺(도처봉인맥면기)어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그 마지막 구절 도처봉인맥면기.
그러니까 가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거든 문득 얼굴을 속일지어다. 이르는 곳마다 사람을 만나거든 빤히 보면서 속이는구나. 해석을 그렇게 했네요. 아주 유명한 글이거든요. 이렇게 천하 사람들이, 천하 총림에서 너도 나도 읊조릴 수 있고, 어떤 모범이 될 수 있는 그런 한 마디 쯤 쓰면 어때서 그저 어디 쓸 데도 없는 그런 게송만 자꾸 지어서 보는데 괜히 눈만 피곤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이 말은 아주 유명하다는 거야.
可與叢林(가여총림)으로 作點眼藥(작점안약)이라
눈을 뜨게 하는 약 노릇을 한다는 거야. 이참정의 게송이 이 쯤 되고 있다는 거야.
公(공)이 異日自見矣(이일자견의)일새 不必山僧注破也(불필산승주파야)하노라
공이 다른 날 스스로 알게 될 거야. 이런 사실을 스스로 알게 될 거야.
不必山僧注破也(불필산승주파야)하노라
거기에 대해서 이참정의 유명한 게송에 대해서 또 뒷말 달아서 설명해주길 바라는 모양인데 아마 당신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異日自見(이일자견)-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반드시 산승이 그것에 주해를 달고 착어를 붙여서 설파해 줄 필요가 없다.
某_ 近見公(모_근견공)의 頓然改變(돈연개변)하야 爲此事甚力(위차사심력)일새
某_ 近見公(모_근견공)의 頓然改變(돈연개변)해서
내가 근래에 그대의 돈연- 갑자기 개변해서
爲此事甚力(위차사심력)일새
이 일을 위하는데 아주 매우 힘쓰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보았다.
故作此書(고작차서)하야 不覺縷縷(불각루루)하노라
故作此書(고작차서)하야
그래서 내가 애착을 가지고 좀 생각을 해서 쓴 소리 같지만 그래도 당신이 이 일에 대해서 상당히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 같아서 내가 이렇게 이야기 했다.
不覺縷縷(불각루루)하노라
몰란결에 이렇게 지저분하게 이야기가 길어졌다. 縷縷(루루)라고 하는 게 떨어진 옷 ‘루’자죠. 그렇게 됐다하는 내용입니다. 이런 편지도 있어요. 강급사에게 보내는 이런 편지입니다. 편지 하나하나가 좀 예습도 많이 하고 복습도 하고 그래서 깊이 잘 음미해보면 대단한 편지입니다.
答 富樞密 季申(一) [不管知解 善參活句]
答 富樞密 (답 부추밀)
추밀이라고 하면 대충 짐작하겠죠? 추밀이라고 하는 벼슬을 하는 사람에게 답하는 편지입니다.
不管知解 善參活句(불관지해 선참활구)
알음알이를 관계치 말고 활구를 잘 참구하라. 그러니까 지식, 식자우환이라고 지식이 좀 있는 것, 공부하는 데는 방해가 된다. 특히 활구 참선하는 데는 지식이 장애가 되니까.
示諭 (시유)호대 蚤歲(조세)에 知信向彼此道(지신향차도)러니 晩年(만년)에 爲知解所障(위지해소장)하야
示諭 (시유)호대
보낸 편지에 보이되
蚤歲(조세)
젊은 나이에
이 도를 믿을 줄을 알았다. 그러다가
晩年(만년)에 知解所障(지해소장)이라
그 지식, 알음알이 거기에 장애되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未有求悟入處(미유구오입처)일새 欲知日夕(욕지일석)에 體道方便(체도방편)이라하니 旣荷至誠(기하지성)이라
未有求悟入處(미유구오입처)일새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는 것이 있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는 게 많으니까 그 나름대로 확철대오는 못하고 그 나름대로 이리저리 대충 알아서 끼워 맞추고 말았다는 거죠.
欲知日夕(욕지일석)에 體道方便(체도방편)이라
그래서 밤낮 정말 도를 제대로 체득할 그런 방편을 알고자 한다. 하는 편지를 해 보냈어요. 그렇게 솔직하게 자기 고백을 해오니
旣荷至誠(기하지성)이라
이미 당신의 지극한 정성을 내가 부담이 된다 이거야. 짊어졌다.
不敢自外(불감자외)일새 據款結案(거간결안)하야 葛藤少許(갈등소허)호리라
不敢自外(불감자외)일새
감히 내가 스스로 외면하지 못할 새
據款結案(거간결안)하야 葛藤少許(갈등소허)호리라
거간결안- 그 어떤 법에 의해서, 법에 근거를 해서 어떤 안건을 작성하겠다. 거간결안이란 그런 거여. 공부에 어떤 조항이 있겠습니까? 공부에는 그런 정관 같은 게 없죠. 그렇지만 공부에는 공부의 길이 있다 이거지. 그런 공부의 길에 근거를 해서 어떤 방법을 한 번 이야기 해 보겠다. 거간결안이라. 이런 표현들이 추밀 벼슬을 하는 속인들에게는 이해하기가 너무 쉬운 거죠. 이런 표현이. 거간결안해서
葛藤少許(갈등소허)하겠다.
좀 되도 안한 소리 해 볼 테니까 들으시오. 이렇게 해놓고
只遮求悟入底(지자구오입저)_ 便是障道知解了也(편시장도지해료야)니 更別有甚麽知解(갱별유심마지해)_爲公作障(위공작장)이며
只遮求悟入底(지자구오입저)가
다만 이 깨달아 들어가기를 구하는 그것. 깨닫기를 구하는 그것. 그것이
便是障道知解了也(편시장도지해료야)라
곧 도를 장해하는 지해가 되었다. 도를. 깨닫기를 구해서 우리가 발심을 했죠. 또 그것 때문에 공부하고요. 그런데 사실은 그것이 깨달음을 장해한다. 지극히 모순된 말 같지만 그전에 기도 이야기라든지, 또 오정지심이 재전돈방-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이 앞에 딱 놓여있어서 그것이 장해가 된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깨닫고자 하는 그 마음이 장애가 된다. 곧 도를 장애하는 알음알이다.
更別有甚麽知解(갱별유심마지해)가 爲公作障(위공작장)이며
무슨 또 특별한 알음알이가 있어서 그대에게 장애 노릇을 하겠는가? 무슨 뭐 공부 많이 했고, 불교 교리 많이 알고, 궁극적으로는 그게 장애가 되는 것처럼 생각 들지만 최종 장애는 깨달으려는 그 마음이 장애다.
畢竟(필경)에 煥甚麽(환심마)하야 作知解(작지해)며 知解(지해)는 從何而至(종가이지)며 被障者(피장자)는 復是阿誰(부시아수)오
畢竟(필경)에 煥甚麽(환심마)하야 作知解(작지해)며
필경에 우리가 알음알이라고 하는 것, 한번 따져 보자 이거야. 뭘 가지고 알음알이라고 하느냐? 그러면 그 알음알이, 지해는 어디서부터 오는 거냐? 도대체. 뭘 배웠다고 합시다. 뭘 배워서 아는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지금 도를 장애하는 그 알음알이는 어디서 오느냐? 또 장애를 입는 사람, 장애를 당하는 사람은 누구냐 말이야. 復是阿誰(부시아수)오?
只此一句(지차일구)에 顚倒有三(전도유삼)하니 自言爲知解所障(자언위지해소장)이 是一(시일)이요 自言未悟(자언미오)하야 甘作迷人(감작미인)이 是一(시일)이요 更在迷中(갱재미중)하야 將心待悟_是一(장심대오_시일)이니
只此一句(지차일구)에 顚倒有三(전도유삼)이다.
이 한 마디 속에 말하자면 알음알이가 장애가 되었다 하는 이 한 구절입니다. 이 한 마디 속에 전도-잘못된 것이 세 가지가 있다.
自言爲知解所障(자언위지해소장)이 是一(시일)이요
알음알이가 장애가 되었다 하는 그 말이 벌써 틀렸고,
自言未悟(자언미오)하야 甘作迷人(감작미인)이 是一(시일)이라
스스로 나는 깨닫지 못한 사람이야. 그래서 스스로 미혹한 사람이다 라고 자처하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다. 야~ 이 대혜스님의 분석, 정말 아주 눈부시고 예리하고 그렇습니다. 스스로 미혹했다. ‘나는 못 깨달은 사람이다’ 라고 해서 자처하는 거야. 이게 상당히 겸손한 것 같고 우리가 못 깨달았으니 당연히 그래야 될 것 아니냐? 고 생각할 것 같지만, 깨달음을 향한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이 자세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럼 깨닫지도 못했는데 깨달았다고 고개 쳐들고 그렇게 하라는 그런 뜻은 더욱 아니죠. 그야말로 깊은 뜻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更在迷中(갱재미중)하야
굳게 미혹한 가운데 있어서
將心待悟_是一(장심대오_시일)이라
마음을 가져서 깨닫기를 기다리는 그것이 또한 하나다. 다시 살펴보면 스스로 알음알이가 장애가 된다고 하는 것. 그 다음에 자신은 미혹한 사람이다, 못 깨달은 사람이다 라고 하는 것. 그 다음에 깨닫기를 기다리는 마음을 가져서 깨달아야 될텐데, 깨달아야 될텐데....... 하는 것. 선명해요. 문제 제기하는 것이.
只遮三顚倒(지자삼전도)_便是生死根本(변시생사근본)이라 直須一念不生(직수일념불생)하야 顚倒心絶(전도심절)하야사
只遮三顚倒(지자삼전도)
다만 이 세 가지 전도된 것이
便是生死根本(변시생사근본)이라
삶과 죽음의 근본이다.
直須一念不生(직수일념불생)해서
바로 모름지기 한 생각, 한 생각 일어나지 않는 일념불생- 한 생각 일어나기 이전-일념불생해서
顚倒心絶(전도심절)
뒤바뀐 생각 이것이 끊어져야
方知無迷加破(방지무미가파)며 無悟可待(무오가대)며 無知解可障(무지해가장)이니 如人(여인)이 飮水(음수)에 冷煖(냉난)을 自知(자지)라
方知無迷加破(방지무미가파)며
야~ 이것 참, 미혹한 것 이거 깨트릴 것이 아니구나. 또 깨달음을 기다릴 것도 또한 아니구나.
無悟可待(무오가대)
깨달음을 가히 기다릴 것이 없다. 미혹을 깨트릴 것이 없다.
無知解可障(무지해가장)
알음알이가 장애될 것도 없다. 라고 하는 것을 바야흐로 알게 될 것이다. 무미가파! 무오가대! 무지해가장! 이것 참 쉽게 말할 것은 아닌데 상당한 경지의 상당한 이야기입니다. 깨달은 사람이 참 쉽게 쉽게 이야기했는데 우리가 사량분별로라도 여기에 뭔가 조금 접근을 해야 돼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그래야 좀 공부하는 맛이 나고 그래요. 그런 경지 - 미혹, 깨트릴 것이 없다. 내가 송광사에서 관음전에서 있었던 이야기, 바로 그 점이죠. 無迷加破(무미가파), 어두움을 제거할 게 본래 없다 라고 하는 것. 불을 켰는데 어둠이 어디로 나가고 어쩌고 할 것 없이 그냥 밝은 거여. 그럼 어둠이라는 게 없다는 것입니다. 무미가파여. 어둠이라는 게 본래 없어요. 無明이라는 게 본래 없다는 거죠. 無悟可待(무오가대). 無知解可障(무지해가장).
如人(여인)이 飮水(음수)에 冷煖(냉난)을 自知(자지)라
물을 마시는데 차고 더운 것은 본인만이 알죠.
久久(구구)하면 自然不作遮般見解也(자연부작자반견해야)리라
오래 하면 자연히 당신이 갖고 있는 그런 견해는 짓지 않을 것이다.
但就能知知解底心上(단취능지지해저심상)하야 看(간)하라 還障得也無(환장득야무)아
但就能知知解底心上(단취능지지해저심상)하야
다만 능히 알음알이를 아는 지지해저심상- 알음알이를 아는 그 마음 위에서, 그 마음 위에 나아가서 살펴보라. 그러니까 나는 알음알이가 있다. 망상이 많다. 망상이 많다 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그 마음. 거기에 떡 한 번 서보라 이거야. 망상이 많은 것까지는 좋다 이거야. 그런데 무엇이 들어서 망상이 많은 줄 아느냐 하는, 그 망상이 많다는 거기에 한번 서보라. 정말 그 자리, 망상을 아는 그 자리, 사물을 본다. 또는 반문문자성이라고 <능엄경>식으로 말을 하자면, 듣는 것을 돌이켜 듣는 그 놈을 들어 보라. 이렇게 이야기가 되지 않습니까? 반문문자성. 듣는 그 사실, 그 자성을 들어라. 망상을 짓는 것이 누구라고 하는 사실을 아는, 망상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그 자리, 그 자리에서 한번 살펴보라.
還障得也無(환장득야무)아
거기에 또 무슨 장애를 하는 것이 있느냐? 이거야. 그 자리는 그런 게 붙을 자리가 아니거든요. 붙을 자리는 아직 그 자리에 선 게 못 되죠. 그러니까 반문문자성, 듣는 것을 돌이켜서 듣는 그 자성을 듣는 게 못되는 거죠. 여기는 망상하는 것을 아는 그 자리에 올라서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서면 장애가 없을 것이다.
