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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부산에스라 원문보기 글쓴이: 나호연
시편
시편은 쉽게하면 유대인들의 찬송가다. 찬송가인데 악보가 안보이지만 곡이 다 붙어있다. 믹담이라든지 깃딧이라든지 뭇랍벤 소산님 마할랏에 맞춘 노래 여러 곡조가 붙어있다. 곡이름이 붙어있는데 그 곡을 몰라서 안타깝게도 노래를 불러 볼수는 없다. 요즘 악보로 새로 재구성할수 있으면 좋겠다. 젊은 신학도들 같으면 시도를 한번 해보세요 유대나라에 가서 시편 1편은 어떻게 노래불렀는지 곡이 있으면 한번 찾아봤으면 좋겠다.
대체로 보면 히브리인들의 노래는 경쾌하다. 죽 늘어지는 것이 아니고 굉장히 빠르고 경쾌하다. 히브리인들만 그런 것이 아니고 아랍 사람들도 그렇고 노래가 빠른 템포고 빠르고 그 노래를 들으면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고 일어나서 춤을 추지 않으면 안될만큼 그렇게 경쾌한 노래를 한다.
시편은 150편인데 그 중에 약 73여편이 다윗의 노래고 그 다음에 고라 자손의 시(11편), 다윗의 성가대 아삽 자손들의 시(12편), 솔로몬(2편), 에단, 모세 에스라, 스가랴 히스기야 이런 분들의 시가 각각 1편씩이 있다. 전부 5권으로 나누어져있는데 유대인들은 토라 율법서를 5권을 받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찬양 5권을 드렸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시는 대게 신앙고백이 담긴 시가 있는가 하면 기도와 간구의 시가 있고 감사시 찬양시 교훈시 역사시 지혜시 저주시 예언이 담겨있는 예언시, 참회시, 금언시, 간증시, 애가도 있다. 이것이 시편들이다. 이것은 시편은 자주 읽고 외우고 할 필요가 있다. 저는 외우는 것이 자신이 없어서 많이 기억을 못합니다만...
또 다른 시의 분류로는 순수시(미스모르), 노래(-가사문학, 시르), 명상시(마스길), 풍자 조롱(믹담), 기도(테필라), 찬양(테힐라) 성가대 지휘에 맞춘 노래(영장)이 있다.
이 시는 한국사람들이 쓰는 말을 가지고 말재주를 하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다. 성경의 시들은 서정시도 아니고 낭만시도 아니고 저항시도 아니다. 영혼이 가장 맑은 상태에서 영성이 투명하고 수정같이 맑아졌을 때 하나님의 성령에 접촉되면서 찬양이 터지는, 인간 내면이 영이 승화되고 거룩해져서 성령에 비추어져서 신령한 것을 노래하는 그런 시들이다. 영시(靈詩) 영적인 시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상당히 많은 예언들이 들어있다. 구약성경에서 가장 신령한 영적인 곳이 어떤 면에서는 시편이라고도 할수 있다.
잠언
잠언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도 세상 잠언이 많이 있다. 잠언은 우리 동양에서 같으면 채근담이나 명심보감도 일종의 잠언들이다. 언설집 지혜와 삶의 철학이 단문단문속에 압축된 문학인데 요즘 문학의 쟝르로는 아포리즘에 가까운 방식으로 진술한다. 이것은 한절 한절도 가치가 있다.
잠언은 히브리어로는 마샬 이것은 다스린다 사람이 사람을 다스릴때의 지혜 라는 말이고 다르게 이름을 붙이자면 솔로몬의 지혜서(마쉴레 솔로모)라고 할수 있다. 솔로몬은 세권의 책을 썼는데 아가서 잠언 전도서이다. 청년시절에 아가서를 썼고 중년시절에 자녀교육 가정교육을 위해 잠언을 쓰고 노년시절에 전도서를 썼다고 한다.
잠언의 목적은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겸손하게, 부지런하게. 이것만 잘 외워요 처음엔 뭐라고요? 그다음은? 셋째는? 갈수록 왜 흐지부지돼요? 귀신의 소리는 처음에는 크게 나오다가 흐지부지된다고. 그런 안됩니다. 끝까지. 따라합시다.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겸손하게, 부지런하게. 이런 것을 강조한다.
지혜를 얻게 하고 훈계을 받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의롭게 공평하게 정직하게 슬기롭게 하고 젊은자에게 지식과 근신을 주기 위한 것이고 지혜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고 명철한 자는 듣고 모략을 얻을 것이라 1장에 잠언의 정신 목적이 있다. 모든 책이 그렇지만 1장은 잘 읽어야 한다. 금언 격언보다는 격상이 좀더 높은 아주 놀라운 말씀들이 많다.
