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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지리산둘레길 7구간(성심원-운리)
여행일 : ‘21. 12. 4(토)
소재지 : 경북 산청군 산청읍과 단성면 일원
여행코스 : 성심원(2.3km)→아침재(2.5km)→웅석봉 하부헬기장(6.4km)→점촌마을(1.5km)→탑동마을(0.7km)→운리마을(거리 및 시간 : 13.4km/ 실제는 13.11km를 4시간에)
함께한 사람들 : 청마산악회
특징 : 대한민국 국립공원 제1호인 지리산(1,915m)은 3개 도(전북·전남·경남). 5개 시·군(남원·구례·함양·산청·하동)에 걸쳐있다. 또한 아흔아홉 계곡과 500여 개의 자연마을을 품는다. 그 지리산의 둘레를 걷기 길로 이은 게 ‘지리산 둘레길(현재 20개 읍·면, 100여 개의 마을을 지난다)’이다. 오늘은 7구간인 성심원-운리 구간을 걷는다. 5개 코스(60.2km)로 이루어진 산청 권역의 세 번째 구간으로 거리는 13.4km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천 미터도 넘는 웅석봉의 8부 능선을 넘어야하기 때문에 지리산둘레길에서 가장 힘든 구간으로 꼽힌다. 대신 산청의 지리산둘레길 중 가장 호젓한 구간이라는 점도 기억해 두자.
▼ 들머리는 성심원(산청군 산청읍 내리 풍현마을)
통영-대전고속도로 산청 TG를 빠져나와 좌회전하여 산청교차로(산청읍 지리)까지 온 다음, 우회전하여 3번 국도를 타고 내려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경호강 건너에 있는 성심원이 눈에 들어온다. 6구간과 7구간의 경계인 성심원의 정문은 국도를 빠져나와 ‘성심교’ 다리를 건너면 만날 수 있다. 참고로 성심원은 가톨릭 재단법인 프란체스코회(작은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사회복지시설이다. 당초 프란체스코회 중심의 ‘한센인 정착 자립마을’이었으나 현재는 한센인 생활시설과 중증장애인시설이 하나로 통합돼 운영되고 있다.
▼ 산청읍 내리의 성심원에서 단성면의 ‘운리’까지. 거리는 13.4km(어천마을을 경유하면 2.7km가 늘어난다) 밖에 되지 않으나 웅석봉의 턱밑인 800m고지까지 올라가야 하는 힘든 구간이다. 또한 탑동마을까지 내려가는 임도도 지루할 뿐 특별한 볼거리가 없기 때문에 둘레길 순례자들이 썩 마음에 내키지 않아 하는 편이다.
▼ 7구간의 시작점은 성심원의 정문이다. 그런데 성심원은 오늘도 통행금지란다. 길을 나서기 전 ‘십자가의 길’을 걸어볼까 했었는데 아쉬운 일이라 하겠다. 이제 성탄절이 한 달도 채 남지 않았다. ‘예수의 사형 판결’을 시작으로 ‘무덤에 안장됨’까지 총 14개로 구성된 십자가의 길. 성탄절을 맞는 마음가짐으론 이보다 더 나은 게 없었을 텐데 말이다. 그나저나 벅수가 오늘은 등산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의도적인지 아니면 누군가가 깜빡 잊고 놓아두고 간 것인지는 몰라도, 길 떠나는 나그네들에게는 묘한 감회를 제공한다.