能知知解底心上(능지지해저심상)에 還有如許多般也無(환유여허다반야무)아
能知知解底心上(능지지해저심상)에
능히 알음알이를 하는 줄 아는 그 마음에
還有如許多般也無(환유여허다반야무)아
허다한 것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그 자리에는 알음알이고 뭐고 지혜고 어둠이고 밝음이고 뚝 끊어진 자리죠. 그 자리는. 좀 너저분한 소리를 하면 그건 근본 자리이거든요. 한마음 자리이고, 최초의 일념 자리이고. 그러니 거기에는 그런 것이 붙을 수가 없는 거죠.
從上大智慧之士(종상대지혜지사)_莫不皆以知解(막불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며 以知解(이지해)로 爲方便(위방편)하야
從上大智慧之士(종상대지혜지사)가
옛날 큰 지혜를 가진 그런 선비가
莫不皆以知解(막불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며
모두 다 이 알음알이로서 벗을 삼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 알음알이를 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또 이렇게 설법을 하신 겁니다. 옛날에 깨달은 사람들이 전부 알음알이로 벗을 삼았어. 그리고 알음알이로 방편을 삼았어. 또
於知解上(어지해상)에 行平等慈(행평등자)하며 於知解上(어지해상)에 作諸佛事(작제불사)호대
於知解上(어지해상)에
알음알이 위에서
行平等慈(행평등자)
평등한 자비를 행했어. 궁극에 이 지혜는 망상 아닙니까? 이 망상이 곧 지혜라. 결국은 망상이 지혜의 깨달음이 되는 것이지 그 알음알이 빼놓고 달리 깨달음의 지혜가 없다하는 것이죠. 어둠 외 달리 밝음이 없고, 밝음 그 자리가 어둠 자리이고, 어둠 자리가 곧 밝은 자리이죠. 그래서 행평등자- 평등한 자비를 행하며 또 알음알이 그 위에서
作諸佛事(작제불사)라
온갖 불사를 다 하죠. 짓되
如龍得水(여룡득수)하고 似虎靠山(사호고산)하야 終不以此(종불이차)로 爲惱(위뇌)하나니 只爲他識得知解起處(지위타식득지해기처)일세니라
如龍得水(여룡득수)하고 似虎靠山(사호고산)이야
終不以此(종불이차)로 爲惱(위뇌)라
마침내 이것으로서 번거러움을 삼지 않는다.
只爲他識得知解起處(지위타식득지해기처)일세
왜 그러냐? 그 사람은 이 알음알이가 일어난 그 당처 자리, 그 알음알이가 일어난 그 뿌리를 알기 때문이다. 식득하기 때문이다. 그 알음알이가 일어난 그 뿌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그 알음알이가 하등의 병이 되지 않는다. 그러니 벗을 삼았다. 알음알이로서 방편을 삼았고, 알음알이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했고, 알음알이로서 모든 불사를 다 지었다. 마치 알음알이가 그것이 如龍得水(여룡득수)야.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더라. 절대 그것으로 문제 될 게 없다. 終不以此(종불이차)로 爲惱(위뇌).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왜냐? 알음알이가 일어난 그곳을 알기 때문이다.
旣識得起處(기식득기처)인댄 卽此知解(즉차지해)_便是解脫之場(편시해탈지장)이며 便是出生死處(편시출생사처)라 旣是解脫之場(기시해탈지장)이며 出生死處(출생사처)인댄
旣識得起處(기식득기처)인댄
이미 그 알음알이가 일어난 곳을 알았을진댄
卽此知解(즉차지해)가 便是解脫之場(편시해탈지장)이며
곧 이 알음알이가 곧 해탈의 장소야. 해탈의 장소. 그 어둠이 곧 밝은 곳이라고요.
便是出生死處(편시출생사처)라
생사에서 벗어나는 그 자리이다. 이미 해탈의 장소이고, 생사를 벗어난 그 곳이라면
則知底解底當體寂滅(즉지저해저당체적멸)이며 知底解底(지저해저)_旣寂滅(기적멸)인댄 能知知解者(능지지해자)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며
則知底解底(즉지저해저)
안다, 이해한다 라고 하는 것이 어디 가겠어요?
當體寂滅(당체적멸)이야.
뚝 끊어지고 없다. 왜냐? 알음알이가 일어나는 곳, 당체- 뿌리를 알기 때문에. 뿌리를 안다고 하는 말은 그 뿌리에서 중심을 잡고 있기 때문에 그 지엽적인 알음알이, 知 ․ 解 이런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거지. 또 그것은 무시해도 좋아. 그래서 당체즉멸.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知底解底(지저해저)가 旣寂滅(기적멸)인댄
知니 解니 하는 것이 이미 적멸일진댄
能知知解者(능지지해자)도
능히 지해를, 알음알이를 아는 그 사람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야
거기에 어떻게 ‘즉’ 자니, ‘해’자니 하는 것이 ‘나는 나다’ 라는 것이 거기에 나눠질 수 없는 거지. ‘나는 나다’라고 그렇게 쪼개질 수가 없는 거야. 능지지해자도 불가불적멸이야. 어쩔 수 없이 즉멸한 그 자리다.
菩提涅槃(보리열반)과 眞如佛性(진여불성)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러니 更有何物可障(갱유하물가장)이며 更向何處(갱향하처)하야 求悟入(구오입)이리요
菩提涅槃(보리열반)과 眞如佛性(진여불성)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야
거기에 보리니 열반이니 진여니 불성이니 그 시시한 소리, 그게 <임제록>같은데서는 그게 전부 사람을 옭아매는 수갑이다, 목에 씌우는 칼이다. 법신이니 뭐니 하는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을 구속하는 존재들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죠. 여기는 보리니 열반이니 하는 것도, 진여니 불성이니 하는 것도 불가불적멸이다. 뚝 끊어지고 어디에 날아가 버렸는지 흔적도 없다 이거야. 우리 지금 머리에는 보리, 열반, 진여, 불성. 이게 뭐 아주 고급 용어죠. 불교에서도. 중요한 아주 핵심적인 용어가 되다보니 머리에 꽉 들어가 짓누르고 있죠. 참 병에 걸려도 크게 걸린 거죠. 사실은. 공부한 만치 또 부담이 되는 거예요. 병이 되는 거죠. 불가불적멸, 적멸이 되어야 되는데
更有何物(갱유하물)
그렇다면 다시 무슨 물건이 장애하겠는가? 무슨 물건이 있어서 장애하겠는가? 알음알이가 장애라고 하니, 대혜스님에게는 이런 알음알이가 장애가 되었다고 하니 그 편지 받았을 때 이야기 꺼리가 얼마나 좋았겠어요? 야~ 이거 참, 이번에 내가 편지 쓰기 쉽게 되었다. 이런 생각 했을 거야. 아마. 更有何物可障(갱유하물가장)이며
更向何處(갱향하처)야
다시 어느 곳을 향해서 깨달아 들어감을 구하겠는가?
釋迦老子曰(석가노자왈) 諸業從心生(제업종심생)일새 故說心如幻(고설심여환)이로니
釋迦老子曰(석가노자왈) 諸業從心生(제업종심생)일새
모든 업은 마음으로부터 나왔을 새
故說心如幻(고설심여환)이로니
그러므로 마음은 幻과 같다 고 한다. 그 업이 삶이니까. 우리는 아직까지는 그 업을 무시를 못하고 살죠.
若離此分別(약리차분별)하면 則滅諸有趣(즉멸제유취)라하며
若離此分別(약리차분별)하면
만약에 이런 분별을 떠날 것 같으면
則滅諸有趣(즉멸제유취)라
온갖 갈래, 유취라고 하는 말은 우리가 하루 동안 살아가면서 지옥도 되고, 아귀도 되고, 온갖 아수라, 별별 것 다 되지 않습니까? 하루 중에도. 그런 어떤 갈래들이 다 소멸하게 된다.
그 밑에 계속 다 조사스님들의 좋은 말씀인데 남겨뒀다가 다음 시간에 하고 부처님 말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서장>은 78쪽 밑에서 다섯째 줄부터
僧(승)이 問大珠和尙(문대주화상)호대 如何是大涅槃(여하시대열반)이 닛고 珠云(주운)호대 不造生死業(부조생사업)이 是大涅槃(시대열반)이니라
僧(승)이 問大珠和尙(문대주화상)호대
여기서부터 할 차례이죠. 부추밀에게 답한 이 내용은 알음알이의 문제, 흔히 知解라고 하는 ‘알 지’자, ‘알 해’자.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데, 내용이 그 알음알이- 일반적으로 의식상에서 일어나는 온갖 잡념들- 이것을 지해라고 하는데 이런 잡념, 물론 경전을 이해한다든지, 古人의 言句를 이해한다든지, 또는 거기에 대한 그 나름의 이해를 한다든지 하는 문제를 잡념이라고 표현하기는 좀 뭣하다손 치더라도 간화선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다 잡념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을 설사 하더라도 그 역시 잡념이니까요.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 부처가 되어서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대한 원력도 당체에 있어서는 아주 큰 잡념일 뿐이니까. 그래서 그런 것까지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래서 그런 “알음알이에 관계치 말고 오로지 활구를 참구하도록 하라” 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죽 해오는 과정에 알음알이의 문제를 좀 더 이야기하면서 부처님 말씀, 또는 조사스님들의 말씀을 인용하는 중간이죠.
大珠 慧海(대주 혜해)라는 스님은 그 어록을 저도 봤지만 그 어록이 정말 뛰어납니다. <頓悟入道要門論>이라고 해서 아주 뛰어난 어록이 있어요.
어떤 스님이 대주화상에게 묻되
如何是大涅槃(여하시대열반)이 닛고
어떤 것이 대열반이닛고.
珠云(주운) 不造生死業(부조생사업)이 是大涅槃(시대열반)이니라
대주 화상이 말하기를 생사업을 짓지 아니하는 것이 대열반이다. 이런 문답은 보통 소개되는 <돈오입도요문>에는 이런 말 없어요. 그것은 대주 혜해 스님이 정식으로 하나의 저술로서 남긴 것이 <돈오입도요문론>이고, 또 어떤 <돈오입도요문론>에 보면 같이 합본으로 되어 있기도 한데, 어록으로서 문답한 평소의 내용을 거기서 따로 어록으로서 취급하고 있는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습니다. 아주 뛰어난 문답들이 있어요.
여기도 대열반이란 생사업을 짓지 않는 것이 대열반이다.
아주 맞는 말이죠. 그리고
僧(승)이 云如何是生死業(운여하시생사업)이닛고 珠云求大涅槃(주운구대열반)이 是生死業(시생사업)이라하며
승이 말하기를 어떤 것이 생사업입니까?
珠云求大涅槃(주운구대열반)이 是生死業(시생사업)이니라
이런 말을 아무나 못하는 거죠. 생사업이 뭐냐? 물었는데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생사업이다. 그랬습니다. 얼른 들으면 참 큰일 날 이야기죠. 성불하려고 하는 것이 생사업이다. 이 말하고 같습니다. 그 속 뜻은요. 성불하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생각이냐? 그렇지만 성불하려는 그것은 아까 이야기처럼 원대한 원력이고, 꿈이고, 또 중생을 제도하겠다고 하는 보살심이라손 치더라도 그 역시 是生死業(시생사업)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이 마당에 있어서는 대열반을 구하는 것이 그것이 생사업이다. 이런 대목이 있고.
또 대주 스님 이야기가 났으니까 如何是解脫(여하시해탈)이닛고? 라는 말도 있어요.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누가 너를 묶었느냐?”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누가 너를 묶었느냐? “무엇이 벗어나는 것입니까?”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묶여 있을 때 질문할 수 있는 그런 문제지 않습니까? 묶여 있을 때 벗어나는 길을 묻지, 묶여있지 않다면 벗어나는 문제가 그 사람에게 있을 턱이 없죠. 그래서 누가 너를 묶었느냐? 내가 보기에는 아무도 그대를 묶거나 얽어매고 속박시킨 것이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누가 너를 묶었느냐? 이렇게 되묻습니다. 참~ 멋진 대목이야! “어떤 것이 해탈입니까?” “누가 너를 묶었느냐?” 이게 선문답의 백미이죠. 그런 문답하며 그 외에도 뛰어난 문답들이 있습니다.
又古德(우고덕)이 云(운)호대 學道人(학도인)이 一念(일념)에 計生死(계생사)이면 卽落魔道(즉락마도)요 一念(일념)에 起諸見(기제견)하면 卽樂外道(즉락외도)라하며
또 고덕이 말하기를
學道人(학도인)이 一念(일념)에 計生死(계생사)이면
도를 공부하는 사람이 한 순간이라도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면
卽落魔道(즉락마도)요
마구니의 도에 떨어지는 것이고
一念(일념)에
한 순간이라도
起諸見(기제견)
이런 소견 저런 소견, 이런 견해 저런 견해를 일으킬 것 같으면
卽樂外道(즉락외도)다
魔道(마도)니 外道(외도)니 이렇게 나누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만은 여기서 오십보 백보입니다. 온갖 견해를 일으키는 것. 이것은 다 삶과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든 그 외 사상적인 것, 이 사상이 좋느니 ‘계’라는 것은 요즘말로 하면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 저런 사상을 이야기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다 사량분별이고, 지해-알음알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일반적인 사변으로 분별할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은 다 여기서 부정하고 나선 것입니다.
又淨名(우정명)이 云(운)호대 衆魔者(중마자)는 樂生死(낙생사)어든 菩薩(보살)은 於生死(어생사)에 而不捨(이불사)하고
또 정명이 말하되
衆魔者(중마자)는
마구니라고 하는 것들은
樂生死(낙생사)어든
생사를 즐기죠. 우리 중생들도 사실은 가만히 보면 생사를 즐겨요. 좋아해요. 생사를 좋아해요.