대체적으로는 솔로몬이 남긴 것이고 솔로몬 외에도 몇 사람의 잠언이 들어있다. 솔로몬은 여기 있는 잠언 외에도 어마어마하게 많은 잠언(3천여개)와 노래 1005개를 지었는데 그 중에서 발췌하고 선별해서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히스기야시대에 편집해서 지금 이 모습으로 기록되었다고 한다. 어떤 것은 빼버리고 성경안에 들어오지 않은 솔로몬의 잠언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지혜와 총명을 심히 많이 주시고 또 넓은 마음을 주시되 바닷가의 모래같이 하시니 솔로몬의 지혜가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난지라(왕상 4:29-30)
새끼 빼앗긴 암콤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지니라 무식한 사람은 하나님도 감당못하신다. 안배우려 하는 것도 교만이다. 인간은 안배우면 태만하고 좀 알면 교만해진다.(쥐뿔도 개코도 없는 것이...) 배우기를 중단하는 것도 교만이다. 공부하면 겸손하게 되어있다.
솔로몬의 글이 아쉬운 것은 성경에는 없지만 이 사람이 동물도 다 논했다고 한다. 초목(식물)도 레바논의 백향목부터 담밑의 우슬초(생물학)까지 다 논하고 짐승이며 기어다니는 것이며 물고기(어류학)도 다 논하고 새들(조류학)도 다 논했다. 그런 것이 있으면 좋겠는데 없다. 성경이 아니라도 따로 있으면 좋겠는데 아쉽다. 솔로몬 시대에서 히스기야까지는 상당한 세월이 흘러가는데 처음에는 성경으로 기록이 되어있지 않다가 후대에 히스기야의 신하들이 편집했다고 성경본문에 그렇게 되어있다.
잠언은 수도 끝도 없이 읽어야 한다. 부지런히 읽어서 툭 건드리면 잠언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읽어야 한다. 아세아 방송 극동방송 사장이 되는 김장환 목사님은 매일아침 평생을 두고 잠언 한 장을 읽는다고 한다. 31장이니까 한달에 꼭 한번씩 읽게된다 30일되는 달은 마지막날에 두장을 읽고 그분은 설교하다가 보면 잠언에 구절들이 청산유수같이 줄줄줄 나온다. 많이 읽었다는 증거다.
잠언은 우리의 삶을 다듬는 말씀이다. 선택할 때 도움을 준다. 기로에 서서 갈등을 할때 지혜를 주어서 지혜롭게 하고 의롭게 하고 공평하게 하고 정직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부지런하게 하고 만든다. 특히 젊은이들이 젊을 때부터 잠언을 많이 여러번 읽는 것이 좋다. 여러분도 가능한 평생을 두고 매일 한 장을 읽으면 좋겠다.
전도서
전도서는 솔로몬이 말기 그러니까 늙어서 타락했다가 다시 회복되면서 쓴걸로 보인다. 전도서같은 것은 반드시 1장1절부터 마지막망 마지막절까지 읽어야 된다. 1장부터 3장까지만 읽으면 불교가 되버린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말짱 공이다. 이렇게 하면 불교가 되버린다.
맨 끝에 가면 전도서를 푸는 열쇠가 뒷문에 걸려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의 지켜라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그렇게 이야기한다.
솔로몬은 자기가 마음에 어떤 소원이 생기거나 눈에 봐서 하고 싶은 것이 생길 때 그것을 금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뭐든지 절제해본 것이 없이 하고싶은 것은 다 해봤다. 은이나 금이나 사치나 여자나 향락이나 네 마음껏 해봐라 사치도 할수있을만큼 해봤고 여자도 1000명인데 후비가 700명이고 후비들 화장하는 빈장이 300명이다. 자기 마음대로 할수 있는 여자가 일천명이다 워낙 지혜가 있으니까 다 기억은 했는가 몰라 우리같으면 뭐 어디서 봤더라 하면서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나라도 간수를 못해서 애를 먹는데 1000명을 데리고 아이구 참.
창조원리에 한 아담에게 한 하와를 만드셨다.(宮, 完) 솔로몬처럼 하려면 갈빗대가 남아나지 않는다. 창조원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 동성연애도 맞지 않다
어떤 사람이 길에서 여자를 만났는데 스치고 지나가는데 앞면이 참 많더래요 어디서 봤더라 하고 한참후에 생각하니까 자기 아내더라고 한다. 그런데 솔로몬은 7백명씩이나 되니까 이 사람이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러니까 타락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들로서 명예 사치 돈 여자 권세 온갖 좋은 것을 세상에 좋다는 것은 다 해봤는데 하나님께서 ‘좋다 너 하나쯤이야 너 하고싶은 대로 해봐라 해보고 단 나중에 간증은 잘해라 그래야 후대 사람들이 쓸데없는 욕심을 안부리지’ 하나님께서 한사람쯤은 구체적으로 이러한 체험을 해볼수 있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그래서 신구약 66권 중에 가장 경비가 많이 든 것이 전도서다. 이것 전도서 한권쓰게 하려고 하나님이 굉장히 투자를 많이 했다. 제작비가 가장 많이 들었다.
