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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사파’는 이화룡이 이끌었던 ‘명동파’ 행동대장 신모씨가 결성했던 조직으로, ‘동대문사단’ 유지광과 사투 끝에 명동 일대를 장악했다.하지만 ‘신상사파’ 신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60년대 후반 지역 차별과 무분별한 개발 정책으로 소외됐던 호남지역 ‘주먹’들이 상경해 ‘범호남파’를 결성하면서 주먹의 주축이 새롭게 형성된다. 광주, 전주, 목포 등지에서 올라와 무교동 일대에서 세력을 키워오던 ‘범호남파’는 1970년대 초반까지 기존의 ‘신상사파’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결국 사건은 1975년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일어났다.주류공급권과 정기적인 상납금 등을 둘러싸고 ‘신상사파’와 잦은 충돌을 빚던 ‘범호남파’ 조직원들이 명동 사보이호텔 커피숍에서 생선회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신상사파’를 기습, 서울의 중심지 명동을 장악한 것이다. 이 사건은 정통 ‘주먹세계’의 종말을 예고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이 때까지 주먹세계의 불문율이었던 ‘주먹과 주먹의 대결구도’가 깨지고 사시미칼 등의 흉기가 등장한 것이다.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으로 ‘신상사파’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고 ‘범호남파’가 명동 진출의 쾌거를 올린다. 당시 광주 지역 폭력조직 ‘서방파’에서 조폭 생활을 시작한 김태촌이 부상하면서 전남 광산군 서방면 그의 출신지를 딴 ‘범서방파’가 결성된다.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범호남파’의 신예 조양은은 두목 오종철이 김태촌 측에 당해 불구가 되자 보복을 선언한다. 이후 조양은은 1976년 4월 중구 태평로 아시아호텔에서 ‘범서방파’조직원들을 습격하는 등 수차례 전면전을 진두지휘하면서 ‘범호남파’의 두목으로 자리 잡는다. [img2]반면 김태촌은 1976년 신민당 각목사건’을 지휘한 사실이 발각돼 구속된다. 김태촌은 1986년 1월 출소하지만 그해 9월 인천 뉴송도호텔 사장을 습격한 혐의로 다시 수감, 1989년 1월 복역 중 폐암 선고를 받고 형집행정지로 석방됐으나 1990년 2월 폭력을 사주한 혐의로 다시 구속됐다. ‘뉴송도호텔 사건’과 관련 김태촌은 “지금까지 나는 권력의 희생양이었다”며 “인천 송도호텔 나이트클럽 사장 피습사건도 모 부장검사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태촌이 구속된 뒤 조양은은 1978년 자신의 부친 제삿날 ‘양은이파’를 출범시킨다. 하지만 조양은은 큰 실수를 범한다. 그는 1980년 2월 방계 조직인 ‘순천시민파’두목으로부터 “부두목이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동생들을 데리고 순천으로 내려가 부두목을 급습한다. 조씨는 결국 이 사건으로 수감돼 15년형을 받았다. 조씨는 1995년 대구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지만 서울리조트 회원권 갈취 및 군산 리버사이드 관광호텔 증기탕 임대계약을 둘러싼 편취 혐의로 1996년 2월 재구속됐다.
'범서방파’김태촌과 ‘양은이파’조양은이 옥신각신할 때 등장한 별(?)이 ‘OB동재파’의 두목 이동재다. 이동재는 조양은과 지하세계 입문 동기가 각별하다. 자유당 시절 광주 시내를 무대로 각각 ‘대호파’와 ‘동아파’가 결성됐는데 양 계파 간 주도권 싸움에서 ‘동아파’가 패하자 ‘동아파’의 부두목 박영장은 부하인 조양은을 데리고 상경한다. 광주에 남은 ‘대호파’에서 이름만 바꾼 것이 ‘OB파’다. 이후 ‘OB파’는 ‘구OB파’와 ‘신OB파’로 분파, 이동재는 ‘신OB파’부두목을 맡는다. 이동재는 1978년 행동대장에게 두목을 살해하도록 지시했으나 실패하자 상경해 서울에서 ‘OB동재파’를 재결성한다. 이때 김태촌은 이미 구속된 상태라 이동재의 상대는 ‘양은이파’였다. 그러던 중 1987년 11월 사건이 일어난다. ‘양은이파’ 행동대원이 ‘OB동재파’조직원을 경찰에 밀고한 것. 이에 격분한 ‘OB동재파’는 보복을 선언, 1987년 11월 서울 서초구 반포동 온천안마시술소 주변에서 ‘양은이파’간부 2명을 칼로 난자해 중상을 입힌다. 이어 ‘양은이파’는 1988년 9월 서울 성동구 행당동 전주식당에서 식사를 하던 이동재의 다리를 난자해 불구로 만들어 조폭세계에서 은퇴시키기에 이른다. 이동재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고, 부두목과 행동대장, 조직원들은 광주로 낙향해 다시 ‘무등산파’를 결성했다.‘조폭 3대 패밀리’의 보스들은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다. 김태촌은 지난해 출소 이후 신앙 활동에 몰두하고 있다. 조양은은 지난 2004년 서울 강남구 역삼동 차병원사거리 인근에 ‘오시리’라는 향토음식점을 열었지만 현재 폐업상태에 있으며, 이동재는 ‘양은이파’로부터 습격을 받은 뒤 주먹계를 떠나 미국 뉴욕에서 슈퍼마켓을 운영, 국내와 미국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일각에선 이들의 나이나 건강상태, 붕괴된 조직 등을 감안할 때 다시 주먹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심장협심증 수술의 통증 때문에 석방 직후 병원에 입원하기도 한 김태촌은 “출감하면 젊은이들에게 ‘조폭 보스’의 비참한 말로를 알려주는 등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것으로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지난 1995년 출소한 조양은은 “조폭 생활을 완전히 청산했다”고 공언했다. 이동재는 린치를 당한 후유증이 남아있으며 현재 주거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에 조직 재건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그러나 ‘조폭 3대 패밀리’의 자취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경찰과 검찰에 적발되는 조직폭력 사건에 ‘범서방파’ ‘양은이파’ ‘OB동재파’ 조직원들이 개입된 사례가 비일비재한 것. 더욱이 김태촌은 1989년 형집행 정지로 풀려난 뒤 종교모임을 가장한 폭력조직 ‘신우회’를 결성한 전력도 있는 데다 수감생활 중에도 15년간 꾸준히 조직원들의 면회를 받아왔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지난 2002년 진주교도소 수감 중 당시 보안과장 이모씨에게 금품을 주고 전화기 사용은 물론 현금, 담배 등의 편의를 제공받은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사정은 조양은과 이동재도 마찬가지. 조양은의 경우 출소 후 몇 차례 추가범죄를 저질렀으며, 이동재도 조직 탈환의 목표를 어느 정도 갖고 있지 않으냐는 관측이다.