그런데 보살은 좋아하거나 그러지 않고
生死(생사)에 而不捨(이불사)라
생사에서 보살의 삶을 버리지 않는다. 여기서 생사를 버리지 않는다 하는 의미보다는 어떤 보살의 길을 버리지 않는다. 생사의 길에서 보살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이런 말이죠. 그 마구니, 우리를 포함한 마구니들은 대개 삶의 문제, 죽음의 문제를 그만 낙착- 즐겨 집착하고 있어. 생사 문제를 오히려 즐기고 있다고요. 즐기고 있다는 게 그것을 자기가- 요즘 의미로 보면 또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즐긴다고 하는 것은 여유 있게 끄달리지 않고 아주 여유작작한 그런 삶을 사는 것을 생사를 즐긴다- 이렇게 표현하고 이해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에요. 그만 생사에 떨어져서 거기에 묻혀서 산다는 거야. 그런데 보살은 보살의 삶을 생사에 있어서도 보살의 삶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보살의, 생사야 있든 없든 관계없이 보살의 삶을 걸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말이에요. 불교라고 하는 것은 궁극에 보니까요, 보살도를 실천하는 일이지, 그 외 아무것도 아니에요. 成佛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진정한 보살도를 실천하기 위해서 힘을 얻자는 거지, 그 외 다른 게 아니에요. 성불이 목적이 아니거든요. 불교는. 성불해서 다른 사람을 제도하자는 그게 목적이지 성불은 하나의 과정입니다. 사실은. 그러면 목적은 뭐냐? 보살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불교에서 최고의 경전이라고 하는 <화엄경>을 보면 시종일관 보살도 이야기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그 방대한 <화엄경>도 사실은 한마디로 요약 하면 53선지식을 친견하고 최후로, <40본 화엄경> 뒤에 보면 보현행- 53선지식 친견하는 것도 역시 普賢行(보현행)이고, 그 모든 것을 또 요약해서 결론으로 표현한 것이 普賢行願品(보현행원품)입니다. 보현행원품은 <화엄경>의 결론이자 불교의 결론이에요. 그 모든 과정을 53선지식을 친견하면서 十信(십신), 十住(십주), 十行(십행), 十回向(십회향), 十地(십지), 等覺(등각), 妙覺(묘각)까지 다 성취하고 나서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 라고 했을 때 菩薩道(보살도), 普賢行願(보현행원)- 보현행원은 보살도의 대표죠. 그 수많은 보살의 덕목을 압축하고, 압축하고 한 것이 열 가지 보현행원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불교의 결론이에요. 보현행원을 실천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그 보살도를 통해서 성불하고, 성불하고 나서 역시 보살도 실천하는 것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과정도 보살도요, 결과도 보살도고, 전부 보살도지 그 외 성불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죠. 사실은 깨닫는다 이런 이야기는 거의 이야기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삶이냐, 생사문제가 사실은 상당히 중요하지만 어떤 차원에 오른 사람들은 생사문제 이미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파악하고 있어요. 그러면 자기 인생이 얼마까지든 간에 관계없이 그야말로 묵묵히 보살도를 실천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보살은 생사속에서- 於生死(어생사)- 생사속에서 보살도를 보살이 가야할 길, 보살의 덕목을 버리지 않는다. 중요한 이야기죠. 이건 조금 대혜스님이 의도한 바에서 조금 빗나간 이야기입니다만은 보살도를 이야기하니까 또 이렇게 이야기되었습니다.
外道者(외도자)는 樂諸見(낙제견)이어든 菩薩(보살)은 於諸見(어제견)에 而不動(이부동)이라하니
외도들은 온갖 소견, 온갖 사상, 온갖 주의주장, 거기에 빠져 있어요. 여기에 ‘낙’은 落着(낙착)-즐겨 집착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까? 누구든지 자기 소견 하나, 알량한 자기 소견 하나 그것 가지고 옳다고 빡빡 우겨쌓고 그것을 평생 못 버리는 거야. 평생만 못 버리는 게 아니라 세세생생 못 버려요. 이 몸은 버려버리고 나면 끝이지만 소견은 세세생생 못 버리는 것이 소견입니다. 그래서 소견 따라 몸 받아 나는 거죠. 또. 소견 따라서. 견해, 주의주장, 사상, 생각 같은 뜻인데 그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을 좌우하는 것이죠. 거기에 즐겨 집착하고 있는 거죠. 그러니까 세상에 별별 일이 다 일어나는 거 아닙니까? 별별 일이.
작금의 어떤 종교 집단의 사건 같은 것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정말 큰 문제죠. 그게 전부 諸見(제견)- 여러 가지 각자의 사상과 주의주장과 소견,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말하자면 거기 지도자는 거짓 사기를 쳤을지 모르지만 따라가는 사람은 최소한도 거짓으로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자기 생각에는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또 몇 해 전에 그보다 더 엄청난 일들이 우리나라에서도 있고 했는데 그런 게 다 제견에 해당되는 거죠. 어떤 자기의 주의주장에 떨어져 있으면, 거기에 치우쳐 있으면 그것은 외도입니다. 외도가 다른 것이 아니고. 불교는 주의주장이 없습니다. 주의주장이 없어요. 오늘 만선동지 중도송이라고 하는 것, 이걸 오늘 끝 시간이 되어서 내가 준비를 해왔습니다만은 八正道(팔정도)에서 소위 ‘정’ 자를 많이 써서 正見(정견), 正思惟(정사유) 등등 正命(정명) 이렇게 하는데 ‘정’ 자를 우리가 생각하는, 아는 ‘바른’ 그게 아니에요. 그야말로 中道(중도) 정견에 있습니다. 어디에도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다 수용하는 것. 어떤 소견도 치우치지 아니하면서 상반된 소견을 다 수용하는 것, 그것이 중도입니다.
그것이 정견이에요. 팔정도의 정견도 그겁니다. 정견을 제대로 이야기하려면 ‘중도 정견’ 이라 해야 맞는 겁니다. 첫 항목이죠. 팔정도에서 첫 항목이 정견 아닙니까. 正命(정명)이라고 하는 것을 ‘바른 직업’ 이러지 않아요? 생명이라는 ‘명’ 자니까. 뭐가 바른 직업입니까? 보통 교리적으로 해석하는 게 전부 틀리게 해석하고 있어요. 거의가. 바른 직업이 뭐예요? 바른 직업이. 바른 직업은 없습니다. 정해진 것이 없습니다. 그게 정명이에요. 상황 따라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거예요. 어떤 직업도 가질 수 있는 거예요. 상황 따라서. 보통 도덕적으로 이야기하는 계율 하고는 다릅니다. 차원이 달라요. 최소한도 ‘바를 정’ 자를 썼을 때는 중도 정견, 중도적인 정명, 중도적인 正業(정업). 정업이란 게 뭡니까? ‘바를 정’ 자, ‘바를 업’ 자. 어디든지 치우치지 않는 업이예요. 내가 무엇을 하더라도- 승려 생활을 한다, 우리가 초기에는 그러지 않습니까? 중물 안든 것을 가지고 상당히 탓하죠. 이제 나이가 들면 중물 안 빠진 걸 탓합니다. 저건 아직도 중물이 안빠졌다고. 빠져야 되거든요. 그게 정업입니다. 드는 것만이 최상이 아니죠. 정말 들고 나서는 빠져야 하죠. 그러니까 승려라고 하는, 승려 생활하는 것을, 우리가 사니까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한다면 정업이라고 합시다. 천만에. 그게 정업이 아니에요. 그걸 만약에 정업이라고 한다면 곤란하죠. 정업은 정해진 게 없어요. 상황 따라서 그렇게 이해해야 팔정도를 제대로 이해하는 거죠. 정견도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바른 겁니까? 바른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는 줄 알고 그러면서 상황 따라서 수용하고, 떨어지지 않고, 이게 중도거든요. 여기 중도 이야기가 설명될 때 좀 더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만은 여기 견, 사람은 순전히 견해로 살지 않습니까? 생각으로 살아요. 일체 생각으로. 이걸 흔히 안목이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눈 가지고 사는 거죠. 眼目(안목). 그러니까 외도들은 그런 여러 가지 온갖 견해, 자기 나름의 소견, 거기에 딱 집착해서 사는데 보살은 어떻게 於諸見(어제견)에 而不動(이부동)이라- 모든 소견, 온갖 사람들이 그런 어떤 생각과 사상과 주의 주장을 일체 다 섭렵하고 알고 이해하는데 그 온갖 주의주장과 사상에 흔들리지 않는다. 이부동이라. 얼마나 근사한 말입니까? 흔들리지 않는 것이지 어떤 주의주장을 내세우는 게 보살이 아닙니다. 보살은 사상이 없어요. 불교는 사상이 없는 사상입니다. 사실은. 사상이 있으면 그건 정상적인 불교가 아니에요. 이보십시오. 이 ‘견’ 자가 사상이라는 말이거든요. 보살은 於諸見(어제견)에 不動(부동)한다고 했지 어떤 사상을 내세운다고 하는 것. 그게 아니에요. 대개 학자들이 무슨 사상, 무슨 사상해서 불교 안에 죽 사상을 열거하는데 깨달은 선지식이 그런 이야기 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열반사상이다, 무슨 중요 사상이다, 근래 우리 학계에서 내세우는 말들 많죠. 다 미혹한 중생들이 만든 이야기지, 깨달은 사람들이 무슨 여래장 사상이다, 열반 사상이다, 중도 사상이다 이런 말 한 것 혹시 봤습니까? 경전에서나 조사 어록에서. 그 누가 불교를 잘 알고 있겠어요? 그런 문제들도 우리가 기초 교리 강좌나 하고 있는 이런 마당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도 우리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봐야 돼요. 생각하고 제대로 이해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불교를 제대로 안 부처님이나 그 외 조사스님들은 무슨 사상, 무슨 사상이라고 열거해서 한 적이 없습니다. 그걸 내세워서 이야기하면 그건 이미 치우친 소견이기 때문에 그건 이미 불교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죠.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나 그런 이야기를 하죠. 보십시오. 菩薩(보살)은 於諸見(어제견)에 而不動(이부동)이라, 온갖 소견이 있을 수 있어. 그러나 거기에 그대로 불교를 아는 보살은 거기에 동하지 않아. 움직이지 않아. 그래 그럴 수도 있어. 깨닫지 못한 너로서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라고 그냥 이해하는 거죠. 그렇지만 거기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하는 그런 뜻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합니다.
此乃是以知解(차내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고 以知解(이지해)로 爲方便(위방편)하야 於知解上(어지해상)에 行平等慈(행평등자)하고 於知解上(어지해상)에 作諸佛事底樣子也(작제불사저양자야)니라
此乃是以知解(차내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고
이건 편지에 쓰인 원래 의도하고는 조금 빗나간 이야기입니다. 내 이야기는. 그러나 그런 것들도 어쩌면 편지의 의도보다 더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불교 일반으로서 볼 때요.
이것은 이에 지해- 알음알이로 벗을 삼는, 주려- 벗을 삼는 것이고 또 지해로서 방편을 삼아서 지해 위에서
行平等慈(행평등자)
우리의 알음알이 또는 사변, 소견 이런 것으로 벗을 삼고 알음알이로 방편을 삼고 또 거기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또 지해 위에서
作諸佛事底樣子也(작제불사저양자야)라
불사를 짓는 본보기다. 이게 어떤 상황, 어떤 경지를 통과한 이후에 제대로 어떤 경지를 밟은 이후에 나오는 어떤 마음의 작용들은 전부 이렇게 씌어 진다는 거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건 지혜가 아니죠. 그러나 미혹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건 지해가 되니까. 그래서 그것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지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어떻게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건 못해내는 것이거든요. 그러나 여기서 깨달은 사람들의 입장에서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알음알이 위에서 평등한 자비를 행하고, 알음알이 위에서 모든 불사를 짓는 본보기다. 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왜 무엇으로 인해서 無라고 했느냐? 이렇게 해서 스님은 성공을 했어. 이렇게 의심이 들어가서 성공을 했어. 이것은 조주 스님이 한 게 아니야. 뒷사람이 조주가 ‘無’라고 해놓으니까 왜 ‘무’라고 했는가? 왜 ‘무’라고 했는가? 왜 ‘없다’고 했는가? 해서 성공했다고요. 이 분은. 그런데 이렇게 의심이 들어가야 된다구요. 의심이 안되면 공부가 되는 게 아니예요.
