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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방언을 성령 받은 표시로 간주하고 있다. 때로는 거짓 방언이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다. 방언이란 물론 성경에서 비롯된 것이고, 초대교회 시대에 복음 전파를 위한 필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은사요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변질 왜곡된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후에는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어 사도 바울은 그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교회에 권면하고 있다. 그러면 과연 오늘날 그 방언이 꼭 필요한 것인가? 오늘날의 방언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며 누구나 다 그 방언을 해야 하는가?
1. 성경에서 말하는 방언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답】방언은 알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라 어떤 외국어를 말하는 것으로 사람이 언어이며 뜻이 있는 단어로 이루어진 인간의 말을 의미한다. 구약에 방언이라고 언급된 것들은 다 어떤 민족의 언어나 외국어들을 의미했다(창 10:5,20,31; 느 13:24; 단1:4).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제자들이 말한 방언도 다 외국어 방언이었다.
2. 방언의 목적은 무엇인가?
【답】하나님께서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복음전파를 위해서이다. 즉 언어 문제로 복음전파가 방해를 받을 경우 그 장애를 해결하여 누구나 자기가 익숙한 언어로 복음을 듣도록 도와주는 것이 방언을 주신 목적이다.
3. 그렇다면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답】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제자들이 맨 처음 받은 성령의 은사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울이 성령의 은사 중 제일 마지막에 두거나 때로는 생략하기도 했던(롬 12:6~8; 엡 4:7~11) 그러한 방언이었다. 그것은 방언의 은사가 그 당시 그 환경에서 가장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소한 15지역 이상에서 오순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사람들이 자기들의 고향말로 위대한 복음을 듣고 놀라 소리쳤다.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행 2:8)”
예루살렘에서 오순절을 지내기 위하여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행 2:5)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 시기는 예수의 메시아이심과 그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새로운 구원의 도리를 전 세계에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언어의 장벽이 있었다. 유대 땅을 떠난 지 오래되고 타향에서 태어난 유대인들(행 2:8)과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언의 이질성은 복음 선포에 큰 장애가 될 것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사도들의 부족을 보충하셨다.
성령께서는 그들이 일생 동안 노력해도 성취할 수 없었던 일을 한 순간에 해 주셨다. 사도들은 저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의 방언을 정확하게 말함으로 이제 해외에 복음의 진리를 선포할 수 있었다. 성령의 충만하심을 힘입어 “하나님의 큰 일(행2:11)”이 그들의 모국어로 강력하게 전파되었다. 그것은 잠시 동안이나마 언어에 있어서 바벨탑 이전의 시대를 회복한 분위기를 맛보게 하였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오순절에 방언의 은사를 주신 목적이었다. 방언의 은사는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수한 사정 아래서 주신 특이한 은사였다.
4.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이 입에 임했는가, 아니면 청중의 귀에 임했는가? 다시 말해서 사도들이 각각 다른 나라말로 설교를 했는가, 아니면 사도들은 이스라엘 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었는가?
【답】 제자들이 이스라엘 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 나라말로 들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행 2:6)” 들었다고 했으며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된 것에 대해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이 갈릴리 사람임을 강조해서 그들이 각각 다른 방언을 말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이 제자들을 “새 술이 취하였다(행 2:13)”고 조롱한 것을 보아서 방언의 주체가 청중이 아니라 제자들임을 알 수 있다.
베드로 한 사람이 이스라엘 방언으로 설교하면 모든 사람들이 각각 자기들의 방언으로 알아듣도록 그들의 귀에 방언의 은사를 주시는 것이 편리할 텐데 왜 제자들이 각각 다른 말을 하도록 하셨을까?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주체를 확실히 구분하여, 제자들에게 성령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함이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쪽은 청중이 아니라 제자들이었다. 성령의 역사가 누구에게 임했는가를 확실하게 드러내기 위한 목적이셨다. 그래서 제자들 자신들이 그들에게 임한 성령의 은사를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간접 체험으로가 아니라 직접 체험을 한 것이다. 갈릴리 사람들인 제자들이 배운 일이 없는 15가지 이상의 방언으로 설교하자 다 놀라고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이 확실해졌다. 그러므로 그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했다.
5. 오순절의 성령 충만이 있을 때 바로 방언 형상이 나타났기 때문에 방언은 성령 충만의 외적증거가 아닌가?
【답】 성경에 보면 성령 충만이 있었으나 방언 현상이 없었던 경우들이 대부분이었다(행4:8; 6:5; 7:55; 9:17; 13:9; 13:52). 오순절에 3천명이 믿었으나 방언을 했다는 말은 없다. 5천명의 회심에도 그런 언급이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사도나 선지자나 교사가 될 수 없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말할 수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다. 바울은 기독교 교리의 정수를 말하면서 로마서에 단 한 번도 방언데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보다 후대에 쓰여진 로마서(12:6~8)와 에베소서(4:11,12)에 기록된 여러 가지 은사 중에는 방언의 은사가 전적으로 생략되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영적인 기도를 가장 만이 드리신 예수께서 방언으로 기도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6. 그렇다면 고넬료 집에서는 왜 방언 현상이 나타났는가? 다 헬라어를 쓰는 사람들이었으니 헬라어 통역만 있으면 되지 않았겠는가?