조폭대부' 조양은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유신 서슬이 퍼렇던 1975년 1월 2일. 한국 폭력 세계의 세력 판도를 뒤바꾼 쿠데타가 발생했다. 바로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이다. 조양은이 10여 년 동안 조폭 대부로 군림하던 신상사파의 신년회를 급습,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무명의 조양은은 소위 전국구로 급부상했고, 십수 년 동안 한국 조직 폭력의 패자로 군림한다.
1970년대 당시 조폭 세계는 신상사파 시대. 1965년부터 광주 전주 순천 등에서 올라온 호남 세력이 무교동을 중심으로 교두보를 구축하던 시기였다.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유당 정권의 비호 아래 정치 해결사로 등장했던 ▲동대문파 이정재 ▲종로파 심종현 ▲서대문파 최창수 ▲광화문파 장영빈 ▲명동파 이화룡 등이 60년 4ㆍ19혁명과 61년 5ㆍ16 군사 정권이 등장하면서 몰락한다.
정치 격변기를 거치면서 기존의 강자들이 사라진 자리를 이화룡의 부하였던 신상현 씨가 차지했다. 육군 상사 출신으로 일명 신상사로 불렸던 신 씨는 전성기 때 휘하에 100여 명의 부하를 거느렸다.
10대 후반 광주 ‘대호파’에서 활약하던 조양은은 69년 광주와 서울을 오가면서 신상사파의 세력을 비집고 무교동에 터를 잡는다. 주력 세력은 광주에서 조양은 주도로 만들어진 ‘화신 8인조’. 광주 충장로 화신다방의 근거지를 딴 이름이다.조양은은 “휘하 조직에서 ‘야무진’ 선수들을 중심으로 8명을 뽑고, 그 밑으로 잘 나가는 애들을 골랐더니 조직이 엄청나게 커졌다”고 말했다.그는 “구세력은 우리를 포용하려고 했지만 신진 세력이었던 우리 조직은 이미 조선, 백남, 로얄, 코리아나 호텔에서 ‘다지’(영업부장)을 보고 있는 등 실질적으로 시내 일대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역사적 사이보호텔 사건은 의외의 사건에서 비화했다고 조양은은 회고한다. “선배 중 O, L 선배가 있었다. 74년 12월 30일이었다. L 선배가 ‘호박처럼’ 맞아 있었다. L 선배는 칸토, 아카데미 다방 등에서 놀 때 알던 절친한 선배였다. 그날 저녁 200명 정도를 모아 장안을 샅샅이 뒤졌다.그러다 75년 1월 1일에서야 2일 오후 1시 사보이호텔에서 L 선배를 때린 K 선배 등을 비롯한 선배들이 모인다는 첩보를 들었다. 야무진 애들 30명을 곧바로 차출해 3개조로 나눠 쳐들어갔다. 당시 모인 기라성 같은 선배들이 엄청났다. K 선배가 가운데 쯤에 있는 걸 보고 ‘형님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면서 다가서는데 낌새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는 긴장하기 시작했다.그때부터 상황 종료까지는 불과 30초였다.” 이권 다툼보다는 L 선배에 대한 복수심과 평소 선배들에 대한 사소한 불만이 폭발한 것이라는 것.검찰은 당시를 “조양은이 회칼과 쇠파이프로 무장한 채 맨주먹으로 대응하는 신상사파를 몰락시켜 이후 칼잡이 시대가 도래했다”고 밝히고 있다.조양은은 하지만 “회칼을 사용하지 않았다. 검찰 기록에도 칼이란 단어는 한 번도 안 나온다. 실제 동원된 인원도 10여 명뿐”이라고 자신에 대해 쏠린 칼잡이에 대한 오명을 강력하게 부인했다.그는 또 “당시 목표는 상현 선배가 아니라 재력을 바탕으로 폭력 조직 위에 군림했던 K 형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상현 선배는 당시 근처 다방에 있어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상현 선배는 이후 내 딸 백일 돌에 반지를 보내 주기도 했다. 여전히 존경하는 선배”라고 말했다.사보이호텔 사건은 그에게 기회였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조양은은 피 말리는 전쟁이 기다리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었다.