우리가 아주 값지고 중요한 물건을, 예를 들어서 내가 금방 사용하던 것을 -펜이라고 하던지, 안경이라고 하던지, 늘 쓰던 것을 어느 순간 어디 뒀는데 잊어버렸단 말이야. 그런데 한 발자국도 옮기지 않았어. 어디를 갔어야 들어다 놓거나 하지. 그랬을 때 이게 없어졌다 이 말이야. 누가 온 사람도 없고. 환장할 일 아니예요? 이게.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아무리 찾아봐도 없는 거야. 주머니고 어디고 열 번 스무 번 찾아봐도 없다 이거야. 그랬을 때 이 안경이 어디 갔을까? 그런 상황에서는 의심하지 말라 해도 의심하게 돼요. 누가 아무리 가까운 친구가 와도 친구 별로 반갑지도 안해요. 환장할 노릇이니까. 금방 보던 안경이 열 번 스무 번 찾아봐도 없는 거야. 누가 들어온 적도 없고. 뭐 고양이가 온 적도 없고, 쥐가 온 적도 없고. 그 때는 누가 와도 반갑지도 않고, 욕을 해도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의심이, 화두가 그렇게 들어가야 됩니다. 그렇게 들어가지 않으면 그냥 염불이에요. 염불.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호대 拘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州云無(주운무). 그것만 외우고 있는 거야. 안되니까 그것만 외우고 있는 거야. 송화두. 하다못해 나온 이야기가 誦話頭(송화두), 念話頭(염화두), 세상에 그런 문자를 다 만드는 거야. 몸부림치다보니까 하는 거지. 그것도 다 이해할 만 하긴 하죠. 다. 송화두 염화두. 억지로 의심을 지어내는 거야. 그래서 옛날 사람이 성공했던 이야기도 한번 상기하면서. 부처님은 온갖 불성이, ‘유정 무정이 개유불성’이라고 했는데 왜 없다고 했는가? 이런 것도 생각해 보고. 그래도 의심이 안가는 거야. 유정이고 무정이고 불성이 뭔지 뭐, 있다고 하지만 어떻게 해서 있는 건지.... 그러니 이게 의심이 될 턱이 있나? 이렇게 가지고 있던 물건 금방 잃어버리고 못찾는 데는 의심이 가죠. 그렇게 순수하게 의심이 들어가야 돼. 그 후대를 보면 송나라를 거쳐서 원 ․ 명 ․ 청, 원나라로 명나라로 청나라로 내려오면서 차츰차츰 근기가 하열해지고 또 머리가 정보를 많이 받아들여지고 하다 보니 자꾸 산만해지는 거야. 그러니 집중력이 떨어지는 거야. 집중력이 떨어지니까 온갖 방법이 또 생기는 거야. 온갖 방법이 생겨서 뭘 어떻게 하고, 뭘 어떻게 하고. 그래서 처음에는 가짜 의심이 생겼다가 그 가짜 의심도 계속 하다보면 진짜 의심이 분발한다. 몰록 진짜 의심이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까지 해가면서 참다운 의심의 세계를 끌어 들이려는 노력들을 하는데, 이게 참 쉬운 일이 아니에요. 쉬운 일이 아니기 보다 어렵고 어렵고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여기서 대혜스님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이것을 가지고 의단-의심 덩어리가, 疑團獨露(의단독로)라고 하지 않습니까? 제일 화두에서 요구하는 것, 간화선에서 제일 요구하는 게 의단독로야. 의단독로 안되면 아무 소용 없어요. 의심 덩어리가 홀로 드러나. 오직 의심덩어리가 하나! 이게 어디 갔을까? 반가운 친구가 와도 “어, 왔어.” 하고는 이 안경 생각이겠지. 잃어버린. 반가운 친구가 오고 뭐 싫은 소리, 좋은 소리 암만 해봐야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고 뭔 소리 했는지 별 관심도 없고. 오로지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인 그 엄청난 의심, 그 생각만 딱 하고 있을 때 그것이 의단. 그것을 저 앞에서 일단화상사라- 한 덩어리의 불과 같아서 거기에 촉착편설이라, 거기에 마치 편설이 정학무인이 거기에 떨어지면 흔적도 없죠. 언제 거기에 큰불구덩이에 눈이 와봤자 저 위에서 이미 녹아서 증발되어버리고 마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망상들이 그런 상황으로 바뀌어버린다는. 아무리 의심을 밀어내어봐야 나가지도 않고, 안들려야 안들수도 없고. 그때는 의심을 안하고 싶어도 저절로 의심이 되는 거야. 안할 수가 없는 거야. 밀어내도 나가지 않는다 하는 그런 표현들도 어록에 있고 그러는데. 이걸 ‘주운무’, ‘무’ ‘무’ 또 어떤 스님은 ‘무’라 그렇게 고함치기도 하고.
또 이걸 내가 해인사 첫 철 있을 때 구체적인 이름은 들 수 없지만 구참 스님이 밤새도록 둘이서 ‘무’라고 해야 옳다. 없다고 해야 옳다. 그걸 가지고 밤새도록 토론하는 소리를 문 밖에서 포행하다가 들었는데. 없다고 하든, ‘무’라고 하든 그건 사실 별 문제가 아니야. 이래야 옳다, 저래야 옳다 하는 것은 아니야. 의심이 가지느냐가 문제지. 없다고 하나, 무라고 하나 그게 뜻이 통해 버리면, 뜻만 통해 버리면 그건 상관 없거든요. 그게 참 정상적으로 순리대로 일어나는 의심 이게 참 어렵다는 사실. 이게 순리대로 의심이, 아까 비유대로 의심이 되지 않고는 의단독로는 바라보기 어려운 거죠. 그래서 뭐 어떤 딱 부러지게 방법을 제시할 길은 없습니다. 그런데 최소한 조금이라도 의심이 되게 하려면 ‘무라~’ 이렇게 하는 것 보다는 ‘무’ 이렇게- 무라고, 없다고 했잖아요. ‘주운무’ 라고 했어요. 그럼 우리가 들을 때 청천 벽력같은 소리라 이거야. 부처님은 모든 유정 무정이 불성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 스님은 없다고 했으니까, 조주는 ‘무’라고 했으니까 내가 그 다음에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 길게 생각하면 안돼요. 여기서부터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호대 拘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州云無(주운무) 이걸 외우는 것은 하도 안돼서 자꾸 반복해서 상기하지만 제대로 되려면 州云無(주운무) 라고 했을 때 일체의 간격도 두지 말고 ‘무’라고 이렇게 숨이 딱 끊어지듯이 의심이 챙겨서 들어가야지 축 처진 상태로 ‘무라~ 무라~’ 이렇게 해서는 이건 의심하는 말이 아니잖아요. 이건 설명조지. ‘무’라고 했더니.
이 ‘무’라는 말에 대해서 의심하고 들어가는 거야. 최소한도 조주스님에 대해서 한순간이나마 의심하고 들어가는 입장이 됩니다. ‘무라~’하면 ‘무’다 이거야. 그렇게 해서 지워 들어가면 그것도 물론 진의는 아니야. 진의는 아니지만 가짜 의심이라도 그게 진의에 가깝고, 진의에 접근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이라. ‘무!’ 하고 이렇게 숨이 막히듯이, ‘없다니’ 우리가 보통 일상생활에서 당치도 않은 얘기를 했을 때 그것을 되받아칠 때 그런 느낌! 그런 감정과 그런 느낌으로 내가 붙일 수 있는 말. 그걸 ‘무’라고 하든 ‘없다’고 하든 그건 상관이 없어요. 뜻이 바로 이해되어버리면 의심이 가게 되어 있어요. 그런 감정으로 몰아가야 그래도 의심이 다만 얼마동안이라도 지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참고로 들어두십시오.
此一字子(차일자자)는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내시최허다악지악각저기장야)라
此一字子(차일자자)는
이 한 글자는
허다한 악지악각을 꺽어버리는 무기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주의사항을 이야기하는데
不得作有無會(부득작유무회)하며 不得作道理會(부득작도리회)하며 不得向意根下(부득향의근하)하야 思量卜度(사량복탁)하며 不得向揚眉瞬目處(부득향양미순목처)하야
不得作有無會(부득작유무회)
유다 무다, 있다 없다 하는 그런 알음알이를 짓지 마라. 두 번째
不得作道理會(부득작도리회)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어. 조주가 ‘무’라 했을 땐 거기 틀림없이 무슨 도리가 있다. 이런 생각도 하지 말라. 또
不得向意根下(부득향의근하)하야 思量卜度(사량복탁)
6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생각의 변두리에서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을 이어간다는 사량복탁은 생각을 계속 해가는 거니까 그것은 의심이 아니죠. ‘무!’ 하고 숨도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고 해서 그 상대를 치고 들어가는 그런 느낌으로 해서 일단 1~2분이라도 스톱된 상태가 되어야지, 생각이 자꾸 이어져 가는 것을 사량복탁이라고 해요. 또
不得向揚眉瞬目處(부득향양미순목처)하야 타根(타근)하며
양미순목-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이는 그곳에서 뿌리내리지 말라. 생각을 짜낼 때 그러지 않아요. 생각을 짜낼 때 눈썹을 움직이고 눈을 깜박거리고 하는 거기에서 자꾸 사량분별하는, 그런 습관이 현저하게 있는 사람들이 있죠. 뭐 생각을 해내려고 할 때. 고개를 기웃거리는 사람이 있고, 자꾸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습관이 되어서 생각이 안날 때도 갸웃거리는 사람이 있다고요. 누구라고 내가 말은 못하겠어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말 못할 사람이 많네. 그 양미순목이라는 게 그겁니다. 생각 안나면 눈 깜박깜박 그러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어떤 생각을 짜내려고 하지 마라. 또
不得向語路上(부득향어노상)하야 作活計(작활계)하며 不得颺在無事甲裏(부득양재무사갑이)하며 不得向擧起處(부득향거기처)하야 承當(승당)하며
不得向語路上(부득향어노상)하야 作活計(작활계)
말, 어로상이라는 건 말로 하다가 어떤 활계, 살 길. 사는 살림살이. 활계라는 말 자주 써요. 이런데 보면. 자기의 어떤 살림살이, 그게 재산이죠. 살림살이로 짓지 말라. 말장난 좀 하지 말라 이거야. 이리저리 말을 가지고 그것이 자기의 공부인양, 재산인양 그렇게 하지 말라. 또
不得颺在無事甲裏(부득양재무사갑리)하며
무사갑리-이건 거북이가, 자라나 거북이가, 자라가 그런가요? 거북이는 안그렇고. 적이 오면 목을 자기 몸속으로 들이밀죠. 워낙 쇳덩이 같은 갑옷이니까 발로 차도, 그 위에 탱크가 지나가도 상관없는 거야. 목만 그 안에 들어가 버리면. 그런 식으로 어떤 의식을, 생각을 움츠려서 가만히 그냥 있는. 아까 앞에서 여소압축 식으로 가만히 있는 그런 것도 하지 말라.
不得向擧起處(부득향거기처)하야 承當(승당)
거기처를 향해서 알려고, 승당이라는 말은 알아맞히다. ‘무’라고 하는 뜻을 알아맞히려고 하지 말라 이거야. 그럼 ‘무’라고 하는 것은 알아맞히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의식이 끊어진 곳, 여기 뭐라고 했어요? 아까. 온갖 사량분별을 끊어버리는 무기라 그러지 않았습니까? 요즘 또 그런 이야기, 하여튼 못깨달은 사람들끼리 노는 세상이니까, 화두가 방편이다, 방편이 아니다. 서점에 가 봐요. 금방 있어요. 화두는 방편이 아니다. 별별 소리가 다 있지 않습니까?
여기 此一字子(차일자자)는 뭐죠? 무라고 하는 화두야.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也(내시최허다악지악각저기장)이라. 온갖 허다한 사량분별을 끊어버리는 무기다. 그랬어요. 무기는 뭐죠? 방편이예요. 여기다 방편이라는 말을 안붙였지만 사람이 평소에 무기 들고 다녀야 하는 것 아니잖아요? 상대를 무찌르려면 나를 공격하는 사람이 있으면 상대를 무찌르기 위해서 무기가 잠깐 필요한 거지, 평소에 무기가 필요한 것은 아니에요. 이렇게 분명하게 간화선의 지침이 확실하게 되어 있는데도 무슨 화두가 뭐다, 뭐다 온갖 이야기를 다 하는 거죠.
승당이라는 게 거기처를 향해서, 그 ‘무’라고 하는 이치를 알려고 ‘무’라는 했을 때 그 이치를 알려고, 아는 소리 하려면 거기 별별 소리 다 나올 수 있지. 별별 소리. 그러면 온갖 악지악각을 끊어버리는 기장, 무기라고 했을 때는 이것은 무라고 하는 화두를 들면서 의단독로로 이끌고 가는 거야. 몰고 가는 거. 내 의식을, 나의 정신세계를 의단독로로 몰고 가는 거야. 몰고 가는 데는 무에 대해서, 무의 이야기를 아무리 알아도 그 의단독로 쪽으로 내 의식을 한 곳으로 집중시켜 가는 것 하고는 전혀 별개라. 전혀 별개라고. 뭐 1700공안이 아니라 만 팔천 공안을 이리 꿰고 저리 꿰도 그것은 1분도 의단독로가 안되는 거죠. 1분도 의단독로가 안되고 1700공안 다 알 수가 있는 거야. 설명은 다 할 수가 있는 거야. 승당할 수가 있어. 그건 제대로 아는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아는 것 하고, 일념이 되는 것 하고는 전혀 별개요. 화두는 일념이 되도록, 의단독로가 되도록 몰고 가는, 우리의 의식 세계를 의단독로로 몰고 가는 이 길이 간화선, 참선하는 법이지. 그 외에 안다, 모른다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야. 아무 의미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여기에 그런 주의를 8가지 해놓은 거야. 또
不得向文字中引證(부득향문자중인증)하고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단향십이시중사위의내)하야 時時提撕(시시제시)하며 時時擧覺(시시거각)호대 狗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云無(운무)를 不離日用(불리일용)하고
不得向文字中引證(부득향문자중인증)
문자중을 향해서 인증하지 마라. 어디에 뭐라 했고, 어디에 뭐라 했고 주욱 끌어다가 박사 논문 쓰듯이 온갖 인용문 다 해다가 그렇게 문자를 설명하고 하지 마라. 문자 10종 병 중에 여덟 가지를 여기에 소개 했네요. 그리고는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단향십이시중사위의내)하야 時時提撕(시시제시)하고
때때로, 어느 때던지 항상 그 문자를 이끌고
時時擧覺(시시거각)
때때로 들라. 들어서 깨어 있으라. 성성하게 覺者(각자)는, 저번에 한번 설명했죠? 성성하게 깨어있는 것. 그런 상태로 의식을 몰고 가는 거죠. 그리고
狗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云無(운무)를 不離日用(불리일용)하고
일상생활에 떠나지 말고
試如此做工夫看(시여차주공부간)하면 月之日(월지일)에 便自見得也(변자견득야)이리니 一郡千里之事都不相妨(일군천리지사도불상방)하리라
試如此做工夫看(시여차주공부간)
시험 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갈 것 같으면
月之日(월지일)에
달이 가고, 한 달이 가고, 하루가 가고 할 것 같으면
便自見得也(변자견득야)이리니
그 스스로 견득, 보게 될 것이다. 여기 문자 화두 드는 문제에 대해서 부추밀 편지위에, 특히 오늘 공부한 요 위에 아주 소상하게 잘 되어 있습니다. 요 지침에서 벗어나면 안돼요. 벗어나면 잘못하는 것입니다. 고 스스로 견득, 보게 될 것이니 그렇게 될 것 같으면
一郡千里之事都不相妨(일군천리지사도불상방)하리라
아무리 많은 번뇌, 일상사, 일군을 다스리는 그런 세상사라 하더라도 아무 관계가 없을 것이다. 할 수 있다 이겁니다. 이 사람은 추밀 벼슬을 하는 사람이니까. 추밀 벼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추밀 벼슬은 한 나라, 일개 군, 일개 읍, 일개 시, 나라라 하더라도 그 일 하는데 아무 관계없을 것이다. 그런 뜻입니다.
