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마지막 날 아내와 함께,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에스키모 영화 <아타나주아>를 보았다.
2001, 캐나다, 드라마, 174분, 감 독 : 자카리아스 쿠눅
줄거리 : 지평선까지 하얗게 지워버리는 눈부신 눈과 얼음의 땅.에스키모 부족이 새로운 리더를 원하던 무렵, 사우리는 정체 모를 악령의 힘을 빌어 경쟁자 툴리막을 무력하게 만들고 부족의 지도자가 된다. 세월이 흘러 툴리막의 두 아들 아막주아(힘센 사나이), 아타나주아(빠른 사나이)는 부족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용감한 사냥꾼으로 성장하고 사우리의 아들 오키는 뛰어난 이 형제를 은근히 시기하는데... 오키의 약혼녀로 정해져있던 아투아가 아타나주아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경계심을 불을 당긴다.
두 청년은 사랑을 얻기 위해, 전통적인 방식에 따라 맨 주먹 결투를 감행하고 결과는 아타나주아의 승리! 패자인 오키는 결과에 승복하면서도 감정의 앙금을 삭이지 못한다. 이 후 단란한 가족을 이룬 형제의 삶은 아타나주아가 오키의 여동생 푸야를 두 번째 아내로 맞이 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임신한 아투아를 대신해서 겨울 사냥살림을 챙기는 일을 맡았던 푸야는 일들 돕기는 커녕 형 아막주아를 유혹하여 집안에서 쫓겨나고..오키는 여동생의 수치심을 갚아주겠다는 명분으로 형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운다.
형제가 긴 사냥 여행에서 돌아와 깊은 잠에 빠진 사이, 오키의 창은 아막주아의 몸에 꿰뚷는다.나란히 잠들어 있다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않고 달아나는 아타나주아와 그를 뒤쫓는 오키...이제 광대한 설원 위로 목숨을 건 숨막히는 질주가 시작된다!!!
내가 본 에스키모의 영화는 80년 된 흑백 다큐멘터리 <북극의 나누크>와 영화 <북극개>다. 그런데 에스키모의 후예가 에스키모 영화를 찍었다는 말을 듣고 가만히 있을 내가 아니다. 자본의 제국주의 시대를 맞이해 급속히 사라지고 있는 문화권의 사람들 이야기는 언제나 신선하고 강렬하다. 이 영화를 보며 소련 당국으로부터 탄압을 받아 영화를 몇편 만들 수 없었던 파라자노프 감독의 <잊혀진 선조들의 그림자>가 생각났다.
왜 나는 향수병처럼 또 현대에 대안으로써 이런 영화를 중요시하는가? 또한 다른 문화권마다 만들어진 민족영화는 자본집약적 헐리우드 영화와 비교할 수 없는 장점과 우월성이 있다.
첫 인상은, 역시 원초적이고 강렬하다는 것! 온통 빛과 얼음뿐인 빙원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원초적일 수밖에 없다. 도구도 무엇도 없다. 하지만 거기에도 문화가 있고 행복이 있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가 그야말로 기본적으로 충족되는 한에서 그들은 만족을 느끼고 행복하다. 도시인과 얼마나 큰 대조를 이루는가? 다른 삶의 가능성에 대해 이미 망각한 눈에 단지 야만으로 보인다면 그야말로 서글픈 일이다.
