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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명심보감' 주제는 '손 아래 사람 보내는 참척의 슬픔'을
주제로 최근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우리 젊은 해병의 넋을
보내야 하는 아픔을 돌아봤습니다. 우리 조상님들은 전쟁 때문이거나
살다 살다 뜻밖의 연고로 자식이나 손 아래 사람이 먼저 가는
슬픔을 '참 척慘慽'이란 용어를 쓰며 각별하게 슬퍼했답니다.
연평도에 포화는 멎었지만 전투중 산화한 해병 용사의
'내 나라 죽어서도 내가 지키겠노라' 외침은 결코 멈추지 않을겁니다.
그 용사를 보내야 하는 '참척'의 아픔을 잠시 돌아보겠습니다.
♣ 고전코너 ‘신 명심보감 ---참척慘慽,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떴으니 ’
모듬쇠 이 시간은 마음을 밝혀줄 보배로운 거울같은 ‘명심보감’을
새롭게 풀어보는 ‘신 명심보감’ 자리입니다.
초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일깨움은 되새겨 보고
이 시대에 적절한 처세와 마음가짐을 풍자와 함께 모색해
보는 ‘신 명심보감!’ 오늘은 고전 속에 어떤 구절인가요?
모듬쇠 예전에 우리 조상님들은 손아래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떴을 때 슬픔을 ‘참척’이란 말로 표현했거든요.
초란 요즘 우리 모두가 그 참척의 슬픔 속에 있다. 해야겠지요.
젊고 푸른 두 젊은 해병용사를 보내야 하는 것도
모두다 참척의 슬픔 속에 전송해야 하는 때이구요.
모듬쇠 참척이란 말은 참담할 참자에 슬플 척자를 쓰고
있습니다만, 우리 조상님들은 참척이란 요즘 우리가 쓰는
세상 뜬 사람을 늘 가슴에 묻고 살아야 하는 아픔이기도
하거든요. 여기
초란 효경의 한구절이 떠오릅니다.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라 했잖아요.
.(身體髮膚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모듬쇠 그렇죠.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孝)의 시작이란 뜻으로
어릴적 자주 들었던 구절이잖아요.
초란 머리카락 하나라도 잘 간수하는 것이 효일진대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뜬 슬픔은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지요.
모듬쇠 더구나. 나라를 위해 겨레를 위해 목숨을 던진 호국충혼이
돼서 떠난 그 푸른 넋을 보내는 어버이며 우리들 슬픔은
무슨 말로 형언할 수 있겠습니까. 이 슬픔을 조상님들은
가슴에 묻고 살 수 밖에 없는 참혹한 아픔이요 비극이라
해서 ‘참 척’이라고 했던겁니다. 여기 면암선생 편지 한구절
읽어보실까요? 참척의 슬픔을 당한 마음이 새겨져 있거든요.
초란 (낭송) 기노사여! 우리가 노년에 이르러서 도리어
자식 먼저 보내는 참척을 만났으니, 아마도 하늘의 운행이
기운과 차레가 들쑥날쑥함을 이기지 못하여 착한 것은
복을 주고 악한 것은 화를 주는 이치를 다하지 못한 듯합니다.
모듬쇠 의병장으로 우리 강토를 침략한 일본과 끝까지
항전하며 싸웠던 면암 최익현은 나라와 겨레를 지키고자
먼저 세상을 떠야 했던 의로운 젊은 투사 의병들이
먼저 죽어가는 모습을 가슴 가슴에 묻고서 하늘을 향해
악한 것에 재앙을 준다는 하늘이 왜 이리 무심하게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는 겁니까 외치던 그 목소리가
초란 들리는 듯 싶은 오늘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가슴에 묻어야 할 두분의 호국해병을 보내는 이 참척의
슬픔 속에서 다시 묻고 싶습니다.
모듬쇠 선대 조상님들이 그리도 아파했던 ‘참 척’이란 말을
오늘도 내일도 다시 우리 가슴팍에 못질하듯
이 손아래 젊은 사람 보내는 ‘참척’의 슬픔을 말해야
겠습니까. 정말 다시 묻고 싶은 말입니다.
초란 숙종 때 우의정까지 올랐던 권상하가 벗과 자신이 당한
손 아래 사람의 죽음, 참척을 슬퍼하며 남긴 글에
이 구절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모듬쇠 (슬픔으로) 그대의 집안에 손아래 자손이 먼저 세상을 뜬
참척의 슬픔을 듣고 그대의 정경을 상상하며 슬퍼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어찌하지 못했더이다.