▼ 어천마을 방향으로 걸으면서 트레킹을 시작한다. 길 떠나는 나그네에게 가장 먼저 다가온 볼거리는 ‘나루터’다. 다리가 놓이기 전 성심원은 철선(鐵船) 한 척이 바깥세상과 통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참고로 음성 나환자들의 집단 정착촌인 풍현마을(성심원)은 1959년에 문을 열었다. 그게 62년, 하지만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갈등과 치유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나와 다르다’는 편견으로 사람이 사람을 냉대하던 시절이 우리 주변에 만연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다리도 1972년이 되어서야 놓인다. 섬 아닌 섬에 갇혀서 죄인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
▼ 안내판은 나루터의 역사를 적고 있었다. 1972년에 놓인 다리는 두 번이나 유실되었고, 덕분에 이 나루터는 세 번째 다리가 놓인 1988까지 제 몫을 수행했단다. ‘사랑은 전염성이 있지만 음성 나환자는 전염성이 없다’는 계도성 문구는 이제 흘러간 옛 얘기가 되었지만, 이제라도 동반자로 사는 게 무엇인가를 느끼게 해주는 곳(성심원)으로 발전했다니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5분. 경호강을 왼편에 두고 강변길로 곧게 뻗어나가던 둘레길이 경호강과 이별을 고한다. 그리고는 임도를 이용해 산기슭으로 파고든다.
▼ 몇 걸음 더 걷자 이번에는 둘레길이 둘로 나뉜다. 하나는 계속해서 임도를 따르고, 다른 하나는 왼편으로 방향을 틀어 나무다리를 건너란다. 다리를 건너면 어천마을로 연결된다. 예전엔 ‘어리내’라 하고 우천(愚川)으로 부르다가 언제부턴가 어천(漁川)으로 변한 산골마을이다. 웅석봉에서 흘러나온 물길이 마을 앞을 지나는데 이 개울에 쏘가리며 뱀장어·가재·메기·꺽지 등이 바글바글 했기 때문이란다.
▼ 벅수(운리 12.6㎞/ 성심 0.8㎞)도 두 방향 모두에 붉은색을 칠했다. 마음에 드는 방향을 골라잡으라는 얘기일 것이다. 맞다. 그 보증은 다리 앞의 ‘구간별 안내도’가 해준다. 본래의 루트는 오른편의 임도이나, 왼편의 어천마을 방향으로 가더라도 이따가 아침재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 이후부터는 임도를 따른다. 이어서 산골짜기를 숨 가쁘게 거슬러 올라간다.
▼ 웅석봉(熊石峰)은 ‘곰’의 전설을 안고 있는 산이다. 그에 딱 어울리는 현수막이 걸려있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반달가슴의 활동지역이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반달가슴곰의 방생을 시작한지도 어언 19년, 세를 부풀리는가 싶더니 이젠 텃새까지 부리는 모양이다.
▼ 길가엔 벌통도 놓여있었다. 꿀은 곰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저것은 분명 곰이 아닌 사람의 소유이다.
▼ 숨 가쁘게 오르던 임도가 끝내 ‘갈 지(之)’자를 쓰고야 만다. 곧장 뻗어나가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가파르다는 얘기일 것이다.
▼ 숨도 고를 겸해서 고개를 돌리자 정수산과 둔철산이 눈에 쏙 들어온다. 그 산자락에는 다랑이논으로 둘러싸인 범학마을이 들어앉았다. 국보 제105호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이 발견된 곳으로, 탑은 현재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보관중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25분. 어천마을에서 성심원 넘어가는 가파른 언덕길 정상에 자리한 ‘아침재’에 올라섰다. 성심원 쪽에서 보면 아침이 밝아오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곳은 아까 어천마을로 나뉜 순환코스가 다시 합쳐지는 ‘삼거리’이기도 하다.
▼ 하지만 벅수(운리 11.1㎞/ 성심 2.3㎞/ 성심 5.0㎞)는 어천마을 방향은 가리키고 있지 않았다. 표지판이 떨어져나갔는지도 모르겠다. 대신 ‘구간별 안내판’가 현재의 위치를 알려준다.
▼ 합체를 이룬 임도는 이제 점점 깊은 산속으로 파고든다. 이때 무당집 처마를 연상시키는 철조망이 눈에 띈다. 얼마나 많은 산악회가 이곳을 찾았으면 저리도 많은 리본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을까?