전쟁과 화해
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은 피 말리는 조폭 전쟁의 시작이었다. 호남파 주먹들이 ‘화해를 명목으로 신상사파의 신년회에 동석해 오히려 뒷통수를 쳤다’는 소문이 확산되면서 조양은은 다른 모든 조직을 상대로 싸움을 벌여야 했다.조양은은 “신상사파는 물론, 호남 선배들까지 나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됐고, 피 말리는 3년간의 전쟁이 시작됐다”고 회고했다.“도망 다니면서도 ‘보디’(보디 가드)‘를 50명씩 대동하고 다녔다.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조직과 죽기 살기식의 싸움을 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경찰은 나의 사진조차 확보하지 못해 거리를 활보할 수 있었다”
조양은이 필생의 라이벌이 된 서방파 김태촌과 조우한 것도 이즈음. 호남 주먹 선배들이 당시 광주에서 급부상하던 김 씨를 불러 올린 것. 찬바람이 불던 1976년 초, 조양은과 김태촌은 남산 인근에서 마주쳤다. 조양은은 “태촌이와는 구면이었다.60년대 말 소년원에서 안면을 텄다. 그래서인지 태촌이 그때 ‘놓지’(칼을 먹이는 것을 뜻함) 못한 것 같다”고 당시를 돌이켰다.김태촌의 비수는 조양은이 존경하던 선배 O 씨로 향했다. 76년 3월 김태촌은 무교동 엠파이어 호텔 주차장에서 O 씨를 난자, 불구로 만들었다. 조양은은 “이때 최초로 조폭간 싸움에서 칼이 등장했고 칼잡이 시대가 도래했다”고 주장했다.검찰은 이 사건을 계기로 조양은이 범호남파의 두목으로 부상하고, 번개파 P 씨의 부하였던 김태촌도 서방파를 독자적으로 구축하기 시작했다고 분석했다.조양은은 “나와 김태촌 사이에 쫓고 쫓기는 피 말리는 시간들이었다”고 말했다.
두 조직간 대결은 76년 4월 서울 태평로 아시아호텔에서의 집단 난투극으로 비화하면서 광주 등 호남권 일대까지 영향을 미쳤다.정점으로 치닫던 대결은 공교롭게도 두목들이 검거되면서 종료된다. 전국 평정에 나선 조양은은 77년 10월 4일 광주를 찾았고, ‘OB파’ K 씨는 조양은을 광주관광호텔로 데려간다. “그 호텔이 반대파들의 본거지였는데 K가 멍청하게도 나를 거기에 데려갔다.” 조양은은 반대파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연행됐다.“수십 명이 붙잡혔는데 조양은이 누군지 몰랐다. ‘내가 조양은’이라고 말하자 경찰관들이 깜짝 놀랐다. 엄청난 거구들 중에서 얼굴도 예쁘장하고 나이도 20대 밖에 안된 나를 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조양은 검거는 서울지검 강력부로 직보됐고, 서울구치소로 압송된 조양은은 김태촌과 다시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김태촌 역시 O 씨 습격 사건과 신민당 각목대회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같은 시기에 자수해 왔던 것. 조폭 두목들이 모여든 서울구치소는 일순간에 긴장에 휩싸였다.조양은은 “구치소 안에서 구원을 풀고 화해했다. 그때부터 태촌이와는 전쟁도 없었고, 각자의 세력을 존중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78년 6월 출소한 조양은이 그 해 11월 10일 서울 광주 대전 순천 등 각 지방 조직까지 규합, 전국적 규모의 ‘양은이파’를 정식으로 발족시켰다고 설명했다. 김태촌은 이듬해인 79년 출소한다.모처럼 여유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10ㆍ26 사태와 12ㆍ12 군사 쿠데타 등 일련의 정변이 자신의 인생을 향해 다가오는 것도 모른 채 ….
우리에 갇힌 맹수
계엄령이 떨어져 사회가 바짝 얼어붙은 1980년 2월 9일. ‘우당탕 탕탕’, 호텔방에서 평소처럼 낮잠을 자고 있는데 검찰 수사관들이 요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들이닥쳤다. 맞짱만 1000전을 치르며 주먹계 천하통일을 했던 조양은이 95년 3월 15일 출소 때까지 청춘을 고스란히 교도소에서 보내야 하는 질곡의 삶은 아무 대비도 없이 시작됐다.정국은 요동치고 있었다. 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된 10ㆍ26사태에 이어 12ㆍ12군사 쿠데타로 실권을 장악한 전두환 소장 등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 폭력배들은 혹독한 된서리를 맞게 된다. 삼청교육대로 줄줄이 끌려 갔고, 김태촌 씨도 청부 폭력 등 혐의로 비슷한 시기에 구속된다.서울지검 강력부에 검거된 조양은은 수도경비사령부를 거쳐 육군본부로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다. “조사를 받으면서 ‘나를 죽이려 하는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육본 지하 벙커에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 정승화 전 참모총장 등 신군부에 의해 끌려온 핵심 인사들이 있었다. 나를 그들과 동급으로 취급했다. 조직 폭력 1호 리스트에 올라 있었다.”검거와 거의 동시에 열린 군사재판에서 조양은은 형법 4조 1항 범죄단체 구성 혐의로 사형이 구형된다. 휘하 조직이었던 순천 시민파 내부에서 두목에게 반기를 드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를 사주한 혐의로 살인 미수도 적용됐다.