그러니까 믿어요 헛되다는 것을. 다 해봐야 헛됩니다. 아무도 아멘 안하는데 해볼 참인가 보네. 뭐 얼마나 벌어놨길래 아무도 아멘안하고 앉았습니까? 믿고 아멘하고 말지. 이대로 해보려면 돈이 많이 들어요. 그런 것은 쓰는데로 다 부패에 돌아가고 허무에 떨어진다. 저도 한번 해봤으면 해서 해보려고 하니까 경제적 상황때문에 못해보겠고 그냥 솔로몬의 말을 믿기로 했습니다. 그래야 속이 편하지 되도 안한 것을 해보려고 하다가... 전도서는 그런 책이다.
역사를 보면 르네상스라는 말을 들어봤지요? 르네상스 이전까지는 온세계가 기독교이건 이교도이건 상관없이 신중심적 신본주의 시대였다. 르네상스 이후부터는 인본주의 시대가 된다. 이 인본주의 시대는 이데올로기 시대이다. 인간주의 인본주의 휴머니즘이다. 어디까지 가냐 하면 르네상스 이후부터 2차대전까지가 이데올로기시대 인본주의 시대이고,
그후는 물질주의 시대 이것은 모든 것을 가늠하는 척도가 돈이다. 경제라는 말을 빼면 아무것도 안된다 그래서 경제를 살려야 된다고 하죠 김영삼 대통령은 갱제라고 하는데. 물질주의가 충족되어서 돈이 풍성하면 ‘할렐루야 이렇게 물질이 풍성하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그 뒤로는 향락주의가 된다.
향락주의는 온갖 음식점 레저문화 노래방 가요방 이런 것들이 나오고 오락기 전자오락 온갖 오락들로 가치가 없는 것들로 된다. 사람들이 허탄한 것을 좋아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싫어한다. 개그맨이 영웅 대접을 받고 생각하기를 싫어한다. 골때린다 골치아프다 해골복잡하다 하면서 뭐든지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궁극적인 이야기를 하고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고 본질적인 이야기를 하니까 다 싫어한다 ‘목사님 결론만 이야기하세요’ 그럼 제가 그러죠 ‘결론만 이야기하면 지옥이다’ 그렇잖아요? 간단하지 결론만 이야기하면 저도 수월해요 벌써 집에 갔지.
향락주의 다음에는 향락을 추구하니까 유쾌하다 할렐루야 이렇데 되는 것이 아니라 허무주의가 된다. 어때 그리 가는 것 같습니까? 그럼 지금 우리는 어디까지 왔습니까? 허무주의가 와서는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느냐? ‘아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깨꼴락’ 이렇게 자살하면 되겠는데
헛된 이것을 극복하려고 몸부림을 치는데 이것이 신비주의다. 초월주의 다원주의 뉴에이지 이런 것들이 나온다. 이때는 천방지축으로 갈라지면서 방향도 없고 원칙도 없고 역사도 없고 기준도 없고 표준도 없고 절대가 없고 신도 없고 그렇게 된다. 그럼 우리가 어디까지 왔습니까? 이렇게까지 가면 갈 데까지 간 것이다. 그런 것같지 않습니까? 지금 우리가 갈데까지 갔다. 그리고 남은 이론이 없다. 인류에게 희망을 약속할수 있는 다른 이론이 바닥이 났다.
마지막 한가지 남은 이론이 있는데 종말론이다. 종말론만 남아있고 다른 이론은 없다. 근데 솔로몬이 하나님중심에서 물질중심으로 향락으로 허무까지 가는데 온갖 욕망을 금하지 아니하고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았으나 헛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한때 하나님을 등지면서까지 쾌락이나 향락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래도 솔로몬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 결과 솔로몬이 회개한다. 회개해서 전도서 11장 12장을 쓰니까 전도서가 완성된 것이다. 그런 것은 세상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어디를 가도 결론은 헛되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계명의 지켜라 그것이 인간의 본분이다 그 명령을 지켜라(어른들에게,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면 인분만드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리고 청년들이여 젊을 때 마음놓고 놀 수 있다 얼마든지. 근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선악간에 심판하신다는 것은 기억해놓고 감안하고 놀테면 놀아라(알기나 알고 까불어라) 노멘 그렇다.
전도서는 그렇게 되어있다 짤막한 책이지만 사람을 깊이 생각해보게 하고 멀리 내다보게 하고 넓게 생각하게 하는 인생을 종합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전도서는 솔로몬의 인생론이다 문학의 장르는 설교다
전도서 맨 끝에 11장을 한번 봅시다.