古人(고인)이 云(운)호대 我遮裏(아자리)는 是活底祖師意(시활저조사의)라 有甚麽物(유심마물)이 能抱執他(능구집타)리요하니 若離日用(약리일용)하고 別有趣向則是(별유취향즉시)는 離波求水(리파구수)며 離器求金(이기구금)이라 求之愈遠矣(구지유원의)리라
古人(고인)이 云(운)호대 我遮裏(아자리)는
옛사람이 말하기를 나의 이곳은
是活底祖師意(시활저조사의)라
살아있는 조사의 뜻이다. 바로 이 자리는. 이 문제에 있어서는-아자리는- 살아있는 조사의 뜻이다.
有甚麽物(유심마물)이 能抱執他(능구집타)리요
무슨 물건이 있어서 이 살아있는 조사를 구속하고 붙들어 맬 수가 있겠는가? 살아있는 조사가 뭐겠어요? 지금 말하고 보고 듣는 그겁니다. 그 외 뭐가 있습니까? 또. 그것 가지고 일용사, 살아가는 거예요. 그것 가지고. 우리가 밥 먹고, 옷 입고, 타피부득처, 정말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가고 오고, 차타고, 말 하고, 사람 상대하는 바로 그거에요. 그게 일용사고 그게 그 사람이야. 그게 살아있는 조사야. 若離日用(약리일용)하고 여기 죽 나와 있어요. 만약에 일상사, 세상사, 일용은 일상사를 떠나고
別有趣向則是(별유취향즉시)
따로 어떤 갈 곳이 있다면, 향해서 갈 곳이 있다면 시는
離波求水(리파구수)며
이것은 마치 물결을 떠나서 물을 구하는 것이다. 흐린 물은 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여기서는 물결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보충 설명으로서 흐린 물은 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물이 가라앉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이파구수야. 여긴 물결이라고 했는데 파도치는 물결, 출렁거리는 물결은 물이 아니야. 안정되야만 물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과 같다. 여기 할 이야기 다 한 거예요. 이 대목이.
離器求金(이기구금)이라
금을 가지고 컵을 만들었다 이거야. 그런데 이 컵은 금이 아니다 이거야. 이 컵 말고 따로 금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求之愈遠矣(구지유원의)리라
구할수록 더욱 멀어질 것이다. 자, 금으로 이 컵을 만들었는데 이건 컵이다. 사람들이 전부 컵이라고 하니까. 그러면 이 컵을 깨든지, 녹이든지 해서 무슨 모양으로 만들 수 있겠어요? 금 만의 모양이 있습니까? 금 만의 모양이 있냐구요? 불상도 금의 모양이 아니에요. 그건 불상이지. 금 만의 모양은 없어요. 그러면 출렁거리던 물이든, 고요히 멈춰 있는 물이든 다 똑같은 물이지, 물 만의 어떤 모습은 없어. 출렁거리는 대로 다 물이야. 흐린 대로 다 물이라구요. 흐린 대로. 아까 내가 서두에 뭐라고 했죠? 흐린 물을 가라앉혀서 맑은 물이 되는 것이 공부의 길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렸다 라고 내가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그런 식으로 하는 건 불교 공부가 아닙니다. 대개 그렇게 아는데 그건 잘못 아는 거예요. 여기 이야기 다 해놨잖아요? 요 마지막 구절에 할 이야기 다 해놨습니다. 정 공부에 관심이 있으시면 이 구절만 계속 읽고, 이걸로 명상을 하고, 이 문제로 명상의 주제를 삼고, 끊임없이 명상을 해보면 아마 답이 나올 거요. 비록 사량분별로 얻은 답이라고 해도 답이 나올 겁니다. 흐린 물 그대로 물이예요. 출렁거리는 물 그대로 물이야. 그 점이 우리가 꼭 이해해야 될 대목입니다. 대혜스님도 긴 이야기, 공부하는 방법 이야기 하다가 정말 하고 싶은 소리, 정말 속에 있는 소리 한 마디 한 거여. 狗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이런 이야기 초보자에게 하듯이 하다가 이 대목에 와서 고인의 말을 척 하나 일컫으면서 당신의 뭐라고 할까? 상당법어격인 그런 말씀을 여기서 我遮裏(아자리)는 是活底祖師意(시활저조사의)라 有甚麽物(유심마물)이 能抱執他(능구집타)리요 若離日用(약리일용)하고 別有趣向則是(별유취향즉시)는 離波求水(이파구수), 물결을 떠나서 물을 구하는 격이요, 그릇을 떠나서 금을 구하는 격이라. 여기서 물결은 뭐죠? 세상사죠. 세상사. 우리 일상사에요. 보고 듣고 싸우고 지지고 볶고 온갖 세상사 희로애락이 뒤엉켜 있는 그것을 물결이라고 하거든. 세파라고 그러죠? 세파. 그 세파가 뭐라고? 바로 출세간사야. 세파 그대로가 출세간사라. 나는 불교의 온갖 많은 가르침 중에서도 이런 대목이 참 마음에 들고 ‘아~ 바로 이거구나!’하는 내나름의 소신이 있어서 이런 문제가 나오면 열을 조금 내고 이야기가 그렇게 됩니다. 잠간 쉬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애착하는 애착심이 있을 때 자기의 권속이든 자기의 자식이 됐든지, 자기의 가까운 사람이 됐든지 그런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情’이지 ‘자비’가 아니지 않습니까? 상당히 애지중지 위하죠. 자기 생명까지 버리면서 자식을 위하는 것 아닙니까? 그건 정이지 자비의 차원은 아니라고요. 그런데 어떤 경지를 넘어서 역시 또 그러한 ‘정’보다 더 열렬한, 강한 자비가 나와야 되겠죠.
只爲他了達三祗劫空(지위타요달삼기겁공)하야 生死涅槃(생사열반)이 俱寂靜故(구적정고)니라
只爲他了達三祗劫空(지위타요달삼지겁공)하야 生死涅槃(생사열반)에
다만 저것은 삼지겁이 공한 것을 요달해서, 삼지겁을, 삼아승지겁을 지내야 성불한다하는 그 이론입니다. 이 한 말 속에 삼아승지겁을 보살도를 실천하고, 뭣을 실천하고, 실천한 뒤에사 비로소 성불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하는 이론. 그런데 그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서 생겼느냐? 이거야. 삼지겁을 지난 뒤에 성불한다고 하는 건 당치도 않은 이야기다. 그건 깨닫지도 못한 사람들의 소리다 이거지. 그런데 너무 그런 이야기를 하면 못 알아듣는 사람, 그리고 물러가는 사람들이 너무 아까와서 그래서 엉터리 불법이지만 그런 이야기를 해서 그런 근기들을 좀 건지고, 달래서 근기를 좀 상승시켜서 나중에는 제대로 된 할 소리를 하기 위해서 그런 이야기도 있어요. 불교 안에서도 그런 이야기가 있어요. 삼아승지겁을 닦아야 성불한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진실이 아니죠. 삼지겁이 텅 비어서 공하다는 사실을 요달해서, 공하다면 시간이라는 건 없는 거죠.
生死涅槃(생사열반)이 俱寂靜故(구적정고)니라
생사열반이 함께 적멸한 까닭이니라.
旣未到遮箇田地(기미도자개전지)인댄 切不可被邪師輩(절불가피사사배)의 胡說亂道(호설난도)하야 引入鬼窟裏(인입귀굴리)하야 閉眉合眼(폐미합안)하고 作妄想(작망상)이어다
旣未到遮箇田地(기미도자개전진)댄
그랬잖아요? 이미 이러한 전지에 이르지 못했을진댄
切不可被邪師輩(절불가피사사배)의 胡說亂道(호설난도)하야
이런 전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그런 전지에 이르렀다면 문제없지만, 만약에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면 간절히 삿된 스승 무리들의 호설난도- 이렇게 말하고 저렇게 말하고, 경우 따라서 별별 소리 아주 어지럽게. ‘호’는 오랑캐들이 막 떠드는 소리, 저 변방에, 예를 들어서 우리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뭐라고 떠들어 대는 소리를 호설이라고 해요. 한나라 사람들은 이 오랑캐들의 말소리를 한 마디도 못알아들으니까 ‘저거들이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그런 식으로 취급할 때 호설. 그래요. 난도도 아주 어지럽게 말한다. 그 삿된 스승 무리들이 그렇게 엉터리 이야기들을 하는 소리를 입어서
引入鬼窟裏(인입귀굴리)
귀신 굴속에 들어가서 캄캄한, 귀신들은 아주 컴컴한데, 귀신 나올 것 같은, 귀신이 어디 있다, 없다 하는 그런 망상 부리니까 우리가 보통 눈에 ‘저기는 꼭 귀신이 나올 것 같다.’ 라고 하는 걸 상상하면 돼요. 귀신이 나올 것 같은 그런 굴속에
떠억 앉아서, 마음이 그런 상태로 되어서
閉眉合眼(폐미합안)이라
눈썹을 닫고, 눈을 감고 그래서
作妄想(작망상)
망상을 짓지 말지어다. 제발 좀 그렇게 묵묵히 쉬어가고, 쉬어가라. 휴거헐거. 그리고 생각 드러내고 드러내라. 조용히 있으라. 눈을 딱 감고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상태로 있으라 하는 그런 공부 좀 제발 하지 말라 하는 거죠.
邇來(이래)에 祖道衰微(조도쇠미)하야 此流_如麻似粟(차류_여마사속)하니 眞是一盲(진시일맹)이 引衆盲(인중맹)하야 相牽入火坑(상견입화갱)이라 深可憐愍(심가연민)이로다
邇來(이래)에 祖道衰微(조도쇠미)하야
근래에 도가 자꾸 쇠퇴해져서
此流_如麻似粟(차류_여마사속)이라
이러한 류가, 이렇게 공부 지도하는 사람들이 말하자면 삼대와 같고, 삼 알과 같다 해도 좋아요. 삼밭을 본 사람이 없으니까 참 문제네. 어릴 때 삼밭을 보면 빽빽한 게 정말 못자리 해놓은 것 같습니다. 그건 본래 모종을 그렇게 하죠. 삼밭과 같고 조와 같다. 조는 아주 알이 작은 곡식 아닙니까?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 류들이 불법 문중에 많으니
眞是一盲(진시일맹)이 引衆盲(인중맹)하야
이것은 참으로 한 맹인이 여러 맹인들을 이끌고
相牽入火坑(상견입화갱)이라
마치 불구덩이로 이끌고 들어가는 것과 같다.
深可憐愍(심가연민)이로다
심히, 가히 불쌍하고, 애석하도다. 아마 그 당시 그렇게 불법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에요.
願公(원공)은 硬着脊梁骨(경착척양골)하야 莫作遮般去就(막작자반거취)어다
願公(원공)은 硬着脊梁骨(경착척양골)하야
척양골을 바짝 세우고, 정신을 차려서 이런 뜻입니다. 척양골 세우라는 말은 어깨 축 늘어지게 하고, 등이 구부정하게 있으면 졸기 딱 좋지, 공부하는 사람 자세가 아니거든요. 척양골 딱 세우고 있으면 그건 정신 차려져 있다 하는 뜻이니까 정신을 바짝 차려서
莫作遮般去就(막작자반거취)어다
이런 짓 하지 말라 말이야. 앞에서 이야기한 사사배들이 가르친 이런 짓들 좀 하지 말라. 이런 거취, 이런 짓 하지 말라.