“‘이정재와 임화수 이후 4조 1항으로 죽는구나’라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어떻든 이 고비를 넘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는 데는 모두 선을 넣었다. 아는 사람도 많았고, 한 다리만 건너면 안 통하는 곳이 없었던 시절이었다.”조양은은 “나는 오히려 시민파 사건을 말렸다”고 억울함을 호소했고, 증인들의 증언으로 무기로, 3일 후에 열린 재판에서 15년 형으로 감형됐다.대전교도소에 갖힌 조양은은 우리에 갇힌 맹수였다. “자유를 향한 몸부림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시베리아 형무소와 다를 게 없었다. 빨간 모자를 쓴 직원들은 무차별 폭력으로 군기를 잡았고, 수감자들은 죽지 않으려 항거했다. 지옥이었다. 수감자 중에는 손이 썩어 들어가 벌레가 나오기도 했다.”81년 7월 10일 대전교도소에서 김해교도소로 이감되면서 파란만장한 수형 생활이 시작된다. 사회에서처럼 교도소에도 음지가 있었다.“3여 년이 지나며 교도소 생리를 완전히 터득했다. 84년 8월 10일 공주교도소로 이감된 후 20일 만에 공장을 통솔하는 반장, 6개월 후 총반장이 되었고, 한 달 후에는 모범수들을 대표하는 자치위원장과 재소자들의 규율 유지와 교도관들의 업무를 보조하는 봉사대 반장 등 3개 감투를 겸임했다.”조양은은 교도소 직원들과의 유착 관계를 부인하지 않았다. “조직과 힘과 돈이 있었고, 교도소 간부는 물론 하급 직원까지 유대 관계가 있었다. 간부만 친하면 하급 직원에 의해 말이 새나갈 수밖에 없다.”하지만 맞짱을 서슴지 않는 등 투쟁도 불사하지 않았다. “온갖 부류가 다 모이는 교도소에서 보스로 군림하기 위해서는 빠른 머리 회전, 카리스마, 교도관들의 신뢰 등 3박자가 필요했다. 고문관들도 있었다. 그들과는 싸움도 있었다. 그리고 한방에 이겼다. 나는 해결사였다.”조양은의 무소불위 권력은 위험 수위를 치닫고 있었다
수감생활의 시련과 사랑
재소자 조양은은 적어도 수감 10년째인 1989년 즈음까지 모범수로 알려졌다. 교도소에서 징계 한 번 받은 적이 없었다. 조양은은 사회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었다.인생의 봄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비록 뛰어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지만 공주교도소에서 3년 동안은 마음만 먹으면 안되는 게 없었다. 89년 8월 순천교도소로 이감되면서 나를 향한 족쇄는 서서히, 그리고 점점 조여져 왔다.” 광주 출신인 그에게 순천은 마음의 고향이지만….급기야 조양은은 90년 순천교도소 난동 사건을 일으킨다. “10대 후반부터 전국을 돌고 돌아 순천에 왔을 때는 비록 철창 신세지만 고향에 온 것 같이 포근했다. 그런데 지역 연고지에 있는 재소자들을 연고가 없는 다른 지역으로 이감하는 조치가 갑자기 내려졌다.나도 순천을 떠나야 했다.” 조양은은 동료 재소자 1200명과 함께 입방을 거부하고 옥상에 올라가 “이감 반대”를 외쳤다. “죽느냐 사느냐였다. ‘조양은의 파워’를 보여 줘야 했다. 다른 재소자들도 나의 기에 눌려 내놓고 반대하지 못했다.”난동 사건으로 조양은은 얼마 후 대전교도소로 보내져 1년 4개월 9일 동안 독방에 수감됐다. “너무 커진 내 힘을 교도 당국이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나를 자주 이감시켜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교도소 밖의 사정도 조양은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조양은의 수감 중에도 ‘양은이파’는 크고 작은 사건을 일으키며 세력을 유지했다. 검찰에 따르면 88년 9월 14일 양은이파는 서울의 한 식당에서 양은이파 서방파와 함께 조직 폭력 3대 페밀리를 구축한 ‘OB파’ 보스 L 씨를 급습, L 씨의 아킬레스건을 절단한다. L씨는 미국으로 출국, 사실상 폭력 세계에서 은퇴한다.조양은은 또 “이 시기에 폭력 조직이 사회 봉사 등 명분을 내세워 조직을 공식화하려는 움직임을 본격화했는데 교도 당국이 나와 사회 조직간의 연계 고리를 끊으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실제 이 시기 호남 주먹계의 ‘대부’ L 씨는 87년 3000여 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호청련’을 결성했다. ‘일송회’ ‘화랑 신우회’도 이때 등장했고, 폐암 치료를 이유로 형 집행정지 결정을 받아 출소한 김태촌 씨도 89년 3월 ‘신우회’를 결성했다.일련의 이 같은 사건들이 ‘특별 관리 대상 1호’였던 조양은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의 행동 반경을 좁히는 계기가 됐다는 게 검찰의 분석이다.
“10여 년이 흘렀지만 대전교도소의 독방 생활에 대한 악몽으로 지금도 가위에 눌리곤 한다. 죽고 싶었다.” 혹독한 시련을 겪은 조양은은 다시 진주?청주?대구 교도소로 세를 구축할 틈도 없이 정처 없이 옮겨 다녀야 했다.“15년 수형 생활, 터널의 끝이 보일 때쯤 나에게도 꿈처럼 천사가 날아왔다. 그 천사에게 비가 오는 날은 빗소리에 장단을 맞추고, 새가 울면 새 소리에, 밤에는 귀뚜라미 울음 소리에 맞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94년 5월 조양은은 20세 연하의 반려자 김소영 씨를 만난다.