9절 청년이여 네 어린 때를 즐거워하며 네 청년의 날을 마음에 기뻐하여 마음에 원하는 길과 네 눈이 보는대로 좇아 행하라 그러나 하나님이 이 모든 일로 인하여 너를 심판하실줄 알라
10절 그런즉 근심으로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으로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 어릴때와 청년의 때가 다 헛되니라
12장 1절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나를 왜 만드셨는지 창조자를 기억하라)
2절 해와 달과 빛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절 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절 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절 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벌써 길에 왔다갔다하고) 참 빨리 가죠.
제가(목회자들은) 장례식을 많이 참여하거든요 직접 집례도 하고. 엊그저께 아버님 별세하시고 얼마있다가 어머니 돌아가시고 큰 형님이 내일 모래 칠십이고 나도 조금 있으면 남 장사하다가 조금있다보면 내장사해야 된다. 금방이다. 여러분 나이가 언제 잘 안가는가 하면 열칠팔살 어른대접 못받아서 신경쓸 때 그때가 나이가 안가는 같죠 그러다가 25살 26살 가다가 37살이 되면 날아간다. 한 일도 없이 그냥 가버리고 모세도 우리가 신속히 가니 곧 날아간다 사람의 일생이 마치 한뼘되는 것같다. 그런 얘기를 한다 세월을 아끼기를 바란다.
12장 13절 끝을 한목소리로 읽읍시다. 일의 결국을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14절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저리로서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이런 것은 꼭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봐야 한다. 그 안에 많은 교훈이 있으니까 꼭 읽어보시고 리포터를 써보시도록.
하나님이 참 멋쟁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욕구 욕심을 낼 때 그걸 다 허락한다. 선악과를 꼭 다보고 싶으면 따봐라 솔로몬이 그렇게 하고싶어하니까 안말린다 해봐라 그리고 문제는 그 뒤에 기록을 잘해서 후세 사람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한다
누가복음에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이 못나가게 할수 있잖아요 돈을 안줄수도 있고 근데 아들이 그렇게 나가고 싶어하는 것을 안보내고 가둬놓고 있으면 아들은 죄수가 되고 아버지는 간수가 되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러면 일생가도 해결이 안된다. 그래서 ‘좋다’하고 관대하게 내보내줬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돌아올 마음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끝까지 못나가게 억압해서 가둬놓았다가 도망을 가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어거지로 하려고 하면 말리지 않는다.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에 보면 인간이 죄를 범하고자 할때 하나님은 말리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있다. 그래서 조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생각할 때 하나님이여 내가 죄지으려 할때 죄짓지 말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는데 ‘니가 죄를 짓지 마라 야야 니가 죄를 짓고 싶어하면 나는 못말린다.’ 여러분 하나님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다. 그러나 말리면 인격이 아니라는 말이다. 지나치게 말리면. 뭐 말리고 싶죠. 말씀으로 하지 힘을 가지고 억압을 해서 말리지는 않는다
한두번 말리고 싶어서 말리는 것이 몇 번 나온다. 예를 들어서 발람같은 것 하나님이 가지말라고 했는데 그 돈이 탐이 나서 자꾸 가고 싶어하니까 말리다 말다가 그렇다. 하나님의 마음이 변한다. 결국은 가기는 가죠 단 가되 내가 네게 주는 말만 해라 하면서 하나님이 마지못해 허락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가 조심해야지 하나님보고 내 마음을 주장해 주옵소서 하는 그런 마음은 좋으나 하나님은 우리를 강제로 하지 않는다. 강제로 하면 우리는 로봇이 되어버린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 뜻을 즐거워하면서 그걸 행해야지 완전히 억압해버리고 장악해버리고 귀신처럼 그렇게 하지 않는다. 마귀나 귀신은 언제나 억지로 들어와서 억압하고 자기마음대로 해버리지만 하나님은 성령이 우리 속에 들어오셔도 언제나 인격적으로 우리가 즐거워하면서 자원하면서 섬기기를 원하신다.