나 역시 얼마 전 손부의 장사를 지내고 슬픔과 괴로움으로
지내고 있는데 이 또 한 참척의 동병상련 아닌지요.
초란 영원한 호국의 용사 해병을 보내는 마음으로 ‘참 척’의
슬픔을 돌아보며 다시 한번 두분 해병의 푸른 혼백에
명복을 빌어 드리겠습니다.
초란 오늘 ‘신 명심보감’에 대한 고전 자료는, 인터넷
‘다음 카페’ ‘우사모’로 들어가셔서 참고해 보시구요.
모듬쇠 좋은 자료나 담론은 ‘우사모’ 카페에서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면암선생문집 제6권 서(書)
기노사(奇蘆沙)에게 올림 - 병자년(1876, 고종13) 7월
머리를 조아리며 두 번 절하고 여쭙니다. 지난겨울에 답장을 주시어 감사하기 한량이 없습니다.
지난번 귀양을 갈 때에, 선생께서 서하의 아픔[西河之痛]이 있었다는 소식을 듣고 멀리 바라보며 매우 놀랐습니다. 잠깐 길을 돌아 조문드릴 수 없었던 것은 아니나, 금부 도사(禁府都事)의 독촉 때문에 자유로이 할 수가 없었으니, 지금까지 죄송합니다.
삼가 듣건대,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인의(仁義)가 천하에 행하여지면, 부모가 자식에게 곡(哭)하지 않고 늙은이가 어린이에게 곡하지 않게 된다.’ 하였습니다. 지금 선생은 인의(仁義)의 덕이 있고 인의의 말을 세웠지만, 마침 도(道)가 궁핍하고 시대가 위축되니 비록 인의를 천하에 쓰지 못하였으므로, 지나간 자취를 앞선 철인(哲人)에게서 계승하고 후학들에게 무궁하게 열어 주어, 나라에 지주(砥柱)가 되고 사림(士林)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이것은 또한 다만 당세에만 베풀고 그치는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신명이 들어주어 큰 복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노년(老年)에 이르러서 도리어 역리(逆理)의 참척(慘慽)을 만났으니, 아마도 하늘의 운행이 기수(氣數)가 들쑥날쑥함을 이기지 못하여 착한 것은 복을 주고 악한 것은 화를 주는 이치를 다하지 못한 듯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때에 복중(服中)의 건강은 신명의 도움으로 강녕하시며 현포(賢抱) 삼형제도 아울러 부지합니까? 사모하는 마음에 잠깐도 잊지 못합니다.
죄인으로 있는 소생(小生)은 어버이를 떠나고 임금을 멀리하고 거듭 바다에 들어왔으니, 그 정상이 가련합니다. 그러나 더욱 이보다 큰 것이 있으니 어찌 백년의 예의(禮義)가 하루아침에 이렇게 참혹하게 무너질 줄 알았겠습니까?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날씨가 서늘하여졌으니 도(道)를 위하여 보중(保重)하시어 우러르는 정성을 위로해 주시기 바랍니다.
[주]서하의 아픔 : 아들의 죽음을 말한다. 공자(孔子)의 제자 자하(子夏)가 서하(西河)에 살았는데, 아들이 죽어서 울다가 눈이 멀었다. 《史記 卷67 仲尼弟子列傳》
權尙夏
성달경(成達卿)에게 답함 - 병자년
봄이 가고 더위가 오는 이때에 멀리 동인(同人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그리는 마음 더욱 간절하던 차에 갑자기 정감 어린 편지를 받으니 마음과 눈이 함께 깨어났네. 그러나 참척(慘慽 손아래 자손이 먼저 죽는 것)이 있었다는 말을 듣고 그대의 정경을 상상하며 슬퍼 눈물이 흐르는 것을 금치 못하겠네. 복인(服人)인 나는 얼마 전에 손부(孫婦)의 장사를 지내고 슬픔과 괴로움으로 지내면서도 큰 질병이 없는 것은 다행이네.
일찍이 듣건대 이일재(李一齋 이항(李恒))가 오랫동안 망월암(望月巖)에서 고승(高僧)과 짝하여 밤낮으로 그 공정(工程)을 겨룬 뒤로부터 확고한 역량이 드러나게 되었다 하네. 지금 그대가 하는 것도 그러하니, 고요한 가운데서 얻은 것을 후일에 말해 주면 이 사람은 귀를 기울이고 듣겠네.