▼ 아침재 부근에서 어천마을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저 일대는 한국전쟁 때 웅석봉을 본거지로 활동하던 파르티잔의 피해를 가장 많이 입었던 곳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이, 개발 붐을 타고 땅값이 오르면서 마을을 지키며 살아 온 주민들은 대부분 떠났다. 주민이 떠난 자리에 펜션과 별장 같은 집들이 들어섰다. 그게 이국적 뉘앙스를 풍기면서 이방인이 자주 찾는 마을이 되었다.
▼ 한결 나긋해진 임도를 따라 걷다가 특이한 표지석이 눈에 띄기에 카메라에 담아봤다. ‘119 농원(벅수 : 운리 10.8㎞/ 성심원 2.6㎞)’의 표지석인데 농원의 이름과 전화번호는 그렇다 치고 주인장의 인물사진까지 자연석에 그려 넣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의 얼굴이 얼마 전 작고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쏙 빼다 닮았다.
▼ 잠시 후 둘레길은 웅석사(熊石寺)를 스치듯 지나간다. 암자라고 해야 걸맞을 정도로 작은데다, 생김새도 여느 여염집과 다름없다. 그래도 ‘절 사(寺)’자가 들어간 어엿한 사찰이다.
▼ 임도는 포장과 비포장을 반복하면서 이어진다. 길을 걷다보면 붉고 보드라운 흙이 속살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때 산청을 대표하던 특산물인 ‘고령토’다. 질 좋기고 소문난 산청의 고령토는 선별 과정을 거쳐 많은 양이 일본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 길을 걷다보면 출입을 금한다는 서슬 시퍼런 경고판을 심심찮게 만난다. 사유지이니 들어오지 말라는 것이다. 이를 보고 야속하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주민들의 심정도 이해해 주어야 한다. 그동안 이 길을 지나간 많은 사람들이 주민에게는 자식처럼 소중한 재산인 농작물을 함부로 꺾거나 채취했다는 증거일 테니까 말이다.
▼ 트레킹을 시작한지 45분. 둘레길은 임도를 벗어나 개울(벅수 : 운리 9.6㎞/ 성심 3.8㎞)로 내려선다. 웅석봉으로 올라가는 여러 등산로 가운데 하나인 ‘어천마을 코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보면 되겠다. 1983년 11월 23일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웅석봉은 이밖에도 밤머리재와 지곡사, 바람재(성심원), 청계리 등 다양한 곳에서 오를 수 있다.
▼ 내려선 어천계곡(상류이니 대통골이 맞을 수도 있겠다)은 만추(晩秋), 아니 완연한 초겨울의 풍경을 보여준다. 떨어진지 이미 오래인 낙엽은 물론이고, 끝물로 남아있는 단풍까지도 모두 말라 비틀어졌다. 그러니 울긋불긋한 단풍은 이미 오래 전 얘기가 되어버렸다.
▼ ‘어린내’라고도 불리는 어천계곡은 개울 수준이었다. 웅석봉이라는 거대한 산줄기에 어울리지 않게 수량도 적다. 하지만 작은 고추가 맵다고나 할까? 개울물에 손을 담그자 소스라치도록 차가운 기운이 머리끝까지 치고 올라온다.
▼ 이제 웅석봉으로 오를 차례다. 산길은 시작부터 가파르다. 아니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가파르다. 산이 허리를 곧추세웠다고나 할까? 가히 웅석봉(熊石峰)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산세라 하겠다. ‘곰바위산’이라는 게 본디 정상에서 놀던 곰이 북사면의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전설에서 유래한 이름이니 말이다.
▼ 왔다갔다 ‘갈 지(之)’자를 쓰면서 고도를 높여간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오가는 폭이 좁은 탓에 버거움까지 없애주지는 못하지만...
▼ ‘이건 둘레길이 아니다’를 외쳐대며 오르는데 ‘구호지점 표시목’이 눈에 들어온다. 맞다. 이 정도로 험한 곳이라면 저런 시설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될 수밖에 없겠다.