몇 년전에 우리 한국 장로교 공식적 이름이 생각 안나는데 예수그리스도 자유케 하사 섬기게 하신다 그런 주제로 큰 집회가 있었는데 신학자대회였다. 자유케 하시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게 하신다. 절대 억압으로 강제로 귀신처럼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마음대로 해버리거나 무례히 해버리거나 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울의 신학이다.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믿습니까? 이 자유를 육체의 소욕을 이루는데 쓰지 않고 사랑을 가지고 그 자유를 가지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가서 이런 신학이 되는 것이다. 구약의 충분한 온축을 다진후에 신약의 신학이 되는 것이다. 전도서는 그런 책이다
아가
아가서라는 말도 어려운 말이죠 아가들만 읽는 것이 아니고 아가서는 원어에 보면 우리말로 번역하면 노래들중의 노래(시르 하쉬르 song of song)라고 한다. 이것은 문학의 장르로는 오페라에 가깝다 가극. 노래하면서 극이 되는 것 우리나라 같으면 판소리다. 주역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다. 그것은 그냥 읽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 개역 성경을 좋아하면서도 아가서는 잘못되어있다. 아가서는 다른 번역들은 다 제대로 하고 있다. 이것은 누가 말하는 것인지가 나온다. 술람미가 말하는 것인지 솔로몬이 말하는지 예루살렘 처녀들이 말하는지 대사가 누구대사인지 구분을 해야하는데 일직선의 꼭 한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줄줄 늘여놓아가지고 도무지 이래가지고는 가극이 안된다. 빨리 고쳤으면 좋겠다 예루살렘 처녀들이 뭐라뭐라고 했다. 솔로몬이 뭐라뭐라고 했다. 이것을 구분해서 영어성경에도 안된 것이 있습디다.
아가서는 처음에는 남녀간의 애정 표현만을 기록한 책이라고 해서 성경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주후 90년 얌니아에서 모인 유대 랍비회의에서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유대교에서는 아가서와에스겔서를 30세 이하의 사람들은 읽지 못하게 했다. 유대 랍비들은 이 사랑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그와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으로 해석했고 후에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사랑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것은 솔로몬의 실재적 사랑이야기인지 이상적 사랑이야기인지 논란이 좀 있다. 저는 솔로몬이 일천명이나 되는 여자들이 있었지만 솔로몬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추근대는 여자들 허무하게 하는 여자들 아니면 징그럽게 하거나 그렇게 되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참된 행복은 참된 사랑 한사람이다.
남자들 잘 들으세요 괜히 욕심부려봤자 몸만 피곤하고 허무하고 귀찮고 아무것도 안된다. 정말 솔로몬이 일천명을 취해도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고 술람미라는 여자 하나있는데 술람미가 실재인물인지는 의혹의 여지가 있다. 다 싫고 들에 나가서 술람미라는 처녀를 만났는데 까무잡잡하고 야성미있고 순수한데가 있고 그런데 이 여자가 도망을 자꾸 간다. 솔로몬이 따라가면 도망가고 돌아오면 또 따라오고 하면서 속을 바짝 태우는데 이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그렇다는 것이다.
유대전승에는 솔로몬이 사냥을 나갔다가 술람미를 만나 왕궁으로 데려왔지만 지혜로도 부귀영화로도 사랑을 얻어내지 못했다고 한다.
솔로몬은 이 아가서를 왕후가 60명 후궁이 80명일 때 기록(아가 6 : 8)했으며 천명중에서도 이상형을 못찾았다고 전도서는 말하고 있다.
저는 이 인물을 가상적인 인물로 본다 솔로몬이 이상속에 그리는 여성상으로 추정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름이 뿌리가 같다 솔로몬과 술람미는 둘 다 샬롬이라는 원어에서 온 말이다. 솔로몬의 문학작품같다. 참 사랑은 이런 것이 아니겠나 하고 노래한 것 같다. 그래서 사랑의 노래로 썼는데 그러나 그런 여자가 없었다고 볼수는 없다. 물론 모델이 있었을 수는 있죠 소설이나 이런 작품들이 모델이 있는데다 모델을 각색해서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이니까.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솔로몬이 지금 이 여자하고 가극의 오페라를 공연했다고 볼수는 없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다.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여기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사랑은 순수무구한 사랑 순진무구한 한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원형적일 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그리고 있다.
아가서의 용어는 천진난만하고 순수무구함이 원래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말라기서 참조)
우리는 지금까지 서양신학자들이나 서양성경학자들에게 뭘 배웠냐 하면 최고 아름다운 사랑은 아가페다 이렇게 배웠다. 그 말이 좀 분석이 덜 된 말이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히브리어로 쓸때는 아하브, 사랑이라는 말의 통전적 개념이다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말이 통전적 개념이다. 헬라어로는 통전적 개념이 아가페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은 아가페만 하시는 분으로 오해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이고 남녀는 에로스고 우정은 필리아고 부성애 모성애는 스톨개이고 동정이나 긍휼 연민의 정은 엘레오스로 배웠다. 얼른 보면 맞는 말같다. 그러나 성경 원문을 자세히 조사해보면 그렇지 않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사랑은 아가페다. 지금은 컴퓨터 성경이 있으니까 컴퓨터로 원어성경을 다 불러보면 분명히 드러난다. 네 아내를 아카페하라 네 형제를 아가페하라 네 자녀를 아가페하라 그렇게 되어있다. 전부 사랑은 아가페로 되어있다 네 아내를 에로스하라 그렇게 되어있지 않다. 사랑이라는 말 자체가 통전적 개념이다.