출소와 결혼, 조직과의 단절
1995년 3월 15일 어슴푸레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5시. “형님 고생하셨습니다. 출소를 축하드립니다.” 대구교도소 정문에 조양은이 검게 그을은 얼굴을 내밀자 양쪽에 도열해 있던 검은 양복 차림의 건장한 청년 100여 명이 일제히 절을 올렸다.“검찰 경찰이 다 보고 있는데 뭐하러 왔냐, 나오지 말라고 그렇게 애기했는데….“ 도열한 100여명의 부하들을 둘러보는 조양은은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얼굴에는 자신감이 환하게 드러났다.
부하들이 샴페인을 터트리려고 했는데 조양은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이제 새로 태어났어요, 제발 이러지들 말아요”라며 성대한 출소식을 극구 말렸다. 조양은은 건재했다. 15년 동안 특별관리대상 1호로 철창 신세를 졌지만 양은이파의 세력은 죽지 않았다.조양은은 핵심 부하들의 손을 잡아주며 “별 일 없었지”라고 짧게 인사했다. 간단한 출소행사가 끝난 뒤 조양은은 청년들에게 둘러싸여 회색 포텐샤를 타고 사라졌고, 150여명의 취재진이 그의 뒤를 쫓았으나 허사였다. “출소 전날 대구의 장급이상 여관은 모두 동이 났다. 옛날 부하들 1000여명이 내려왔다.“조양은은 출소후 서울로 올라와 1년 가까이 편지를 주고 받았던 김소영씨 집으로 직행한다. 그리고 충남 온양의 김 씨의 집 ‘푸른산장’에서 은둔의 시간을 가진 뒤 그해 6월10일 여의도 순복음교회에서 결혼식을 갖는다. 조양은은 “나와 아내를 연결시켜준 사람이 목회자로 알려졌는데 사실은 ‘천안곰’ 조일환 선배가 중간에 다리를 놓았다”고 말했다.“아내는 미국 USC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하고 일어_영어 동시통역사였는데 교통사고를 당한 후 심신이 허약해져 한국에 와 있었다. 주위의 성화로 선도 7번 보았으나 모두 퇴짜를 놓았다. 그런 참에 조 선배가 나를 소개했고, 94년 5월 교도소에서 처음 만났는데 첫눈에 서로 호감이 갔다”조양은은 이때부터 출소할 때까지 44통 편지를 썼고, 그중에는 27장 장문의 편지도 있었다고 말했다.조폭 보스와 유학까지 한 통역사 간의 사랑이라니, 신파극 같은 얘기에 조양은은 다소 엉뚱하게 설명한다. “장모가 아내에게 ‘대학생인데 정치적 격동기에 잘못돼 징역을 살고 있다. 출소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이도 딱 맞는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아내는 내가 조직폭력배의 보스인 줄은 전혀 몰랐다. 오죽했으면 출소하는 날 ‘왠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왔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중에 신분을 알고 나서는 결혼 전날까지 취소하겠다고 말썽을 부렸다.“출소한 조양은에게는 무거운 과제가 하나 있었다. 형기를 마칠 즈음 검사에게 “출소하자마자 조직을 해체하겠다”고 서면으로 맹세까지 해둔 조직과의 단절. 30년 업보였다.
앞으론 '신앙의 조양은'일뿐…
“외롭고 고독한 교도소에서 요한복음 1장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구원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귀한 손길이 저와 함께 해 주신을 것을 깨달았습니다. 놀라운 사랑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전달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1995년 3월 출소 후 얼마 되지 않아 조양은은 대중 앞에 나서 간증을 했다. 조양은은 “앞으로 보스 대신 신앙인 조양은, 조 집사로 불러 달라”고 했다.“나는 떠난다. 새 삶을 살아갈 것이다.”조직도 떠났다. 검사와 “출소하면 조직을 해체하겠다”고 약속한 조양은은 출소 직후 충남 서산에서 전국 ‘오야붕’모임을 갖는다. “목숨을 걸고 만들었고, 지켜 왔지만 양은이파는 오늘로 공식 해체한다. 나도 주먹과의 인연을 끊는다.”조양은은 또 “칼부림을 없애는 데 기여했다“고 말한다. “전국을 돌며 결혼 청첩장을 돌릴 때도 오야붕들에게 앞으로 조직간 싸움 때 칼부림은 없애라고 당부했다. 95년 이후 칼부림이 난 적이 있느냐. 있다면 동네 양아치들의 싸움에서나 나왔을 것이다.”영화 <보스>에 직접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활발한 사회 활동을 재기한 것과 동시에 조양은은 신학대학에 입학한다. 노숙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세족식에도 참석하면서 다른 모습으로 살겠다는 약속을 이행하는 듯했다.그러나 30년 이상 묵은 구습을 한번에 떨칠 수는 없는 듯 조양은은 출소 1년 5개 월 만인 96년 8월에 이어 2000년 12월에 도박과 외화 밀반출 등의 혐의로 잇따라 구속 수감된다.세인들은 “과거와의 단절은 거짓이었다. 조양은은 세상을 속였다. 종교의 우산 속에 숨어 여전히 범죄 생각만 하고 있었다“면서 위장 신앙 생활을 비판했다.“내가 실수한 것은 당연히 처벌을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더 많은 돌팔매질을 받았다. 나는 때가 덕지덕지 너무 많이 묻은 사람이다.한꺼번에 새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조양은의 항변이다. “주먹도 완전히 잊었다. 만약 활동을 시작한다면 내가 그만둘 때 잘못한 일도 없고 등 돌릴 일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못할 것도 없었다.그러나 동생들한테 전화라도 한 통하고 본의 아니게 일이라도 터지면 두 말을 하게 되는 셈이다. 조직을 이끌려면 이권에도 개입하고 그래야 하는데 그런 것은 하고 싶지도 않다.”조양은은 조만간 아내 김소영 씨와 딸 수빈이를 먼저 이민 보낸다. “세상은 나를 여전히 조폭의 두목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내가 조용히 죽어 지내기를 원하고 있다. 한순간 잘못으로 청춘을 송두리째 교도소에서 보냈다. 나도 내 인생이 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니냐.”“사회에 대한 빚을 청산한다는 생각으로 아무데나 거침없이 다니면서 선교 활동을 하겠다.”그의 약속이 지켜지길 빈다.