▼ 독일의 신낭만파 시인 ‘칼 부세(Carl Busse 1872-1918)’는 사람들의 말을 빌려 산 너머 고개 너머 먼 하늘에 행복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찾아가보니 산 너머 고개 너머 더욱 더 멀리 행복이 있다고 하더란다. 지금 오르고 있는 산길과 어찌 그리 잘 어울리는지 모르겠다. 하늘이 내다보기에 이제 다 올라왔나 싶었는데, 막상 올라와보니 하늘은 진행방향 저만큼으로 성큼 도망가 있지 않겠는가.
▼ 돌탑도 눈에 띈다. 하긴 이렇게 험한 곳에 어찌 돌탑 하나 없겠는가. 그것도 둘레길 순례자들의 발걸음이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하나씩만 소원을 빌었었어도 돌멩이는 산더미처럼 쌓였을 것이다.
▼ 오르는 게 버거운 나그네는 멈추는 횟수를 늘려갈 수밖에 없다. 호흡도 가다듬을 겸해서 고개라도 돌릴라치면 그때마다 정수산과 둔철산을 품은 산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로 나타난다. 그 산줄기는 쉬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점점 수위를 낮추어 간다.
▼ 오르고 또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겁이 덜컥 난다. 내가 과연 정상(여기서는 헬기장을 말한다)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나보다도 함께 걷고 있는 집사람이 더 걱정이다. 이때 문득 떠오르는 지인의 한마디. 산에 이골이 나다시피 한 친구인데, 산이 높고 험할 때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오르라고 했었다. 그러다보면 정상이 나온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힘들다는 생각까지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게 없다’고 했다. ‘이제 그만!’을 얼마쯤 외쳐댔을까? 하늘이 활짝 열리는가 싶더니, 먼저 온 이들이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나그네에게 어서 오라 손짓을 보내온다.
▼ 그렇게 올라선 웅석봉의 하부 헬기장은 정자를 세워 쉼터를 겸하도록 했다. ‘고진감래(苦盡甘來)’. 가파른 오르막길과의 버거운 싸움을 치른 이들의 노고에 대한 보상이라고나 할까? 참고로 들머리인 성심원에서 이곳까지는 1시간 40분이 걸렸다. 벅수(운리 8.6㎞/ 성심원 4.8㎞)는 어천골에서 이곳까지의 거리를 1km로 적고 있다. 평지라면 한걸음에 달려갈 거리를 50분도 넘게 올라온 것이다.
▼ 지리산둘레길(7구간)에 대한 안내판도 눈에 띈다. 구간의 설명과 함께 주요 볼거리를 적고 있는데, 구간의 시점이 성심원이 아니라 어천마을이다. 지리산둘레길이 운영을 시작한지도 벌써 13년(시범을 포함한 횟수다). 그동안 7구간의 노선에 변화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곳은 웅석봉으로 오르는 주요 길목 가운데 하나이다. 어천마을이나 어천고개, 청계리를 시점으로 삼은 등산로가 모두 이곳으로 모인다. 그래선지 웅석봉으로 오르는 길목에다 큼지막한 ‘등산 안내도’를 세워놓았다. 마치 웅석봉이 저 위에서 여러분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이.
▼ 이후부터는 청계임도를 따른다. 그런데 내려가지 않고 웅석봉을 향해 올라가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걱정할 필요까지는 없다. 5분쯤 지나면 구불대며 오르던 임도가 해발 768m 지점에서 둘로 나뉘기 때문이다. 둘레길은 왼편으로 방향을 잡아 아래로 내려간다. 삼거리에는 벅수(운리 8.2㎞/ 성심 5.2㎞) 말고도 이정표(웅석봉 2.28㎞/ 청계 6.65㎞/ 한재 3.83㎞) 하나가 더 세워져 있었다. 청계리를 들머리로 삼을 경우 이곳을 거쳐 웅석봉으로 오른다는 얘기일 것이다.