그리고 아가페라는 사랑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역시 남녀간의 사랑이 최고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다.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그런 사랑은 하나의 동정에 가까운 사랑이다. 긍휼에 가깝다. 고차원적인 아가페 사랑은 아직 그런 개념이 모호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 부분을 책을 써서 ‘신학은 사랑학이다’ 하는 책을 거의 다 탈고했는데 정리를 해서 각주를 교정중에 있는데 은혜를 받았다. 다른말로 하면 사랑의 신학인데 이것은 에스라 강좌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다. 년세가 많은 분은 높은 분대로 사랑을 새로 배워야 되겠지만 젊은 분들은 지금 하는 강의를 잘 들어야 한다. 목회자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 사랑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책이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그렇게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제가 성경을 여러번 읽어보다가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인간의 사랑들, 신구약을 전체적으로 읽어보고 오경에서의 사랑 예언자들의 사랑 복음서의 사랑 역사서의 사랑들 서신서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들 인간사랑들을 죽 정리하니까 분량이 불어나서 400여 페이지 되는 내용인데 저 자신이 글을 쓰면서도 은혜를 많이 받게되고 진작 나왔어야 되는데 임지를 옮기면서 지금 건축하고 있고 시간이 지연되어서 약속을 못지켜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아가페만 한다고 생각하면 큰일난다. 하나님은 아가페만 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그런 것은 긍휼이고 그런 긍휼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진한 에로스를 갖고 있다. 그야말로 진한 순수하고 진한 그런 에로스를 갖고 있다. 그 에로스는 질투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이 질투해요 안해요? 어느 정도로? 죽여버릴 정도로 하죠. 구약성경을 읽어왔으니까 그래요 안 그래요? 구약성경을 읽어보니까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가 질투 이야기로 꽉 차있다. 질투로 충만해 있다.
질투는 에로스의 한 다른 면이다. 사랑의 다른 면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긍휼이나 동정은 질투가 없다. 긍휼한데 무슨 질투가 있겠어요? 부성애 모성애도 질투가 없다. 에로스 같은 그런 아가서에 있는 이런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질투하신다는 것이다. 서양신학자들이 전혀 인식을 못한채 다루지를 못했다. 제가 깜짝 놀란 것은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다.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그런 말씀이 많이 나온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리도 하나님을 섬길 것입니다 하니까 글쎄 하나님이 질투가 심해서 잘 되겠나? 하고 염려한다.
또 하나 물어봅시다. 예수님은 질투하나요? 안하나요? 예수님은 안하겠죠 예수님까지 질투하면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근데 놀랍게도 예수님이 질투가 심합니다. 예수님은 아들이나 딸이나 아비나 어미나 남편이나 아내나 어떤 사람 중에서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하고 한마디로 딱 잘라버린다. 길게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도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과 약속을 할때 나 여호와는 솔직히 질투가 많다 알아서 기라.
성령님은 질투하실까요 안할까요? 성령님은 안하시겠죠.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이 너희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님이 시기하기까지 질투하시기까지 질레토스 하시기까지 사모한다는 말을 헛된 줄로 아느냐 세상과 벗되게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라 성령이 질투한다. 여러분 물질적으로 세속적으로 향락적으로 가요방으로 노래방으로 다니면서 맥주는 괜찮다면서 들이마시고 돌아다니면 성령이 근심하고 탄식하고 하다가 소멸되어버린다. 그렇게까지 질투가 많다. 자꾸 좋은 것 사고 영적인 것은 하나도 쌓지를 않고 성경도 안보고 서태지와 같이 흔들어 재끼기만 하면 성부성자성령 성삼위 하나님이 다 질투한다.
질투만 하느냐 하나님께서는 필리아도 갖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보고 벗이라 하고 예수님께서도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친구는 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라 한다. 죄짐맡은 우리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위에 계신 나의 친구, 포도나무 나의 친구 하나님은 우리를 아주 우정적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한다.
그 다음에 하나님은 부모같이도 자녀처럼 사랑한다.
또 우리가 연약할 때 긍휼이 여기는 엘레오스도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통전적인 사랑이지 아가페만 한다 이런 철딱서니 없는 소리를 하면 안된다. 아가페라는 말은 통전적으로 쓰면 맞는 말인데 전혀 그렇게 쓰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랑이시라 하는 말을 한 사람이 요한인데 하나님은 본질이 본체가 사랑이다. 본질이 사랑이신 분은 대상을 찾는다 사랑이 충만하고 사랑하고 싶어서 못견디면 대상이 있어야 한다. 사랑이 충만한 처녀총각들은 대상이 없으면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가 없다. 그래요 안그래요? 안그런척 하고 있지만 다 그렇지 뭘 그래? 사랑을 쏟을 곳이 없으면 그것만치 괴로운 것이 없다. 하나님게서는 사랑을 쏟을 대상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사랑하시기 위해서다.