【답】 베드로를 비롯한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을 주셨다고 믿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똑같은 성령 충만을 이방인에게도 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고넬료 집에서 방언 현상이 없었다면 베드로 일행은 그것을 오순절과 똑같은 성령 충만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에게 한 베드로의 보고에서도 명백해진다. 베드로는 이방인에게 내리신 성령 충만의 현상이 처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와 똑같은 것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행11:15~17). 사도행전 19장에서 에베소 교회의 어떤 제자들 (아마도 이방인)이 방언을 한 것도 똑같은 설명이 적용된다.
7. 오순절의 방언과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답】 오순절의 방언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방언은 바울의 책망을 받았다. 고린도교회의 방언이 오순절의 방언과 같은 성질의 어떤 외국어였는가, 아니면 당시 희랍 신들의 제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황홀 상태에서의 지절거림이었는가 하는 것을 명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운 문제다. 바울 자신도 거기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바울은 한결같이 방언에 대하여 ‘글로싸’란 헬라어를 써서 일단은 구분하는 것을 피했다.
고린도가 국제 무역도시였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이 이곳저곳에서 주워들은 외국어를 연결하여 방언이라고 자랑했는지도 모른다. 또 이교신 제사에 익숙했던 이방인 개종자들이 황홀경에서 나오는 지절거림을 교회 안에 가지고 들어와 성령의 은사라고 주장하면서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방언도 성령의 은사 중에 하나이기는 하지만,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중에 방언에 대하여 권면한 내용을 보면, 고린도교회의 방언은 그것이 외국어이든 열광적인 ‘지껄임’이든지 간에 성령의 은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어지럽고 소란스러운 방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에 예비하리요.....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7,9,19)”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 현상을 찬성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어떤 형태의 방언이든지 간에 그 결과가 걱정스럽고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는 이상, 그것이 성령 충만의 결과가 아님이 확실하므로 바울은 찬성할 수 없었다. 고리도전서 14장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바울은 사실상 고린도교회의 일부 방언을 금하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잘라 말했다.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 그것은 그들이 방언은 성령 충만의 결과도 아니며 쓸데없으니 하지 말라는 책망의 완곡한 표현이다.
8. 그렇다면 바울은 왜 방언을 금하지 말라고 했는가?
【답】 그렇다면 왜 바울은 “방언 말하기를 금하지 말라(고전 14:5,14,39)” 같은 애매모호한 말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것은 고린도교회들에 대한 바울의 부모 같은 뜨거운 사랑 때문이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1년 반이나 머물렀던 사랑하는 교회였다. 에베소에서 3년간 머물면서 바울은 고리도교회의 어지러운 소식을 전해 듣고 충격과 슬픔에 잠겨 “많은 눈물로(고후 2:4)” 고린도전서를 기록해 보냈다.
바울은, 그렇지 않아도 분파가 많은 고린도교회에서 자기가 보낸 편지 때문에 연약하고 일시적인 실수를 저질렀던 형제들이 매도되고 정죄될까 두려워했다. “너희는 차라리 저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저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고후 2:7)” 하는 것이 바울의 심정이었다. 그는 심지어 편지 보낸 것을 후회하기까지 했다(고후 7:8). 그러므로 바울은 엄한 말로 방언을 금지하고 꾸짖고 싶었지만 그의 이런 사랑과 염려 때문에, 또 직접 보지도 않은 방언 같은 미묘한 현상에 대해 직접적인 질책을 하는 것을 피하고 완곡한 표현을 쓴 다음, 그가 직접 가서 그가 들은 말마다 사실 여부를 “확정”하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고후13:1). 바울은 그래서 내가 갈 때까지는 “금하지 말라(고전 14:39)”는 아주 소극적이고 걱정스러운 한 마디를 덧붙인 것이다.
9. 고린도전서 14장 2절에 보면 방언은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며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장려해야 할 것이 아닌가?
【답】 방언을 하는 사람들은 위의 성경절을 근거로 방언은 하늘의 언어이기 때문에 방언으로 말해야 하나님께서 더 잘 들어주신다고 주장한다. 과연 방언은 하늘의 언어인가? 그렇다면 왜 사람마다 방언이 다른가?
① 먼저 고린도전서 14장의 배경부터 살펴보자. 바울은 고린도전서 14장을 왜 기록했는가? 방언을 장려하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방언을 하지 말 것을 권하기 위해서였는가? 분명히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방언 때문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방언의 남발을 염려하고 책망하고 있다. 방언은 다른 사람이 그 뜻을 모르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14장에서 바울은 말한다(고전 14:6~11). 그것은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요 서로 야만이 되는 것이다(고전 14:11). 만일 온 교회가 모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미쳤다고 할 것이다(고전14:23). 그러므로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고전14:19)”고 바울은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은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성령께서 주시는 참된 방언의 은사를 모독하는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로 지절거리는 방언에 대한 언급은 부정적인 뜻으로 쓰였다는 것을 해석의 전제로 삼아야 한다.