作遮般去就底(작자반거취저)인댄 雖暫拘得箇臭皮袋子住(수잠구득개취피대자주)하야 便以爲究境(편이위구경)이나
作遮般去就底(작자반거취저)
이런 짓을 한다면
雖暫拘得箇臭皮袋子住(수잠구득개취피대자주)하야
이것은 비록 잠간 구득한다. 얽어 묶는다 이거여. 냄새 나는 가죽 주머니, 이 몸뚱이를 구속해서, 앉아있긴 잘 앉아 있는다. 몸뚱이 조복 받아 잘 앉아 있는 것을
便以爲究境(편이위구경)하야
곧 그것을 최상의 법이라고 여기나
而心識紛飛(이심식분비)호미 猶如野馬(유여야마)하야 縱然心識(종연심식)이 暫停(잠정)이나 如石壓草(여석압초)하야 不覺(불각)에 又生(우생)하나니
而心識紛飛(이심식분비)호미
잠에서 깨거나 그 상태라 하더라도, 몸은 그렇게 앉아있다 하더라도 심식분비야, 우리의 의식이 아주 어지럽게 이리 날고 저리 날고 하는 것이
猶如野馬(유여야마)
마치 야마, 아지랑이와 같아서
縱然心識(종연심식)이 暫停(잠정)이나
비록 우리의 의식이 잠깐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如石壓草(여석압초)야
마치 돌로써 풀을 누르는 것과 같다. 풀을 아무리 돌로써 무거운 걸로 눌러 놓았다 하더라도 봄 되면 저 옆으로 비죽이 노란 싹을 비집고 나오지 않습니까? 또 돌을 들춰보면 그 안에 노란 싹이 햇빛을 못봐서 있어요. 그대로 그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거야. 그와 같이 비록 생각을 쉬어서 거친 망상은 없어졌다 하더라도 속에 알음알이, 망상이 근본이 끊어지지 아니해서 그대로 그 속에 뒤엉켜 있는 거죠. 마치 흙탕물을 맑히려고 가만히 가둬 놓는 것과 같은 거야. 그러면 그 흙이 오래되면 가라앉지 않습니까? 지장수 만들어 마시죠? 지장수 만들 때처럼 그렇게 흙탕물을 휘저어 놔두면 한참 있으면 가라앉는 거요. 불교 공부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얼른 불교를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그렇게 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건 참 크게 잘못 지시하는 거예요. 그렇게 가라앉혀 있으면 어떡해? 조금만 누가 출렁거려버리면 그냥 흙탕물이 또 뜨잖아요? 그런 엉터리 공부가 어딨어요? 세상에. 그건 공부도 아니에요. 그런 공부를 했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공부라고 할 것도 없고, 불교 공부가 어떻게 하는지도 전혀 모르는 거죠. 이게 그 얘기 아닙니까? 심식이 분비하는 것이 마치 야마와, 아지랑이와 같아서 비록 마음이 잠간 이렇게 머물러 있다 하더라도 여석압초야.
不覺(불각)에 又生(우생)이라
몰란결에 또 거기서 생겨. 자꾸 나나니
欲直取無上菩提(욕직취무상보리)하야 到究竟安樂處(도구경안락처)면 不亦難乎(불역난호)아
欲直取無上菩提(욕직취무상보리)하야 到究竟安樂處(도구경안락처)면
무상보리를 직취, 바로 취해서 구경, 결정적인 안락처에 이르는 일이
不亦難乎(불역난호)아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근본적인 해결이 안된다는 거야. 물 잠간 가라앉혀서 조금만 흔들어버리면, 돌 하나 던져 버리면 그냥 바로 흐려지니까.
某亦嘗爲此流(모역상위차류)의 所誤(소오)러니 後來(후래)에 若不遇眞善知識(약불우진선지식)이런들 幾致空過一生(기치공과일생)일러니라
某亦嘗爲此流(모역상위차류)의 所誤(소오)하니
또한 내가 일찍이 이러한 류의 그르친 바를 입었다. 그르친 바를 당했다. 오랫동안 이 대혜스님이 아주 절치구심 이런 문제를 바로 잡고자 하는 이유가 있어요. 여기 일찍이 이러한 무리들에게 잘못 지시함을 입어서 여러 해 허송세월을 보냈다.
後來(후래)에 若不遇眞善知識(약불우진선지식)이런들
뒤에 만약에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던들
幾致空過一生(기치공과일생)이라
일생을 헛되이 보낼 뻔 했다. 정말 생사를 던져서 출가를 해서 이 일을 해치우겠다고 그렇게 결심하고 나선 사람이 스승 잘못 만나서 잘못 지시해준 것 입어가지고는 일생을 그르쳤다면 정말 천추의 한이야. 세세생생 한이 쌓였을 것입니다. 여기보면 대혜스님같이 이렇게 깨달으신 분이 이 문제만 들고 나오면 그만 중생심이 발동하는 거야. 이런 표현이 대혜스님께는 참 미안하지만, 정말 중생심이 발동할 정도로 열을 올린다고. 아주 열 받아 버려. 대혜스님이 이 문제만 나오면.
每每思量(매매사량)컨댄 直是尀耐(직시파내)로다 以故(이고)로 不惜口業(불석구업)하고 力求此弊(역구차폐)리니 今稍有知非者(금초유지비자)니라
每每思量(매매사량)컨댄
매양매양 사량컨댄, 생각해볼수록, 곰곰이 생각해볼수록
直是尀耐(직시파내)로다
참을래야 참을 길이 없더라. 그래서
不惜口業(불석구업)하고 力求此弊(역구차폐)라
구업을 아끼지 않고, 내가 구업 때문에 지옥 가는 한이 있더라도 힘써 이런 폐단을 구제했더니
今稍有知非者(금초유지비자)
요즘 와서 조금씩 조금씩 그런 공부 방법이 잘못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더라.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공부 잘못하면 괜히 헛 공을 들이게 되니까 그래서 이런 이야기 나오면 열을 받아서 전혀 선지식 같지도 않고, 도인같지도 않게 열을 바짝 내어서 자기 표현을 이렇게 합니다. 어떤 데는 이보다 더 심한 표현도 있어요. 구업을 아끼지 않고 온갖 이야기를 다해가면서 한다는 거죠.
若要徑截理會(약요경절리회)인댄 須得遮一念子(수득자일념자)를 爆地一破(폭지일파)하야사 方了得生死(방료득생사)하리니 方名悟入(방명오입)이니라
若要徑截理會(약요경절리회)인댄
만약 경절, 바로 질러서 이해하기를 요할진댄
須得遮一念子(수득자일념자)를
이 한 생각, 최초 한 생각이라고 할까? 최초 한 생각이나 최후 한 생각이나 오로지 한 생각에서 천 가지 생각, 만 가지 생각이 일어나니까, 근본 망상 일념이야. 근본 망상 일념이라고 할 수 있겠네. 그것을
爆地一破(폭지일파)
‘팡!’ 터트려 한번 깨트려서
方了得生死(방료득생사)하리니
바야흐로 생사를 마칠 수 있다. 생사 문제를 끝낼 수 있다. 그래야 바야흐로 이름을 오입, 깨달아 들어가는 것이다.
然(연)이나 切不可存心得破(절불가존심득파)어다 若存心在破處則永劫(약존심재파처즉영겁)에 無有破時(무유파시)하리라
然(연)이나 切不可存心得破(절불가존심대파)어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깨달음이라는 말, 쓰기 싫은데 이쯤 와서 안쓸 수도 없어서 쓰긴 쓴다만은 그렇지만 간절히 존심대파, 마음을 두어서 말하자면 폭지일파 한다는 그런 깨트리는 것을 기다리지 말라.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라. 그것도 깨달음을 이야기하니까 또 깨달음을 기다릴까봐 염려가 되어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그러면 이야기 하다가 병을 하나 더 얹어주는 게 되는 거야. 병을 제거하려 약을 줬는데 그 약 때문에 또 병이 되어 버리는 거죠. 깨달은 사람의 안목에서 보면 이걸 말할 수도 없고, 참 안할 수도 없고. 하면 또 그 말에 쫓아가버리니까.
若存心在破處則(약존심재파처즉)
만약에 마음을 두어서 깨트린다고 하는 그곳에다가 둔다면
永劫(영겁)에 無有破時(무유파시)하리라
영원히 깨트릴 데가 없을 것이다.
但將妄想顚倒底心(단장망상전도저심)과 思量分別底心(사량분별저심)과 好生惡死底心(호생호사저심)과 知見解會底心(지견해회저심)과 欣靜厭요底心(흔정염 저심)하야
但將妄想顚倒底心(단장망상전도저심)과
다만 망상해서 전도하는 그런 마음과
또 사량 분별하는 그런 마음과
好生惡死(호생오사)하는 마음, 살기를 좋아하고 죽기를 싫어하는, 보통 우리 중생들의 상정이죠. 그런 마음과
知見解會底心(지견해회저심)
알음알이로서 이해하려는 그런 마음과
欣靜厭욕底心(흔정염욕저심)
고요한 것을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을 싫어하는 그런 마음을 가져서 공부할 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어떤 심리적 현상들이죠. 그런 것을 모조리 가지고
一時(일시)에 按下(안하)하고 只就按下處(지취안하처)하여 看箇話頭(간개화두)호대
一時(일시)에 按下(안하)
일시에 눌러 내리고. 눌러 내린다고 하지만 눌러 내리는 작업이 따로 있는 건 아니예요. 그것 돌아보지 말고, 무시하고 이런 말입니다. 여기서. 꼭 뭐 무거운 돌로 풀을 눌러 내리듯이 그렇게 상상하면 곤란해요.
只就按下處(지취안하처)
그걸 무시한 바로 그 자리에 나아가서
看箇話頭(간개화두)호대
그 화두를 보대. 여기 토가 ‘호대’라고 되어 있으니까. 간개화두. 그 화두.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호대 拘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州云無(주운무)라하니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호대
조주에게 묻되 개도 또한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州云(주운) 無(무)니라
‘무’라 한 것을 간, 볼지니라. 토를 그렇게 해야 돼요. 간개화두, 그 토 빼버리고, 승이 무조주호대 구자도 환유불성야무닛가 주운무니라. ‘무’라 한 것을 볼지니라. 간하라. 이 ‘간’은 사물을 보듯이 그렇게 보는 거죠.
이걸 한국의 참선하는 사람들이 이 <서장>의 영향을, <서장>의 영향은 800년 전 보조 지눌 스님께서 이 <서장>을 보시다가 깨달은 바가 있고 해서 그 후 정혜결사를 하시면서 대중들을 모아놓고 그 당시 공부를 공부답게 한다고 하는 곳이 그래도 송광사, 정혜사예요. 몇 년 동안 방을 붙여서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았으니까. 그래서 정말 공부에 뜻이 있는 사람을 모아서 제대로 보조스님이 지도를 할 때 당신이 힘을 얻은 이 <서장>을 교재로 안했을리라곤 상상을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서장>은 그때부터 교재로 썼다고 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서장>은 최소한도 800년간 우리 한국 불교를 지도해온 수행지침서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최소한 <서장>은 그래요.
왜 그런고하니 지금 법맥으로, 인맥으로 볼 때는 태고 보우 스님이 틀림없어요. 그러나 그 영향력으로 볼 때는, 후대에 끼친 그 영향력으로 볼 때는 보조스님의 영향력이 훨씬 큽니다. 그걸 알아야 돼요. 인맥으로 보우스님이 정상적으로 임제 법맥을 이어내려 왔다. 이것에 대해서는 감히 내가 말할 수는 없으나 최소한도 보조스님이 그 당시 공부할 사람을 전국적으로 몇 년간 불러 모아서 정혜사에서 공부를 할 때는 최소한도 정말 공부에 뜻있는 사람들이 모였고, 거기서 지도받은 것을 전국에 퍼져서 그 영향으로 말하자면 수행이 체계화되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조선시대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도 그래도 꺼질듯 말듯한 선법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근래에 다시 활기차게 하긴 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입장에서 보면 보조스님께서, 여기 스님들께서 태고 보우 스님에 대한 영향력, 뭐 시를 잘 아시니까 시 몇 수는 알지 몰라도 그 스님의 주의주장이라든지, 학인을 제접한 공부 방법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솔직하게 없어요. 저도 잘 모릅니다. 그만치 그 분의 수행에 대해서는 오늘날까지 크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어요.
그런데 보조스님은, 걸핏하면 보조스님이야. 화엄론을 간략히 산문으로 묶어서 화엄사상을 편 일 이라든지, 또 <진심직설>같은 세계적인 명저거든요. 보조스님의 저서 중에서 <진심직설>을 최고로 칩니다. 세계적인 명저 속에 들어 간다구요. <진심직설>은. 그 외 <보조어록>이 전해 내려오면서 상당히 큰 영향을 공부한 사람들에게 끼쳤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서장>이 거기에서 힘을 입어 지침서 역할을 틀림없이 했으리라고 봅니다.
그런데 그 영향으로 우리나라 선원에서 화두를 드는 스님들, 이건 설문 조사를 한 것은 아닌데, 내가 그래도 10여년 선방으로 다니면서 이런저런 몸으로 부딪혀서 경험한 바에 의하면 한 80%는 “구자무불성하”를 해요. 이야기를 해보면 그래요. 이 화두를 많이 한다구요. 이 <서장>의 영향이라. 80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 영향을 끼쳤으니까 왜 안그렇겠습니까? 사실 그만치 많이 해요. 80%가 넘을 거예요. 어쩌면. 그런데 이 화두를, 이거 하나 챙길 줄 알면 <서장>공부 거의 한 거라고 할 수가 있겠는데 제일 “구자무불성하”를 많이 권했거든요. <서장>에서. 이걸 어떤 느낌으로, 최소한도 우린 감정이죠. 일단 중생들이니까. 한 생각 떨어진 입장이 아니니까. 이걸 어떻게 드는 것이 과연 제대로 ‘무’자 화두를 드느냐? 이게 처음 나왔잖습니까? ‘무’자 화두 드는데 대해서 처음 나왔잖아요? 이걸 어떻게 들어야 제대로 드느냐?