우리는 교회에서 배울 때에 서양신학자들이 우리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려고 창조되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이 우리 때문에 영광좀 받았습니까? 욕이나 안먹었으면 다행이지 그 말이 전적으로 다 틀린 말은 아니다 영광받으려고 창조했다는 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정말 성경을 파고 들어가서 보세요
또 죄에 빠진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건지셨다. 또 왜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며 우리를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이냐 뭐할려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하시기 때문에. 왜 천국이 영원합니까? 사랑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이제 더는 못받겠다 이제 사랑은 징그럽다’ 그런 사람 있으면 손들어봐요 사랑은 끝이 없다. 그래서 천국도 끝이 없을 것이다.
또 저와 여러분이 천사가 부럽습니까? 뭐 아니요라. 대개 우리가 천사를 부러워하고 하는데 천사는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다. 이론으로 얼마나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천사들은 연애를 해본적이 없고 천사들이 아가서를 읽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안된다. 천사들은 누가복은 15장의 그 아버지를 이해못한다. 우리는 이해할수 있죠? 그런 것을 이해하면서 아가서를 이해하면서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우리가 천사가 되지 않고 인간이 된줄 믿습니다.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천사가 되지 않고 인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아가서와 같은 남녀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면서 그 사랑을 배우는 것이 곧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고 신학은 사랑학이다. 사랑을 배우는 것이 신학이다.
아들이 되어서 아버지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면서 사랑을 배우고 커서는 장성해서 입장이 바뀌어서 자기가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서 사랑을 배우고 주변의 어려운 사람을 동정하면서 또 사랑을 배우고 친구와 교제하면서 코이노니아 사랑을 배우고 그러니까 인간이 됨으로써 이 모든 사랑을 체험하면서 구체적으로 사랑을 배우게 되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배우는 것이고 인간이 되어서 특별히 배워햐 할 것은 바로 사랑이다. 아무리 세상 지식을 가지고 학사 석사 박사 뭘 다 배웠어도 사랑을 배우지 못했으면 인생을 헛산 것이다.
천국방언 만국방언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소음이다. 모든 비밀을 알고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공해다 먼지만 내고 환경만 파괴한다.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신나만 아깝다. 연기만 날린다. 아무 의미가 없다. 다른 이야기할 것이 없다.
다른 신학이 그 위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사랑의 신학이 마지막이다. 완성이다. 믿음의 신학 소망의 신학이 있지만 사랑의 신학이 완성이다. 그럼 그 사랑이라는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어디로 가면 되겠습니까? 어느 기도원가면 되겠어요? 유명한 캠브리지 하바드 튀빙겐 게팅겐 가면 배웁니까? 어디로 가면 되요? 집으로 가야지 가긴 어디로 가요? (따라합시다 안통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엄마되고 아빠되고 남편되고 아내되는 것이 가장 신령한 영적 체험이다. 그 신령한 것이 구체화되는 구체적으로 경험되는 가장 아름다운 신학이 되는 곳이 여러분의 가정이다. 그러니까 그러기 때문에 사탄은 어떻게 하든지 가정을 파괴하려 한다. 여자들이여 해방되라 해방되라 밖에 나가자 돈준다 돈 요이땅 빨리가자 빨리..
공산주의로 가정을 파괴하고 물질주의로 가정을 파괴하고 향락주의로 해서 총 공격의 목적은 교회와 가정을 파괴하면 사랑이 파괴되고 사랑이 파괴되면 지옥이 되버리니까 영원히 하나님을 배울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이런 신학을 깊이 해야 한다. 이런 이야기는 동서양 신학이 아직 한번도 이야기된 적이 없다. 저도 잘 모르다가 지금 읽으려고 하는 말라기 성경을 읽다가 깜짝 놀랐다.
잘못된 사랑의 표본은 호세아서에 나타난다.
온전한 사랑의 표본은 아가서 안에 나타나있다. 우리가 이 두 책의 의미를 다 이해하면 성경을 많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온전한 사랑을 배우면 인생을 다 배운 것이 된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온전한 사랑을 배우지는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애를 태우는 사랑 사랑하면 병이 나는 사랑 이것이 진짜 사랑인데 이 아가서를 또 주석하는 사람들이나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과잉해석을 하는데 해석을 하지 말고 읽는 것이 좋다.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사랑이라고 굉장히 열을 내어서 오묘하고 기묘하고 신묘하고 막측하게 풀어재켜서 성도들이 아하 그런가 하고 얼얼해 하는데 저는 볼 때 그렇게까지 과잉 해석할 것은 없고 저는 이렇게 봅니다
나중에 말라기서로 가서 더 좀 구약성경 전체를 총괄하는 그런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만 하나님께서 원래 우리에게 주셨던 순수한 남녀의 사랑은 이렇게 되어야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다. 근데 인간성이 점점 파괴된다는 것은 결국은 이 애정이 파괴되는 것이다. 애정이 파괴되는 것은 곧 인간성이 파괴되는 것인데 오늘 현대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애정이 사랑이 다 파괴되는 것이다.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다 식어지리라 한것처럼 남녀간의 사랑이라든지 부자지간 모녀지간 부녀지간 모자지간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모든 사랑이 다 파괴되고 있다. 심각한 문제다. 요즘 사람들은 이것이 이해가 안되는가 봐. 거의 사랑의 불감증 환자들이 되어서 이런 감정들이 생겨지지를 안한다. 얼마나 가슴들이 매말랐는지 정서가 매말라서 현대인들이 이런 애정이 생기지를 않는다. 불쌍한 청춘들이다.