▼ 둘레길을 겸한 임도는 ‘달뜨기능선’을 오른편 어깨 위에 올려놓은 채로 이어진다. 여순사건으로 지리산으로 향하던 남부군의 사령관 이현상이 웅석봉을 바라보며 ‘동무들! 저기가 바로 달뜨기 산이요! 이제 우리는 살았소!’라며 오랜 행군에 지친 부하들을 독려했다는 그 능선이다. 웅석봉에서 감투봉까지의 능선을 일컫는데, 지리산 서북능선에서 바라보면 웅석봉 쪽에서 달이 떠오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으니 기억해 두자.
▼ 임도 변 산자락은 고로쇠 채취를 위한 시설들로 어지럽다. 고로쇠 채취가 인근 마을 주민들의 중요한 수입원이라는 얘기일 것이다. 고로쇠나무는 뼈에 이로운 나무라는 뜻으로 골리수(骨利水)라는 어원을 갖고 있으며, 수액은 인체 내의 모든 노폐물을 배출시켜주는 신비의 약수로 불린다. 현대인들에게 인기가 높은 이유이다. 나 역시 산촌마을의 찜질방에 들어앉아 팬티만 입은 채로 마셔대던 기억이 있다.
▼ 뒤돌아볼라치면 웅석봉(1,099m)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웅석봉은 산청의 중앙에 솟아 홀로 떨어진 산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리산 자락이다. 천왕봉에서 시작한 산줄기가 중봉 하봉을 지난 다음,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서 잠깐 쉬었다가 다시 높이 솟아오르는데 그게 웅석봉이다.
▼ 헬기장에서 다시 길을 나선지 30분. 7구간의 정중앙임을 알리는 벅수를 만났다. 지금까지 6.7km를 걸어왔지만, 앞으로도 꼭 그만큼의 거리를 걸어야 한단다.
▼ 임도는 둘레길 순례자나 웅석봉 등산객들만 고집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사람이 아닌 차량까지도 다닐 수 있는 열린 공간이다.
▼ 고개를 돌리자 면도를 하듯 깔끔하게 정리된 능선이 눈에 들어온다. 웅석봉에 흘러나와 수리봉과 석대산을 일군 후 ‘경호강’에서 그 맥을 다하는 산줄기이다. 웅석봉은 한때 천왕봉 대신 백두대간의 시·종점으로 조명을 받기도 했었다. 그렇다면 백두대간이 가지를 쳤다고나 할까?
▼ 3일 후면 눈이 많이 내린다는 대설(大雪)이다. 하지만 이곳은 이미 엄동설한인가 보다. 물기 머금은 바위벼랑이 저렇게 꽁꽁 얼어붙었으니 말이다. 하긴 해발이 700m를 넘기고 있으니 능히 그럴 만도 하겠다.
▼ 임도는 심심찮게 시야를 열어준다. 이때 웅석봉과 수리봉, 석대산 등 주변의 산들이 눈에 들어오는데, 저 멀리 산골짜기에 들어앉은 진양호도 지리산둘레길이 보여주는 소중한 풍경 가운데 하나다.
▼ 탑동마을까지의 임도 구간은 상당히 길다. 거기다 메모를 해야 할 만큼 특이한 볼거리도 없다. 지루해지기 딱 좋은 구간이라 하겠다. 하지만 인간의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싶다. 걷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고자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 우린 어느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할까나?
▼ 헬기장을 출발한지 1시간 10분. 성불정사(成佛精舍)라는 간판이 눈에 띈다. 매달린 깃발로 보아서는 신흥종교가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내 정보에는 이 사찰이 ‘있는 것 없는 것 다 내놓고 마음 편하게 해주는 곳’이다. 곡차도 얻어 마실 수 있다니 발길이 끌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 그런데도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집사람이 곁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어쩌겠는가. 곡차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고두고 아쉬운 일이었다.