조폭의 역사
한국에서 조직적인 폭력배의 태동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싹튼 구한말에 비롯됐다는 게 정설이다. 이권과 함께 시작된 주먹의 역사는 상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한국의 주먹들은 과연 어떤 옷으로 갈아 입으며 변화해왔을까. 그들이 기생한 사회환경과 이권 추구 방법, 그리고 조직을 유지한 나름대로의 철학 등을 종합해볼 때 한국 주먹의 역사는 크게 4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는 일제치하와 광복 공간의 ‘낭만파 주먹시대’이며, 제2기는 자유당 정권 시절 정치권과 공생관계를 유지한 ‘정치깡패의 시대’로 나뉜다. 5·16으로 된서리를 맞은 주먹세계는 한동안 숨을 고르다 70년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발판으로 먹을 ‘파이’가 한결 커지자 피비린내 나는 조직끼리의 전쟁을 통해 ‘전국구 주먹시대’로 접어든 게 바로 제3기다. 제4기로 불리는 현재의 주먹세계는 음습한 ‘검은 옷’을 벗어던지고 합법적인 공간에서 활동하는 ‘기업가형 폭력배 시대’로 변신했다.●한국 주먹패의 효시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의 시초는 과연 언제일까. 역사학자들중에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던 흥선대원군이 만든 사조직을 조직 폭력배의 효시로 보는 견해가 많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불량배와 어울리며 안동 김씨의 감시와 견제에서 벗어나는 연막전을 폈고, 자신의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보좌에 앉힌 뒤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권력투쟁의 고비마다 이들을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는 전위부대로 적극 활용했다. 이전에도 객주나 나루 주변에 상인들을 갈취해 돈을 뜯는 무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폭력행사를 주업으로 삼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대적 의미의 조직 폭력배라고 단정하기는 무리다.●제1기 낭만파 주먹시대●3자 구도폭력을 생업으로 삼는 한국 주먹의 본격적인 장은 1930년대에 열렸다. 피 끓는 젊은이들이 식민시대의 울분을 토해낼 길이 없어 폭력배로 전락했다는 일부의 해석은 사회과학적인 논리가 결여된 유치한 발상이다. 사회현상은 구조적인 틀 속에서 입체적으로 설명돼야 한다. 30년대는 일제의 식민지배가 공고해지는 시기로 토지수탈과 상업자본주의의 침투로 농업을 기반으로 한 봉건제 사회가 부분적으로 해체되는 변화를 겪는 시기다. 그 과정에서 생산수단을 박탈당한 농민들은 상대적으로 먹고 살 길이 나은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이들 가운데 힘깨나 쓰는 젊은이들은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암흑세계’의 전면에 나서게 됐다. 당시 경성은 조선인이 주도하던 종로상권과 일본인이 밀집한 명동상권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먹패들은 상권에 기생해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당시 주먹세계도 자연스레 양분돼 있었다. 명동의 지존은 하야시로 알려진 한국인 선우영빈. 일찍이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거물정치인이자 최대 야쿠자 조직인 ‘현량사’의 보스 도오야마 마쓰루(頭山滿)의 휘하에서 성장한 만큼 조선 내 야쿠자의 우두머리로 막강한 조직 장악력을 과시했다.반면 종로의 주먹패는 명목상 ‘구마적’ 고희경이 오야붕의 위치에 있었지만 조직력과 자금력이 취약해 하야시처럼 절대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종로를 장악한 주먹이 조선 최고의 오야붕으로 인정받던 당시 주먹판의 권력판도는 구마적을 비롯해 학생패를 이끈 보성전문 출신의 ‘신마적’ 엄동욱, ‘쌍칼’ 김기환 등이 형성한 삼자구도라는 분석이 타당하다. 엄동욱은 학생패라는 충성도 낮은 조직의 한계로 패거리의 전체적인 힘에서 다소 약했지만 뛰어난 싸움 실력으로 구마적의 반열에 올랐다. 김기환도 구마적의 하부조직에 편입돼 있었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조직력으로 구마적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세력으로 급성장했다. 왕십리의 김남산, 마포의 정춘식 등도 조직 편제상 ‘구마적’ 휘하에 있었지만 자신들의 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한 주먹 계보로 활동했다.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갈취한 일종의 세금이 이들의 주 수입원이었던 만큼 협객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게 객관적인 평가다.●김두한의 천하통일삼자구도를 형성하던 조선 주먹계가 1934년 김두한에게 평정됐다. 