우리가 어릴때만 해도 순정소설이라는 것이 있었다. 아세요? 알기는 뭐 40대 50대가 되어야 예가 나오지 20대 30대는 순정소설이 뭡니까 하고 잘 모른다 그리고 연애편지라는 것이 있고 그런데 요즘에는 없어져버렸다. 왜그러냐 하니까 여자들이 너무 밖으로 기어나오니까 그렇다. 여자들이 좀 숨고 부끄럽고 감추고 해야되는데 여자들이 그저 날잡아잡숴 하고 온몸을 다 드러내고 다니니까 남자들이 징거러워서 눈을 못들고 다닌다. 요즘에는 어머니들이 하는 얘기가 집에 딸들 단속잘하라고 우리 아들 못내놓겠다고 한다. 어떻게 여자들이 설치고 다니는지 총각들을 겁이나서 내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 아름다운 사랑이나 순정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없는 일이다. 그런 일이 안생긴다. 다말라서 흘려줄 눈물도 없고. 얼마나 불쌍합니까? 이상하의 노래알죠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 하는 노래가 있는데 부르면서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부르더라고. 그것이 무슨 뜻인가 하면 남자친구가 차버렸는데도 슬프지도 않고 담다디 담다디 ... 나는 마음이 담담하다는 말이다. 원래 가사가 그렇다. 그대는 떠나도 ... 아무 충격도 없고 마음이 담담하다는데 뭘 그리고는 다른데 찾아간다 담다디 부르면서.
옛날에는 다른 사람에게 남자가 가버렸거나 군에 가버렸거나 유학을 가버렸거나 이별을 하거나 하면 울고불고 상사병이 나고 하는데 요즘은 처녀들이 ‘새신을 신고 뛰어보자 팔딱’ 그런 여자들 하고 연애해야 하는 요즘 총각들이 불쌍하다.
우리 어릴때만 해도 처녀들을 한마을에 살아도 보기가 어렵다 담도 높고 그래서 처녀들도 바깥을 보고싶은데 못보니까 널뛰기를 한다. 니 한번보고 나 한번보고 그것이 바깥세상을 보려고 하는 것이다. 껑충뛰어서 보고 어른들은 뭐하는지 모르지 1년에 두 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오월 단오 지역에 있는 처녀들이 다나와서 그네뛰기를 할때 그네를 메주고 하는 것은 총각들이 하는데 가슴설레이는 그것도 5월이 아닙니까/? 계절의 여왕. 5월 큰 애기들의 그네뛰는 모습 거기서 선 다보고 점도 찍고 침도 발라놓고 한다.
처녀들이 남자들을 점찍는 것은 팔월 추석에 다 본다. 어느게 떡발이 좋은가 하면서. 풍속속에 그런 장치가 다 있었다. 지금은 그런 아름다운 것이 다없어져 버리고 정서가 다 파괴되었다. 서글픈 시대다. 아가서는 정말 하나님께서 원형으로 주셨던 원래의 순수무구한 남녀의 사랑은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지 추한 것이 아니다. 가장아름다운 것이 부패했을 때는 가장 추한 것으로 전락한다. 그렇죠.
그러니까 우리 집아이들이나 교회성도들이나 남녀학생들에게 학문보다는 사랑이 우선이다. 대학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연애가 훨씬 중요하니까 이것이다 하거든 야곱처럼 붙잡고 놓지 마라고 한다. 진짭니다. 공부라는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학문보다는 사랑이 훨씬 더 중요하다. 무슨 말인지 아직 이해가 안되고 있다.
당신없인 못살아 하나님없인 못살아 할때 좋아하신다.
아가서는 정말 순수무구한 남녀의 사랑의 원형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부여준다. 그런
면에서 솔로몬은 참 풍부한 삶을 살았다 애정생활에도 그렇게 순수를 추구하고 물질세계에 그렇게 화려한 삶도 추구하고 경제적으로 그렇게 풍성한 정치적으로 그렇게 막강한 하여튼 마음껏 살아본 것이다. 지혜도 그렇게 많게 해보고 시가서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책은 집에서 읽어야 됩니다.