내가 영화에서 재밌게 본 것은 시간에 관한 관념이다. 우리는 직선적 시간관에 젖어 있다. 역사를 대단히 중요시 여기고 절대화한다. 발전사관을 가지고 있고,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고대인보다 현대인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한편으로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종말에 대한 불안을 더불어 안고 있다. 무의식중에 모든 것은 끝이 있다는 우주의 법칙을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순환적 시간관을 보여준다. 첫장면엔 새로운 지도자를 뽑으며 부족을 떠나는 자매가 나오는데, 결말도 또 다른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면서 죄를 지은 자매가 역시 부족을 떠나게 된다. 한편 가족들 간에는 조상이 거듭 태어나는 것으로 인식된다. 조상은 영이 되어 후손을 돌보기도 하지만, 영화에서처럼 할머니의 어머니가 손녀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런 가족적 유대와 계승은 직선적이지 않고 순환적인 구조를 나타낸다. 온통 겨울 속에 짧은 봄이라는 계절의 순환 속에 부족의 삶도 어긋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열악하지만 또 편안해 보인다. 거대한 질서 속에 순응하여 사는 인간의 모습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또 한가지 재미난 점은 현대의 과학적 합리주의 대신 이들이 가신 신화적 사고방식이다. 신화는 모든 민족이 공유했을 고대적 사유방식이며, 분명 종교와 예술, 철학의 모태가 된 세계관인 것이다. 주술이 영화에서는 중요한 기능을 한다. 일종의 텔레파시로 사람을 부르거나, 조상이 나타나 위험을 알려주고 혹은 길을 인도해 준다. 악마를 쫓아내는 의식을 통해서 사람을 구하기도 한다. 현대인에겐 이런 주술이 직관과 꿈의 형태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신화적 세계관과 과학적 합리주의는 분명히 다르다. 과학적 합리주의는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점차 단련되었다. 처음엔 그것은 자연을 이해하는 기쁨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자연을 정복하고 착취하며 대상화하였다. 하지만 신화적 사고는 자연을 존중하고 교감하며 공존하는 사유방식이다. 보이지 않는 연결을 중요시하며, 전체 속에 사람의 모습을 발견한다. 현대인이 풍부한 정신 대신 물질을 가득 채운 반면, 고대인은 물질 대신 정신을 가득 채운 것이다. 느낌과 교감이 없어진 현대인과 느낌과 교감이 살아 있는 고대인은 분명 다른 인간이다.
세 번 째 재미난 점은 살인 사건과 그것의 해결 방식이다. 고대적 살인은 분명 충격적인 일이다. 구약에도 아담의 아들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죄가 나온다. 요셉은 형들로부터 살해될 위기에 이집트로 팔려간다. 살인. 왜 인간이 인간을 죽였을까? 제인 구달의 관찰에도 분명 침팬지끼리의 경쟁 속에 살인이 벌어진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강한 유대를 보이는가하면 경쟁자를 쫓아내고 죽이는 일도 벌어진다. 카인은 이 모순을 뼈저리게 각성한 최초의 사람인지 모른다. 더 높은 유대를 갈망하기에 살인을 저지르는 모순. 인간은 야생을 벗으며 모순의 존재로 태어난 것이다. 그리고 문명의 과제는 이 모순에 따른 죄책감을 어떻게 씻어내느냐의 문제를 안게 된다. 하나의 해결책이 주술인 것이다. 즉 죄(살인)는 악마가 들어와 저지른 것이므로 사람을 미워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사람의 약함은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살인자를 마귀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마귀를 쫓아내고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게 된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얼마나 잘 실행하고 있는가? 현대식 재판으로 결코 그런 상호 이해와 용서를 이뤄낼 수 없다. 죄는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귀를 쫓는 주술은 가해자에게나 피해자 모두에게 행해진 일종의 심리치료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점을 기억하자. 어쩌면 마귀와 요정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성격이 인격으로 분리된 것일 수 있다. 그래야만 인간은 죄책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므로. 지극히 유아적 사고방식 같지만 현명한 방법이다. 잡식을 하면서 벌어진 인간의 동물살해도 분명 죄책감이라는 모순된 감정을 유발한다. 그래서 원시인들은 그 동물을 숭배하여 부족의 신으로 모시고, 그들의 정령을 위로하고 받들었던 것이다. 예수의 성찬식과 같이 식사의 종교적 의례로 삼는 것은,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인다는 모순을 어느 정도 해소하는 방법이며 주술인 것이다.
자연의 사고는 분명 야만이 아니다. 더구나 지금처럼 자연과 유리되고 자연을 착취해 위기에 처한 문명에게는 커다란 암시가 될 것이다.
첫댓글 이 영화 어디서 구해보나???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