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러티브(narrative)
우리는 왜 영화를 보러 가는가?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를 보러 가기도 하고, 화끈한 액션 장면을 보러 가기도 하고, 가슴 찡한 남녀 간의 사랑을 보러 가기도 하고, 역사의 다른 면을 보러 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우리는 다양한 이유로 영화를 보러 간다. 그러나 이처럼 다양한 이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들은 결국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의 틀 안에서 표현된다. 내러티브란 바로 이것, 즉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 또는 ‘이야기를 이루는 줄거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영화가 내러티브 영화는 아니며 반드시 극영화(일정한 줄거리가 있는 영화)만이 내러티브를 갖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대중문화/오락으로서의 영화, 즉 상업영화는 거의 예외 없이 내러티브 영화로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자기가 본 영화를 다른 이에게 이야기 할 때 무엇보다도 줄거리를 전하기 마련이며, 줄거리가 뻔한 영화 혹은 어려워서 무슨 소린지 모를 영화라는 평을 듣는 영화는 대체로 흥행에 실패한다.
그래서 상업영화 속에는 항상 내러티브가 있으며, 새로운 내러티브가 만들어져 관객들에게 제공되는 한편, 동일한 내러티브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다루어지기도 한다. 이것은 관객과 영화 사이의 암묵적인 약속을 기반으로 성립하는 장르 영화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소년이 소녀를 만나고, 그들이 서로 사랑하고, 그러다가 헤어지고 ...’ 하는 줄거리를 영화를 보러 온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러티브가 주는 즐거움에는 반드시 몰랐던 이야기에 접한다거나, 의외의 결말에 충격을 받는다거나 하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숨어있다고 할 수 있다. 원작소설을 읽고도 영화를 보러 가는 사람들을 보면 그것은 더욱 분명하다. 관객들은 분명히 재미있는 줄거리를 원하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은 줄거리가 있음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내러티브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고대의 신화와 전설은 모두 내러티브로 전해져왔고, 종교의 경전들도 흔히 내러티브의 형태로 그 교리를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통해 내러티브 전문가 곧 이야기꾼을 갖고 있지 않은 사회는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인간에게 내러티브를 만들고, 이해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본능적인 욕망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따라 극영화 - 특히 헐리우드 영화 - 의 내러티브 전통의 뿌리는 멀리는 모닥불 가에 둘러 앉아 이야기꾼에게 귀를 기울이던 인류의 선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겠지만 가까이는 19세기 서유럽의 사실주의 소설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초창기의 대도시 영화관객들에게 가장 친숙한 내러티브 형태였으면서, 후에 유럽문화권 바깥의 관객들에게도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내러티브의 보편적인 특성들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는 몇 명의 주인공들, 주인공들 사이에 명확하게 정의된 관계들(애인, 가족, 친구, 적 등), 인과관계를 가진 연속된 작은 사건들, 주인공들의 삶에서의 문제의 발생과 발전(전개), 해결이라는 갈등구조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관객이 영화를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특성들을 극영화의 전제조건으로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어떤 이유로든 상업영화(특히 헐리우드 영화)에 반대해 온 영화작가들은 종종 이러한 내러티브 특성들을 자신들의 영화 속에서 부정하려고 노력해왔다. 이러한 노력은 극단적으로는 내러티브 자체를 없애버린 영화들(미니멀리스트나 구조주의 영화)로 나타나기도 했고, 헐리우드식 내러티브가 아니면서도 특정한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안적 내러티브를 만들려는 절충적인 접근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 작업의 공통된 의미는 현재의 극영화에 가장 일반적으로 쓰이는 내러티브 방식이 그 자체로서 영화에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19세기 서유럽 사회에서 영화가 발생했다는 역사적 조건의 산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데 있다.
* 참고
1) 미니멀리스트(minimalist) :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추구하는 사람들.
2) 미니멀리즘(minimalism) :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젊은 작가들이 최소한의 조형 수단으로 제작했던 회화나 조각을 가리키며 '최소한의 예술'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것이 음악 분야로 옮겨져 단순과 반복을 통한 개성 있는 음악으로 창조되었고, 패션에서는 최소한도의 옷으로 훌륭한 옷차림을 연출하는 방법을 말한다.
3) 구조주의 영화 : 영화 문법의 해체와 재해석을 통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내러티브를 배제한 채 시각적으로만 접근하는 방식의 영화들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