김두한의 당시 나이는 18세. 김기환이 구마적에게 패해 조직을 넘겨받은 김두한이 신마적과 구마적을 차례로 때려눕히고 주먹세계를 통일했다. 이후 조선의 주먹판도는 하야시와 김두한의 양자대결 구도로 전환하게 된다. 영화 ‘장군의 아들’이나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의 항일의식을 부각하기 위해 하야시와 극단적인 대립관계로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둘은 갈등보다 동반자적인 관계로 각자의 수익구조를 유지했다. 김두한 역시 생존 당시 동아방송 대담프로그램인 ‘노변야화’에 출연해 “하야시패와 장충단에서 일전을 벌인 뒤 하야시를 형님으로 모시며 형제관계를 맺었다”고 두 사람 간의 공생관계를 시인하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김두한이 창설한 ‘반도의용정신대’도 총독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하야시의 도움을 받았다.●광복 공간의 암흑세계광복 후 좌우의 이념대립 바람은 주먹세계에도 몰아쳤다. 우익 주먹들은 김두한이 선봉에 서 ‘민주청년동맹’을 이끌었고 이북 출신이 주축이 된 ‘서북청년단’이 뒤를 이었다. 좌익 주먹패는 김두한의 친구인 정진용(야인시대에는 정진영으로 나오지만 문헌상으로는 정진용이 올바른 표기)이 이끈 ‘조선청년전위대’가 대표적이다. 좌익에 대한 김두한의 백색테러는 악명 높았다. 파업현장에서 무자비한 테러를 자행했고 정진용을 살해한 ‘시공관 사건’으로 김두한은 미군정청으로부터 사형을 언도받기도 했다. 주먹패들의 좌우대립은 권력과 손을 잡음으로써 활동 영역이 정치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다. 주먹세계의 경쟁도 외부 유입 세력의 가세로 한층 치열해졌다. 6·25가 터지고 이북 출신들이 서울로 몰려들었다. 광복 후 하야시패가 떠난 명동을 장악한 이화룡, 명동 동부의 중앙극장을 차지한 정팔 등이 대표적인 이북 출신 주먹패. 일제시대 중원을 떠돌던 시라소니 이승순도 광복 후 동향인 신의주 출신 정팔의 요청으로 ‘중앙극장파’에 잠시 몸을 담았다. 낭만파 주먹들은 일제 식민지배와 광복 뒤 좌우이념대립, 그리고 전쟁이라는 혼란기를 겪었다. 생존을 위한 기생형 폭력 조직의 성격을 띤 제1기 주먹시대는 보호비 명목으로 상인들에게 자릿세를 뜯는 것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 폭력의 사회적 폐해는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조직 끼리의 대결도 흉기에 의존하기보다 맨손으로 치러 어떻게 보면 인간미마저 느껴진다. 매춘 아편 등 쉬운 수입이 보장된 반사회적인 행위를 자제하고 조직원 끼리의 의리를 중요시하는 등 주먹 철학도 엿보인 시기다. 이 때를 낭만파 주먹시대라 부르는 이유다.[출처] 스포츠서울 10월 25일자 신문에서=-=-=-=-=-=-=-=-=-=-=-=<제2기 정치깡패의 시대>낭만파 주먹시대를 거친 한국 주먹들은 생활의 물적 토대를 확보한 뒤 본격적으로 몸집 불리기에 나선다. 시대적인 환경도 이들의 ‘몸집 불리기’에 튼실한 자양분을 공급했다. 6·25전쟁을 거치고 자유당 정권이 뿌리를 내리면서 정통성이 결여된 정치권이 주먹세계의 물리적 힘을 이용하기 위해 추파를 던졌다. 건달세계도 질적 변화를 겪으면서 이른바 주먹과 권력이 본격적으로 손을 잡는 ‘정치깡패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1954년 김두한의 정계입문으로 무주공산이 된 주먹계에 현대적 의미의 조직 개념을 도입한 이정재가 급부상했다. 동대문 상인조합 이사장이 된 이정재는 막강한 자금과 조직력을 앞세워 자유당 이기붕에게 접근해 정치권과 손을 잡는다. 57년 장충단 야당집회 방해사건 등을 주도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이정재는 자유당 이천 지구당위원장까지 역임하며 한국의 도야먀(頭山滿)를 꿈꿨지 만 결국 5·16쿠데타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이정재의 동대문사단 휘하에는 자유당의 사주로 4·18 고대학생 습격사건을 주도한 유지광을 비롯해 ‘연예계의 대통령’으로 불리던 임화수와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잔인한 린치를 가해 주먹생명을 끝낸 이석재 등이 포진해 있었다. 동대문사단은 본격적인 정치깡패의 시대를 열었지만 시라소니 린치 사건에서 보듯 ‘협객’이라고 자처하던 낭만파 주먹시대의 물을 흐렸다는 비판을 받았다.이 시기에 김두한으로부터 종로를 넘겨받은 심종현을 비롯해 광화문의 장영빈, 서대문의 최창수, 소공동의 홍영철 등이 나름의 주먹 계보를 이어왔지만 정치권과 결탁해 독주하던 동대문사단에는 견줄 수가 없었다. 정치권도 동대문사단의 바람막이 구실은 물론 적극적인 비호를 서슴지 않았다. 이정재가 가장 껄끄럽게 여기던 이화룡의 명동파를 ‘충정로 도끼사건’을 빌미로 제거해주기도 했다. 정치깡패의 시대를 이끈 이정재는 느슨하던 주먹 조직을 기업형으로 새롭게 재편하고, 활동공간 역시 광역화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조직폭력배의 발판을 다졌다. 