그러니까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호대 拘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州云無(주운무). 여기까지라구요. 딱 한 줄이네. 요 한 줄이 말하자면 ‘무’자 화두를 제시한 거라. 그래서 이 밑에 보면 此一字子(차일자자), 이 한 글자는 뭐예요. 無. ‘무’거든요. 乃是摧許多惡知惡覺底器仗(내시최허다악지악각저기장)이라. 모든 악지악각, 그러니까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생각들, 상념들, 그런 번뇌 망상들을 다 꺽어버리는 무기다. 그랬어요. 이것을 싹 쓸어가는 무기다. 그래놓고 그 다음에 문자10종병, 소위 문자10종병이라고 하는 것을 나열하는데. 여기서는 여덟 가지 밖에 소개 안됐습니다만 흔히 선방에 많이 떠도는 문자 10종병, 또 문서화 되어서 돌아다니는 것도 있고 그런데 여기서 8가지를 들었는데. 물론 병 생각할 것 없고, 일단 僧(승)이 問趙州(문조주)호대 拘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州云無(주운무). 이걸 어떤 마음 상태로 화두를, 흔히 든다, 의심한다, 화두를 의심한다 그러는데 뜻은 같죠. 어떻게 들어야 제대로 드는 것이냐? 이게 문제야. 사람들이 천차만별이거든요.
나도 사실은 선방에 갈 때 명색이 엉터리 이력이라도 이력 배우고, 범어사에서는 그 때 강원 분위기를 보면 9시 삼경 치고서 누우면 한 5분 있다가 일어나 앉는 사람이 열 명에 7~8명이 됐어요. 거기는 또 묘하게 선찰 대본사라서 그런지 그 때 성호스님이라고 아주 선지가 밝은 스님이 강사로 계셨어요. 본래 신선되려고 절에 들어왔다가 나중에 불법을 정상적으로 만나서 선지에 아주 뛰어난 안목을 가지신 분인데. 이 분이 <선요>를 가르치고, <서장>을 가르쳤다고. <선요>, <서장>은 누구 안맡겨. 당신이 가져갔어. 그 영향을 받아서 그런지 하여튼 그랬어요. 그렇게 하면서 나는 처음에는 그 스님에게서 <선요>를 배우고 <서장>은 나중에야 제대로 눈을 뜨게 되었는데, 어쨌든 그런 세월로부터 졸업할 때까지 거기서 배운 식으로 삼경 치고 나면 최소한도 배운 식으로 다시 한 시간 쯤 앉았다가 다시 자고 세월을 이런 식으로 보내면서 내~ 이 ‘무’자 화두로 씨름을 한다고 제일 많은 시간을 그렇게 했는데. 이걸 어떻게 드느냐? 하는 게 제일 문제더라구요. 별별 방법을 다 동원해보고, 물어보고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사실 다른 사람들이 소위 그 당시 선지식에게 가서 화두를 탄다 하지 않습니까? 화두를 타온 이야기도 많이 들어보고, 옆에 있어보기도 하고, 나도 줘보기도 하고 그렇게 했지만 이걸 제대로 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이야기는 누구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이건 의심이 가버려야 돼. 자기가. 그래버리면 끝나는 건데, 의심이 이런 말 속에서 가는 사람이 솔직하게 몇 명이나 있어? 부처님 말씀에는 유정무정이 개유불성이라 했는데 어떻게 해서 조주스님은 ‘無’라고 했는가? 옛날에 어떤 조사스님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거야. 그래서 의심이 들어간다는 거야. 조주스님이 개가 불성이 없다고 하는데 대해서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간다. 조주를 내가 의심할 수도 없고, 부처님을 의심할 수도 없다. 그러면 여기에는 틀림없이 큰 함정이 있을 것이다. 저의가 뭐냔 말이야.’ 그렇게 해서 저절로 의심이 들어갔단 말이야. 거기서 생긴 말이 석가모니 부처님은 유정무정이 개유불성이라 했는데 조주는 인삼도무고. 왜 무라고 했느냐? 옛날 조사스님이 그랬다구요. 뭣 때문에 무라고 했느냐?
答 富樞密 季申(一) [不管知解 善參活句]
示諭 (시유)호대 蚤歲(조세)에 知信向彼此道(지신향차도)러니
晩年(만년)에 爲知解所障(위지해소장)하야 未有求悟入處(미유
구오입처)일새 欲知日夕(욕지일석)에 體道方便(체도방편)이라
하니 旣荷至誠(기하지성)이라 不敢自外(불감자외)일새 據款結
案(거간결안)하야 葛藤少許(갈등소허)호리라只遮求悟入底
(지자구오입저)_ 便是障道知解了也(편시장도지해료야)니 更別
有甚麽知解(갱별유심마지해)_爲公作障(위공작장)이며畢竟(필
경)에 煥甚麽(환심마)하야 作知解(작지해)며 知解(지해)는 從
何而至(종가이지)며 被障者(피장자)는 復是阿誰(복시아수)오
只此一句(지차일구)에 顚倒有三(전도유삼)하니 自言爲知解所
障(자언위지해소장)이 是一(시일)이요 自言未悟(자언미오)하야
甘作迷人(감작미인)이 是一(시일)이요 更在迷中(갱재미중)하야
將心待悟_是一(장심대오_시일)이니 只遮三顚倒(지자삼전도)_
便是生死根本(변시생사근본)이라 直須一念不生(직수일념불생)
하야 顚倒心絶(전도심절)하야사 方知無迷加破(방지무미가파)
며 無悟可待(무오가대)며 無知解可障(무지해가장)이니 如人
(여인)이 飮水(음수)에 冷煖(냉난)을 自知(자지)라 久久(구구)
하면 自然不作遮般見解也(자연부작자반견해야)리라 但就能知
知解底心上(단취능지지해저심상)하야 看(간)하라 還障得也無
(환장득야무)아 能知知解底心上(능지지해저심상)에 還有如許
多般也無(환유여허다반야무)아 從上大智慧之士(종상대지혜지
사)_莫不皆以知解(막불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며 以知
解(이지해)로 爲方便(위방편)하야 於知解上(어지해상)에 行平等
慈(행평등자)하며 於知解上(어지해상)에 作諸佛事(작제불사)호
대 如龍得水(여룡득수)하고 似虎靠山(사호고산)하야 終不以
此(종불이차)로 爲惱(위뇌)하나니 只爲他識得知解起處(지위타
식득지해기처)일세니라 旣識得起處(기식득기처)인댄 卽此知解
(즉차지해)_便是解脫之場(편시해탈지장)이며
便是出生死處(편시출생사처)라 旣是解脫之場(기시해탈지장)이
며 出生死處(출생사처)인댄 則知底解底當體寂滅(즉지저해저당
체적멸)이며 知底解底(지저해저)_旣寂滅(기적멸)인댄 能知知
解者(능지지해자)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며 菩提涅槃
(보리열반)과 眞如佛性(진여불성)도 不可不寂滅(불가불적멸)이
러니 更有何物可障(갱유하물가장)이며 更向何處(갱향하처)하
야 求悟入(구오입)이리요 釋迦老子曰(석가노자왈) 諸業從心生
(제업종심생)일새 故說心如幻(고설심여환)이로니 若離此分別
(약리차분별)하면 則滅諸有趣(즉멸제유취)라하며
僧(승)이 問大珠和尙(문대주화상)호대
如何是大涅槃(여하시대열반)이 닛고 珠云(주운)호대 不造生死
業(부조생사업)이 是大涅槃(시대열반)이니라 僧(승)이 云如何
是生死業(운여하시생사업)이닛고 珠云求大涅槃(주운구대열반)
이 是生死業(시생사업)이라하며 又古德(우고덕)이 云(운)호대
學道人(학도인)이 一念(일념)에 計生死(계생사)이면 卽落魔道
(즉락마도)요 一念(일념)에 起諸見(기제견)하면 卽樂外道(즉락
외도)라하며 又淨名(우정명)이 云(운)호대 衆魔者(중마자)는
樂生死(낙생사)어든 菩薩(보살)은 於生死(어생사)에 而不捨(이
불사)하고 外道者(외도자)는 樂諸見(낙제견)이어든 菩薩(보살)
은 於諸見(어제견)에 而不動(이부동)이라하니 此乃是以知解
(차내시이지해)로 爲儔侶(위주려)하고 以知解(이지해)로 爲方
便(위방편)하야 於知解上(어지해상)에 行平等慈(행평등자)하고
於知解上(어지해상)에 作諸佛事底樣子也(작제불사저양자야)니
라 只爲他了達三祗劫空(지위타요달삼기겁공)하야 生死涅槃(생
사열반)이 俱寂靜故(구적정고)니라 旣未到遮箇田地(기미도차
개전지)인댄 切不可被邪師輩(절불가피사사배)의 胡說亂道(호
설난도)하야 引入鬼窟裏(인입귀굴리)하야 閉眉合眼(폐미합안)
하고 作妄想(작망상)이어다 邇來(이래)에 祖道衰微(조도쇠미)
하야 此流_如麻似粟(차류_여마사속)하니 眞是一盲(진시일맹)
이 引衆盲(인중맹)하야 相牽入火坑(상견입화갱)이라 深可憐愍
(심가연민)이로다 願公(원공)은 硬着脊梁骨(경착척양골)하야
莫作遮般去就(막작자반거취)어다 作遮般去就底(작자반거취저)
인댄 雖暫拘得箇臭皮袋子住(수잠구득개취피대자주)하야 便以
爲究境(편이위구경)이나 而心識紛飛(이심식분비)호미 猶如野
馬(유여야마)하야 縱然心識(종연심식)이 暫停(잠정)이나 如石
壓草(여석압초)하야 不覺(불각)에 又生(우생)하나니 欲直取無
上菩提(욕직취무상보리)하야 到究竟安樂處(도구경안락처)면
不亦難乎(불역난호)아 某亦 嘗爲此流(모역상위차류)의 所誤
(소오)하니 後來(후래)에 若不遇眞善知識(약불우진선지식)이런
들幾致空過一生(기치공과일생)일러니라 每每思量(매매사량)
컨댄 直是尀耐(직시파내)로다 以故(이고)로 不惜口業(불석구
업)하고 力求此弊(역구차폐)리니 今稍有知非者(금초유지비자)
니라 若要徑截理會(약요경절리회)인댄 須得遮一念子(수득자일
념자)를 爆地一破(폭지일파)하야사 方了得生死(방료득생사)하
리니 方名悟入(방명오입)이니라 然(연)이나 切不可存心得破
(절불가존심득파)어다 若存心在破處則永劫(약존심재파처즉영
겁)에 無有破時(무유파시)하리라 但將妄想顚倒底心(단장망상
전도저심)과 思量分別底心(사량분별저심)과 好生惡死底心(호
생호사저심)과 知見解會底心(지견해회저심)과 欣靜厭욕底心
(흔정염욕저심)하야 一時(일시)에 按下(안하)하고 只就按下處
(지취안하처)하여 看箇話頭(간개화두)호대 僧(승)이 問趙州(문
조주)호대 拘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州
云無(주운무)라하니 此一字子(차일자자)는 乃是摧許多惡知惡
覺底器仗也(내시최허다악지악각저기장야)라 不得作有無會(부
득작유무회)하며 不得作道理會(부득작도리회)하며 不得向意
根下(부득향의근하)하야 思量卜度(사량복탁)하며 不得向揚眉
瞬目處(부득향양미순목처)하야 不得向語路上(부득향어노상)하
야 作活計(작활계)하며 不得颺在無事甲裏(부득양재무사갑이)
하며 不得向擧起處(부득향거기처)하야 承當(승당)하며 不得向
文字中引證(부득향문자중인증)하고 但向十二時中四威儀內(단
향십이시중사위의내)하야 時時提撕(시시제시)하며 時時擧覺
(시시거각)호대 狗子(구자)도 還有佛性也無(환유불성야무)닛가
云無(운무)를 不離日用(불리일용)하고 試如此做工夫看(시여차
주공부간)하면 月之日(월지일)에 便自見得也(변자견득야)이리
니 一郡千里之事都不相妨(일군천리지사도불상방)하리라 古人
(고인)이 云(운)호대 我遮裏(아자리)는 是活底祖師意(시활저조
사의)라 有甚麽物(유심마물)이 能抱執他(능구집타)리요하니
若離日用(약리일용)하고 別有趣向則是(별유취향즉시)는 離波
求水(리파구수)며 離器求金(이기구금)이라 求之愈遠矣(구지유
원의)리라
부추밀에게 답하는 편지, 첫 번째
편지를 받아보니, “젊은 나이에 이 도를 믿어 마음을 기울일 줄 알았다가 만년에 알음알이[知解]의 장애되는 바 되어 깨달아 듦을 구하는 곳이 있지 아니함일세. 아침저녁으로 도를 체달[體道]하는 방편을 알고자 한다” 하니, 이미 지극한 정성을 짊어졌음이라 감히 스스로 멀리하지 못할새 탄식함에 의거해 답안을 맺어서 (言說의) 갈등을 약간 하리라.