▼ 얼마쯤 더 걸었을까 이번에는 청계저수지(淸溪池)가 얼굴을 내민다. 이름 그대로 맑은 시내가 흘러든다는 저수지다. 이런 호재를 놓칠 외지인들이 아니다. 저수지 주변은 이미 외지인들이 지어놓은 펜션과 전원주택 차지가 되어버렸고, 사람들은 또 피서차 찾아와 그곳에서 머문다.
▼ 20분쯤 더 걷자 차단기로 길을 막아놓았다. 그럼 아까 만난 성불정사의 신자들은 절까지 걸어서 다니란 얘기일까? 그나저나 벅수(운리 2.4㎞/ 성심 11,0㎞)는 종점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려준다.
▼ 임도를 벗어나자 잘 지어진 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옥외풀장까지 갖춘 곳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삼거리(벅수 : 운리 2.2㎞/ 성심 11.2㎞)를 만났다. 왼편은 청계저수지(저수지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된 ‘점촌마을’의 아픈 얘기가 전해지는 곳이다). 둘레길은 오른편으로 간다.
▼ 조금 더 걷자 이번에는 시야가 툭 트이면서 운리(雲里) 일대의 들녘이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운리’란 지리산의 험준한 산속에 파묻힌 ‘구름에 덮인 마을’에서 유래된 지명인데, 이곳 역시 다랑이논으로 유명한 산촌마을이다. 산이 산에 기대고, 사람들은 그 산에 기대어 살아간다고 보면 되겠다.
▼ 잠시 후 만나게 되는 ‘오거리(벅수 : 운리 1.2㎞/ 성심 12.2㎞)’에서는 5시 방향의 금계사 쪽으로 크게 휜다. 다섯 중 가장 좁은 길로 들어선다고 보면 된다.
▼ 탑동마을로 들어가기 직전 ‘금계사’에 들렀다. 암자 형태의 작은 사찰인데 단속사의 옛 이름인 금계사(錦溪寺)를 차명해왔지 않나 싶다. 금계사가 누렸다는 성황을 기대하면서 말이다. 그래선지 몰라도 시주는 넉넉한 듯. 큼지막한 대웅전은 단청까지 입혔다. 참고로 금계사로 불릴 당시 단속사는 중들이 수도하기도 힘들 정도로 신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수도정진을 위해 금강산 유점사에서 온 도승의 도움을 받아 ‘단속사(斷俗寺)’로 이름을 바꿨고. 절간은 인적이 끊기면서 불까지 나 망해버리고 말았단다. 말이 씨가 되었다고나 할까?
▼ 요 아래 단속사지의 삼층석탑에시 이름을 빌려온 듯한 탑동마을은 벽화부터가 예스럽다. 고전적인 동양화를 그려 넣어 탑동이라는 이름에 딱 어울리는 풍경을 보여준다. 거기다 돌담인지 외벽인지 모를 옛집들이 고향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가 하면, 처마에는 정갈하게 묶인 옥수수 단이 매달려 있었다.
▼ 마을을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정당매(政堂梅)’가 나온다. 늙은 선비를 닮았다는 토종매화 ‘산청 3매’ 중 하나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문신 ‘강회백(姜淮佰, 1357-1402)’이 유년 시절 요 아래 단속사에서 수학할 때 심었다는 매화나무다.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이라는 고위직까지 올랐다고 해서 후세 사람들이 ‘정당매’라 불렀다. 강회백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 자신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단속사에 심은 매화(斷俗寺 手種梅)’라는 시를 읊기도 했단다.