특히 충성도 높은 조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고향인 이천 지역 출신을 대거 중앙으로 끌어들여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탄탄한 결속력을 과시했다.<제3기 전국구 시대>5·16쿠데타 이후 깡패 소탕령으로 숨을 죽이던 주먹세계는 63년 민정 이양 이후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지리멸렬하던 주먹계를 잠시나마 통일한 사람이 바로 ‘신상사’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신상현이다. 그는 이화룡이 이끌던 명동파의 행동대장 출신으로 과도기에 ‘밤의 황제’로 등극했다. ‘신상사파’의 시대는 오래 가지 못했다. 6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눈부신 경제성장은 주먹세계의 변화를 요구했다. 경제개발로 인한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호남지역에서 무작정 서울로 온 청년들은 손쉽게 ‘검은 세계’에 편입돼 주먹계의 ‘태풍의 핵’으로 등장했다. 오종철과 박종석(일명 번개)이 양분하던 ‘범호남파’는 무교동 유흥가를 발판으로 세력을 키운 뒤 당시 패권세력이던 ‘신상사파’와 일촉즉발의 대결구도로 치닫는다. 범호남파는 경제성장에서 소외된 상대적인 박탈감에다 사회구조적 요인에 의해 갑작스레 주먹세계로 편입됨에 따라 이전과 달리 잔인한 폭력성을 드러냈다. 범호남파는 1975년 1월 2일 주류 공급권과 관내 유흥업소 상납금을 둘러싸고 명동의 사보이호텔에서 신년회를 열던 신상사파를 급습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사보이호텔 기습 사건을 통해 ‘오종철파’의 행동대장이었던 조양은이 급부상했고, 범호남파도 내부 분열을 겪는다. 내부적으로 수세에 몰린 ‘박종석파’의 행동대장 김태촌이 1976년 3월 무교동 엠파이어호텔 후문 주차장에서 범호남파의 실질적인 보스 오종철을 칼로 난자해 불구로 만들었다. 이후 조양은과 김태촌은 3년간 쫓고 쫓기는 혈투를 벌였다. 이 시기에 오기준, 김태촌이 중심이 된 ‘서방파’와 이동재를 두목으로 한 광주 ‘OB파’가 급속히 세력을 키워 당시 패권세력이던 ‘양은이파’와 함께 ‘3대 패밀리’를 형성했다. 전국적으로 통하는 주먹이라는 의미의 ‘전국구 주먹시대’는 이러한 ‘3대 패밀리’를 비롯해 부산의 칠성파(두목 이강환), 대전의 옥태파(두목 김옥태, 2001년 사망), 대구 동성로파(두목 오대원), 수원파(두목 최창조), 이리 배차장파(두목 김항락) 등이 이끌었다. 이즈음에 한국 주먹사는 잔인한 그림자를 드리우게 된다. ‘전통 주먹의 시대’는 가고 ‘칼잡이의 시대’가 왔음을 알렸고, 선·후배간의 위계질서도 생명력을 잃었다. 주먹세계를 부르는 호칭이 ‘조폭(조직폭력배)’으로 바뀐 것도 바로 이 시기다. 이권추구 방식과 활동공간도 엄청나게 바뀌었다. 활동공간은 상권 중심에서 대형 유흥업소 중심으로 바뀌어 주먹들의 ‘강남시대’가 열렸다. 또한 부를 축적하는 방식도 시대에 걸맞게 다양해졌다. 채권·채무관계 주주총회 등에도 조폭들이 개입해 ‘해결사’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주류 도매업은 물론 공사 입찰 건축자재 공급권에도 손을 뻗쳤다. 검찰도 80년대까지 진행된 이 시기를 폭력배들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제4기 기업가형 주먹시대>90년 노태우 정권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주먹들의 위세는 한풀 꺾였다. 보스급 주먹이 줄줄이 구속되면서 설 땅이 좁아지는 듯했지만 곧 세련된 옷으로 갈아 입고 다시 사회 전면에 나섰다. 그동안 축적된 자금력을 바탕으로 음습한 어둠의 뒷골목에서 벗어나 양지로 나왔다. 합법적인 공간에서 기업가로 변신한 이들은 최근 대형 권력형 비리 의혹사건이 터질 때마다 연루된 것으로 밝혀져 국민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해 G&G 그룹 이용호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사건에는 광주의 ‘국제 PJ파’ 두목 출신인 여운환씨가 등장했고, 2000년 한국디지탈라인(KDL) 정현준 회장의 동방금고 불법대출 사건에는 ‘서방파’ 두목 출신인 오기준씨가 연루된 것으로 드러났다.조직폭력배들의 동향을 감시 감독하고 있는 경찰청 폭력과 손재한 반장은 “현재 관리대상인 조직폭력배는 194개파 4052명이지만 법망으로 솎아내기 힘들다”면서 “폭력배들은 조직 결성 자체만으로 구속할 수 있지만 거물급 주먹이 대부분 기업인으로 위장한 탓에 ‘범죄단체 구성에 관한 법률’ 위반 행위를 적용하는 게 무척 어렵다”고 말했다. ‘기업가형 주먹시대’로 불리는 요즈음 주먹세계는 조폭들이 돈을 벌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진 때문인지 조직끼리의 물리적 충돌이 현격히 감소한 게 특징이다. 중앙무대랄 수 있는 서울의 폭력조직이 슬림화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 예전과 달리 조직끼리 공존공생하기 위해 피가 튀는 전쟁을 서로 회피함에 따라 대규모 조직원을 거느릴 필요가 없어져서다. 반면 지역 폭력배들은 서울과 견줘 검·경의 감시에서 상대적으로 멀기 때문에 운신의 폭이 넓어 점차 대형화·통합화하고 있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