다만 이 깨달음을 구하는 것이 문득 도를 가로막는 알음알이니, 다시 달리 무슨 알음알이가 있어 그대에게 장애를 짓겠는가? 결국에 무엇을 불러서 알음알이라 하겠는가? 알음알이는 무엇을 좇아왔는가? 장애를 받는 사람은 다시 누구인가? 단지 이 하나의 글귀에 뒤바뀜[顚倒]이 셋이 있으니, 스스로 알음알이의 장애되는 바가 된다고 말함이 하나요, 스스로 말하기를 깨닫지 못해서 미혹한 사람이라고 달게 여김이 하나요, 다시 미혹한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림이 하나요, 다만 이 세 가지 뒤바뀜이 문득 생사의 근본이 됨이라. 곧 모름지기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게 하여 뒤바뀐 마음이 끊어짐이라야 바야흐로 미혹 가히 깨트릴 것이 없으며, 깨달음 가히 기다릴 것이 없으며, 알음알이 가히 장애됨이 없음을 알 것이니, 마치 삶이 물을 마심에 차갑고 따뜻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음이라. 오래오래 하면 자연히 이와 같은 견해를 짓지 않으리라.
다만 알음알이라고 능히 아는 마음 위에 나아가서 살펴봐라. 도리어 장애하는가? 마는가? 알음알이를 능히 아는 마음 위에 도리어 허다한 것들이 있는가? 없는가? 위로부터 큰 지혜가 있는 선비들이 모두 알음알이로써 벗을 삼지 아니함이 없었으며,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 알음알이 위에 평등한 사랑을 행하였으며,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 알음알이 위에 평등한 사랑을 행하였으며, 알음알이 위에 모든 불사(佛事)를 짓되, 마치 용이 물을 얻은 것과 같고 호랑이가 산을 의지한 것과 같아서, 마침내 이것으로써 번뇌를 삼지 않았음이니, 다만 그들이 알음알이의 일어난 곳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일어난 곳을 알았을진댄 독 이 알음알이가 문득 해탈의 도량(道場)이며, 문득 생사를 벗어난 곳이라. 이미 해탈의 도량이며 생사를 벗어나는 곳인댄, 앎과 이해함이 즉시에 적멸할 것이며, 앎과 이해함이 이미 적멸할진댄 알음알이라고 능히 아는 것도 가히 적멸하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며, 보리ㆍ열반과 진여ㆍ불성도 가히 적멸하지 아니함이 없으리니, 다시 무슨 물건이 가히 장애함이 있을 것이며, 다시 어느 곳을 향하여 깨달아 듦을 구하리요?
석가노자께서 이르시길 “모든 업이 마음으로부터 일어남일세. 그러므로 마음이 허깨비와 같다고 설명함이로니, 만약 이러한 분별을 여읜다면 곧 모든 갈래[有趣]를 멸하리라”고 하시며, 어떤 스님이 대주화상에게 묻되 “어느 것이 큰 열반이닛고?” 하니, 대주화상께서 말씀하시길 “생사의 업을 짓지 않음이 큰 열반이니라”고 하였다. 스님이 다시 묻되 “어느 것이 생사의 업이닛고?” 하니, 대주화상께서 말씀하시길 “큰 열반을 구함이 생사의 업이니라”고 하시었다. 또 고덕이 이르시되 “도를 배우는 사람이 한 생각[一念]이라도 생사를 헤아린다면 곧 마구니 길에 떨어짐이요, 한 생각이라도 모든 견해를 일으킨다면 곧 외도에 떨어진다”라고 하시며, 또 정명이 이르시되 “모든 마구니들은 생사를 좋아하고 보살은 생사를 버리지 않고, 외도들은 모든 견해를 좋아하고 보살은 모든 견해에 움직이지 않는다”라고 하니, 이것이 이에 알음알이로써 벗을 삼고 알음알이로써 방편을 삼아서 알음알이 위에 평등한 사랑을 행하고 알음알이 위에 온갖 불사(佛事)를 짓는 본보기이니라. 다만 그들은 삼아승기겁(三阿僧祈劫)이 공하여 생사ㆍ열반이 적정(寂靜)함을 명백히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이미 이러한 경지[田地]에 도달하지 못했을진댄, 가히 삿된 스승들의 어지럽게 이야기함을 받아서 귀신굴 속에 이끌려 들어 눈썹을 붙이고 눈을 합하여 망령된 생각을 짓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노라. 요즘에 조사의 도가 쇠미(衰微)하여 이러한 무리들이 셀 수 없이 많음(如麻似粟)이니, 진실로 한 눈먼 장님이 여러 눈먼 사람을 이끌고서 불구덩이로 끌고 들어가는 것과 같음이라, 매우 가히 불쌍하게 여김이로다. 원컨대, 그대는 척추[脊梁骨]를 곧게 하여 이러한 거취(去就)를 짓지 말지어다. 만약 이러한 거취를 짓는 놈인댄, 비록 잠시나마 그 냄새나는 가죽주머니를 얽어매어 두어 문득 구경을 삼음이나, 마음[心識]이 어지럽게 나부낌이 마치 야생마와 같아서 비록 그러나 마음이 잠시 멈출지라도 마치 돌로써 풀을 눌러놓은 것과 같아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不覺]에 다시 생(生)하나니, 위없는 깨달음을 취하여 구경의 안락한 곳에 이르고자 한들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나도 또한 일찍이 이 무리들의 잘못된 바가 되었는데, 훗날[後生]에 만일 참된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였다면 하마터면 헛되이 한평생을 보낼 뻔 하였을 것이다. 나날이 생각하건댄 바로 참을 수 없도다. 이런 까닭으로 구업(口業)을 아끼지않고 힘써 이 폐단을 구제하였더니, 요즘 차츰차츰 잘못됨을 아는 사람이 있게 되었다. 만약 곧바로 꺽어[徑截 ; 지름길] 깨달아 알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 한 생각을 활연히[爆地] 한 번 쳐부숴 버림을 얻어야만 바야흐로 생사를 마칠 수 있으리니, 비로소 깨달아들었다고 이름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해서) ① 간절히 가히 마음을 두어서 부서지기를 기다리지 말지어다. 만약 마음을 두어서 쳐부수려는 곳을 둔다면 곧 영원히[永劫] 쳐부숴 버릴 기회가 없을 것이다. 다만 망상으로 뒤바뀐 마음과 헤아려 분별하는 마음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으로 알려고 하는 마음과 고요함을 좋아하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서 한꺼번에 내리 누르고 다만 내리 눌린 곳에 나아가 화두를 들[看]되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하니, 조주스님께서 이르시되 “없다[無]”라고 하시니, 이 한 글자는 곧 허다한 나쁜 지견과 나쁜 앎[惡知惡覺]을 꺽는 무기[器伐]이니라.
②유ㆍ무(有無)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③도리(道理)의 알음알이를 짓지 말며, ④의근(意根) 아래를 향하여 사량으로 헤아려재지 말며, ⑤눈썹을 드날리고 눈을 깜박거리는 곳을 향하여 뿌리를 박지 말며, ⑥언어의 길[語路] 위를 향하여 살림살이[活計]를 짓지 말며, ⑦일없는 가죽껍질[甲] 속을 향하여 드날려 있지 말며, ⑧들어일으키는 곳을 향하여 잡아 해결[承當]하려 하지 말며, ⑨문자(文字) 가운데를 향하여 인증(引證)하려 하지 말고, 다만 하루종일 [십이시중] 네 가지 위의(威儀) 속을 향하여 때때로 잡아 이끌며, 때때로 들어 깨닫게 하되 “개에게도 도리어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이르되 없다!” 라고 하신 말씀을 평상시 [日用]에 여의지 말고 시험삼아 이와 같이 공부를 지어 살펴보면 어느 달 아무 날엔 문득 스스로 볼 수 있으리니, 한 고을 천리의 일이 도무지 서로 방해롭지 않으리라.
고인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이 속은 살아 있는 조사의 뜻이라, 무슨 물건이 능히 저를 구속하여 잡아매겠는가?”라고 하시니, 만약 날마다의 씀씀이를 여의고 달리 향하여 나아감[趣向]이 있다면 곧 이는 물결을 여의고서 물을 구하는 것과 같고, 그릇을 여의고서 금을 구하는 것과 같음이라, 구하면 구할수록 더욱더 멀어지리라.
又(二) [勸不得滯靜 於鬧中得力]
滯靜(체정), 고요한데 처해있지 말고
於鬧中得力(어료중득력)
시끄러운 가운데서 득력하라고, 힘을 얻으라고 권하는 그런 내용이다.
竊知日來(절지일래)에 以此大事因緣(이차대사인연)으로 爲念(위념)하야 勇猛精進(용맹정진)하야 純一無雜(순일무잡)하고 不勝喜躍(불승희약)호라
竊知(절지)
가만히 알았다. 그윽히 알았다. 가만히 보니 그런 내용이더라, 그런 말입니다.
日來(일래)
근래. 요즘에
此大事因緣(이차대사인연)으로
이 큰 일하는 이 인연으로
생각을 삼아서
勇猛精進(용맹정진)으로 純一無雜(순일무잡)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不勝喜躍(불승희약)호라
그 뛸 듯이 기쁨을 내가 이기지 못하겠다. 공부한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맞게 공부하는 사람을 제일 좋아하니까. 제대로 공부하면 그 이상 더 기쁠 수가 없죠.
能二六時中熾然作爲之祭(능이육시중치연작위지제)에 必得相應也未(필득상응야미)아 寤寐二邊(오매이변)에 得一如也未(득일여야미)아
能二六時中熾然作爲之祭(능이육시중치연작위지제)에
이육시중, 하루종일 치연히 작위하는 그 사이에, 최소한도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 갈아입고, 식사하고, 청소하고, 사람 만나고, 그런 일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야. 화장실 가고 하는 그 외 또 이 사람은 추밀 벼슬을 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일이 많겠습니까? 그 치연작위야. 하루 종일 치연이 부단히 움직이는 그 즈음에
必得相應也未(필득상응야미)아
반드시 상응하는 것을 얻는가? 못 얻는가? 상응, 공부가 제대로 순일하냐? 이 말이야. 일은 제대로 하면서 순일한가? 일 하는데 어찌 순일하겠느냐? 하는 것은 괜히 하는 소리이지, 얼마든지 일하면서도 화두는 순일할 수가 있습니다.
寤寐二邊(오매이변)
깨어있을 때나 잠자는 그 두 가지 일에
得一如也未(득일여야미)아
일여하느냐? 마느냐? 오매일여.
如未(여미)인댄 切不可一向沈空趣寂(절불가일향침공취적)이니 古人(고인)이 喚作黑山下鬼家活計(환작흑산하귀가활계)라 盡未來際(진미래제)히 無有透脫之期(무유투탈지기)하리라
만약에 그러지 못할진댄
切不可一向沈空趣寂(절불가일향침공취적)이니
간절히, 가히, 한결같이 침공취적하지 말지니. 침공-공에 잠기고, 또 고요한데 나아가지 말라. 이걸 제일 경계하고 있습니다.
침공취적. 휴거헐거. 이걸 간화선 하는데서는 제일 경계하고 있어요. 왜냐? 조주가 ‘무’했으니까 ‘무’.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거여. 당치도 않은 소리다. 어떻게 개가 불성이 없다고 했어. 없다니! 그게 잠이 오겠어요? 고요히 떨어질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없다고, 유정무정이 개유불성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가 조주가, 고불 조주가 ‘없다’고 했다면 이건 엄청난 사건 아닙니까? 보통 충격적인 사건이 아니라구요. 삼천년의 불교가 한 순간에 무너지느냐 마느냐 하는 그런 사건으로 이 ‘無’자를 받아들여야 돼. 그렇게 받아들인다면 이건 의심하지 말라고 해도 저절로 의심이 되게 되어있어. 그야말로 그런 마음으로, 그런 자세로 화두를 공부하는 거지, 沈空趣寂(침공취적), 休去歇去(휴거헐거). 맥 빠진 사람처럼 축 풀어져서 가만히 그냥 있는. 스님들 옷 색깔이 회색이라고 아무 힘도 없고, 박력도 없는 그런 종교인줄 알고, 뭐든지 양보만 하는 종교인줄 아는데, 불교 같이 파워가 넘치는 종교는 없어요. 사실은.
신라 때 왕 화상이라고, 중국의 어떤 선지식에게 가서 몇 년간 시봉하고 공부 배우려 했지만 한 마디도 일러주지 않으니깐 하루는 화로에다 벌건 불을 이고 가서 너 죽고, 나 죽고 하자고. 스승에게. 그렇게 해서 골이 타들어가는데도 그냥 이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그 순간에 골이 터져서 화로가 저만치 떨어지면서 그러니 그 스승이 머리를 쓰다듬어줘서 아물었는데 거기에 임금 왕 자가 새겨져 있더라. 왕 화상이라고. 얼마나 박력 넘치고 힘이 넘치는 종교입니까! 그 뿐입니까? 혜가 같은 이는 차고 있던 칼로 팔을 자르는....... 종교 역사에 그런 일 잘 없어요.
그런 정신으로 화두를 몰고 들어가는 거지, 침공취적, 고요한데 가만히 떨어져서. 그래서 그 밑에
古人(고인)이 喚作黑山下鬼家活計(환작흑산하귀가활계)라
고인이 그런 상태를 흑산하귀가활계라, 아주 컴컴한 굴속에, 귀신이 나올듯한 그런 굴속에 귀신집의 살림살이다. 귀가활계, 그렇게 되어서는
未來際(미래제)가 다할 때 까지
無有透脫之期(무유투탈지기)하리라
투탈 할 기약이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