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재 여행편지
한 편의 시가 되고픈 여행
서문
오랫동안 길 위의 풍경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 길에서 상처를 만나면 상처를 위로 받고
지혜를 만나면 지혜를 배우고자 했습니다.
어느 산골의 오두막집을 그리워하며
산으로 숲으로 옛사람의 흔적을 따라 걸었습니다.
길은 인내와 겸손의 또 다른 이름.
길 위에서 수많은 인생이 저물어 갔듯이
길 속으로 스며들어 하나의 풍경이 되고자 했습니다.
누군가 그 길을 서럽게 울면서 갔고
누군가 그 길을 고달픈 삶의 지게를 짊어지고 갔고
누군가 그 길을 희망에 들떠서 걸어갔지만
이제 그 길을 걸어 돌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그와 같이 길을 따라서 어디론가 흘러가는 존재입니다.
길은 사람이 만든 욕망의 지도와 같습니다.
길을 따라서 문명이 퍼져나갔고 전쟁과 약탈도 시작되었습니다.
욕망이 사라지고 나면 후회와 성찰이 남듯
길은 추억으로 남아서 고요히 늙어갑니다.
봄날의 환희와 여름의 성성함, 가을의 쓸쓸함과 겨울의 침묵
길은 지난 세월의 궤적과 그 추억들을 바라볼 수 있고
그것이 지닌 의미를 사유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더러는 희미한 길의 흔적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백지 위에 가느다랗게 운필運筆을 하여 놓은 듯한 길
길은 바람에 날리는 옷고름처럼 유려하고 아득하였습니다.
길은 언제나 미지의 풍경 속을 향해 있었고
길을 따라가면 익숙하지만 낯설고 미처 보지 못했던
마음의 안쪽, 안쓰릐움에 닿곤 했습니다.
길은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내가 길을 걸어가면 처음 만나는 풍경들이 춤을 추고
처음 보는 사물들이 말을 걸어오고
추상적인 것들이 구체적으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풀 한포기,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바람소리, 물소리......
산촌의 쓰러져가는 오두막집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야기가 되어서 아름다운 추억을 부려놓습니다.
길을 따라 여행한다는 것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습니다.
스무 살 시절 배낭을 짊어지고 진도의 굿판과
칠산바다의 섬들을 떠돌았던 편력으로부터
나는 하염없이 떠돌이의 길에 살았습니다.
무리를 지어 일상을 도모해 본 적이 없이
홀로 표표히 떠도는 유랑자의 삶을 그리워한 까닭입니다.
그 길에서 품은 작은 소망 하나가
겨울이면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오두막집을 짓고
무심재無心齋라 편액하고 은자처럼 사는 꿈이었습니다.
분주하게 떠돌던 육신이 고요히 깃들고 싶었던
마음을 어루만지는 집 무심재,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2004년 우연한 기회에 다음 카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를 연 후
동반자가 아름다운 여행 무심재란 이름을 걸고
새로운 여행길을 시작하였으니
그동안 국내여행 494회, 해외 여행 110회에 이르는
마음의 위로가 되는 뜻 깊은 행로가 쌓이게 되었습니다.
국토의 어느 후미진 변방으로부터
세계사의 문명이 휩쓸고 간 역사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무심재 여행길은 언제나 향기로웠습니다.
그 추억과 우정 어린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광채처럼 빛나던 감동의 순간들이
헐거워진 기억의 그물 속을 빠져가 버리기 전에
여기 작은 수틀 속에 지난 흔적들을 모았습니다.
이미 추수가 끝난 들판에서
몇 낱 벼이삭을 주워든 허허로운 마음이지만
저녁연기가 피어오르는 고향마을을 바라보는 것처럼
길 위에서 쓸쓸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나직이 불러보고 싶은 시간입니다.
인생이
봄날의 한 조각처럼 서러운 시간이듯
여행의 시간도
동백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처럼 순간이었음을
담담하게 깨닫는 시절입니다.
무심재는
눈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오두막집입니다.
달빛 고이는 툇마루에
소살소살 여울물 소리 들리는
적막한 산모퉁이의 외딴집입니다.
분주하고 메마른 세상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무심재처럼
못 견디게 그리운 여행을 만들어가겠습니다.
2018년 7월
無心齋에서 이형권
ㅡ 이형권 글 사진
'한 편의 詩가 되고픈 여행'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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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글 마음에 새기며 몇번을 읽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