▼ 하얗게 꽃을 피운다는 ‘정당매’는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매화 가운데 하나이다. 수령 640년, 3.5m 높이까지 자랐던 나무는 현재 옛 줄기들이 대부분 고사 상태다. 그나마 봄이면 원줄기에서 뻗어 나온 손자 줄기들이 꽃망울을 토해낸다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 부지 안에는 ‘정당매각(政堂梅閣)’도 들어서 있었다. 이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다.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비각을 세운 이유를 적은 정당매각기(政堂梅閣記)와 통정공 강회백의 시, 강회백 후손들이 지은 시 등 여러 편의 시가 적혀 있다고 한다.
▼ 정당매 근처에서 피어난 들꽃이 하도 예뻐 카메라에 담아봤다. 찬 서리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는 국화를 보고 내 어찌 반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도연명도 ‘채국동리하(採菊東籬下) 유연견남산(悠然見南山)’이라 읊지 않았던가. 이런 삶 가운데 참 뜻이 있다면서 말이다.
▼ 정당매에서 몇 걸음 더 내려오자 울타리를 두른 석탑 2기(보물 72호와 73호)가 얼굴을 내민다. 이곳이 ‘지리산 4대 사찰’에 끼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는 ‘단속사지(斷俗寺址)’이다. 서쪽의 화엄사와 남쪽의 쌍계사 그리고 북쪽의 실상사는 익히 알 것이고, 동쪽에는 이곳 단속사가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는 것이다. 단속(斷俗)은 속세를 단절한다는 의미. 절의 이름이 속세를 단절한다고 할 만큼 강한 결의를 가진 고찰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불에 탄 뒤 지금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있단다. 현재는 동서로 ‘3층 석탑’ 2기만이 남아 옛 영화를 알려줄 따름이다.
▼ 단속사지는 현재 발굴조사가 한창이다. 그러니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 덕분에 단속사지의 또 다른 볼거리인 ‘당간지주’를 놓치고 말았다. 참고로 사찰에서는 절의 경계에 깃발을 세우고 법회 의식과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절의 문 앞에 깃발을 걸어 이를 알린다. 이때 사용한 깃발을 ‘당(幢)’이라 하며, 당을 묶어놓는 기둥을 ‘당간(幢竿)’이라 한다. 우리가 놓친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이다.
▼ 운리로 들어서기 직전 다물민족학교의 평생교육원(벅수 : 운리 0.2㎞/ 성심 13.2㎞)을 만났다. ‘다물민족학교’는 구한말 대성학원과 신흥무관학교의 맥을 잇는 자생적 민족교육기관으로 1990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다물(多勿)은 ‘되돌려놓는다’, ‘되찾는다’는 의미로 고구려 동명성왕의 ‘고조선의 영토와 문화를 회복한다’는 취지를 본뜬 ‘다물정신’으로, 왜곡된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건강한 민족혼이 교육 이념이란다.
▼ 하지만 내리초등학교를 리모델링했다는 교육원은 왠지 썰렁한 느낌이다. 인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동명성왕(BC 58-BC 19)은 수천 명의 고조선 유민들로 ‘다물군’을 조직해 한나라를 물리치고 고구려를 세웠다. 그 정신은 발해의 건국정신, 고려의 북진정책, 조선의 북벌정책으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니... 내가 잘못 생각한 거겠지?
▼ 날머리는 운리마을 주차장
헬기장을 출발한지 2시간 20분. 운리(雲里)에 이르면서 힘들었던 7구간의 대장정이 막을 내린다. 운리는 탑동과 본동, 원정마을이라는 단위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곳은 본동마을쯤 되겠다. 아까 탑동마을을 지나왔고, 원정마을은 8구간 때 만나게 되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오늘은 4시간을 걸었다. 핸드폰의 앱에 찍힌 거리는 13.11km. 웅석봉의 8부 능선까지 올랐던 점을 감안하면 제법 빨리 걸은 셈이다.
▼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했다. 하루 24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그녀는 내 곁을 지켜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라도 더 알고 싶어 나대는 나를 진정시키는 청심환 같은 역할도 소화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체셔 캣’의 역할이라고나 할까?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 아무 데도 갈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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