②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4장의 전반부는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면서 예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쉽게 말하면 14:2~4에서 방언은 “하나님께 한다”느니 “알아듣는 자가 없다”느니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느니 “자기의 덕을 세운다”느니 하는 말들은 다 방언을 장려하는 말씀이 아니라 예언의 탁월성에 비하여 방언은 큰 유익이 없다는 내용을 부정적으로 하신 말씀이다. 14장 3절의 “그러나”가 그것을 증거한다. “그러나”는 그 위에 나오는 문장이 앞 문장보다 더 긍적적일 경우에는, 그 전 것보다 후의 것이 더 옳다는 것을 나타내는 접속사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4:1~4을 그 원래의 뜻을 풀어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내가 지금부터 예언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를 말해주겠다. 너희 교회에서 지금 알아듣지 못하는 방언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방언이란 원래 사람들, 그 중에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이 쓰는 방언은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덕만 세우는데 사람들은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으니 그것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냐? 그리고 그것은 성령께서 주신 방언의 원래 목적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예언은 사람에게 알아듣게 말하기 때문에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자기의 덕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③ 고린도전서 14:14에는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라고 기록되었다. 방언은 영혼의 기도인가? 그렇다면 한국말로 하는 기도보다 방언 기도가 더 응답이 잘되는 영적인 기도인가? 여기의 “영”도 참된 “영적인 기도”라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즉 인간의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기도라는 뜻이다. 그런 기도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열매가 없는 기도가 올바른 기도일 리가 없다.
10. 그렇다면 현재 일부교회에서 하고 있는 지절거리는 방언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답】 하나님께서는 현대 교회들이 성령의 침례를 받은 증거로 강조하는 방언을 과연 필요로 하시는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 영적인 교통을 즐기기 위하여 꼭 방언을 할 줄 알아야 하는가? 오늘날 교회에 널리 퍼져 있는 비정상적인 방언 현상이 과연 성령 충만의 증거일까? 성경을 진지하게 연구하는 많은 성경 학도들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지절거리는 방언은 거의 모든 종교에 공통된 원시적인 일반 현상으로서 언어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전혀 언어적 특징이 없는 생명 없는 소리요 허공에다 외치는 공허한 자기 소리일 뿐이다. 모든 은사 중에서 특히 방언의 은사가 가장 모방하기 쉬운 것이었다. 발성기관은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동일한 방언 현상은 희랍신의 축제나 강신술, 몰몬교, 힌두교, 그리고 이슬람교도에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은 항상 분명한 것이었다. 헛소리로 표현된 적이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뜻있는 말씀을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런 비정상적인 지절거리는 방언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고 분명히 믿을 수 있다. 방언으로 해야만 하나님께서 인상 깊게 들으시며 기도의 효과가 있다고 믿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큰 오해이며 불신이다. 오늘날의 소위 방언은 통역을 세워도 어지러운 언어의 분열이요 무질서의 표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비정상적인 소음 속에 계시지 않는다.
11. 그렇다면 지금은 방언이 필요 없는가?
【답】 지금은 방언이 전혀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여 성령의 은사를 제한시킬 필요는 없다. 오순절과 같은 방언 현상은 특수한 사정과 환경에서 오늘날에도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현대의 방언은 삽시간에 전 세계에 퍼져 나가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하나님의 말씀을 순식간에 온 세상에 전달하는 인터넷이나 라디오나 텔레비전, 수백 개의 언어로 변역된 성경일는지도 모른다. 방언은 모든 영적 은사 중 제일 작은 것이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도 아니었고 한번 획득하면 계속되는 소유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온 천하게 복음을 전파하고 확신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수한 환경에서 주어진 특이한 은사였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구원의 증거도 아니며 높은 영성의 표현도 아니고 성령 침례의 객관적 표적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일부 교회에서 방언을 해야만 영적으로 축복 받은 것처럼 인식시키고 있는 것은 성서적이 아니며, 분리와 모방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 값싼 표적에만 매달리는 미숙하고 위험한 그리스도인을 양산할 염려가 다분히 있는 것이다.
12. 방언으로 기도해야 속이 시원하고 오래 기도할 수 있다. 그러니 어쨌든 좋은 것 아닌가?
【답】 하나님께서는 방언 듣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방언이 필요 없으시다. 분명한 한국말을 두고 이상한 ‘지껄임’을 해야 비로소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이라면, 그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니라 아마도 샤머니즘의 하나님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치신 분이시다. 방언을 가지고 하나님의 품성을 왜곡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방언에 대한 건전한 인식이 필요하다. 방언이 왜 필요한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위하여 방언의 은사를 주셨는가? 모든 사람이 다 방언을 해야 하는가?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방언문제로 인한 혼잡을 경험하고 있다. 방언 은사를 받지 못하면 마치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한 것처럼 간주하기도 하고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방언을 억지로 만들어서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처럼 가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일이 개인이나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사도 바울이 권면한 다음의 말씀을 주의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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