벗 우대형(禹大亨)이 “하늘도 경이 있는가?[天有敬乎]”라고 묻기에 제가 “경이 있다. 천지가 위치를 설정함에 역(易 음양(陰陽) 승강(昇降)의 변화)이 그 가운데 행하되, 사시(四時)가 어긋나지 않고 만물(萬物)이 종시(終始 시는 생(生) 종은 멸(滅))하는 것은 주재(主宰)함이 있어서이니 이것이 바로 경이다.”고 대답하였더니, 우우(禹友)가 “나도 경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설이 잘못이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명도 선생(明道先生)이 일찍이 필유사언이물정(必有事焉而勿正)과 연비어약(鳶飛魚躍)을 같은 활발발지(活潑潑地)라 하였으니, 고명(高明)이 이와 같이 미루어 말한 것도 역시 명도의 뜻과 같다고 하겠네. 그러나 명도의 뜻은 사람의 공부가 성취된 뒤에 하는 일에서 드러나는 것이, 모두 자연에서 나와 천도(天道)의 유행(流行)과 일반이라는 것이고, 하늘도 물망 물조(勿忘勿助)의 공부가 있다는 것은 아니네. 대개 무엇을 지적하여 말을 할 때에는 한 글자도 구차히 써서는 안 되네. 하늘은 바로 성(誠)일 뿐이니 하늘에 경을 말하는 것은 잘 맞지 않는 것 같네.
벗 신유(申愈)가 양의(兩儀)를 천지라고 하였습니다. 만징(晚徵)이 생각해 보니 “양의의 큰 것으로는 천지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그 큰 것을 들어 명칭하는 것이 해로울 것이 없으나, 한 이(理)가 천기(天機)를 타고 유행하고 변화하므로 물(物)마다 각각 양의를 갖추고 있다. 심지어 주야의 순환과 호흡의 굴신(屈伸)까지 양의가 아님이 없으니, 양의를 천지에만 귀착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또 역(易)의 괘획(卦劃)으로 말하면 각기 일획(一劃)은 가까스로 양의라 칭할 수 있고, 각기 삼획이 된 뒤에야 건곤(乾坤)이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천지의 정명(定名)인데, 신우(申友)는 무슨 소견으로 양의를 천지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리를 밝혀 가르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생각도 이와 같네. 보내 준 편지에 “각기 일획(一劃)은 …… 정명(定名)이다.”란 말은 본 것이 더욱 정미롭네.
[주]필유사언이물정(必有事焉而勿正) :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선(善)을 쌓는 수양(修養)으로부터 오는 것이므로 반드시 선을 쌓는 것을 일삼되 그 효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라는 말. 정(正)은 효과를 미리 기약한다는 뜻이다. 《孟子 公孫丑上》
[주) 연비어약(鳶飛魚躍) : 솔개는 날고 물고기는 뛴다는 말로 천지 조화(造化)의 묘용(妙用)을 이름. 날고 뛰는 것은 드러나 볼 수 있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理]이 있듯이 천하 만물에는 모두 소이(所以)와 소이연(所以然)이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中庸章句 第21章》
[주]활발발지(活潑潑地) : 활기(活氣)가 넘쳐 생동(生動)하는 모양이다.
[주]물망 물조(勿忘勿助) : 선을 쌓는 자가 그 효과를 미리 기약하지 말아야 하되 혹 호연지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다만 일삼는 바를 잊지 말고 의식적으로 조장(助長)하지도 말라는 말이다. 《孟子 公孫丑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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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늘은 모듬쇠 형님이 ..ㅎㅎㅎ
문자를 보내니 ,,4:00ㅎㅎㅎㅎ 잘 보고 갑니다 ...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합니다..저에 부모님도 군에서 1명 병으로 1명 6.25때..포격으로 1명 3명의 자식을 앞세웠지요..
고등시절에 "호연지기"를 글로 배웠습니다 이제야 뜻을쫒아 가려하나 .....막막하네요 그러나보라돌이님의 간만큼이라는 단어에 용기를 얻어 계속가렵니다
"연비어약" 가슴 떨리게 하네요
수년전 이 말을 들었을때 뭉클했던 기억이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